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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의 오나라를 멸망시킨 막강한 해양.농업강국 한韓-마한제국(대한민국)
사료:삼국지 위지 동이전 [三國志魏志東夷傳]
위나라 당시 존재했던 고구려.마한 등 만주와 한반도의 한민족 나라들에 대한 기록임으로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과 위상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가치가 있는 사료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三國志魏志東夷傳]는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로 서진(西晉)의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의 위지에 부속된 고대 동방의 여러 종족과 국가에 관한 기록이다.
〈삼국지〉는 위지가 30권, 촉지가 15권, 오지가 20권이다. 송대(宋代) 이전에는 위서(魏書)·촉서(蜀書)·오서(吳書)로 나뉘어 간행되었기 때문에 '위서 동이전'이라고도 한다. 위지는 총 30권에 기(紀)가 4권, 열전(列傳:傳)이 26권인데, 동이전은 제일 마지막 권30의 오환(烏丸)·선비(鮮卑) 다음에 실려 있다. 외국열전을 위지에 포함시킨 것은 위를 정통으로 간주한 데도 이유가 있겠으나, 위나라가 중국 동북방의 여러 민족들과 가장 활발히 접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동이전을 구성하는 데 가장 많이 의존한 것은 사찬(私纂)인 어환(魚豢)의 〈위략 魏略〉이었다. 따라서 동이전의 서술순서도 〈위략〉과 거의 같다. 후한(後漢) 말에서 삼국초에 이르는 기간의 동이와 중국, 특히 위나라와 요동과의 관계기사는 진수가 직접 보충했다. 따라서 동이의 활동 자체가 중국 왕조와 관계한 측면에서 보면, 〈삼국지〉 동이전은 〈후한서〉 동이전보다 본기와의 관련성이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한서〉 동이전의 기사는 〈삼국지〉의 기사 순서를 내용에 따라 개편한 부분이 많아 〈삼국지〉 동이전이 보다 충실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은 서(序)·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동옥저(東沃沮)·읍루(揖婁)·예(濊)·한(韓)·왜인(倭人)의 순서로 되어 있다. 서에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주변 종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를 간단히 적었다. 부여전에는 위치와 영역, 풍습·산물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함께 순장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특히 옛 부여의 관행으로서 가뭄이나 장마가 들어 오곡이 익지 않으면 국왕을 죽이거나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은 프레이저(J. G. Frazer)가 그의 저서 〈황금가지〉에 소개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고구려의 경우에도 관제(官制)를 비롯하여 제천행사·혼인풍속 등과 함께 후한 때부터의 관계를 상세히 적고 있어 초기 고구려 사회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완하는 자료로 이용된다. 특히 중국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부여의 경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고 한 반면, 중국과 빈번하게 충돌하여 성장한 고구려에 대해서는 "힘이 세고 전투에 능하다"든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을 좋아한다"고 하여 대조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옥저전에서는 고조선에 복속했던 사실과 한군현과의 관계, 고구려에 복속한 사실 등을 적고 풍속을 서술했다.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하여 맥포(貊布)·생선·소금·해초 등의 공납을 바친 내용이 중요한 기사로 주목된다. 동옥저전 다음에는 읍루족의 생활상을 간단히 적었고, 책화 (責禍) 풍습과 함께 과하마(果下馬)가 유명한 예족의 생활을 실었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남한지역에 해당하는 <한전>은 마한을 상국으로 삼고 남3한 나라들을 토착 마한인들이 왕노릇하며 다스린다는 점을 전제로 마한·진한·변한을 함께 서술하고 있다. 진한인들은 진나라에서 노역을 하다 도망한 자들이고, 변한인은 편두 풍습를 하고 있다는 기록에서 역시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토착인들인 마한인들이 왕노릇을 했다는 기록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서남부에 해당하는 마한 중심의 78개국에 달하는 삼한 소국의 명칭을 열거하고, 신지 (臣智)·읍차 (邑次) 등 소국 수장(首長)의 명칭과 함께 한의 군현과 관계하면서 생겨난 칭호들을 소개했다. 특히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한韓에 망명한 사실을 적었으며, 낙랑인 1,500명이 진한에 붙들려와서 혹사당한 설화를 싣고 있다. 이는 북한지역의 후한 낙랑군과 한韓의 관계뿐만 아니라 삼한사회에서 포로-노예의 존재형태를 아는 데도 도움이 된다. 또 소도 (蘇塗)에 관한 것, 삼한사회에서의 철의 생산과 교역을 기록한 것도 중요하다. 한편 왜인전의 경우에는 북한의 후한 대방군(帶方郡)에서 야마다이국[邪馬臺國]에 이르는 길을 적고 당시 왜인의 정치상·사회상을 함께 기록했다.
