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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비유
눅 15:11-19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11-19 / [잃었던 아들의 비유]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12)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제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지금 나누어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후에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가지고 먼 지방으로 떠났다. 거기서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면서 돈을 허비해 버렸다. 14) 돈은 이미 다 떨어진데다 그 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 그는 끼니조차 이을 길이 없었다. 15) 할 수 없이 그는 한 농부를 찾아가서 애원하다시피 하여 돼지를 치게 되었다. 16)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넉넉히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일꾼들까지도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여기서 나는 굶어 죽겠구나! 18) 아버지께로 돌아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 봐야겠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그러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저를 일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세 번째 비유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를 찾기 위해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11) 흔히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어지는 이 비유는 앞선 두 비유(양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를 포괄적으로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그 의미를 완성하고 있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그 영적인 깊이를 더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누가복음의 전체 중심 주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잃은 양은 제도권 밖으로 나간 세리와 죄인들을 비유한다면, 드라크마는 제도 안에 잃어버린 영혼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말하고 있음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둘째 아들은 잃은 양으로, 집에 머문 큰 아들은 드라크마의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분깃을 달라합니다. 여기서의 분깃은 정확히 말하자면 유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관습에 의하면 유산은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이루어지며, 율법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다른 아들보다 두 배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은 그 유산의 1/3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 21:17). 하지만 이것은 유산 분배에 관한 규정이기에 이 둘째 아들의 요구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대로 재산을 나누어 둘째 아들의 몫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3-16) 자신의 몫의 유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갑니다. 이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때 다시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날 때 자유가 아닌 방종이며 방탕의 길에 들어서 육체적 쾌락에 빠져간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둘째 아들은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맙니다. 그 결과 ‘쥐엄 열매도 주는 자가 없는’ 모두에게 무시를 당하는 버려진 인생 즉, 맨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돌이켜(17-19)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라는 의미로 정신을 제대로 차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들의 존재가 아닌 품꾼으로 여기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반성이며 회개이고,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적 용 : 죄라는 것은 결핍된 상태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를 떠났을 때와 돌아왔을 때의 기쁨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존 러스킨> 못난 탕자가 아버지의 엄청난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위치와 목표를 기억하여 스스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면 자신의 인생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더 멀어집니다. 때론, 목표가 흔들려도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길이 열리듯이 하나님이 지으신 자신을 기억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기다리시는 아버지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웠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불안함으로 마음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골길을 가다가 어떤 농부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은 유난히 평화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농부에게 다가가서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평안하고, 기쁨으로 살 수 있는지’, ‘그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때 농부는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마음에 늘 기쁨이 넘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날부터 톨스토이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드디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사는 길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이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그저 하나님을 위해 ‘일’만 하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일하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신 예수님
문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도, 수많은 종교도 하나님을 우리에게 올바르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당신 자신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가 쉬운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에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곧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알려 주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무엇보다 먼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만나야 할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입니다. 같이 해 볼까요? “하나님 아버지”,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가르쳐줍니다. 구약에는 15번, 신약에는 414번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사복음서에만 274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170번이나 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그분,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2003년에 아버지 학교를 경험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강하게 와 닿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은 '좋은 아빠'가 아니라 '내 아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들 역시 '좋은 남편',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내 남편’이 되기를 바라지요. 밖에서는 너무 좋은 분인데, 가정에서는 아닌 남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늘 하는 이야기는 ‘남편은 남의 편이예요’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내 아버지’로 만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신 부분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는 세 번째 비유,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를 통해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배우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주님이 어떤 배경에서 이 비유를 들려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 본문 1-2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나아오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들이 수군거렸을까요? 아마 그들은 ‘아니 예수님은 저 사람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인 줄 모르나?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식사를 하지?, 거룩하신 하나님은 저런 죄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거야!’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에 대한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그들의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내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라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에게”라는 말은 비유라는 것입니다. 실제의 사건, 실제 인물이 아니라 비유로 주님은 하늘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주님은 하늘 아버지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 하늘 아버지를 제대로 보여 주실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아버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는 아마 아브라함을 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모세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주는 아버지였다면, ‘모세의 가정을 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버지들 중에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들려주고 싶었을까요?
