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밭 걷기
안희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暖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머잖아 내가 당근을
수확하게 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
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뉘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 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땅 위에서
이제 내가마주하는 것은
두더지의 눈
나는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당근밭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안희연
경기 성남 출생. 2012년 《창작과비평》 등단.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