이렇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우리 고대 종족들의 생활상과 풍속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사실을 비교적 상세히 전한다는 점에서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으로 이용된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5월제와 10월제 등 농경의례(農耕儀禮)의 모습과 함께, 정치조직의 발전정도를 알 수 있는 것도 동이전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고대사회의 사회상을 전하는 데는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이 때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로 인해 한때 일본인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고 중국측 기록인 동이전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국내의 고대사 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동이전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 고대사회의 특성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리고 동이전에 묘사된 사회상은 대략 3세기 무렵의 것이지만 그중에는 훨씬 이전의 전문(傳聞)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동시기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지금은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상당한 신뢰성을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고, 양자의 상충되는 부분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3면이 바다인 나라이다. 따라서 바다와 어민과 항로를 관리하고 보호할 해양수산부와 해양경찰청은 반드시 필요하며, 제주해군기지 역시 우리의 해양영토를 지키고 확장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를 반대한 집단은 중국과 일본의 국익을 이롭게 하는 세작집단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고대부터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민족은 우리 한민족이다. 특히 한반도 해양세력은 호남중심의 세계 최다 분포지역인 한반도의 고인돌 문명을 해로를 따라 동남아에서 유럽까지 전파한 위대한 해양세력이였다. 이들을 중국은 비하하여 <왜>로 기록하였다.
한자어로 마고와 쌀을 의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왜>는 본래 마한 진왕의 명을 받았던 한반도 해양세력을 의미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신라를 공격한 왜는 열도 왜가 아니라 마한 진왕의 명을 받은 한반도 해양세력이다. 박혁거세가 사로왕이 되면서 상국인 마한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마한 진왕이 지금의 전라도.경상도 해안세력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왜의 선조와 본국은 <삼국지위지-한전>의 기록내용을 보아도 본래 한반도인 것이다.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광개토태왕이 남한을 정벌하면서 한반도 왜집단은 열도로 이주해 갔다.
그 때부터 <왜>는 열도세력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백제.신라가 초기에 왜에 왕자들을 볼모로 보냈다는 [삼국사기]백제.신라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반도 왜는 마한이 마지막으로 천도한 전라도 나주를 왕도(반남고분 등 거대한 왕릉급 고분들이 많고 금동관도 출토됐다)로 삼고 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며 무역으로 쌓은 부로 막강한 군사력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에서 마한이나 왜는 결국 동일한 한반도 남한을 대표하는 국가명임을 알 수 있다.
<왜>는 해양무역을 하는 해양세력을 의미하고, <왜구>는 무역선을 침탈하거나 해안지역을 침탈하는 바다의 오랑캐들을 의미하는 용어다. <왜구>는 1-4세기 동해안을 타고 유입된 백인계 스키타이족으로 신라.가야권력에서 소외되어 열도로 이주한 초원집단을 의미한다. 왜구들의 머리스타일이 초원문화임이 이를 명확히 입증한다.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부여족의 나라인 백제 역시 마한의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백제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와 야합하여 한성백제의 왕도인 한강지역을 차지한 신라의 배신에 분노하여 신라정벌에 나서면서 한.일 악연의 씨를 뿌리게 되는데, 성왕이 신라군에 의해 참수당했고,
무왕-의자왕 시기에 백제가 강하게 몰아 부쳐 결국 망국위기에 빠진 신라는 당나라에 에 사대하며 당나라군의 지원으로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백제는 마한열도로 이주하여 백제담로에서 일본이 나왔다는 <일본서기>를 편찬하며 지금의 일본으로 태어나 나라를 당시 열도까지 다스린 성왕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훗날 정한론을 통하여 한반도 침략과 지배로 실현시킨다. 백제일본은 신라에 대한 배신과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망국의 치욕의 원한을 조선인들에 대한 살륙으로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로 미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꼬인 원한은 다시 보복과 응징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백제일본의 깊은 원한의 뿌리는 결국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성왕을 잔인하게 참수한 노랑개족 신라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코리아 대칸이 신라왕조를 대표하여 경주 김씨종친회가 백제황족인 일본황실에 사죄해야 하고, 백제일본황실은 일제 식민지를 통하여 보복하고 학살하고 강간한 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피해보상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로 나가기 위한 한국과 일본과의 진정한 역사적 화해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소련과 중국이라는 외세의 승인과 지원을 받아서 남한을 침략한 김일성일가는 8천만 한민족 앞에 사죄하고 세습독재권력을 내어 놓고 심판과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8천만 한민족의 전면적 교류와 거주이전,그리고 경제활동이 보장되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공의로운 한반도 통일의 길이다.
[역사 이야기]중국사를 결정한 한국
중국 삼국지의 나라 중 오나라를 멸망시킨 한韓-마한제국
후한서 동이열전(한전)|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集解】王會汾曰 案晋梁二書 皆作弁韓 當從改 下云 弁辰在辰韓之南 弁辰亦弁韓之訛 惠棟曰 魏志作弁韓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辰이다. 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 남쪽은 倭와 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과 接하여 있다. 弁辰은 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이고 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萬餘戶, 작은 나라는 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이다. 마한이 [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
동진이 되기 전 서진의 무제 사마염 때에 남한을 대표하는 마한 왕조는 이미 위나라 때에 백제 고이왕을 통해 요서 지역에 진출하고 있었다. 백제가 근초고대왕을 기점으로 마한(열도포함)을 통합하기 이전까지 마한은 진왕(천왕)이 거주하는 나라로 남한을 대표하는 백제.가야.사로(신라)의 상국이였기 때문이다.
