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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교수이자 월정사 교무국장인 자현 스님이라는 자가 현각 스님에 대하여 조목 조목 반박을 한 글을 보고 도저히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어 감히 글을 올립니다.
원래는 자현이란 자의 페이스북에 직접 올리려고 하였으나
‘ 제 얼굴에 침뱉기 ’ 가 되기에 참고 또 참아 이곳에 올려봅니다.
조계종 홈피도 생각을 해봤으나, 조계종을 인정하지 않기에 올릴 수 없어 이곳에 올리니 만약 이 글을 조계종에 옮겨 주시거나 하실 법우님이 계시면 언제든지 올리셔도 됩니다.
제가 우선 이 자현 스님이란 자를 호칭을 스님이 아닌 ‘ 스님이란 자 ’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고통 속에 살아가는 중생들을 보시고 나서 당신이 가지고 누렸던 모든 부와 명예와 영광과 편안함을 버리시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 그 모든 걸 스스로 버리시고 45년 고행 길에 오르셨단 말입니다.
그러며 하셨던 일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인도의 ‘ 카스트 제도 ’ 라는 제도의 철폐이셨습니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 카스트 제도 ’ 속의 하층은 말 그대로 인간이 아닙니다.
지금도 국민을 4가지 계급으로 분류하여 하층 천민은 온갖 괄시와 핍박과 고통 속에 살게 하는 제도입니다.
조상이 하던 백정 짓은 현재의 후손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카스트 제도이고
조상이 하던 빨래 빠는 직업은 지금도 그 후손이 하고 있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카스트 제도입니다.
그런데 자현이란 이 자가 이번 페이스북 글에서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 자현 스님은 형식주의, 유교적 관습 등에 대해 “한국 불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더구나 (한국에서)25년이나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밝혔다. “
즉, 우리의 전통이 ‘ 유교 ’인데 그걸 따르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현각 스님의 잘못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네 ‘ 유교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국에서 공자에 의해 시작된 ‘ 유교 ’는 고려쯤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 유교 ’라는 개념은 조선 초기에 ‘ 유교 ’에서 ‘ 성리학 ’이라는 학문으로 변화되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애초 공자가 시작한 유교의 근본 개념은 인본 사상에 기초를 둔 인의예지 등이 그 핵심이었는데, 이는 ‘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덕으로 대하자 ’ 표현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 유교 ’가 조선시대 초기에 성리학으로 변질되며 기초 사상이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금의 시대에는 ‘ 유교 사상 ’ 의 반대는 ‘ 민주주의 ’ 라고 주장되기도 하는데
이 이유는 바로
특히 조선 초기의 유교로 인하여 백성의 계급이 ‘ 양반 ’ 과 ‘ 쌍놈 ’ 으로 크게 분류가 되기 시작하였고, 서자를 괄시하고 핍박하는 것도 모자라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까지도 ‘ 장사치 ’ 라는 중인 계급에 집어넣어 천대 하였던 것이 바로 우리나라 ‘ 유교 ’ 의 속성 중 하나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국민 중 나이 좀 먹었다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천민 성씨 ‘ 천 방 지 축 마 골 피 ’ 라는 개념도 이 ‘ 유교 ’ 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우리네 불제자 입장에 있어서 ‘ 유교 ’ 는 내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와도 다름없는 사상입니다.
조선 시디에 벌어졌던 ‘ 승유 억불 ’ 정책이 그 이유이니
당시의 ‘ 승유 억불 ’ 정책으로 인하여 팔도강산 수많은 사찰의 불상이 목이 잘린 체 버려져야 했었고, 경주의 남산에서는 지금도 당시에 목이 잘린 체 훼손 되었던 불상이 발견되기도 하니 당시 스님네들은 얼마나 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하셨는지 굳이 듣고 보지 않아도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불제자 입장에서는 당시에 행해졌던 ‘ 승유 억불 ’ 정책을 탓해서도 욕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 승유 억불 ’ 정책으로 인한 고통을 딛고 일어섰기에 지금의 우리네 불자들이 있을수도 있기에 그렇기도 하거니와, 이해하고 용서하며 당시의 그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 불자들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자라서 이해하고 용서해야 할지라도 절대 인정하면 안 되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중생을 계급으로 분류하는 신분제도입니다.
