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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등산 정보 스크랩 혜화동에서 올라간 낙산 공원의 봄
황종원(중앙대) 추천 0 조회 216 11.04.28 1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 시내 복판에서 하늘에 손 닿는 곳이 있을 줄이야. 낙산 공원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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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보기

 

 

 

서울내기에게 서울은 추억이며 고향이며 그리움이다.
충무로, 을지로와 서대문에는 소년의 추억. 청계천과 종로-세검정에는 사랑이 머물다 갔다. 흑석동 노량진에는 학창 시절이 꿈이 피었다가 시든다. 삼각지와 해방촌에서 내 젊은 날이 제복의 날들을 보낸다. 잠실과 둔촌동, 명일동에서 나의 아이들이 자라고 우리의 불행과 행복이 울음과 웃음 속에 저물었다. 명일동 시절에 나는 장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동숭동에 해마다 왔다.
늙으신 어머님은 늙은 아줌마 한 분이 치성을 드려 주는 동숭동 고갯길을 올라 가신다.
나는 아내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고갯길 작은 집까지 갔다.
세상사는 내 하기 나름이라는 신조를 나를 가지고 있으나 세상사는 치성드리기 나름이라는 어머님의 의견은 존줄 받을 믿음이었다.
두 여인이 치성을 드리는 동안 나는 동숭동을 서성인다.
좁은 길에 차를 세웠기에 나는 차 주위에서 빙빙 돈다.
눈을 치켜뜨면 언덕이 보이고 성곽이 보였다. 언덕 아래서 보는 언덕의 시야는 좁았다. 한 뼘 만큼 성곽은 남정네 머리통 같은 모습을 조금 보였다.
조금 더 올라 가고 싶었다.
나에게는 조금 더 만큼 언덕 위에 오르지 못하고 언제 어머님과 아내가 나올 줄 몰라서 서 있다.
그 뒤 여러 해 꽃이 피고 꽃이 졌다.
어머님께서 떠나시고, 함께 늙어 가던 치성집댁도 떠나가셨다.

동숭동 어귀.
낙산공원 팻말 앞에 서있다.
길 따라 갈 적 어머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걷는다.

 

 

 

 마로니에 공원 옆 표지판. 500미터에 낙산 공원.

 

 이 길 따라 한 때 나는 아내와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해마다 다녔다.

 

 벽화 골목의 입구에 벽화

 

 낙산 공원 입구에 들어 선다.

 

 어디가나 담배는 금물이다.

 

 예전 성곽 모습은 사진으로 남는다.

 

 낙산공원에 공연장이 있다. 젊은 이들이 노래한다.

 

 연주를 듣고서 여기 외국인들이 박수를 치고 떠난다.

 낙산 전시관에 뭐가 있을지.

 

 낙산 공원의 역사와 건설 과정. 기록은 아주 중요한 우리의 기억이며 추억의 부활이다.

 

 

 

 

 

 전시관을 나오니 갈림길이다. 나는 광장길을 택한다.

 

 나뭇길을 올라야 광장...

 

 광장에 들어섰다.

 

 바로 옆에 성곽에 다가 가니 서울은 파노라마 속에 펼쳐진다.

시야를 막는 아파트는 눈엣 가시.

 

 어디나 산을 막는 아파트.

 

 여기 저기 둘러 본다.

 

 나무 사이 서울대병원 방향으로 시선 고정.

 

 올라 왔던 나무 계단 쪽이나 동숭동 방향.

 

 

 

 사진 동호인들이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성곽을 사냥한다.

 

 다른 시각으로 본 광장.

 

 광장 입구에는 마을 버스가 선다.

 

 입구를 벗어나 시내를 본다.

 

 여긴 봄꽃이 활짝.

 

 성곽 너머 아득하게 남산 타워.

 

 다시 돌아서서 낙산 공원으로 가니 보이는 팔각정.

 

 팔각정 가는 길로 접어든다.

 

 바로 입구...

여기서 낙산공원의 위치도.

낙산공원은 혜화동에서 올라가면 500미터.

동대문에서는 1.2 키로 미터.

