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76
4월30일[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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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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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wQTjB1f99g
전진 세례자요한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9739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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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은 착한 목자이지만, 잠깐 방심하면, 도둑이요 강도, 삯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시골에 살다 보니 비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실감합니다. 오늘 하루 온종일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비가 오길래, 웬 떡이냐 하며, 이런저런 모종을 심었습니다.
전문가 농부들이 보시면 배를 잡고 웃으실 모종 작업입니다. 멀리 텃밭에 심었더니 자주 안 가게 되고, 엄청난 잡초 때문에 엄두도 안 나길래, 올봄에는 찌그러진 솥단지며, 금이 간 물통, 다 쓴 간장통 등 폐품에다 흙을 담아 모종을 심었습니다. 작업을 다 끝내고 나니, 그럴듯했습니다.
모종 작업도 만만치 않습니다. 좋은 흙을 퍼오고, 퇴비도 좀 섞고, 잘 배합한 다음, 모종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뤄 땅에 꽂고, 흙을 다져준 다음, 뿌리가 잘 내리도록 물을 듬뿍 주었발생합니 모종 작업을 하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하셨겠지.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조심조심 다루시고, 애지중지하시고, 잘 자리 잡고 성장하도록 갖은 정성을 기울이시고...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그저 백번 천번 감사드리며, 감지덕지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한 본당에 특강을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자상하신 주임 신부님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는데, 신부님 손이 보통 손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도 거칠고 투박하기로 만만치 않은데, 그 신부님 손은 여기저기 굳은 살이 박히고 상처도 많았습니다.
“아니, 신부님께서 무슨 공사판에서 중노동 하시는 분도 아닌데, 무슨 손이 이러시냐?”고 물었더니, 신부님께서, 거의 공사판 노동자처럼 살고 계신답니다. 웬만한 건물 보수나 기계 수리는 직접 다 하시다 보니 손이 그렇게 거칠다고 하셨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우리 안에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한 형제가 저희 피정 집을 찾아오셔서 며칠 머무시다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말씀, “세상 답답한 날들이었는데, 고속도로가 하나 뻥 뚫린 기분입니다.” 또 다른 자매님께서는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줄기 밝은 빛을 보고 갑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형제들, 하나같이 부족하고 나약하고, 한심하고 웃기는 존재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를 통해서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오늘은 착한 목자였지만, 잠깐 방심하면, 살짝 초심을 잃어버리면, 주님께서 보시고 슬퍼하실 도둑이요 강도, 삯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요한 것이 한결같으며 지속적인 겸손의 덕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육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영적 생활, 주님 계명에 따른 생활로 넘어가려는 노력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인 동시에 착한 목자를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성화와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이 땅의 모든 사제, 수도자들이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고 착한 목자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모든 평신도들 역시 보편 사제직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과 직장, 단체와 사회 안에서 주님을 꼭 빼닮은 너그럽고 착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 성소 주일을 맞아 사제와 수도자, 지도자들에게만 착한 목자로서의 삶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서 착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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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wz75uGMi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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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목소리는 필요할 때 들린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기도 하고 착한 목자 주일이며 그래서 성소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는 어쩌면 예수님의 양들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긍정하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리 선택입니다. 내가 선택해야 상과 벌이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군대 있을 때 운전병을 하였습니다. 군대 차들은 그렇게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고장으로 인한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래서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운전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엔진의 이상한 소리나 나사가 풀려 나는 소리 등을 무시하면 커다란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소리는 더 잘 들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크리스천이고 가장 큰 부자였지만, 나눌 줄을 몰랐습니다. 성경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고 나와 있지만 그는 고집쟁이였습니다.
그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서야 이 말씀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눌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병도 치유되었고 새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 목소리가 들리려면 내 목소리를 부정해야 합니다.
하와는 뱀의 목소리를 살려두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목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님께 청할 뿐이지 그분으로부터 이래라저래라하는 말씀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순종’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이승복 박사는 어렸을 때 미국에 이민해 와서 미국 대표 기계체조 선수가 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만 연습 도중 척추가 망가져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식물인간이 됩니다.