바로 우리의 근본 스승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깨뜨리려 하셨던 것이 바로 이 신분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각 스님의 그런 “ 유교적 권위주의 ” 에 대해서 비판을 했더니
동국대학교 승가대학 교수이며 월정사 교무국장이라는 자현스님이라는 자가 되려 그것을 이해 하지 못하는 현각 스님을 비판합니다.
이 자가 과연 스님 맞습니까?
우리네 근본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깨뜨리려 하셨던 그 신분제도를 불제자로서 수많은 재가 불자들의 시줏돈을 받아먹는 스님이라는 자로서 석가모님 부처님의 제자로서 그런 유교적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깨뜨리려 노력해도 부족할 터인데 되려 그것을 비판한 현각 스님을 비판합니다.
스님 맞습니까?
스님 아닙니다.
불제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석가모님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근본 이유도 모르는데 어찌 스님이라 할 것이며
중생들을 위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권위와 돈과 명예를 좇기 바쁘니 어찌 불제자라 하겠습니까?
자현 이자는 스스로 유교적 권위주의에 빠져 권위주의와 우월감에 빠져 신도들 보기를 아랫사람 보듯이 보며 평소 “기복주의, 스님과 신도의 차등은 모든 종교에서 확인되는 부분으로 조계종만의 문제적 특징은 아니다”라며 “세상 어느 종교에서 성직자와 신도가 평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라고 떳떳히 자기 소신을 밝히는 이 자현이란 자는 스님이라 호칭을 절대 사용해서도 들어서도 안 되는 그냥 땡중, 아니 땡중도 아까운 사이비 중인 것입니다.
머리를 깎고 가사장삼을 입었다 해서 다 스님이면 세상 스님 아닌 자 그 누구일 것이며,
이런 사이비 중이 교수로 있는 승가 대학은 과연 제대로 된 곳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런 자를 월정사의 교무국장이란 직책에 앉혀 놓은 조계종은 과연 온전한 집단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자현이라 이 자는 또 이와 같은 글을 올립니다.
“이분(현각 스님)은 특별한 능력이 없이 하버드라는 한국인의 저급한 환상 덕분에, 처음부터 조계종의 상위 1%에 속했던 사람”이라며 “25년 동안 조계종에 빨대만 꽂고서 가장 좋은 조건 속에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그 조건을 비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몇 년 전 불현 듯 마음이 일어나 평소 알고 지내는 스님께 가사 장삼을 선물해드리려 했었습니다.
주변의 보살님들이 말리시더군요.
“ 지금 스님이 입고 계신 가사장삼이 얼마짜린줄 알고나 그러세요? ”
“ 얼마나 하는데요? 가사장삼이 그렇게 비싼가요? ”
“ 저거 천만 원짜리에요~ "
그렇다 고해서 그 천만 원짜리 가사장삼이 아주 비싼 편에 드는 것도 아니랍니다.
마음을 접었습니다.
아팠습니다.
자현. 그대에게 묻는다.
현각 스님이 1%에 속했던 사람이라면
천만 원짜리 가사장삼을 입는 스님은 몇 %에 속한 사람인가?
그대는 아는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한 송파 세 모녀의 고통을 아는가?
오늘도 어디선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들의 고통을 아는가?
그대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그 이후로 지금까지 돈이 없어 시달리거나 고통스러웠던 적은 과연 있었는가?
현각 스님을 1% 에 속해 특혜를 누렸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십 원 백 원 아껴서 시주한 그 돈으로 편하게 돈 걱정 않하며 지금도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그 어느 곳에 앉아 ‘ 나 스님인데~ 나 교수인데~ 나 교무국장인데~’ 라고 거들먹거리며 우월감에 빠져 있는 이 시간에도 수많은 중생은 이 더위에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일을 하고 있는 중생들의 고통은 아는가?
그대는 지금까지 과연 몇 번이나 밥을 직접 지어 공양 했었는가?
