옛날에 금잔디 동산
이수익
시인이자 사진작가이기도 한 김수우의 포토 에세이집
<지붕 밑 푸른 바다>에서는
옛날 내가 살던 부산 대청동 복병산 7부 능선쯤에 기대어 살던
낡고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의 우리 집이
빈약하게 떠오르게 만드는데,
거기서 보면
저 멀리 남쪽 부산항을 드나들던 검고 하얀 상선들과
또는 용두산 지나 자갈치 시장 그 너머로 통통거리면서 들어오고
나가던 어선들이 눈앞에 보일 듯이 그려지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 산복도로들이 좌우로 엄청 들어서고
고층 아파트들이 줄줄이 솟아오르면서 그 옛날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얼핏 드는데
그때는
그래도 참 좋았지,
어릴 적 부푸는 환상 속에서 바라본 우리 집은
넘치는 활력 속에 뛰어놀던 철부지 시절 드높은 왕궁이었지
길을 가다가 오른쪽 골목에서 왼쪽 골목으로 꺾여
한참 가다가, 다시 오른쪽 골목을 돌아 한 번 더 오른쪽 골목을
지나가면서 또는 왼쪽 골목,
그래도 우리 집 가는 길이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다는 소식에
산을 따라 오르는 길고 가파른 골목길이
오를수록 장딴지엔 더욱 힘이 바짝 돋아났는데
아, 마침내 우리 동네에 들어서면
신발 끄는 소리처럼 다정한 이웃들의 웃음이 있고
밤에는 도둑이 되어 다른 집 담장을 뛰어넘는 사람도 있고
용감하고 장난기 많은 친구들이 제법 있어서
진정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는데
나는 <지붕 밑 푸른 바다>를 찾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와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산악처럼 우뚝한 건물들이 무한정 뻗어나가 있고
재빠른 속력의 자동차와 버스들이 씽씽 지나가고
여기 사람들은 지나가면서도 모른 척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세상처럼 까맣게 인간이 변해버린 것이다, 당신도 나도 그렇게, 그렇게……
-웹진《공정한시인의사회》 2024년 9월호
이수익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우울한 샹송』 『꽃나무 아래의 키스』 『조용한 폭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