이때 어떤 선교사가 그렇게 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고 분명 이것을 통해 큰일을 하실 것이라는 말을 해줍니다. 다른 때 같아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이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음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부하여 의대에 가고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이 됩니다.
양은 멍청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앞도 제대로 안 보이고 냄새도 잘 못 맡습니다. 힘도 없어서 맹수들에게 이만큼 좋은 먹잇감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없으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서 알아듣는 것보다는 그러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알아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 한 말씀이 없으면 나의 영혼은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말씀을 해주시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말씀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지, 안 들어주시는 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방향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분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를 힘입니다.
어떤 병원장 사모님은 매우 돈도 많고 어릴 적부터 성공만 거듭하여 남부러운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점을 보러 다니고 비싼 집과 비싼 차, 그리고 비싼 옷을 즐겨 입으며 으쓱거리며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의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했고 그 당사자는 우리나라 준재벌이었으며 원상태로 고쳐놓지 않으면 이 병원을 망하게 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사모님은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의 목소리와 비슷한 무당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왔던 것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알았기 때문에 이제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고는 완전히 회개합니다. 병원이 잘 되건 안 되건 그건 상관없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에 보답하고 싶어서 본당에 가서 가장 비천한 봉사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일도 잘 풀렸습니다.
그분 목소리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 나를 믿지 맙시다. 그러면 나와 비슷한 목소리도 믿지 않게 되고 오로지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그분 목소리만이 귀하게 여겨지고 비로소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착한 목자에게 합당한 사람은 착한 양이 되는 신앙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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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부활 제4주일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지향을 따라 ‘성소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하느님께 일꾼을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일꾼을 하느님께 청하자고 하였습니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일삼는 백성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잘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의 가르침을 어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세리는 세상의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열혈당원 시몬도 부르셨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포기하고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복음서를 만들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을 전하는 책입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사라집니다. 셋째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에 연연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가까이 있을 때는 부정과 부패가 있었고, 타락하였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과부의 정성과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교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질 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은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두려워했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갔던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답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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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오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착한 목자로 나타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가졌던 목자로서 안정과 번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생활의 친교, 친근한 애정 등의 의미를 지닌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목자라는 개념은 그들의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드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목자라는 상징적 개념을 사용한다. 교회는 이 개념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시며, 그분이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수난 하시기 전에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드러내시는 절정의 순간이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우리에서 있는 일을 말씀하신다. 목자들은 한 양우리에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각자 자기 양들을 집어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래서 목자가 부르면 그들은 목자를 따라나서고, 다른 양들은 자기 주인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문지기 역시 목자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이 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가도록 한다.
그러나 도둑들은 딴 데로 몰래 들어가 양들을 훔친다. 잡히지 않은 양들은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5절). 이것은 참 목자와 도둑과 강도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스스로 목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둑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렇다면 누가 문으로 양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고, 양들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도둑이며 강도인가?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그들은 폭력으로 그리스도를 없애려 한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10절). 즉, 양 떼뿐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목자까지도 없애려 한다. 그래야 양 떼를 흩어지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마태 26,31).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모든 양 떼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10절)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만이 참되고 유일한 목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의 문”(7-9절)이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항상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초대를 따름으로써 진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도둑과는 달리 목자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시며, 또한 참된 목자가 베푸는 희생적 사랑의 봉사를 잘 보여주신다. 즉 예수께서는 참 목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태어날 무수한 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증명의 문이시다.
