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曦陽山, 999.1m)-시루봉(914.5m)
산행일 : ‘17. 4. 25(화)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 산행코스 : 은티마을→성터→구왕봉갈림길→희양산→성터→시루봉→백두대간 복귀→도막갈림길→분지리 연풍별당(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갤러리산악회
특징 : 희양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 마룻금에 걸쳐있는 산으로 깎아지른 암벽과 암봉으로 이뤄져 있어 마치 거대한 성채와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또한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데다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 있어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전형적인 골산(骨山)이라는 얘기이다. 덕분에 이 산은 볼거리로 넘친다. 기암괴석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조망(眺望) 또한 거칠 것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양산의 가치는 이러한 산세나 지형보다 불교사적인 면에서 더 발한다. 신라의 고승(高僧)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창건했다는 봉암사(鳳巖寺)가 이 산의 품에 안겨있기 때문이다. 이후 봉암사는 우리나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종찰(宗刹)로 우뚝 섰다. 또한 봉암사는 근대 불교의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는 왜색화로 급속히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난맥에 빠진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성철, 청암, 자운 등 50여 스님은 희양산에 모여 이른바 ‘봉암사 결사’를 결행했다. 한국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지만 구호는 간결했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였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혁신 운동이었다. 스님들은 제일 먼저 왜풍을 일소하고 수도 도량으로 거듭날 것을 결의했다.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재를 없애고 화려했던 가사(袈裟)도 괴색으로 바꾸었다. 일일부작 일일부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정신을 생활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수행자들이 노동에 지쳐 선방에서 졸기하도 할라치면 ‘밥값 내놔라 이 도둑놈들아’ 하는 성철 스님의 고함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1982년에는 수도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사찰은 물론 일대 임야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금단의 사원’, '비밀 수도원'이라는 전통의 시작 이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석가탄신일에만 산문을 열었으나 그것도 경내로 방문이 제한되었다.
▼ 산행들머리는 은티마을(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514-5)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곧이어 적석교차로(괴산군 연풍면 적석리)에서 34번 국도로 올라가 수안보?문경 방면으로 2~3분쯤 달리다가 연풍 I.C교차로에서 내려와 은티중리길을 따라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은티마을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은 양보의 미덕이 필요한 길이다. 차량 두 대가 비켜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비좁기 때문에 먼저 본 차량이 약간이라도 넓은 지점에서 기다려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은티마을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아름드리 노송(老松)들이 무리지어 길손을 반겨준다. 소나무 아래에는 장승 두 개와 은티마을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참! 주차장에 커다랗게 세워놓은 ‘등산안내도’를 한번쯤 살펴보고 산행을 시작하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우리같이 길을 잘 못 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니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보인다. 돌담을 둘러쌓고 그 안에다 모셔 놓은 걸 보면 이 마을에서 신주단지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이곳 은티마을은 풍수지리(風水地理)로 볼 때 ‘자궁혈(子宮穴)’에 해당되어 천지간의 기를 모야 생명이 잉태되는 양택(陽宅)의 땅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궁혈이란 게 본디 물이 많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는 좋으나 여자의 기(氣)가 너무 세다는 단점이 있단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소나무 숲(陰宅에 해당된단다)’을 만들고 남근석(男根石)을 세워 남녀 간 기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한편 매년 정월 초이튿날이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고제(洞告際)를 지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돌의 모양이 남성의 성기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은티마을은 희양산과 악휘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두 개울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래서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 때문에 가끔 수해를 보는데 그 개울 줄기가 여인네의 오줌 줄기 같다 해서 수해의 방패막이로 마을 앞에 남근석을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 마을로 들어가기 전 반가운 풍경과 마주한다. 