그대는 지금까지 공양하기 위하여 육체적 노동을 몇 번이나 해봤는가?
중생들은 더위에 지쳐 열사병으로 죽어나가는 그 시간에 ‘ 하안거 ’ 라는 미명하게 시원한 곳에 들어 앉아 ‘ 참선 ’ 하던 그대는 1% 가 아닌 몇 % 인가?
중생들은 살을 에는 추위에 손과 발이 얼어터지는 고통 속에서도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그 시간에 ‘ 동안거 ’ 라는 미명하게 따뜻한 방에 들어 앉아 ‘ 참선 ’ 하던 그대는 1% 가 아닌 과연 몇 % 인가?
0. 1 % 인가 아니면 0.01 % 인가?
지구상에 입을 옷은커녕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주는 중생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대는 지금 얼마짜리 가사장삼을 입고 있으며, 천만 원짜리 가사장삼을 입은 그 스님네는 대략 0.0000000000000000000001 % 쯤 되는 사람인가?
현각 스님께서는 조계종에 빨대를 꼽았다고 한다면
그대는 어디에 꼽았는지 아는가?
그대에게 빨대를 꼽혔던 수많은 중생들은 보이지 않는가?
수많은 중생들에 빨대를 꼽아 호가호위하며 편하게 먹고 살고 있는 그대가 나쁜 것인가 그런 그네들의 종단인 조계종에 빨대를 꼽고 살아온 현각 스님이 나쁜 것인가?
그대는 글에 “더구나 (한국에서)25년이나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였다.
자현 그대에게 또 묻는다.
현각 스님은 한국에서 25년을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이라고 평가하자.
그렇다면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승려로서 단 한 번이라도 돈을 받지 않고 신도들 병문안을 가본적 있는가?
그대는 승려로서 단 한 번이라도 돈을 받지 않고 신도의 극락왕생을 빌어본적 있는가?
내 어머님 생전에 주변 교회 목사님께서 몇 번 전도를 오셨으나, 당시 내가 녹음해드린 108 참회문을 늘 들으시는 모습도 뵙고 하더니 전도를 포기하셨던 목사님이 계셨다.
그런데 어머님이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계실 때 이 목사님은 사모님과 함께 병원비에 보태라며 돈까지 들고 병문안을 오셨었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에도 거액의 부조금을 들고 머나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셨더이다.
그대는 가까운 친인척인 아닌 신도를 위하여 중생을 위하여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적이 있는가 말이다?
하긴, 그동안 내가 접했던 수많은 스님들은 돈을 받아야만 움직이셨으니 그대도 그랬으리라 생각되는데,
우리 전통문화 그 어디에 돈을 받아야만 병문안을 가고 돈을 받아야만 상갓집을 방문해 명복을 빌어줘야 한다고 되어 있는가?
더군다나 그대는 그대의 주장대로 스님 아닌가?
그런데 어찌 그대는 그러하지 않았는가?
이런 그대가 과연 우리 전통 문화를 논할 자격이 있는가?
이것은 아는가?
일요일 교회 예배에 가보면 예배당 입구에 목사님과 장로님 또는 다른 성직자들이 입구에서 예배를 보러 오는 신도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하고, 예배가 끝난 후에도 교회 입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신도들을 배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네.
그럼 그대는 과연 법회에 오는 신도들을 향해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맞이하며 인사 한적이 있는가?
법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을 진심으로 배웅하며 인사한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십 원 백 원, 한 푼 두 푼 아껴서 시주한 시줏돈으로 먹고사는 그대는
공양하며 시주한 불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단 한 번이라도 가져본적 있는가?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 인들은 귀한 손님이 이글루를 방문하면 아내와 동침하게 했다고 한다네.
그렇듯 손님은, 그것도 귀한 손님은 귀하게 대접을 하는 것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평균적인 사고일터이고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특이하다면 특이한 문화를 가진 민족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본다.
그런데 현각 스님이 누구인가?
수 억 만 리 머나먼 미국이라는 땅에서 가족이며 친구며 모든 것을 버린체 한국 불교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귀한 손님중의 손님 아닌가?