이것이 오늘 성소 주일의 의미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을 닮으려 준비된 많은 젊은이가 있다. 그러나 한편 주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실천해야 할 그 봉사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이상은 높지만 주저하는 그 마음에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참된 목자는 항상 그분뿐이시며 주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떳떳하게 당신을 드러낼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오늘, 모든 사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데, 참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참으로 봉사하는, 그리고 모든 교우의 영적인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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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목자의 비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여기서 ‘도둑’과 ‘강도’는 거짓 예언자, 가짜 메시아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자들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간다는 말씀은, 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은 전하지 않고 그릇된 이론이나 학설 같은 것만 말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사리사욕만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겉으로는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산을 등쳐먹으니 그자들은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그자들의 위선, 교만, 허영은 문이 아니라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목자가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은, 참된 목자는 하느님의 말씀만 전하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말씀과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참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한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가르치셨을 때의 일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음을 느끼고 몹시 놀랐습니다. <참된 목자의 음성이라고 느낀 것입니다.>
당시에 율법학자들은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사실상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이고, 그래서 그들의 말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거짓 예언자와 가짜 메시아를 잘 식별해야 하고, 그자들을 멀리 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 전의 재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마르 13,21-23)
요즘에도 거짓 예언자들과 가짜 메시아들에게 속는 사람들이 많고, 그자들을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습니다. 그자들에게 속아서 따라가는 일의 결과는 늘 고통과 불행입니다. 나중에 심판 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바로 겪는 일입니다. <혼자서만 고통과 불행을 겪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모두 고통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가짜 메시아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하고, 교회 교도권의 판단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7-10)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나는 문이다.”라는 말씀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메시아라는 것과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문이나 길이나 진리나 생명은 없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아닌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세속 사람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에도 해당됩니다. 그런 것들을 얻기를 원하고, 원하는 대로 얻는 것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고, 오히려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나타났었던 가짜 메시아들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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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목자에 관한 예수님의 담화는 오늘 복음에 앞서 소개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논쟁(9,40-41)에서 시작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눈먼 자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자기만족과 교만으로 그들은 죄인으로 단죄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머물러 있는 바리사이들에게 목자에 관한 이야기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목자에 관한 비유에서는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도둑과 강도’입니다. 그들은 양 우리로 들어갈 때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 양들을 훔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다른 부류는 ‘양들의 목자’입니다. 목자는 도둑이나 강도와는 달리 문으로 들어가서 양들의 이름을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양들은 그를 따릅니다. 이처럼 목자가 양들에게 가는 이유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비유에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양들의 문’으로 계시하십니다. 앞선 비유에서 ‘문’은 양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상징되었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문’으로 소개하십니다. 양들은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좋은 풀밭으로 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주시는 중개자이십니다. 여기서 도둑과 강도는 예수님과 대립하는 바리사이들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은 ‘양들의 목자’이자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을 조금 더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그분의 안내를 받을 수 있고, 그분을 통하여 풀밭으로 들어갈 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목자이신 예수님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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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전진 세례자요한 신부님]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속 왕자의 별에 어느