주막집이다. 2002년엔가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처음으로 만났던 이래 잊을만하면 들렀던 추억의 장소이다. 초창기만 해도 간단하게 막걸리나 한잔씩 하고 지나가던 허름한 가게였는데 언제부턴가 반듯한 식당으로 변해있다. 그것도 토종닭 요리는 물론이고 찌개나 전골, 그리고 두부김치와 녹두전, 더덕구이, 도토리묵 등 메뉴도 도회지 식당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다. 맛있는 두부를 안주 삼아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치고 싶지만 오늘은 불가능하다. 하산지점이 다른 곳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산행의 피로를 싹 날려버릴 기회를 잃은 셈이 되어 버렸다. ▼ 주막을 지나자마자 길이 둘(이정표 : 희양산← 4.4Km/ 마분봉→ 4Km)로 나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시멘트 포장길을 따른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또 다른 ‘등산안내도’ 세워져 있다. 이번 것은 희양산과 구왕봉, 그리고 시루봉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에는 시루봉으로 가는 길(이정표 : 구왕봉↑ 3.3Km/ 시루봉↖ 3.2Km/ 은티마을↓ 0.4Km)이 나뉜다. 구왕봉 방향으로 향한다. ▼ 뒤돌아보면 은티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은티마을의 원래 이름은 ‘의인(義仁村里)’이었다 한다. 경술국치(庚戌國恥) 뒤 일본인들이 '의인'이 민족정신을 뜻한다 해서 은평으로 고친 것이 은티(銀峙)로 변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그맣기 이를 데가 없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그러니 농사를 지을 땅이 넉넉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선지 마을 주민들은 농사보다는 임산물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 아까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만났던 ‘임산물 직판장’들이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송이나 능이버섯, 두릅 등 임산물은 물론이고 곶감과 사과 등의 과일들까지 팔고 있었다. ▼ 한옥(韓屋)으로 한껏 멋을 부린 ‘은티산장’을 지났다 싶으면 이번에는 양옥으로 지어진 ‘은티펜션’이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이곳 은티마을도 많이 변해있다. 생업으로 하던 임산물 채취가 언제부턴가 여행자들을 위한 서비스업으로 바뀐 것을 보면 말이다. ▼ 길은 너른 과수단지(果樹團地) 사이로 연결된다. 때는 바야흐로 꽃피는 춘사월, 사과나무마다 하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누군가는 사과밭 길을 일컬어 ‘카멜레온(chameleon) 길’이라고도 했다. 봄이면 예쁜 꽃으로 치장된 ‘하얀 길’이지만 여름철엔 녹음 짙은 ‘녹색 길’로 변하고, 가을이 되면 빨간 ‘사과 길’로 바뀌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참고로 사과는 배수가 잘 되고, 일교차 크고, 일조량 많고, 비가 적은 지역이 당도가 높고 맛있다고 한다. 은티마을이 희양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 ▼ 그렇게 20분쯤 진행하자 시멘트포장길이 끝나면서 길이 둘로 나뉜다. 정자를 지어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해놓은 이곳에는 이정표(희양산↖ 3.6Km/ 구왕봉(호리골재)↗ 3.0Km/ 은티마을↓ 0.8Km) 외에도 이곳이 희양산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백두대간 희양산)과 산행안내도, ‘국가지점번호 표지판(라바 43765902)’, 입산통제 경고판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만큼 중요한 포인트라는 증거일 것이다. ▼ 희양산 방향으로 들어선다. 비록 비포장이지만 아직도 길은 임도처럼 널찍하다. 그렇게 5분 조금 못되게 걸으니 또 다시 길이 둘로 나뉜다. 아까 구왕봉 갈림길의 ‘등산안내도’에 표기되어 있던 갈림길이 아닐까 싶다. 지름티재로 올라가는 길과 산성터로 연결되는 길이 나뉘는 지점 말이다. 하지만 이정표가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다른 길(호리골재)로 들어서버린 지 이미 오래인 그가 이곳에 표시지를 깔아 놓았을 리가 없다. 덕분에 우린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다. 오른편 지름티재로 진행해야 하는데도 희양산성이 있는 왼편으로 들어서버린 것이다. ▼ 잠시 후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른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산길은 개울을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별다른 안전시설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장마철에는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 그렇게 14분쯤 오르면 골짜기에 가로로 걸터앉은 널따란 암반(巖盤)을 만난다. 