그 손님이 귀해 다른 수련 승들과 달리 특혜를 주었다고 하자.
그것이 그렇게 문제인가?
말도 통하지 않고 글도 모르는 현각 스님에게 뭘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손짓 발짓으로 가르칠 수 있는게 불교인가?
평생 토굴에 앉아 수행만 해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 불교의 참 진리인데
말도 통하지 않고 글도 모르는 현각 스님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그대가 말하는 특혜가 아니였겠는가?
그대는 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런데 현각처럼 25년이 지나도 한국말이나 한글이 제대로 안 되는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보시게 자현.
난 이곳에서 50년을 넘게 살았다네.
그런데 나는 지금도 불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네.
뭐 독경을 해봤자 뭔뜻인지도 모르는 한문 불경이다 보니
굳이 불경을 읽으려 한다면 한글 불경을 찾아서 읽어야 하고
그나마도 한글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 불경은 읽을 엄두조차 못내고 있다네.
거기에 이동하면서라도 불경을 가까이 하고 싶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독경 파일도 구해서 들어봤으나 이게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수가 없어
내 일부러 내 핸드폰에 내가 직접 한글 불경을 녹음해 듣고 다닌다네.
그런데 그대는 현각 스님은 25년을 살아도 한국말이 안 되니 현각 스님 잘못이라고 지적하는데
이곳에서 50년을 살았어도 불경 읽기가 어려운 나는 도대체 뭔가?
내 이리 글을 올리는 것을 보니 한글을 읽고 씀에는 문제가 없음을 알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 읽기가 너무나 어려우니 이 어찌 된 것인가?
나도 머리가 모자란 중생인가?
그럼 그대 자현에게 묻겠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이미 천 년 이상이 지났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 반포 하신지도 수백 년이 지났으며
조계종이 우리나라 불교계 대표 종단으로 자리 잡으며 지난 백 년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불제자들에게 빨대를 꼽아 수 조원 아니 수십조 원의 시줏돈을 받아왔을 터인데
그동안 제대로 된 한글 불경 하나 제대로 없는 현실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들어온 지 2백년도 안 되는 기독교는 이미 오래전에 한글 성경이 제작 되었고, 지금은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는가?
평생 자식들을 위해 입에서 “ 나무 관세음보살 ”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셨던 내 어머님은
당신께서 읽으실 수 있는 불경이 없어 평생 불경을 읽지 못하시다가
그나마 내가 어머님이 듣기 편하게 번역하고 해석한 불경을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들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동안 반평생 이상을 절집에 다니시며 한푼 두푼 아끼신 돈을 절집에 가져다 바쳤지만, 정작 그런 어머님은 제대로 된 한글 불경이 없어 단 한 번도 직접 불경을 읽으신 적이 없다는 현실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말이다.
자식으로서 불자로서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데 그대는 어떤가?
미국에도 한국 불교가 전파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그곳에도 불경이 읽혀지고 있을 터인데
그대는 영어 불경을 본적이 있는가?
만약 우리네 한국 불교의 상황을 그대로 따른다면 영어 불경은
Yeosiamoon 이라고 시작하는가?
그대는 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가?
중생을 위하여 출가를 하였는가 아니면 그대를 위하여 출가를 하였는가?
그대가 어떤 마음으로 출가를 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나
그래도 승가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라면
월정사 교무국장에 앉아 있는 스님이라면
그래도 중생들이 겪고 있는 최소한의 아픔과 현실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대를 보라.
보이지 않거든 에어컨이 틀어진 시원한 선방에 앉아보시게.
불제자라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한 이유조차도 모르는 그대가 진정 스님인지 살펴보시게
우리네 문화를 제대로 모르면서 우리네 문화를 말하는 그대를 살펴보시게
과연 그대는 대한민국 국민 중 몇 % 에 들어가는 사람인지 살펴보시게
과연 그대는 8만 4천경 중 과연 몇 경이나 제대로 뜻이나 알고 읽는지 살펴보시게
과연 그대가 권위적이지 않은지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게
과연 그대는 “ 귀의승 중중존 ” 의 그 ‘ 승 ’ 이 맞는지 살펴보시게~
울분을 참을 수 없어 글 올립니다.