날, 알 수 없는 씨앗 하나가 날아와 꽃을 피웁니다. 왕자는 참 아름답고, 그만큼 예민한 한 송이 꽃을 뒤에 남겨두고 다른 벌로 여행을 떠납니다. 시간이 흘러 여러 행성을 거쳐 지구에 도착한 왕자는 한 정원에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나만의 꽃으로 알고 있었던 소행성의 유일한 그 꽃과 똑 닮은 꽃들이 무려 5천 송이가 넘게 피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같은 교복의 학생들이나, 동일한 군복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군인들 사이에서 남다름을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교복의 파도 속에서 딸의 뒷모습을 찾아내어 이름을 부르고, 훈련소의 파르스름한 까까머리 속에서도 아들의 이목구비를 구분해 내고야 맙니다. 볼개성의 무리를 뚫고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리주는 힘은 언제나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의 힘은 그야말로 대단해서 군중의 한 조각에 불과한 누군가를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 빛나게 합니다. 언뜻 보면 절대로 구별되지 않고, 무리로 몰려다니는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지팡이를 따르는 것 역시 목자가 양들을 단순히 양 떼라는 덩어리로 여기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볼러 기억하고 안아주기 때문입니다.(요한 10.3) 목자의 목소리 앞에서 양들은 더 이상 무리의 아무개가 아니라. 이름을 기억하고 아픔과 기쁨을 나누며 인격적인 역사를 함께 쌓아갈 수 있는, 대체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부르심을 뜻하는 '성소(聖召)'는 우리의 얼굴을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한 목소리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곁에 우리들이 영원히 머물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나아가 그 응답으로, 당신을 닮아 같은 길을 걷겠다고 결심하는 용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오늘날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귀로 당신의 음성을 듣고 입술로 응답하여 성소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목자의 부르심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깨달은 양들은 그 목소리에 응답을 시작합니다. 나를 만드시고 보기 좋아하셨던 태초의 미소를 생각하며 말씀으로 스스로를 채우고, 당신이 흐못해 할 복음의 씨앗을 세상에 정성들여 심게 됨니다. 그렇게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깨달은 착한 양들은 예수님을 닮은 참 목자의 삶으로 또 다른 양들을 찾아 나서게 될 것입니다. 도둑은 다만 흡치고 죽이고 멸망시킬 뿐이지만, 사랑의 부르심은 결코 마르지 않아 얻고 또 얻어 세상에 넘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0,10)
이제 어린 왕자는 왜 자신의 꽃이 정원의 장미와 다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목소리로 길들여져 서로에게 책임이 생긴 그 장미는 다른 무엇으로도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진정한 그만의 장미가 되었습니다. 성소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를 불러주신 목자의 사랑과, 기꺼이 그 목소리에 길들여지기를 택한 모든 착한 양들의 마음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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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종광 요한 사도 신부님]
<MZ 세대와 하느님 부르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부르셨듯이 이 시대에 우리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소자가 매년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올해 춘천교구의 대신학교 신입생이 한 명인데, 서울 대신학교를 포함한 6개 대신학교 신입생 수는 모두 100명이 채 되질 않습니다. 중도에 탈락하는 이들까지 예상해 본다면 사제 서품식이 없는 때가 곧 올 것입니다.
MZ 세대가 사용하는 언어 중에 '런(run)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도, 직장 생활을 하다가도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면 쉽게 그만두는 행동 양식을 표현합니다. 취업이 가장 큰 관심사이지만 몸이 힘든 것은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많은 청소년은 종교에 관하여 관심이 없으며,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미비하다고 생각한다는 연구 발표가 있었습 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곧 성소의 위기를 넘어서 교회의 위기가 바로 우리 앞에 와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것을 찾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이들에게 더 강하게 심어 주신 듯합니다. 멋진 것. 좋은 것을 알게 되거나 마주치게 되면 SNS를 이용하여 빠르면서도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합니다. 그리고 환경이나 인권 문제 등의 사회적 이슈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며 실제적인 행동을 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의 관심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 동체와 사회 안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로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17)
성소주일에 젊은 세대를 향한 질문보다도 이미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여 혼인성사와 성품성사를 받고 생활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그들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서도 젊은이들이 자신의 성소를 키워나가는 데 첫 번째로 도움을 받는 분은 본당의 사제일 것입니다. 그들과의 영적인 유대 관계가 형성된다면 그들의 삶은 성사와 기도로 자연스럽게 어질 것이며, 그들은 용기를 내어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추수할 일꾼을 더 많이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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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장승용 베드로 신부님]
<착한 목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면서 각자에게 고유한 소명을 주시고 그 소명에 따라 살도록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무엇을 위해 나를 창조하셨는지를 되돌아봅니다. 더 나아가 교회는 특별히 성소주일을 제정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부르심을 받는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의 성소를 위해 기도합니다.
많은 착한 목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며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많은 수도자들 역시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복음 삼덕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삶으로 증언합니다. 하지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처럼 하느님 백성을 위한 일꾼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주님께 성직자와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젊은이들을 많이 보내어 주시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미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참된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예수님이라는 문’으로 이끌어 주는 목자들이 진정 참된 일꾼들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양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수 있으며, 양들을 언제나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줍니다. 곧, 양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줍니다.
여기서 착한 목자가 예수님의 문으로 드나든다는 말은 1·2독서에서 사도행전과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듯이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며,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활을 체험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착한 목자로 사는 것입니다.
성소 주일을 맞아 목자로서 살아가는 이들, 수도자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좀 더 충실하도록 기도합시다.
