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인구 10만여명이 거주하는 소도시 몰렌베이크의 한 아파트. 벨기에 대(對)테러 경찰팀은 지난 3월 18일 이 아파트를 급습해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 테러 공격을 감행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 조직원 살라 압데슬람을 체포했다. 파리 테러범 8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압데슬람이 은신해왔던 이 아파트에선 AK-47 소총과 탄약 및 각종 무기, 기폭장치 등이 발견됐다.
압데슬람과 함께 숨어 있다 도주한 IS 폭탄 제조 전문가 나짐 라크라위는 나흘 뒤인 3월 22일 브뤼셀 자벤텀 국제공항에서 또 다른 조직원 이브라힘 엘 바크라위와 함께 자살 폭탄테러 공격을 벌였다. 이브라힘의 동생인 칼리드 엘 바크라위도 바로 1시간 뒤 유럽연합(EU) 본부에서 500여m밖에 떨어지지 않은 말베이크 지하철역에서 자살 폭탄테러 공격을 감행해 숨졌다.
이 형제가 은신해오던 브뤼셀 북동부 스하르베이크의 한 아파트에서도 액체폭탄(TATP) 15㎏, 폭탄 재료인 아세톤과 과산화수소 150L, 폭탄에 장착할 못과 기폭장치 및 각종 총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형제는 파리테러 총책인 압델하미드 아바우드 등에게 총기와 탄약을 지원한 공급책이었다. 아바우드 등 테러범들은 파리 중심가의 바타클랑 극장과 식당가에서 이들이 조달한 자동소총 등 총기를 난사해 민간인 130명이 희생됐다. 당시 파리 테러범들은 프랑스 군경과 무려 7시간30분간 5000여발의 총알을 퍼부으면서 총격전을 벌였다. IS 조직원들이 어떻게 많은 무기들을 입수해 대담하게 테러 공격을 감행하고 총격전까지 벌일 수 있었을까.
AK-47 한 정 가격 123만원
그 비결(?)은 벨기에의 불법 무기 암시장에서 각종 무기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세계적으로 주요 총기 제조국가 중 하나다. 벨기에에선 백인우월주의 청소년의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 규제가 강화되기 전인 2006년까지만 해도 신분증만 보여주면 누구나 총기를 쉽게 살 수 있었다. 물론 총기 규제 강화 이후에도 벨기에의 불법 무기 암시장은 지금까지 번창해왔다. 유럽 각국의 범죄자들을 비롯해 IS와 알 카에다 조직원 등 테러범들이 돈만 있으면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다.
2006년 총기 규제 강화 전부터 불법 무기 암시장 번창한 벨기에
잠재적 테러범 등 수요 많아져 "돈만 주면 30분 내로 구입"
클로드 모니켓 유럽 전략정보 및 보안센터 회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300~400발의 탄약이 포함된 AK-47 1정이 400유로(50만원)에 거래됐다면서 지금은 1000~2000유로(123만~250만원)로 가격이 올랐다고 밝혔다. 총기 값이 크게 인상된 것은 잠재적인 테러범들을 중심으로 수요가 높아진 탓이다. 특히 무기 밀매상들이 일반 범죄자들보다 테러범들에게 더 높은 리스크 프리미엄(위험감수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순 총기 밀매는 징역 2~3년형이지만 테러범들에게 무기를 팔면 20년형을 선고받는다.
브뤼셀과 인근 위성도시들에서는 유럽 어느 도시보다 더 저렴하고 빠르게 총기를 구할 수 있다. 벨기에 싱크탱크인 이티네라재단의 빌랄 베냐이치 선임연구원은 “브뤼셀에서는 돈만 주면 30분 이내에 무기를 구할 수 있다”면서 “브뤼셀에선 미국 도시들처럼 총기를 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월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풍자 전문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총격사건 범인인 쿠아치 형제도 브뤼셀에서 총기를 샀다. 지난해 8월 암스테르담과 브뤼셀, 파리 구간을 달리던 탈리스 고속열차에서 테러를 시도하다 미국인 승객들에게 진압당한 아유브 엘 카자니도 브뤼셀에서 총기를 구입했다.
브뤼셀이 유럽의 불법 무기 최대 암시장이 된 이유는 무엇보다 치안이 허술해 불법 무기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인구 100만 남짓한 브뤼셀은 19개의 지자체로 나뉘어 있다. 19명의 지자체장이 있고, 6개의 경찰본부가 브뤼셀을 지킨다. 한 지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지역으로 숨으면 체포가 어려울 정도로 경찰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공용어도 네덜란드어, 프랑스, 독일어 등 3개를 사용한다.
정보기관도 인원 부족으로 불법무기 밀매조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체 정보요원의 수가 600여명밖에 되지 않는다. 정보기관과 경찰의 유기적 협력도 잘 되지 않는다. 벨기에 정부는 지난해 8월 무기 밀매업자 소탕을 위한 불법무기 이동에 관한 부서 간 협력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지역 정부와 연방정부의 원활한 정보 공유가 어려워 단속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무기 공급처는 발칸반도
또 다른 이유는 벨기에는 EU의 중심국으로서 자유통행을 보장하는 솅겐조약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경우 솅겐조약의 한 가입국에서 비자를 받으면 다른 가입국들에선 검문검색 없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브뤼셀은 유럽에서 교통 중심지이다. 파리 308㎞, 암스테르담 202㎞, 베른 219㎞, 룩셈부르크 213㎞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의 수도 중 가장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또 EU와 나토 본부 등 국제기구가 집중돼 있어 유동인구도 많다. 게다가 브뤼셀의 위성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 몰렌베이크, 스하르베이크 등은 무슬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데다 일종의 슬럼가가 형성돼 있으며 지하경제가 발달해 있다.
