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연대봉과 진해 용원 사이로 해가 사라지고 있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날이 저물고 있다. 몰운대성당에서 바라본 다대포의 일몰 풍경. 사진=강영조 | |
너른 벌과 제멋대로 자란 모래톱, 그리고 1300 리를 쉬지 않고 흘러내려와 기어이 바다에 몸을 푸는 넉넉한 낙동강이 그 곳에 있었다.
그 언덕 위에는 카메라 파인더를 노려보고 있는 사진작가들이 한 둘 모여들고 있었다.
이 곳은 일몰 촬영의 포인트다. 석양의 하늘이 수면 저 너머에서 타오르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몰운대 성당은 만면(滿面)에 홍조를 띠면서 이들이 삼각대를 거치(据置)하는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해지는 부산의 풍경들
나는 강변대로를 타고 이 곳에 왔다. 후박나무 가로수 긴 그림자를 차례로 밟고 지나왔다. 서쪽 하늘 위에 구름이 몇 점 떠 있었다. 그 구름의 한쪽 끝은 봉숭아물을 들인 손가락처럼 붉은 물감이 배어들어 있었다.
다대포는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일몰의 명소다. 하지만 한낮을 뜨겁게 태우다가 마침내 스러지는 해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이 일몰의 풍경이라면 그것의 풍경적 우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세상 모든 죽음이 애틋하듯이 일몰의 풍경은 모두 아름답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부산에서도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많이 있다.
우선 달맞이 고개. 선연한 붉은 빛 덩어리가 오륙도와 용호반도, 그리고 바다 저 너머로 사라진 다음 서쪽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광경을 찻집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는 안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또 그 와우산 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공중목욕탕에서 석양을 보는 체험도 각별하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수증기 낀 창 너머로 기우는 붉은 해를 마주할 때에는 마치 온 몸에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광안리의 수변공원에서 황령산 너머로 숨어버린 해가 남은 불기운으로 광안대교를 발갛게 물들이는 광경도 놓칠 수 없다.
석양이 계절을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과 여름은 약간 차이가 난다. 건조한 대기 때문에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동그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겨울보다 물기가 서려 있는 여름철의 일몰을 더 좋아한다. 태풍이 지나간 날처럼 오전에는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오후가 되자 문득 갤 때가 있다. 습기 가득 찬 저문 강펄 저 너머 서쪽 하늘 위에 허공에 떠 있는 것조차 신기할 정도로 무거운 구름이 점령하고 있는 그런 날이 좋다. 그때 하늘은 마치 이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듯이 시커멓고 또 시뻘겋게, 냄새가 날 정도로 타오른다. 물론 세상의 종말 따위 올 리가 없는 것을 아는 우리는 그 하늘의 섬뜩한 검붉은 색조와 매캐하게 소멸하는 구름조각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일몰을 본다.
내친 김에 말해두자면, 차를 타고 가면서 노을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곳은 하단의 강변대로다. 남해고속도로 북부산 톨게이트를 나와 백양터널로 이어지는 고가교로 낙동강을 건너자마자 맨 우측 차선과 이어지는 램프로 내려선다. 바로 거기서부터 낙동강을 따라 다대포까지 이어지는 길이 강변대로다. 낙동강과 김해평야 저 너머 진해 용원, 그리고 김해 녹산을 에워싸고 있는 산자락 뒤로 스러지는 해의 잔영 때문에 늦은 오후의 이 길은 언제나 발갛게 물들어 있다. 그 속을 질주할 때 후박나무 가로수의 그림자와 금화처럼 노란 해가 오른쪽 차창에 규칙적으로 그려진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보통 이상의 일몰 풍경을 보장하는 곳이다.
#멀리 있으므로 아름답다
이곳 저곳 부산에서 손꼽는 일몰의 풍경지를 소개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다대포의 일몰을 제일로 친다. 그것은 하늘 가득 붉은 색조로 타오르는 노을 때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은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다대포를 일몰의 명소로 꼽는 것은 시인 강은교도 그랬듯이 다른 장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으로 해가 지기 때문이다.
칸트도 그랬다. 아름다운 것은 멀리 있다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고향처럼 시간적으로 멀거나, 다가설 수 없는 낙원처럼 지리적으로 먼 곳은 아름답다. 팍팍한 이 세상도 멀찌감치 바라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심리적인 거리 또한 미적 체험의 조건이다. 다대포 일몰이 아름다운 것은 시간적, 심리적 거리도 한몫을 하겠지만, 그보다는 지리적 거리 때문이다.
다대포는 끝없이 펼쳐진 개펄과 모래밭, 그리고 자잘한 파도가 이는 바다 저 끝,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저 먼 곳에 희미한 산 그림자가 겨우 보일 정도로 그 공간적 규모가 크다. 육질을 잃어버리고 마치 연극 무대의 배경처럼 메마른 평면의 몸으로 서 있는 원경의 그 산들은 중국 북송의 화가 곽희가 말한 심원(深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갯벌에 서면 마치 거대한 대륙 속에 있는 듯하다. 이렇게 거대한 대지의 가장 먼 곳으로 사라지는 해를 목격하는 곳이 바로 다대포다.
아름다운 일몰을 연출하는 것은 그 해가 멀리 있도록 보이도록 하는 공간이다. 비어있는 무의 장소. 해와 나 사이에 아무 것도 끼어들지 않고 아득한 거리감을 절감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갯벌과 바닷물 그리고 원경의 산, 지평선을 연상하게 하는 이런 대륙적 풍모를 지닌 하구가 바로 이런 공간이다. 이 허무의 공간이 다대포의 일몰을 명풍경으로 기억하게 한다.
일몰의 아름다움을 지리적 조건으로 설명하자면, 하나 더 말해둘 것이 있다. 해가 지는 방향이다. 해가 지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서쪽이지만 계절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해는 하지 무렵에 가장 서쪽으로 진다. 그 때부터 서서히 남쪽으로 몰일의 장소를 옮긴다. 동지(冬至) 무렵이 되면 가장 남쪽 하늘 뒤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다대포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가까운 녹산 뒷산으로 훌쩍 넘어가는 여름보다는 가덕도 바다보다 더 먼 곳으로 낙일하는 동지의 겨울이다.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불 속에서 막 꺼낸 동전처럼 붉게 달아오른 해가 원경의 산 그림자에 다가서고 있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간 순간, 느닷없이 무거운 침묵이 사위를 눌렀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하다. 산 뒤로 사라진 해는 발소리처럼 멀어지면서 서쪽 하늘을 선홍색으로 바꾸고 있었다. 사진작가들이 파인더에 눈을 붙이고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날이 저물고 있었다. 몰운대 성당은 이미 어둠에 싸여 있었다.
동아대 도시계획·조경학부 교수 yjkang@d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