아래 인용글은 낙산 공원 홈피에서 자료를 펌함.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2-10번지 일원
중부푸른도시사업소
Tel : 02)743-7985~6

 

 
공원개요


 낙산은 서울의 형국을 구성하던 내사산(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이렇게 소중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낙산은 일제의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부분 파괴 · 소실되었고 특히 60년대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인해 아파트와 주택이 낙산을 잠식한 채 오랜 시간 방치되어 역사적 유물로서의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낙산을 근린공원으로 지정하고 주변의 녹지축과의 연결을 도모하면서 낙산의 모습과 역사성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면적


 총 201,779㎥

 

개원
 2002. 6. 12

 

주요시설


 기반시설 : 관리도로 2,920m, 산책로 1,010m, 주차장 640㎡
교양시설 : 역사탐방로 935m, 비우당 27㎡, 홍덕이밭 50㎡
건축시설 : 5동(전시및관리실, 매점및화장실, 비우당, 육각정자, 노인정)
운동시설 : 배드민턴장 12면, 농구장 1면
편익시설 : 파고라 5종, 의자 117개, 음수대(6), 화장실2
광 장 : 5개소(중앙광장, 놀이광장, 전망광장 3개소)
기타시설 : 안내판 등 29개

주요식물
 수목식재 : 소나무 등 47종 107,603주
지피식물 : 구절초 등 11종 43,075본


역사/문화유적
 
내용

 

동대문(東大門)
 
한양도성의 정동(正東)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명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태조 5년(1396)에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고, 단종 원년 (1453)에 중수. 조선후기 다포계건물(多包系建物)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고 있고 남대문과 함께 현재 서울의 중요한 랜드마크의 역할

 

성곽
 
낙산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과 함께 서울의 내사산의 하나로서 서울성곽은 이러한 내사산에 축조된 석성으로 일종의 내성이다. 사적 제 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총길이 약 17km로 대상지에는 2,160m 정도(동숭지구 1,051m / 삼선지구 1,109m)가 해당

 

홍숫골
 
창신 2동 입구에서 약 300m 정도 들어간 지점으로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만 싸여 있다 해서 홍숫골이라 불리워짐. 암벽에는 홍수동이란 세글자가 새겨져 있음.

 

오형제우물터
 
홍숫골 막바지 낙산 정상 2/3 지점에는 우물이 다섯 개 나란히 있었으므로 오형제 우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짐


문헌속의낙산


 

도성도


 한경지략, 춘성유기(春城遊記), 지봉유설(芝峰類說), 동국여지비고 등에서 낙산의 경관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한경지략의 산천 조에는 낙산의 평평하고 비스듬히 잇닿은 봉우리의 형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낙산 밑에 형성되어 있던 경관을 동촌(東村) 이라고 기록하고 있음.
득공의 춘성유기(春城遊記) 에서는 지금의 당주동에 있던 태상사(太常寺) 에서 바라본 낙산의 모습을 '흰 모래와 소나무들이 맑고 아름다워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어 과거 낙산일대에 소나무의 자생지가 있었음을 알수 있음.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에서는 낙산 일대의 옛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 언급. 그 밖에 중종때 시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 ~ 1583) 은 동산인가시(東山人家詩) 에서 낙산의 뛰어난 경관을 묘사하고 있으며, 오산설림(五山說林) 용재총화와 어우야담에서는 풍수지리에 의한 한양에서의 낙산의 지리적 입지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또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 ~ 1791)은 쌍계동 바위에 낙산의 경관을 상징하는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전해지는 한편, 백림정(栢林亭) 쌍계동의 협간정 (夾澗亭), 일옹정(一翁亭) 등 많은 정자가 들어섰고, 수석과 물이 깨끗하고 송림이 무성하여 왕족.문인.가인이 즐겨 찾았다고 함.
 

자주동샘(紫芝洞泉)
 
낙산 줄기에 위치.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서 귀양살이 할 때 단종 왕비가 불가에 입문, 청룡사에서 불도를 닦으며 사중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댕기, 저고리깃, 고름끝동에 자주물을 드려서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고 하였으므로 이 바위를 『자주바위』라하고, 바위 밑에 있는 샘물은 『자주우물』이라 하며, 마을이름도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림

 

지봉선생옛집터(庇雨堂)
 
지봉 이수광이 청백리인 그의 외주부 유관의 집을 손질하여, 겨우 비를 가릴수 있는 집이라 하여 집 이름을 '庇雨堂'이라하고, 이집에서 [지봉유설]을 저술

 

이화장
 
낙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 이화동에 있던 이화장은 기념물 제 6호로서 이화동 5,500㎡의 대지에 건립되었으며 "ㄷ"자형의 한옥과 조각정(組閣亭) 등 부속건물로 이루어짐

 

북평관터
 
현재 이대부속병원 맞은 편에 있으며 조선시대 여진족의 사신을 접대하였던 곳으로 조선초기에 있었으나 중기에는 없어졌고 현재는 기념비만 설치되어 있음.

 

동학당터
 
이대부속병원자리로 조선 초에 설치된 5부 학당 가운데 하나인 동부학당이 있던 곳이다. 세종 17년(1435) 8월에 동부학당에 대한 보수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독립학사가 마련되었는데 세종 20년(1438)에 야인(여진)들의 유숙수인 북평관이 되었고 그 대신 당시 동부 창선방에 있던 유우소(乳牛所)를 동부학당의 건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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