진 세조 무황제 사마염(晉世祖 武皇帝 司馬炎, 236년 ~ 290년)은 서진(西晉)의 초대 황제로, 자(字)는 안세(安世)이다. 그의 조부는 위(魏) 왕조의 대신으로 제갈량(諸葛亮)과 결전을 벌이고 노년에는 정권을 잡은 사마의(司馬懿)이며,
백부는 사마사(司馬師), 아버지는 사마소(司馬昭)이다.
사마염의 조부인 사마의가 정적인 조상(曺爽)을 물리침으로써 사마씨는 위나라의 정권을 획득한다.
사마의가 죽자 사마의의 장남인 사마사가 대권을 받았는데. 사마사는 3대 황제 조방(曹芳)을 무시하고 정권을 휘둘러 조방이 사마사를 벌하려하자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시키는 만행을 저지른다.
사마사가 죽자 동생 사마소가 조정의 대권을 받아 형과 마찬가지로 무단 통치를 행사했다.
황제 조모(曹芼)는 이를 벌하려고 친위군을 이끌고 사마소의 집으로 쳐들어 갔으나,사마소는 대담하게도 부하 장군을 시켜 조모를 죽이게 하고선 그 부하에겐 황제 시해의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고 간사하게도 자신은 황제가 죽었음을 슬퍼하는 연기를 하여 천하를 속인다.
사마소가 죽자 그 아들 사마염은 드디어 위나라 황제를 폐립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
265년, 사마소가 죽고 진왕직을 승계한 사마염은 위나라 황제 조환을 겁박하여 선위를 요구했다.
선위받은 이후에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하며, 낙양에서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고 황좌에 오른다. 이것이 바로 서진(西晉)이다.
찬탈로 일어난 왕조가 찬탈로 망하는 순간이었다.
사마염의 당시에 이미 유비의 촉나라는 진나라에 합병된 상태였고(서기 263년)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쳐부순 손권의 오나라는 아직 건재했다. 사마염은 오나라를 멸망시켜야 진정한 중원의 황제라
불릴 수 있었다. 사마염은 오나라를 쳐부수기위해 전전긍긍하나 묘책이 없었다.
진나라의 장사꾼들은 오나라를 붕괴시키기 위해 묘책을 강구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위나라의 문제(文帝:조조의 아들 조비)의 황초 원년(서기 220년)에 조비는 손권에게 남방에서 수입되는 공작.상아.서각.대패 등을 구입하겠다고한다. 이것들은 위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나라의 신하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으나 손권은 진나라가 오나라보다 군세가 위에 있고 가능하면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할 수 없이 원하는걸 준다.
"이해 조비는 사자를 보내어, 작두향,대패,명주,상아,서각,대모,비취,투압,장명계 등을 오나라에 요구했다.
군신들은 상주하여 말하기를 "형주와 양주에서 바치는 물품들은 일정한 법도가 있으며, 위나라에서 진귀한 애완물을 요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손권은 혜시가 제왕에게 한 말을 예시하고 난 다음 모두 갖추어서 보내주었다." (삼국지 오주(손권)전 三國志 吳主(손권)傳)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건 위나라 황제가 편지를 보내서 요구해야 줄 정도로 위나라와 오나라간의 교역은 그리 원활하지 않았다는걸 알 수 있다.
오나라는 남방에 위치하고 있고 바다를 끼고 있어 농업성장력이 위나라보다 월등히 높고 인도,동남아,백제,가야,신라 등과 교역을 하고 있어 위나라보다 경제 지위가 높았다. 위나라로서는 더이상 전쟁보다는 평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하고 싶어 했다.
손권은 당시 요동의 공손연과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트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이유는 남방에서 조달할 수 없는 마필 때문이었다. 말이 있어야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기병의 숫자를 대등하게 할 수 있다.
반면 위나라는 남방 오나라에 비해 마필이 넉넉했다.
"(위나라) 명제(明帝:문제 조비의 아들 조예)는 그때 궁전을 짓고 있었는데, 백성들은 노역으로 피곤해 있었다.
신비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제가 사사로이 듣기에는 제갈양이 무예를 가르치고 군대를 정돈하고,
손권은 요동에서 말을 샀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 도우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삼국지 위서 신비전)
이를 알게 된 위나라의 명제는 가화 4년(서기 235년) 손권에게 보화와 마필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 때 손권은
왜 내가 거절하겠느냐며 당장 수락한다. 이렇게 하여 위나라와 오나라간의 무역이 개시된다.
"4년(235) 여름, 여대(呂岱)를 파견하여 이환 등을 토벌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박이 내렸다. 위나라 사자가 말을 진주 비취 대모와 교환하기를 구하자,
손권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모두 내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고, 말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 교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소?"
