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이야기
24. 04. 02
오늘 아내가 체한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함께 갔다.
성지주일 꽃꽂이를 하는 날이라 서둘러 9시에 도착했다.
나도 금년 종합검진을 받는 해 이기에 늘 검사하는 위, 대장내시경 외에
추가로 어떤 검진을 받을 지 상담키위해서다.
요즘 자주 코에서 피가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현상이 있어서다.
상담을 마치고 종합검진 날짜를 정하고 있는데
아내는 수액주사를 1시간 정도 맞아야 한다기에
먼저 나와서 주차된 곳으로 가자
길 양쪽으로 벚꽃이 만개한 것이 보였다.
차에서 내릴 때는 보이지 않더니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주위의 풍경이 보인 것이다.
바람이 불자 벚꽃잎이 흩날리며 떨어졌다.
일 년을 기다려서 핀 꽃이 오래 머물면 좋으련만..
비라도 내리지 않기를 빌어본다.
우연히 봤던 김훈 작가의 낙화에 대한 글을 옮겨 적었다.
김훈 작가 글을 좋아한다.
동백꽃, 매화, 산수유. 목련의 특징을 섬세하게 관찰해서 표현했다.
김훈 작가는 자전거의 속도로 남도를 달리면서 낙화를 묘사했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선암산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모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증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뚝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ㅡ김훈, <자전거 여행>중에서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