짧은 지식을 총 동원하였으나 일부 틀린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틀렸거든 가르침을 주시기 바라며,
다양한 의견 환영하지만 ‘ 그런 스님 ’ ‘ 그러지 않는 스님 ’ 등의 댓글은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한국 불교를 위해 충정 아닌 충정의 마음으로 쓴 글이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두서없는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개뿔 수행중인 사람이 현각한 큰 스님에게 말 하고 싶은 대로 하나?
한국 불교 수행승 자질이 고작 그 정도라? 아직 구중궁궐 문턱도
가보지 못한 자현이 현각한 분에게 막말해도 되능갑여?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스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승 삼보를 내세우며 똥폼 잡고 사기 치는 중들에게 속지 맙시다
옳은 말씀 자현은 진작 내쳐졌어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깨닫고 안깨닫고 문제가 아니라 스님으로써의 본질을 찾아야요 참으로 마음 아픔니다....
그냥 직업이 스님인사람들이 많은거 같네요
같은 마음이드네요. 나무아미타불.
현각스님의 문제제기와 발언하심을 계기로 스님과 불자 모두 上求菩提下化衆生 의 길로 가기를...........
자현이 스님이면 참말로 장을 지진다. 분별심으로 가득차
봉건사회 이상을 불교가 지니고 있더라도 문제
됄 것이 없다는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스님으로 부르자니 고
명한 스님들
중도를 비방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기에 스님이
란 호칭은
빼기로한다. 자현이라는 사람 본적도 들은적도
없으나 수행
정진으로 한소식 챙긴 분을 입장이 다르다 해
서 비방과
막말을 서슴지않는 것은 불교가 먼지도 모르는
중일 뿐이고
조개종 총무원을 대신해 입장을 밝힌 것으로
이해한다.
총무원 심각하다. 장기집권에 종정을 수행이나
덕망과 무관한
사람을 입맛대로 앉혀 종단을 오로지하는 데만
관심을 뒀지
불교를 퇴보시키고 부폐로 이끈 장본인들이다.
길게도 이어왔다. 총무원장과 이들을 대변하는
자현이 같은 사람
정작 불교계를 혁신시켜 승적을 박탈해야할
집단들이다.
이참에 총무원과 이를 위호했던 세력을 척결해
야 불교계가
참모습을 찾아갈것이다.^^
제 마음과 같습니다.. 갑갑하던 속이 후련하네요... 예전 서암종정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논두렁앉아 마음 비우면 그사람이 진정한 수행자고 중이라네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점점 시대를 거꾸로가고 있습니다.
스님들의 말씀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조심스러우나,
현각스님에대한 자현스님의 비판에 대한 저의 단상 :
"지식이 많다해서 지혜로운 것이 아니며.
지혜가 부족하면 상식이라도 있어야한다"
작금의 한국불교의 실상에대한 저의 시각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는 말씀이 한국에서 기독교에만 해당될까요?
()()()
한국 불교에 종단은 없도 조직과 단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스님은 없고 조직원만 있는것 아닌가.
군대문화나 깡패문화인 상명하복(上命下服)만 가득하니 언제 나를 찾아 득도를 할꼬.....()()()
지구를 벗어나 우주창공 에서 지구를 보아야
지구의 참 모습이 보이는 것이니 한 단면을 보고 전체를 논할수 는 없는 것입니다
자현과 같은 무리들 참으로 많습니다. 직접 대면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그들을 보면 정말 역겨움이 올라오죠 그들은 그저 직업인일 뿐 수행자가 아니란 걸 그들 스스로도 알니다. 그저 불쌍한 중생이 승복을 걸치고 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수행자는 오직 행위로서 평해야 합니다. 위치와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그들의 행위가 어떠 한지에 따라 스님과 승복 걸친자가 됩니다....()_
잘 앍었씀니다
구구절절 지당한 글 올리신 뜻은 불교를 사랑하고 걱정하여 척사현정의 마음일 것 입니다
제 견해론 현각 자현 스님 불교의 핵심을 뚫지 못하고 중생심을 표출한것임니디
한국불교에 공부인이 나오지 않으니 자기 아는것으로 자기 견해만 쏟아놓는 중생심임니다
현각스님께서도 불법을 꾸ㅖ뚫지 못한 방황이 보이고 자현스님의지기지식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불교를 왜곡시킴니다
이것이 한국불교 현주소임니다
사람을 키우지 않아 사람이 나오지 않는것이 큰문제입니다
소생은 자신을 돌아보고 허물을 돌이켜 봄니다
'사랑' 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 들었고, 저 역시 옳다 생각합니다.