5년(236) 봄, 대전(大錢)을 주조하였는데, 대전 하나가 5백 개의 소전에 상당했다. 조서를 내려 관리와 백성들에게
동(銅)을 내도록 하고, 그 동을 계산하여 전을 주었다. 화폐 주조에 대한 처벌 조항을 만들었다. "(삼국지 오주(손권)전
三國志 吳主(손권)傳)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오나라는 위나라와 활발히 무역을 트기 시작하더니 적잖은 이득을 보더니
국민들이 모두 전쟁은 잊어버리고 상업쪽으로 전념하고 있던 것이다.
손권을 계승한 제2대 경제 영안 2년(서기 259년) 3월조에 "근년 주군 관리와 백성 및 병졸까지 농업을 버리고 모두
배타고 장사치로 장강을 오르내려 양전이 방치되고 곡식을 날로 줄어드니 어떻게 큰 뜻을 펴겠는가."(태평어람)라
탄식할 정도였다.
그런데 위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사마씨가 정권을 잡아 진나라를 개국한다.
위나라의 황제가 평안히 앉아서 평화를 즐기려하고만 하자 장사꾼 세력들은 이를 몹시 싫어했다.
이렇게 되면 중원의 장사꾼들은 남방의 오나라 장사꾼들에게 중요한 경제적인 이익들을 많이 뺏기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급히 위나라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그들의 일원인 사마염을 옹립시킨다.
사마염은 장사꾼들을 대변하는 자였고 꼭두각시였다. 그는 오나라를 멸망시켜야 자신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
이 때 진나라는 마한 왕조와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
[(서진의)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元年(서기 280년 백제 고이왕 47년)과 2년(서기 281년 고이왕 48년)에
그들의 임금이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조공하였고, (태강) 7년(286년 책계왕 1년),8년(287년 책계왕 2년),
10년(289년 책계왕 4년)에도 자주 왔다. 태희(太熙) 원년(290년 책계왕 5년)에는 동이교위 하감에게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함녕(咸寧) 3년(서기 277년 고이왕 44년)에 다시 (사절이) 왔으며, 이듬해에 또 내부(內附)하기를 청하였다.-진서 마한전-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제가 진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건 근초고왕부터 나온다. 그런데 마한전은 백제의 고이왕
시절에 마한이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한다. 이로 보아 이건 백제가 아니라 마한 왕조임을 알 수 있다.
280년은 오나라가 망한 해인데. 오나라가 망한 직후 마한과 진나라의 외교 기록이 등장한다.
뭔가 관련이 있지않을까?
중요한건 이 이전에 마한과 진나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의 기록은 전무하다. 만약 있었다면 중국쪽에서
이를 빠뜨릴리없다. 중국 왕조는 대대로 먼 나라에서라도 사신을 보내오면 그걸 조공이라 기록하여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를 원했다. 오죽하면 한나라 때 로마제국에서 사신이 온 것도 조공이라 적었겠는가.
또 동이교위 하감은 앞서 서진과 모용외의 관계를 연결해주고 서진의 동방 경략 정책을 추진하는 인물로 나왔었다. 동이 교위란 직책이 동방의 나라들을 관할하고 감독하는 직책인데. 직접 관할 감독하는건 아니고 원래 동방 나라들과의 외교를 트는 주요한 외교 부서로 보인다.
마한과 진나라는 무엇때문에 국교를 트게 됐을까.
'진서'를 보면 이상한 것이 나온다.
서기 276년부터 동이(東夷)라는 세력이 수십개국이나 홀연히 출현하여 진국으로 속속 귀화하기 시작한다.그리고 갑자기 오나라는 마치 야밤 중에 함정에 빠지듯 덜컥 망하고 만다.
그런데 이 기록들은 하나같이 귀화,래부의 표현을 쓰고 있다. 즉 동이 세력들이 중국에 귀화했다는 것이다.그것도 부족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 나라들이 귀화했다는 것이다.
"276년, 진나라 무제 2년, 2월 동이 8국이 귀화하였다"
7월 동이 17국 내부(內附)
277년, 진나라 무제 3년, 동이 3국이 내부(內附)하였다"
"278년, 진나라 무제 4년, 3월 동이 6국 래헌來獻. 동이 9국이 내부하였다"
"280년, 태강 원년,
3월 오나라 멸망
6월 동이 10국 귀화
7월 동이 20국 조헌(朝獻)
281년, 태강 2년, 3월 동이 5국이 조헌하였다. 6월 동이 5국 내부
286년 태강 7년 8월 동이 11국 내부
287년, 태강 8년, 8월 동이의 2국이 내부하였다"
288년, 태강 9년, 9월 동이 7국 교위가 내부하였다"
"289년, 태강 10년, 5월 동이 11국이 내부하였다"
"291년, 진나라 혜제 원년, 동이 17국이 내부하였다"
"382년, 효무제 7년, 동이 5국이 방물을 바쳤다" (진서)
진서는 당태종이 진나라의 사관들이 남긴 기록들을 모아 정리하게 하여 편찬한 것인데. 진서의 이상한 점은
고구려전은 있는데. 백제 신라는 없다는 것이다. 당태종 당시 백제 신라는 분명 존재했고 당태종도 백제 신라가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백제 신라를 열전에 넣지 않을 것일까?