허락하시는 아버지
본문에 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법에는 두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의 재산 중에 2/3는 큰 아들에게, 그리고 1/3은 둘째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그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요구입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시는데, 유산을 물려달라는 것은 아버지보고 빨리 죽으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세상 아버지라면, 그냥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못된 이 아들을 혼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그냥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하늘 아버지’는 허락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보겠습니다. “허락하시는 아버지”. 아버지가 아들의 요구를 허락했다는 것은, 인격적인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우리 인간들에게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유도 함께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강요하시거나 강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허락하시는 하나님’,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영적인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은 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혼문제가 그와 같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 시대 때에 이혼증서를 써서 주고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자들이 함부로 여자들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혼증서를 반드시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나라에 왕을 세우는 때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게 하나님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무엘을 찾아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후6:14)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 불신자와의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자매들은 여러 가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붙여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저 불쌍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잖아요?’ 어떤 자매는 아예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까지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물론 그리고 난 다음에, 많은 고생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습니다. 믿어도 좋습니다.’ 베드로 이렇게 말할 때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그냥 두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은 베드로가 그 실패를 통해 다시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 베드로에게 그의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시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기대대로 실패한 이후에 베드로는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늘 아버지는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분, 사랑으로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락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그런 인격적 부분을 품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하나님’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렸습니다. 더군다나 그 땅에는 흉년도 들었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겨우 어떤 사람에게 붙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이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조차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주 처량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를 떠나면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서야 둘째아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무엇이 이 둘째아들을 아버지에게 돌아오게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가 만난 흉년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둘째 아들은, 풍요를 꿈꾸면서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었든 것은 풍요가 아니라 흉년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잔소리도, 간섭도 없는 화려한 자유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흉년을 만나 돼지를 치는 노예의 자리로 전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는 뼈저린 추위와 외로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문학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만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는 순간, 사실, 모든 것을 버린다’ 참 유명한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자유를 떠나는 것이고, 아버지의 사랑을 떠나는 것이요, 그리고 자신의 모든 가치마저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아들이 만난 흉년, 인생의 흉년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인생의 흉년을 경험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흉년이 둘째 아들에게는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아들은 인생의 흉년을 당하자,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 본문 17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기를 보면, 그는 인생의 흉년을 만나자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비로소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얼마나 많은가, 거긴 종들까지도 풍족하게 먹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고 있구나’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을 ‘He came to himself’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이런 결론 앞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그래 나는 아버지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어,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려도 아버지를 잃어서는 안돼’ 여러분, 이 둘째 아들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 돈은 잃을 수 있어도, 심지어 건강을 잃을 수 있어도, 결코 우리 인생에서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 한번은 C.S 루이스 교수가 옥스퍼드 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학생이 그를 붙들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교수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이다지도 많습니까?” 루이스는 그 학생을 행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세상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이렇게 오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말이야,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 하나님의 메가폰이야’
그렇습니다. 이 둘째 아들에게는 인생의 흉년을 만나고 비로소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 아버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흉년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인생의 흉년을 만나게 되거든, 여러분들은 그 흉년 속에서도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자 20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기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여기 ‘아직도 거리가 먼데’라는 말은, 단순히 문자적인 거리일 뿐만이 아니라, 이 둘째 아들이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을 심리적인 거리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적인 거리, ‘글쎄, 아버지가 정말 나를 받아주실까? 내가 얼마나 개판치고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정말 하나님을 비웃고 살았는데...’
그의 이런 심정을 잘 말해주는 것이 18절, 19절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가슴에 품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심리적인 거리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에 보면,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말합니다. 누가 누구를 보았다는 말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습니다. 누가 먼저 발견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로 달려갔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여기에 보면, 집나간 둘째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측은히 여겨서 그에게로 ‘먼저’ 달려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가 그런 분이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비의 마음, 용서의 마음’은 아들의 ‘회개하는 마음’보다 더 빨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하늘 아버지의 용서는 회개하는 우리 인간들의 발걸음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스폴츠라는 설교가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간신히 한걸음 한걸음을 무겁게 내 디디고 있었을 때, 기다리는 아버지는 열 걸음으로 달려왔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그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린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을 기다리십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 가져오라’고 하였고, 새 옷,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는 언약의 반지를 끼워준 것입니다.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세상의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마 아버지는 둘째아들이 돌아왔을 때, 물론 기다리고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는 일부러 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도 안하고 ‘에헴’하고 앉아 있을 것입니다. 아들이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면, 그때 아버지는 ‘네 이놈,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냐?’라고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아니면, 몽둥이를 들고 다시 내쫓아갈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미리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미리 용서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그의 아들 예수님이 보내시고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 인간들을 미리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를 그분이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저주 대신 받으시고, ‘너의 죄는 다 해결되었다. 돌아오기만 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허락하시는 분이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보고 수군거리고 정죄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허락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란 한 아버지, 하늘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은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것, 말하자면 ‘아버지’가 있는 교회, 가족과 같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알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하나님을 떠나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또 혹시 인생의 흉년을 만나 고통당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분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마음
본문은 주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깁니다. 사실 본문은 누가복음 15장 마지막 절까지 이어집니다. 또한 본문은 가장 아름답고 극적이며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우리는 탕자를 주인공으로 봅니다만, 실은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비유의 초점은 집 나간 둘째 아들보다는 오히려 그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준 아버지의 마음에 맞춰져 있습니다.