오래전 어느날 거의 평생을 부처님 품 안에 계시려 애쓰셨던 어머님께서 단 한 번도 불경을 읽으신적이 없다는, 한문 불경이나 한문 음 불경이라 읽을 수 없었다는 어머님의 말씀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한 분노를 느끼며 '미움'이 생기기 시작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계종에 대한 '미움'은 그 '미움'과 다름은 고백합니다.
1년에 수 천억씩 들어오는 그 시줏돈 다 어디에 쓰는지 너무나 궁금해 때론 밤잠을 설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조계종이 없어지거나 천지가 개벽하 듯 개혁되지 않는 한 법우님과 많은 법우님들의 근심은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_()_
@裝嚴 불교는 성품을 깨닫는 가르침임니다
장엄님께서 보는 시각은 맞씀니다
그 시각이 박으로만 향한다면 분노심만 나와 상처만 입게되고 비판만 하는 습이 생기게 됨니다
차라리 지켜만 보고 바른스승을 만나고 정법을 만나 공부하게 된다면 편해지고 무소뿔처럼 갈길 도를
만게 되지 않을까요
그때는 종교의 벽도 허물어지고 성인들과 만나게 되곗지요
종교란 성인의 가르침을 후학들이 집단을 만들어 놓은 것임니다
그러니까 종교집단에선 별스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죄무자성 종심기 라고 성품에는 다툼도 분노도 미움도 없는 너와 나 하나임니다
모두 방하착 해 버리시고 정법만나 행복하십시오
@bakdosa 저는 창원서 직접 쐬를 깍는 60 대 노동자로 글이제보는 시각과 같았씀니다
일하다가 처음으로 댓글달아봣씀니다
@bakdosa 가름침 받겠습니다 _()_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위에 건강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_()_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훌륭한 반론이십니다.
스스로 집안에 똥물끼얹는
무지를 보여준 자현스님과
종단은 반성부터 하길
부디
부탁합니다.
자현스님이란분이 한국불교승단의 민낫을 대낮에 벌것게 부끄러움도 모르고 보여주었지요, 한국불교승단, 조계종 ,,승복을 입은 이익집단이요 직업중이지요...
구구절절 옳은말씀 잘 읽었습니다 ㆍ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논두렁에서 벼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며 아래밭엔 붉은 고추가 3번째 수확하라고 춤추며 환호하니 삼복더위에 수확하는 작물이 많아요 감사합니다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냥 그 말이 떠오르네요.떠나는 중이나 그걸 보는 중이나 말없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세상 일이란
그렇지 않나 봅니다. 그래도 성불합시다.
자현스님이란 분!
유툽에 보면은 여전히 我相이 넘쳐나
파도를 타고 있고
박사학위 4개면 공부는 많이 했으나
아직도 曲學아(아부할 아)世하고 있더군요.
불자란 불쌍한 자들로
보입니다.
여전히 절도 모르고
시주하고 있는 불자가 있을까요.?
정신차립시다.
지리산 깊은 숲속에 정말로
정진하시는 스님들 계십니다.
추운 겨울 온전히 나시게 방한복 한벌 사들고
찾아가 보세요.
자현 본인 입으로 자기는 먹고살려고 스님 한다고 합니다..저런 사람이 한둘일까요..어쨌든 불교대중화를 위해 노력은 하는것 같아요..세상자체가 금전만능 사회이니...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