진서에는 귀화한 세력들을 '동이'라 표현하고 마한 왕이 조공한 걸 적을 뿐 동이 세력의 실체에 대해서 명확히
적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마한이 54개국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기록이나 서기 280년에 마한과 진나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으로 보아 여기 나오는 동이 혹은 주축 세력이 마한일 가능성이 높다.
진한은 신라 가야 연합을 의미한다.(진한(辰韓:신라를 말한다. 당시 가야는 변진弁辰이라 불렸는데.가야를 원래 변한이라 적는다. 그런데 변한+진한의 뜻인 변진이라 적는건 당시 가야와 신라가 연합 세력이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서는 하나같이 이 동이 세력들이 사신만이 온게 아니라 아예 '내부','귀화'를 했다고 적고 있다.
이건 은밀하게 내부에서 적(진나라)에게 들러붙거나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러붙었다는걸 의미한다.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알기론 백제 신라.가야는 한반도에 있지. 대륙에 있진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앞서 우린 온조백제가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설치했다는걸 확인했다.그렇다면 마한과 신라 가야 역시 바다 건너 중국 대륙에 진출하였다는걸 의미한다.
가야는 일찍이 우수한 철제련술로 질좋은 철을 제련해내 그 철을 녹여 철덩이를 만들어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거두어 해상 왕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 철의 무역은 위,촉,오가 서로 격돌하여 한나라가 전쟁의 와중이던 삼국지 시대에 더욱 번성했다. 조조,유비,손권 등은 우수한 가야의 철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가야의 무역의 영향력이 커져 가면서 가야는 중국 대륙에도 상업 기지들을 설치해나가기 시작했다.
가야와 신라는 친밀한 형제국가였으므로 신라는 가야를 따라 대륙으로 나가 기지들을 설치했다.
신라가 중국대륙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은 그리 허구적인게 아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태평성대를 누릴 때
신라인 장보고는 당나라로 가서 당나라의 군대에 들어가 당나라의 군대와 병법을 익혔는데. 이 때 당나라에는
산동 요서 중국 남부 지방 등 해안가들에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신라인 집단 거류지가 있었다. 물론 본래는 서백제 지역으로 백제방이였지만, 당나라가 행정구역상 백제의 흔적으로 삭제하기 위헤서 신라방으로 바꿨을 것이다.
학자들은 신라인들이 중국으로 가서 무역 활동을 한거라고 말하지만 대략 그 시기가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른다.
그 시기는 오직 이 진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는 이 가야의 철을 수입해간 나라 중에는 마한도 있다고 기록한다. 마한은 가야의
우수한 철을 다른 나라들보다 싼 값에 구입하여(마한은 가야의 상국이자 우방국이므로) 이것으로 온조백제의 군대를 무장시켜 서기 3세기에 요서로 진출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한은 그보다 더 이전부터 가야의 무역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그들도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진서에서 동이 나라들이 진나라로 내부한 다음에 오나라가 망한걸 보면 오나라가 있는 중국 남부 지방에
마한,가야,신라의 상업기지들이 밀집해있었을 것이다. 이 상업기지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를 버리고
진나라편을 든 것이다.
마한,가야는 아마 이 당시에 무역으로 인한 경제 성장으로 수군력도 상당했을 것이고 상업기지들에는 치안을 담당하는
군대들도 배치되어있고 왕족들이 상업기지 관리자로 배치되었을 것이다.
오나라로서도 마한,가야가 미치는 국제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 상업 기지의 군대 진주를 막지는 못했다.
앞서 백제의 요서 진출도 위나라와 마한과의 무역때문에 요서 지역에 설치된 요서의 백제 무역 기지가 군대를
불법 주둔시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태종은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사실을 진서에 적지 못하게 했다. 더군다나 그는 한반도의 마한,진한세력들이 중국의 남부에 진출을 하고 있었다는걸 인정하기 싫어했다.왜 그런가하면 당시 그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동방의 나라들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 그런 때 한반도의 나라들이 과거에 중국진출을 했었다는걸 역사서에 그대로 남겨둘 수는 없는 것이다.그렇게해서 그는 마한,진한이라고 표기된건 모두 삭제해버리고 동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백제전은 아예 빼버렸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군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양서 백제전)
여기서 진평은 한자로 晉平. 즉 진나라를 평정. 또는 진나라가 평정했다는 것이다. 이 진평군의 위치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아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위치 문제에 앞서서 이 군의 이름 '진평'은 진나라와 백제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줄 수 있는 자료가 삼국지에 있는데. 삼국지에는 손권은 장군을 요동쪽으로 파견해 위나라의 군현들을 공격하게하여 남녀를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그런데 오나라가 어떻게 요동까지 갈 수 있었을까? 산동쪽은 위나라 영토라서 손권이 그 근처론 지나갈 수가 없다. 그것은 황해의 마한 가야 수군들의 도움을 얻어야만 가능한 전략이었다.