■ 렘브란트가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자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돌아온 탕자>도 제목은 그렇지만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탕자는 거지 행색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 있고, 아버지는 한없이 따뜻하고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얼굴로 아들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신비한 감동에 젖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두고 <렘브란트 자신의 영혼의 초상>이라 부릅니다. 남루한 자신의 영혼을 당신 품에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합니다. 유대 사회는 우리 사회와 비슷합니다. 모든 게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좌우되는데 재산 분배만큼은 그 사회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야 했습니다. 아들이 둘인 경우엔 맏아들에게는 2/3, 차남에게는 1/3을 상속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도 그 규례에 근거해 자기 몫을 주장한 것입니다. 다만 상속 시점은 통상 아들이 결혼해 분가할 때부터 이뤄졌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결혼 적령기는 18-28세였으니 본문의 둘째 아들은 많아도 20세 미만입니다. 아들의 요구를 아버지는 받아들입니다. 아들은 곧 재산을 정리해 집을 떠납니다.
본문에는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을 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귀소본능도 있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해 멀리 달아나고 싶은 도피본능도 있습니다. 추석 명절에 우리가 귀향하는 것은 귀소본능의 발동입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종교성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있지만, 본능적으로 아버지 집을 향한 향수에 시달리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처럼 성경이라는 가이드북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우상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 아버지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 자기가 주인이 되어 인생을 즐기고 싶은 본능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담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을 피해 숨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언가 가졌다고 생각하면 아버지로부터 달아나려고 합니다. 돈, 지식, 건강, 권력 등을 가졌다는 사람일수록 자꾸만 아버지의 권위, 말씀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합니다. 그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 없는 행복, 먼 나라에서의 행복을 약속하는 마귀의 미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 품을 떠나면 성경이 말씀하는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본문도 집 떠난 둘째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했다고 합니다. 자기 멋대로 신나게 살았습니다. 더는 삶의 규범이나 통제가 없는데 못할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방탕한 삶의 극치를 달린 겁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적나라한 현주소를 보여준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면 그 순간부터 그 영혼과 인생은 마귀가 접수합니다. 갖은 올가미를 씌워 그의 모든 것을 강도질합니다. 악한 곳은 어디든 끌고 다니며 그의 인생을 유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갑니다.
둘째 아들도 순식간에 돈을 탕진한 그는 먼 나라에서의 향락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에는 끔찍한 흉년도 들었습니다. 농경사회의 흉년에는 민심이 고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문전걸식하던 그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를 쳐야하는 알바로 전락합니다. 그는 돼지우리 안에서 돼지들과 함께 지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끼니를 제대로 때울 수 없어 돼지들이 먹는 쥐염 열매를 먹으려 해도 그것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의 종국입니다.
거기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을 생각하는 회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탈무드에 쥐염 열매를 먹어야 회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 회개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을 품군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간청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로 아버지 집을 등지고 아버지를 떠나지만, 아버지는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마귀는 나를 끌고 다니며 유린한 후 돼지우리에 던지지만, 주님은 여전히 나를 좇고 계시고 어둡고 냄새나는 음습한 돼지우리까지 찾아오셔서 성령으로써 회개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게 하시고, 귀향을 결단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것은 성령께서 주신 회개의 결단입니다.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 회한이 아닙니다. 회개는 귀환, 귀향입니다. 만일 본문의 탕자가 먼 나라 돼지우리에 앉아서 후회만 하며 돌아갈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귀향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가룟유다도 후회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대신 거기서 목을 매고 맙니다. 그는 반성은 했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다시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회개합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같은 잘못을 반복합니다.
본문의 탕자는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결단합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귀향길에 나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전에 아버지 집에 전보를 친 것도 아닌데, 집 앞에서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문밖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아들의 방탕한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아들에게 입을 맞춥니다. 원어에 보면 아버지가 쉴새 없이 아들에게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아들은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절)라고 합니다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그저 즐겁고 기쁠 뿐입니다.
아버지의 환대는 놀랍습니다. 목욕은 물론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깁니다. 아들의 지위를 복권시킨 겁니다. 이것은 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종이 되겠다고 귀향했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소중한 당신의 아들로 받아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여 우리가 잔치하자고 합니다. 그동안 객지에서 돼지 사료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버지 집에서 넉넉하고 풍성하며 아름다운 삶을 보장 받게 된 것입니다. 24절은 아버지의 심경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아버지의 기쁨과 감격입니다. 이것이 돌아온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이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회개하여 아버지 품에 안길 때 아버지가 느끼는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도 보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명절 때 고향에 가면 부모님은 좋아하십니다. 평소에는 늘 걱정과 근심만 끼치는 자식이라도 부모는 그저 자식이 찾아온 것으로 기쁩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도 깊이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