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 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
...살면서 어떤 날은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때가 더러 있다. 거친 세상을 홀로 살아가기엔 삶이 공허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바로 그런 날들..<술 한잔>을 읽으며 쓸쓸한 어느 골목 뒤안길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포장마차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어떤 사람을 생각했다. 다 식은 우동 국물을 앞에 두고 홀로 술잔을 들이켜는. 어쩌면 그는 부도를 낸 회사의 사장일 수도 있다. 아니면 고향을 뒤로한 채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어떤 이 일지도. 또는 흔들리는 가정에 대한 무책임함을 한탄하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 바로 포장마차이다. 그곳에서의 술 한잔은 여느 좋은 술집의 술 한잔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주저리주저리 흘러내리는 삶이란 어느 때에는 손댈 수 없을 만큼 뜨겁다가, 한 순간에 그 열기를 잃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산 사람들의 얘기처럼 인생은 정말 짧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짧다고 말하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이 상존하는가. 어떤 이는 불과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목줄을 걸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정반대에서의 고민을 한다
혹자가 이런 말을 한적히 있다. "어쨌든 산다는 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인생이 간혹 슬프고 힘들더라도 분명 살아야 할 이유는, 삶이 그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충분히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그래서 자신은 삶 자체만으로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고..
누구나 자의에 의해, 또는 타의에 의해서라도 삶을 지탱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얼마든지..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나야만..
경험으로부터 인간이 얻어낼 수 있는 깨달음은 지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삶의 애환 끝에 자리한 어떤 확신도..
홀로 술을 따르던 시절을 뒤로하여 남겨진 지나치리만큼 당당한 자부심도...
매번 산다는 건 즐거운 것이라 말한다. 살아있어서 행복하다 말한다.
그 전제는 항상 모든 것이 끝난 후라는 종결형...
폭풍이 지나간 후엔 항상 전보다 더 잔잔하고 고요한 평화가 오기마련이다
두려움이 클수록 행복의 가능성도 커진다 했던가.
하지만 인생이 내게 술을 따라 주지 않는 현실에서 얼마만치의 상처와 시련에 익숙해질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진리를 잠시 보류해 두려 한다. 그리고 인생이 내게 술을 따라주는 그 저녁이 올 때까지 나는 또다시 늦은 밤 낡은 포장마차 앞을 서성거릴 것이다.
언젠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기리라는 막연한 믿음만으로도 의로움의 한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어느 것에도 너그러워질 수 있는 현자의 마음을 얻어야 비로소 인생을 산다는 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모든 애환의 술잔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부딪혀 볼만하지 않은가...
오늘 같은 날은 술 한잔 건네 보자. 인생이 무엇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다 해도 혹자의 말처럼 이미 존재함으로 기쁜 일일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