고구려도 이 당시에 위나라와 적대 관계여서(위나라의 사마중달이 고구려에 반란을 일으킨 요동 태수 공손연을
토벌하는걸 도와주면 요동은 고구려가 가지고 요서는 사마중달이 가지기로 고구려와 위나라간에 협약이 있었는데
그걸 사마중달이 무시하고 서기 238년에 요동을 쳐서 도둑질해감) 오나라 마한 가야의 이 행동을 묵인했다.
"경초 원년(237) 가을 7월 2일 손권은 대장 주연(朱然) 등 2만 명을 파견하여 강하군(江夏郡)을 포위하였지만, 형주자사 호질(胡質) 등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주연은 퇴각하였다. 이전에 손권은 사자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하여 고구려와의 관계를 통하여 요동을 공략하려고 했었다."(삼국지 위서 명제(조예)기)
"2년(239) 봄 3월, 손권은 사자 양도(羊?)정주(鄭胄)장군 손이(孫怡)를 요동으로 가게 하여 위나라 수장(守將) 장지(張持)고려(高慮) 등을 공격하게 하여 남녀를 포로로 잡았다."(삼국지 오주(손권)전三國志 吳主(손권)傳)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는 오나라 황제 손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손권은 중국 동남방의 한족(漢族)과 이족(夷族:동이족)들이 서로 화합하게하여 나라를 잘 이끌어나간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오나라와 마한의 굳건한 동맹 관계를 일컬을 것이다.
"그대(손권)는 동남쪽 땅을 안정시키고 장강 밖의 토지를 잘 다스려 한족과 이족이 편안히 실업을 하고 어떤 사람도 반역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삼국지 오서 오주(손권)전)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마한이 아무리 해상왕국이라 해도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한 군사력을 오나라에 진출시킬 순 없다. 그건 오나라의 강력한 반발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오서에도 마한과 오나라의 군사적 충돌 관련 기록은 전무하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마한이 오나라의 멸망에 큰 기여를 한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큰 기여는 과연
무엇일까?
이 의문은 진국의 정서대장군 양호가 상소한 [오벌책吳伐策]을 통해 풀 수 있다.
서기 276년 양호는 오벌책을 상소한다. 오벌책이란 오나라를 벌하는 책략으로 그 내용의 대략은 전해지지 않으나
어째서인지 많은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대를 했다.그 때 모용외를 발굴해낸 장사꾼 길드의 일원인 중서령 장화만이 찬성이었다.
무제 사마염은 즉각 장화를 보내 양호의 오벌책을 알아보게 했다.
사마염은 양호의 정확한 생각을 더 듣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가서 의견을 들으려 하면 신하들이 더 반발할
것이기에 장화를 통해 살펴보려 한 것이다.
마침 양호가 병석에 눕자 장화는 병문안을 핑계삼아 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구체적인 생각을 모두 듣게 된다.
[진서] 장화전에 따르면 장화의 보고를 받은 사마염은 즉각 장화를 탁지상서로 임명하고 대량의 곡물을 어디론가
수송시킨다. 그러자 대도독 가충(賈充)이 펄펄 뛰면서 "장화를 죽여 천하에 사과시켜야한다."고 했다. 이에 많은 신하들이 동조했지만 사마염은 신하들의 뜻을 묵살했다.
대량의 곡물은 도대체 어디로 수송된 것일까? 그리고 오벌책의 상세한 내용은 무엇일까?
오벌책을 수행한 주요 인물은 장화이다. 장화의 행적을 알아보면 이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사초는 서기 282년. 즉 오나라 멸망인 서기 280년으로부터 2년 후. 장화가 마한으로 사신을 보내 입조하자
마한과 장화가 서로 연합했다고 말한다.
◎ 十三年壬寅, 秋九月, <張華>遣使来朝, <馬韓>及附於<華>. <芻牟鏡>七十卷新成.