벨기에에서 거래되는 불법 총기의 대부분은 옛 유고 연방이 있던 발칸반도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다. 스위스의 비정부기구 단체인 ‘스몰 암스 서베이’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보스니아와 코소보 내전이 끝난 이후 600만정에 달하는 무기가 그대로 남게 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무기들 중 상당수는 불법 무기 밀매 조직들의 손에 넘어갔고, 벨기에를 거쳐 유럽 각국으로 흩어져 나갔다. 벨기에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무기의 90%가 발칸반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며 보통 수화물을 통해 반입된다. 실제로 세르비아의 경우 등록되지 않은 총기 숫자가 적게는 20만정에서 많게는 90만정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니아에서도 75만정, 알바니아의 경우에도 75만정의 각종 총기가 있다고 한다. 이들 무기는 대부분 AK-47 소총이다. 파리테러에 쓰인 AK-47 8정의 시리얼 넘버를 추적한 결과 모두 세르비아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총기들은 지금도 계속 서유럽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프랑스 경찰은 최근 들어 불법 총기 2700여정을 압수하는 등 총기류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바로 이웃에 벨기에라는 ‘무기고’가 있기 때문에 속수무책인 셈이다.
차량을 이용한 소규모 밀매도 이뤄진다. 이런 무기 밀매를 ‘개미무역(ant trade)’이라고 부른다. 이반 즈베르자놉스키 유엔 남동부 유럽 소형무기 통제 정보센터 소장은 “2010년 이후 소규모 무기 매매가 늘어나고 있다”며 “발칸반도 국가에서 차량으로 벨기에나 스웨덴으로 옮겨지고 있다”고 밝혔다. 닐스 뒤케 플랑드르 평화연구소 무기전문가는 “벨기에는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 네덜란드에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총기의 이동이 빈번하다”면서 “국경을 넘는 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상황에서 경찰이 일일이 단속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이른바 ‘퇴역총기(decommiss-ioned guns)’도 재활용되고 있다. 퇴역총기는 실탄 발사 기능을 제거해 공포탄만 쏠 수 있도록 개조한 총기로, 영화 촬영 등에 사용돼 왔다. 무기 밀매 조직들은 이런 퇴역총기를 수집해 실탄을 쏠 수 있도록 만든 뒤 판매하고 있다. 샤를리 에브도 총격사건 때 테러범들이 썼던 무기도 이들 퇴역총기였다.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에는 퇴역총기들이 수두룩하다. 슬로바키아의 경우 국내법상 규제가 없다시피해 퇴역총기를 확보하기 가장 쉬운 국가라는 말을 들어왔다. 슬로바키아에서 퇴역 총기를 사려면 18세 이상이면 된다. 무기 밀매 업자들은 동유럽 국가에서 구한 퇴역총기를 개조해 주로 벨기에로 가져가 팔아넘긴다. 테러범들은 벨기에의 암시장에서 무기를 구해 국경을 넘기만 하면 된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무기를 구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지만 테러범들이 총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게 된 것은 바로 벨기에에서 무기를 몰래 들여왔기 때문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총기 구입이나 보유를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지만 무기 밀매 때문에 불법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덴마크의 경우 권총과 자동소총은 아예 보유하지 못하고 사냥용 총도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만 구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크에서 자동소총을 구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무기 밀매업자와 연결되고 돈만 있으면 구입에 문제가 없다. 한스 요르겐 보니센 전 덴마크 보안국 작전국장은 “불법 무기를 쉽게 매매할 수 있는 것은 덴마크만이 아니라 전체 유럽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EU 지도자들은 불법 무기 거래를 단속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솅겐조약에 따라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 무기 유통과 무기 밀매 업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테러범들이 직접 발칸반도를 방문해 불법 무기를 구입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시리아에서 난민으로 위장해 들어오는 테러범들은 세르비아를 비롯해 발칸반도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통해 프랑스 등으로 입국한다. 이런 경로를 볼 때 테러범들이 발칸반도에서 필요한 무기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테러범들이 발칸반도를 무기 구입의 최고 쇼핑몰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테러범들이 가장 선호하는 무기는 AK-47이다. AK-47은 러시아의 무기설계자인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1947년 개발했다. 총의 이름도 개발자의 이름과 그 개발연도를 따온 것이다. AK-47은 구조가 단순해서 고장이 적고, 작동 방법이 간편한 데다 성능도 뛰어나다. 2013년 사망한 칼라시니코프는 자신의 발명품이 “조국의 국경을 지켜 행복하다”고 했지만, 이제는 테러범들이 가장 애용하는 살인무기가 됐다.
유럽의 대테러기관들은 무기 암거래시장의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또 무기 밀매조직을 누가 운영하는지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불법 무기 거래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옛 소련 붕괴 이후 동유럽에선 각종 불법 조직들이 무기와 마약은 물론 인신매매까지 하는 등 온갖 범죄행위를 저질러왔다. 특히 러시아 마피아들도 각종 불법거래에 깊숙이 개입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유럽 각국이 앞으로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을 꼽자면 무엇보다 먼저 무기 밀매조직들과 무기상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