어른과 키 재기를 해도 될 정도로 높으니 만일 장마철에라도 찾아온다면 멋진 폭포(瀑布)로 변한 경관을 눈에 담을 수도 있겠다. 그래선지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희양폭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건폭(乾瀑)으로 있는 날이 더 많으니 이름까지 붙이는 건 과대포장이 아닐까 싶다. ▼ 산길은 계속해서 골짜기를 따른다. 물기가 없는 골짜기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널려있다. 물을 대신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아무튼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는가 하면 시루떡을 층층이 쌓아놓은 모양의 낭떠러지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 위에 묘하게 걸터앉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은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 느긋하던 산길이 언제부턴가 가팔라져 있다. 흙냄새가 날 정도라고 한다면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다. 흙냄새가 코로 솔솔 들어올 정도로 허리를 숙여야만 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 오르막길이 길지가 않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 그렇게 5분쯤 치고 오르면 드디어 능선(이정표 : 희양산→ 1.0Km/ 시루봉← 2.2Km/ 은티마을↓ 3.2Km)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5분 만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난데없이 희양산성(曦陽山城)의 성벽(城壁)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오르려고 했던 ‘지름티재’에는 이런 성벽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선두를 선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섰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시루봉은 이곳에서 왼편 능선을 타야한다. 오른편으로 1Km쯤 떨어져 있는 희양산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똑 같은 코스를 왕복해야만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를 맞고야 말았다. 참고로 ‘희양산성’은 희양산의 능선 일대와 그 동남쪽 바로 아래 산사면(山斜面)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 성이 있으니 3면이 모두 석벽’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산성의 주된 방어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증거는 ‘929년 후백제 견훤(甄萱)이 그의 고향 가은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찾으면 되겠다. 아무튼 이곳이 과거 후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 이후부터는 능선을 탄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버겁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에 눈을 맞춰가며 걷기라도 할라치면 산행은 오히려 더 즐거워진다. ▼ 그렇게 12분쯤 더 진행하면 안부삼거리를 만난다. 그런데 이정표(구왕봉→ 1.5Km/ 시루봉↓ 3.0Km)의 희양산 방향이 텅 비어있다. 초행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딱 좋겠다. 어쩌면 봉암사의 영향력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봉암사는 1982년부터 수도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사찰은 물론 일대 임야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금단의 사원’ 전통의 시작 이었다. 매년 석가탄신일엔 산문을 열었으나 그것도 경내로 방문이 제한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상표지석까지 세워놓은 정상을 올라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행위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아무튼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지름티재를 거쳐 구왕봉으로 연결된다. 애초에 우리 일행이 마음에 두었던 코스이다. 지름티재를 거쳐서 이곳 희양산으로 오려고 했던 것이다. ‘지름티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풍과 봉암사를 연결하는 지름길이다. 지름길을 이용하면 조금 더 쉽게 정상으로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만 길을 잘 못 들어 엉뚱한 코스로 올라와 버렸다. ▼ 정상으로 향한다. 진달래꽃이 곱게 핀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암릉이 시작된다. 오른쪽으로 수백 길의 암벽(岩壁)이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암벽 위로 난 길이 생각보다는 널찍하기 때문이다. 배포가 크다는 걸 증명이라도 한답시고 일부러 벼랑까지 나가지만 않는다면야 문제될 일은 없다. 아무튼 이곳 희양산은 대간길에서도 가장 기(氣)가 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간상 위치가 신체의 단전(丹田)에 해당하는 데다 봉우리 전체가 에너지가 충만한 바위산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란다. ▼ 멀리 칠보산과 보배산, 낙가산으로 짐작되는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구왕봉(九王峰, 898m)은 바로 코앞이다. 