아울러 성소는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노력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또 우리가 길러내는 것임을 잊지 말고 노력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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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님]
<훌륭한 성소의 못자리>
성소(聖召)라는 말은 풀이하면 ‘거룩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성소 주일인 오늘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각해 보고, 주님의 부르심에 다양한 방법으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특별히 일생을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제, 수도자들과 예비 성소자들을 위해 기억하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래전부터 제기돼 온 성소자 감소 문제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넓은 갯벌에서 조개잡이의 재미에 빠져 앞만 보고 가다 밀물은 갯고랑을 통해 빨리 들어오는데, 이를 눈치채지 못하면 밀물에 포위되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성소자 감소와 관련된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 이미 밀물이 들어와 있거나 빠른 속도로 들어오는데, 바로 앞에 밀물이 안 보인다고 마음을 놓고 있다가 밀물에 포위당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성소자 감소 문제의 원인으로는 종교와 신앙에 대한 무관심, 현실주의, 세속주의, 미사 참례율 감소, 냉담률 증가, 주일학교 인원의 감소, 저출산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폐쇄된 사회는 활력을 잃고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늘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부르심’을 찾으며 시선을 멀리 높게 두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제 성소 계발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비신학생과 신학생에게 성소 동반자 가운데 가장 영향이 큰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을 하면 대부분 성당에서는 ‘본당(보좌) 신부님’,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역할이 성소 계발에 절대적이라고 대답합니다.
가정 안에서 기도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부모로부터 성소에 대한 지지를 받는다면 가정은 훌륭한 성소의 못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예비 성소자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시대 이곳의 교회를 위하여 성령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일꾼도 보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께 겸손되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기도야말로 사제 성소 계발을 위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우리의 노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면서도 먼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총동원하여 장차 ‘하느님 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될 젊은이들을 찾아내고 키울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오 9,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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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박헌일 필립보 신부님]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
오늘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사제와 수도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소 주일입니다. 과거 비신자 한 분이 저에게 신부님과 목사님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같은 성직자로 이해될 수 있겠고, 그리스도교라는 신앙적 테두리에서는 비슷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제 독신’이라는 교회의 규정과 직업이 아닌 소명이라는 사제직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으로 부르심의 여부라고 말해 줬습니다.
시간이 흘러 작년 여름 주교님의 명을 받고 성소국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학사님들과 대화 중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사님들 중에 이태석 신부님 때문에 사제 성소의 길을 걷는 분들이 계신 것입니다. “울지마 톤즈”로 우리 교회 공동체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감동시킨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한때 이태석 신부님의 소속 수도회 성소자가 넘쳐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교구사제를 지망하는 학사님들 안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스타 같은 사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신부님도 계셨지만, “이태석 키즈” 현상은 의사 출신 재능있는 한 사제의 드라마 같은 소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친구이자 가족이 된 한 사제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이들이 주님 부르심에 응답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성소는 하느님 구원 사업의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신비입니다.
성소를 계발하고 양성하는 몫은 교회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당 안에서 성소의 꿈을 키우는 친구들에게 본당 신부님과 교우들의 사랑이 절실합니다. 성소를 꿈꾸는 친구들이 세상이 추구하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메리트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꾼으로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이태석 키즈”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친구들에게도 스타나 영웅 같은 신부님, 수녀님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고 기쁘게 자신을 봉헌하며 사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필요하지 않나 묵상해봅니다.
특별히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10,3)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양들과 더욱 친근하고 소통할 줄 아는 주님의 착한 목자를 많이 보내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의 양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 성소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수도 성소가 더 많아진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도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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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경청과 소통을 통해 드러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각자의 성소에 충실할 수 있는 은총을 기원합니다.
어린아이 이설아 첼리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빠지지 않고 미사참례를 합니다. 아주 귀엽고 이쁩니다. 제가 손을 내밀면 손도 잡아주고 인사도 잘합니다.
물론 수녀님 보좌신부님에게도 애틋합니다. 그런데 제가 늘 입던 수단을 입지 않고 일반 옷을 입은 채 손을 내밀었더니 멈칫하였습니다. 늘 같은 모습이 아니기에 선뜻 손을 주지 않았습니다.목소리와 모습이 다르니 혼동이 온 것입니다.