○ 임인,13년 AD282}임인, 가을 9월, <장화>가 사신을 보내 입조하자, <마한>은 <장화>에게 붙기에 이르렀다. -고구려 사초 서천왕기
진서(晉書)의 장화전을 보면 사마염은 서기 282년에 장화를 '지절 도독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안북장군'
(持節都督幽州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으로 삼아 요서로 보냈고 이에 장화는 옛 요서의 세력들(백제)과
새로 임명된 진나라 장군들을 모두 받아들이니 오랑캐와 중국이 그를 따랐는데.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이 있어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띠고 있었으며 유주(幽州)와의 거리가 4천여리였는데, 역대로 내부(來附)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왔다. 이에 먼 오랑케가 감복해 와서 사방 경계가 근심이 없어지고 매해 풍년이 들어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 (乃出華為持節、都督幽州諸軍事、領護烏桓校尉、安北將軍。撫納新舊,戎夏懷之。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裡,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於是遠夷賓服,四境無虞,頻歲豐稔,士馬強盛。)
여기선 마한이 '마한신미제국'으로 나온다. 제국(諸國)은 당시 마한이 수십개국이 진왕(천황) 아래 연합한 연방국이란걸 알 수 있고 신미(馬韓新彌)는 마한이 오나라를 멸하고 중국 남방에 영토를 넓히면서 자신감에 가득차 새로이 반포한 국호로 마한이 새롭고(新) 널리(彌) 사방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진서의 장화전은 마한 수십여국이 처음 사신을 보내왔다고 하나 이는 마한을 의도적으로 변방의 오랑캐국인 것처럼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이미 진서의 다른 부분들에는 동이 수십여국이 내부해왔다고 하니 마한이 오나라를 멸하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걸 애써 부정할려고 왜곡한 것이다.
당시 요서 지역은 마한의 제후국 백제와 고구려 선비의 모용씨 세력들이 들끓고 있었다. 장화는 백제의 도움을 얻어 유주를 잘 관리하여 진나라는 오랑캐의 걱정이 비로소 없어지게 되고 모용씨와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화전을 통해 장화와 마한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하였다. 이 관계는 장화가 유주로 가기전부터 있었을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마염이 장화와 같이 어딘가로 보내진 대량의 곡물은 진나라 군대가 아닌 오나라에 있는 마한의 상업기지들로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곡물을 이용해 이들이 오나라에 구사할 책략은 무엇인가?
아마 마한은 진나라로부터 받은 대규모의 식량을 가지고 오나라와 거래를 했을 것이다. 오나라는 진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군량이 필요하므로 마한으로부터 식량을 사들였을 것인데. 이 때 마한이 값을 비싸게 매긴 것이다.오나라는 울며 겨자먹기로 식량을 사고 결국 국고가 탕진되어가자 귀족.백성들한테 세금을 세개 매겨서 거둔 것이다.
이에 귀족,백성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 마한의 작전에 신라,가야의 상업기지들도 가담을 했을 것이다. 신라,가야는 원래 진한,변한 시절 때 마한의
제후국이었기에 마한을 도와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략은 위나라 때에도 거론되었었다. 위나라 조정에 위나라 장군 왕기가 다음과 같은 전략을 건의한 적이
있다. 그는 오나라의 국경으로 파견돼 오나라군을 무찌르며 많은 전공을 거두어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위나라 조정은 그에게 오나라에 대한 전략의 자문을 구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오나라를 토벌하려고 상의하였는데, 왕기에게 조서를 내려 진격하는 것이 적당한지 어떤지 의견을 서술하도록 했다. 왕기가 대답했다.
“무릇 병사를 움직였지만 공이 없으면, 밖으로는 위엄과 명성이 꺾이고, 안으로는 경제가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반드시 만전을 기한 연후에 출동을 해야 합니다. 만일 수로 교통에 의지하지 않고 식량을 모으고 수전할 준비를 한다면, 비록 장강 안쪽에 병사를 집결시켰을지라도 절대로 물을 건널 수 있는 형세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강릉(江陵)에는 저(沮)ㆍ장(漳) 두 물이 있고, 관개된 비옥한 토지가 수천 곳이 있습니다. 안육(安陸)의 변방에는 연못과 옥토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수군과 육군 양군이 나란히 농사를 지어 군대의 자재와 식량을 충실하게 하고, 그런 연후에 다시 강릉(江陵)과 이릉(夷陵)으로 향하여 병사를 나누어 하구(夏口)를 점거하고, 저수(順沮)와 장수(漳)를 통하여 수로를 이용해 곡물을 싣도록 하십시오. 적군이 관군에게 장기간의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면, 천자의 주살을 거역한 자의 뜻은 꺾이게 될 것이고, 왕도(王者)와 교화를 흠모하는 자의 마음은 더욱더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만이(蠻夷)를 합쳐 통솔하여 그 내부를 공격하고 정예병사가 밖서 토벌하도록 한다면 하구(夏口)로부터 상류지역은 틀림없이 함락될 것이고, 장강 밖에 있는 군은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오와 촉(吳蜀)의 연합은 끊어질 것이고, 연합이 끊어지면 오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사를 출동시킨 이로움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삼국지 위서 왕기전
왕기는 오랑캐(蠻夷)와 연합하여 오나라의 내부를 공격한 후 위나라의 정예군으로 오나라를 공격하면 필시 오나라는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이 오랑캐에 대해서 삼국지를 기록한 진나라의 역사가 진수는 그 실체를 명확히 밝혀놓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해상왕국 마한이었던 것이다.