무협영화 같으면 단 한 번에 건너뛰어도 될 만큼 가깝다. 우람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구왕봉은 험상궂기 짝이 없다. 대신에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골산(骨山)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것이다. 구왕봉은 지증대사가 절을 세울 때 연못에 살던 아홉 용(龍)들이 이 봉우리로 쫓겨 왔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 ‘야호!’라고 외쳐보고도 싶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요 아래에 한국 선맥(禪脈)의 산실이라는 봉암사(鳳巖寺)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방이나 토굴에서 화두를 잡고 깨달음에 몰두하고 있을 스님들의 청정을 어찌 깨뜨릴 수 있겠는가. 문득 언젠가 귓가로 흘려들었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어느 산에서든 정숙은 에티켓(etiquette)이지만 특히 희양산에서 만큼은 <음소거(音消去) 모드>를 유지해야 한다.’던... ▼ 능선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상큼한 솔향과 함께 백두대간의 준령들이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봉암용곡(鳳巖龍谷) 너머로 대야산과 속리산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악희봉과 민주지산이 옅게 낀 박무(薄霧) 속에서 아득하기만 하다. ▼ 서너 평쯤 됨직한 정상은 의외의 풍경을 보여준다. 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걸어온 근육질의 암릉을 생각해볼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정상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자연석의 앞뒷면에 한글과 한자로 ‘백두대간 희양산’이라고 새겨 넣었다. 이 년 전(2015년)쯤 희양산의 정상석을 교체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당시 기사는 희양산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초라한 기존의 표지석을 봉암사와 협의해서 높이 1.5m, 폭 0.8m의 큰 표지석으로 교체했다고 했다. 글씨를 봉암사의 원근스님이 썼다고 첨언했음은 물론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정상까지는 1시간 45분이 걸렸다. ▼ 그러나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으스스한 바위벼랑이다. 그것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천인단애(千?斷崖)이다. 희양산은 햇빛 희(曦)에 볕 양(陽)자를 쓴다. 햇빛이 비치고 볕이 드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 산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이 산은 유독 더하다 할 것이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산 전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어서 햇빛에 반사되는 하얀 암봉이 더 크고 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거고 말이다. ▼ 정상 주변도 역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히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연상시킬 지경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옛날 사람들이 이곳 희양산을 일러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더니 이런 경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럼 지증대사가 느꼈다는 감정도 한번 끄집어 내보자.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 처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 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였다.’ ▼ 정상에서의 조망 또한 화려하다. 백화산을 거쳐 황학산으로 이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마룻금이 가없이 우람하고 그 오른편에서는 성주산과 뇌정산 등이 나도 있다며 손짓한다. ▼ ‘성터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성터를 따라 반대편 능선을 탄다. 계속해서 백두대간의 마룻금을 따른다는 얘기이다. 산길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심하게 가파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수월하게 오르내릴 만큼 만만치도 않다. ▼ 성터에서 35분 조금 넘게 걸었을까 구릉(丘陵)처럼 평평한 안부에서 사거리(이정표 : 시루봉↑ 0.9Km/ 이만봉↗ 2.0Km/ 은티마을← 2.4Km/ 구왕봉↓ 2.8Km)를 만난다. 시루봉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백두대간과는 헤어져야 한다. 백두대간의 마룻금에서 약간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 시루봉으로 향한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시루봉을 오르려면 어느 정도 경사가 져야하겠건만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린 지금 ‘배너미평전’을 걷고 있는 모양이다. 배(舟)가 넘나들었다는 설화(說話)가 전해지는 구릉(丘陵) 말이다. 아무튼 8분쯤 후에는 ‘T’자형 삼거리(이정표 : 시루봉← 0.3Km/ 이만봉→ 2.3Km/ 구왕봉↓ 3.6Km)를 만난다. 시루봉은 왼편 방향이다. 