아이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관심과 진실한 사랑이 없이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더더욱 주님과의 소통이 긴밀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28) 고 하셨는데 진정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신 데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면 답답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해야 하고 그분의 행동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침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토마스커킹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3장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고요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아무리 얘기를 하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이른 새벽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살이에 바쁘고 지치고 힘이 들지만 그럴수록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는 길이 그분 마음에 드는 길인지 알게 되고, 살게 되며 마침내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음성을 따라가는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우리가 움켜쥐고 싶은 것이 있어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는 것이지 주님은 늘 사랑으로 속삭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루 잠시 잠깐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들으려 애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십시오. 사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먼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위로와 희망, 지혜, 문제의 답, 그리고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힘과 능력의 손길, 열매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삶의 여정에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폭넓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고 부자간에, 부부간에, 이웃 간에도 서로 통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도 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지켜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기회를 만들어 성체조배를 하면서 주님과의 속 깊은 만남을 이루시기 빕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직자, 수도자의 길에 나설 수 있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릇으로 쓰일 성직자, 수도자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종신서원을 하려면 지금 시작해도 앞으로 10년 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하면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자녀를 봉헌하고 손자, 손녀를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소의 동기는 아주 다양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도 부르심을 주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신부님들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밥상에 김이 올라가고 달걀이 놓여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시골 공소에서 지냈는데 어른들로부터 주일공소예절에 나오는 것으로 칭찬을 듣게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너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공소회장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어울리던 회장님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명은 수녀가 되었으며 하나는 결혼하여 자녀에게 성소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특별 성소의 꿈을 키워줄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와 칭찬과 권고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복사들을 미래의 신부님, 수녀님으로 부릅니다. 언젠가 그 소리가 마음을 흔들기를 희망하며.
결혼 성소도 좋고, 수도자, 성직자의 성소가 다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그중에 다양한 성소로 초대받습니다. 특별 성소인 성직자, 수도자의 부름도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각 가정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은총을 입기를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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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당에서 나와 마트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몇 개의 신호등이 있습니다. 이 신호등 때문에 약간의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차가 전혀 없는데도 신호를 한참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눈치 보며 건너가는 것입니다. 누가 하면 나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역시 급한 마음에 그분을 따라서 무단 횡단을 하려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경적이 울립니다. 진행 신호를 보고 멀리서부터 속도를 높여서 차 한 대가 달려온 것입니다. 진짜 위험했습니다. 몇 초 빨리 건너가려다가 정말 빨리 하느님 나라에 갈 뻔했습니다.
적색 신호등은 분명히 정지 신호입니다. 당연히 멈춰야 합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커다란 혼란이 다가옵니다. 문득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즉, 우리 삶 안에서도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옳지 못한 길일 때에는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눈치 보면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말이지요. 또 그 멈춤의 시간이 고통스럽다면서 그냥 앞으로만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적색 신호도 어느 순간에는 녹색 신호로 바뀝니다. 영원히 적색 신호만 있는 신호등이 없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으로 멈출 수밖에 없는 그 순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녹색 신호로 바뀌어서 다시 힘차게 나아가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래서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라는 멈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멈췄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부활이라는 녹색 신호로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지혜롭게 지금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양 우리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합니다. 하나는 양들의 목자이고,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도둑, 강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도둑’이라고 했고(요한 12,6), 예수님 대신 사면받은 바라빠는 ‘강도’라고 했으며(요한 18,40),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장사치들을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즉, 도둑, 강도는 모두 하느님 이름 밑에서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름 붙여 부르는 당시 양치기 생활의 관습이었지요. 그만큼 양들을 소중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을 받은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외면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우직하게 따라갑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들리면 산산이 흩어집니다. 우리는 과연 목자를 충실하게 따르는 양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혹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탐욕을 추구하는 도둑과 강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또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따를 수 있는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를 부르심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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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께서 늘 나보다 한걸음 앞에>
요한 10,1-10 (목자의 비유, 나는 착한 목자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님께서 늘 나보다 한걸음 앞에>
님께서 늘
나보다 한걸음 앞에
나의 길
곱게 하시려
님께서 늘
나보다 한걸음 앞에
나의 길
바르게 하시려
님께서 늘
나보다 한걸음 앞에
나의 길
부드럽게 하시려
님께서 늘
나보다 한걸음 앞에
나의 길
걸을 수 있게 하시려
님께서 늘
나보다 한걸음 앞에
나의 길
잃지 않게 하시려
님께서 늘
나보다 한걸음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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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어떤 성소자?>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성소 주일을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좋아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부르면 좋아하지 않거나 겁을 냅니다. 제가 부르면 늘 일을 시키기 때문이지요.