"왕기(王基)는 자가 백여(伯輿)이고, 동래군(東萊) 곡성현(曲城) 사람이다."-삼국지 위서 왕기전
왕기는 산동 왕씨 가문으로 과거 산동을 떠나 낙랑을 세운 왕씨 장사꾼 세력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방의 한직에만 머물던 그는 장사꾼 길드의 유력자인 사마 중달에 의해 발탁되어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대장군(大將軍) 사마선왕(司馬宣王:중달)이 왕기(基)를 초청하였다. 왕기가 도착하기 전에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발탁되었다."-삼국지 위서 왕기전
왕기는 중원을 지배하는 장사꾼 길드의 일원이고 후일 진나라 때 장사꾼 세력들은 그의 전략을 백분 활용한 것이다.
왕기(王基)는 자가 백여(伯輿)이고, 동래군(東萊) 곡성현(曲城) 사람이다.
아무튼 진나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킨다.
오나라가 멸망한 서기 280년. 무제는 새로운 연호로 태강(太康을 발표하고 백성들에게
창고의 무기와 강가의 배를 파하고 강변과 해안 및 언덕의 임야 중 개발되지 않은 땅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황명을 발표한다.
그런데 무제는 '이인(夷人)은 수빈포 1호당 1필이고 먼 곳은 1장'이라는 특혜를 취한다.
이 이인은 마한인을 말한다. 중국 남부 지방의 마한의 무역기지들은 세금을 조금만 내도 될 정도로
무역에 있어 진나라의 후원을 많이 받게된 것이다.
그리고 장화는 오나라 멸망의 1등 공신으로 무후(武侯)에 봉하여졌다.
서진의 후원으로 강력한 성장을 하게된 마한. 마한의 제후국인 백제의 근초고왕은 백제 휘하의 일본의 제후에게 칠지도를 하사하는데. 이 칠지도는 태화(泰和) 4년이란 연호를 적고있는데. 이는 동진의 연호다. 마한,백제는 서진을 이어 동진 때에도 형식적으로 동진을 상국(上國)으로 추켜 세우며 동진을 통해 중원에서 자신들의 국제 위상을 드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칠지도(七枝刀 일곱 가지 칼))
그리고 동진은 마한을 통해 고구려와 북방기마민족들의 나라들을 견제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은 왜 진나라가 마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서까지 오나라를 멸망시켜야했느냐는 점이다.
진나라(서진)가 군사력이 부족해서? 아니다. 당시 오나라는 황제 손호(孫皓)가 폭정을 일으켜 신하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곳곳에서는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나라의 군사력으로도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다.
그럼 무엇일까?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 당시 진나라는 무역의 영향력이 오나라보다 약했다. 오나라는 남방에 위치하여 농업 성장력이 진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고 바다를 통해 인도 동남아 한반도의 마한 가야 신라와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는 해상 왕국이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한동안 그치고 평화로운 세월이 지속되었기에 그 경제적 성장의 지위는 매우 높았다. 만약 오나라가 전쟁으로 망하여 경제와 무역이 그로 인해 파탄나고 그 여파가 오래도록 지속된다면 그 경제적인 영향은 진나라에도 미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오나라의 무역을 다시 안정시켜줄 실력자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오나라에 있던 마한의 상업기지들이었던 것이다.
마한인들은 오나라 땅과 상업에 대해서 진나라의 장사꾼들보다 더 풍부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진나라는 해전 경험이라곤 오나라와의 적벽 대전이 고작이다. 적벽대전이 무엇인가? 중국 남부의 강인 '장강'에서 수전을 치른거지. 진정한 의미의 해전이 아니다.
위나라의 명제 때 위나라는 산동,하북,북경 등에 명을 내려 대규모 해선을 건조시켜 오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지만
이 해선들이 실제로 동원되진 못했다. 왜 그랬을까?
"경초 원년(237) 명제는 청주, 연주, 유주, 기주의 네 주에 명을 내려, 해선(海船)을 대규모로 만들도록 하였다."
(삼국지 위서 명제기)
이 때 황해는 마한 수군이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나라는 고구려,오나라를 해로를 통해 습격하지 못한 것이다. 진나라는 마한의 막강한 수군력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들의 협력을 어떻게 끌어냈을까? 아마도 오나라는 폭정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서 얼마 안가 망할테니 이제 배를 갈아탈 때가 되지 않았냐고 진나라는 마한을 설득하려 들었을 것이다. 마한으로서도 새롭게 떠오르는 강국인 진나라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하여 진나라는 마한과 동맹을 맺어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던 것이다. 막강한 해양강국인 마한을 통합한 부여족의 백제가 중국 동해안 지역을 차지하고 중국을 흔들었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최치원 전]"고구려.백제가 강성할 때는 100만 강병으로 오.월.연.제 땅을 휩쓸어 중국이 좀이 되었습니다"-최치원이 당나라 고위 관리에게 한 말은 명백히 역사적 사실이다. 자신의 고향이 옛 백제 땅이라는 장개석이 김구와 나눈 대화에서도 절강성 지역은 고대 백제땅이였다는 내용도 정확히 맞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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