하지만 하산지점인 분지리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 즉 이만봉 방향으로 한참을 더 가야만 한다. 다시 말해 시루봉 정상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경사(傾斜)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로 가팔라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오르기 딱 좋을 만큼 경사가 주어진다. 잠시 후 ‘진촌리 갈림길’(이정표 : 시루봉↑ 0.2Km/ 진촌리→ 2Km/ 이만봉↓ 2.5Km)을 만났다 싶으면 곧이어 한두 평 넓이의 비좁은 공터로 이루어진 시루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은 충청북도 특유의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문경 301, 2003재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고로 시루봉은 이 봉우리를 멀리서 볼 때 마치 시루를 엎어 놓은 것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희양산에서 이곳 시루봉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 시루봉은 백두대간 줄기의 이만봉과 희양산 사이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 마룻금에서는 약간 비켜나있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인지라 산세(山勢) 또한 보잘 것이 없다.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조망만은 끝내준다. 조령산과 주흘산 등 주변의 산군들이 막힘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뒤쪽에는 구왕봉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 ‘T’자형 삼거리로 되돌아와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이만봉 방향이다. 경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산길을 따라 6분쯤 걸었을까 ‘분지저수지 갈림길’(이정표 : 이만봉↑ 1.8Km/ 분지저수지← 2.6Km/ 시루봉↓ 1.4Km)이 나온다. 이곳에서 분지저수지로 내려가더라도 하산지점인 연풍별당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 이만봉으로 향한다. 아까와는 달리 경사가 제법 심해졌다. 거기다 바닥이 온통 너덜로 이루어져 있다. 속도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산길이 능선을 고집하지 않고 사면(斜面)을 따른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면 삼거리(이정표 : 이만봉← 1.4Km/ 구왕봉→ 4.7Km/ 시루봉↓ 1.8Km)가 나타난다. 아까 헤어졌던 백두대간 마룻금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 이후부터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평탄해서 속도를 내기에는 좋지만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산길이다. 아니 길가의 진달래들이 무리지어 피어났으니 이것도 볼거리라면 볼거리일 수도 있겠다. ▼ 그렇게 5분쯤 더 걸으면 ‘독막 갈림길’을 만난다. 하산을 하려고 하는 지점인데 이정표(이만봉 0.8Km/ 도막 2.3Km/ 시루봉 1.7Km) 외에도 국가지점번호표지판(라바46605879, 이만봉 7지점)이 세워져 있으니 길을 못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코스는 최악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한다. ▼ 하산을 시작한다. 바윗길이 뒤섞인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안전시설도 일절 설치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다음에는 급경사 너덜지대가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몸에 중심을 잡아가며 조심조심 내려서다보면 자신도 몰래 짜증이 나게 되고, 끝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육두문자(肉頭文字)까지 쏟아져 나온다. ▼ 그렇다고 모두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중세 기사들이 쓰고 다니던 투구를 닮은 귀한 볼거리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덕분에 아직까지 저런 볼거리가 남아있지 않았겠는가. ▼ 하산을 시작한지 30분쯤 되면 낙엽송(일본이깔나무) 숲이 나타난다. 집사람의 표정이 밝아지는 순간이다. 조림지(造林地)이니 이제 거의 바닥에 다 내려섰을 거라며 말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거친 산길은 이후로도 20분 가까이나 계속되기 때문이다. ▼ 마을로 내려서기 전 물소리가 들려온다. 계곡에 내려서니 돌 틈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나뭇가지 사이를 나는 새들 울음소리도 청량하다. 오지(奧地)의 산은 생명력으로 충만하기만 했다. ▼ 산행날머리는 연풍별당(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203-1)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은 후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장독대가 줄지어 늘어서있는 ‘연풍별당’이라는 펜션을 지나면 군도(郡道)인 중앙로가 나오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공터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하지만 산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 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5시간쯤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