이런 생각 다음 누가 부르면 좋아할까도 생각해봤습니다. 깡패가 부르면 당연히 싫어하겠지만 예를 들어 애인이 부르는 것과 어머니가 부르는 것과, 주님이 부르는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이 좋아할까 말입니다.
지난주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 “공동생활”이 주제였는데 피정의 집 동산에 꽃이 만발했기에 다음과 같은 묵상 거리를 드렸습니다.
꽃을 보면 그 아름다움을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는가? 아무도 없는가?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인가? 같이 사는 자매인가? 밖에 사는 누구인가?
아무튼, 이때 떠오르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나 애인이 부르는 것보다, 주님이 부르는 것이 좋으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이겠지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왜 부르시고, 우리는 주님과 어떤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인가? 아니면 목자와 양의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주님께서 일을 시키려 부르실 것이고, 목자와 양의 관계라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려 부르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와 주님 관계가 그 어떤 것 하나인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주님과 우리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둘 다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지도 않고 일을 부려 먹는 분이 아니라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당신에게로 부르시고 당신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나만 부르지 않으시고 열두 사도를 같이 부르시고, 목자가 한 마리 양이 아니라 양 떼를 부르시듯 같이 부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찰케 됩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나는 혼자 가고 싶은가? 누구와 같이 가고 싶은가?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인가? 다른 누구인가?
부부라면 지금 주님께로 같이 가는 동반자인가? 아직도 서로를 향할 뿐 주님께 같이 가지 않는 관계인가? 자식들은 어떤가? 같이 주님을 향하는가? 서로를 향하는 관계인가?
수도자라면 나는 혼자 주님께 가도록 부르심 받은 독수자인가? 같이 주님께 가도록 함께 부르심 받은 공동체 수도자들인가?
다음으로 우리는 소명을 받드는 주님의 일꾼들이라는 것을 보겠습니다. 소명이라는 말 자체가 성소적인 표현입니다.
소명의 소자와 성소의 소자가 부르심이라는 같은 뜻이고, 명령을 받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요, 부르심을 받아 명령을 받드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의 종이요 일꾼들이고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설마 일꾼은 싫고 사랑만 받겠다는 얌체나 어린아이는 아니겠지요? 일을 시킬까 봐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을 살살 피하는 나는 아니겠지요?
이것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소자가 많기를 기도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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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 실현의 여정>
-착한 목자 예수님 닮기-
성소주일이면 떠오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다인 랍비 신비주의자 아브라함 여호수아 헷셀의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김춘수의 "꽃"이란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우리 모두가 하나하나 주님께 불림 받는 유일무이한 "파스카의 꽃"같은 귀한 존재입니다. 오늘은 4월의 마지막 날이자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입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이 참 시의적절했습니다. “은총이며 사명인 성소”라는 주제하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2)성구를 바탕으로 참 귀한 가르침을 주는 담화문 서두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늘 우리는 60번째 성소주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소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하여 제정되었습니다. 하느님 섭리의 이 계획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서, 오늘날 세상의 고통과 희망, 도전과 성과가운데 우리에게 저마다 주님께서 맡기신 부르심과 사명에 응답하도록 돕고자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교회의 친교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회 목자들의 인도 아래 수행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예외없이 성소 실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소가 실현되는 여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 얼마나 멋집니까! 어떻게? 답은 단 하나,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입니다.
참 역설적인 진리가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나의 성소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마침 어제 피정자들과 나눈 강의 주제와도 일치합니다. 강의 주제는 “참으로 멋진 그리스도인의 삶-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며 제 삶의 자리에서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소주일이자 착한목자 주일이기도 합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가 안심하고 드나들 수 있는 생명의 문, 진리의 문, 생명의 문이기도 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감동적인 복음 말씀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나는 문이다’ 얼마나 멋진 착한 목자 예수님의 신원인지요! 예수님께는 벽이 없이 온통 누구에게나 사면팔방 활짝 열린 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이라고 다 문이 아니라 생명의 문, 구원의 문, 진리의 문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제가 자주 예로 들었던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의 벽은 점차 넓은 생명의 문으로 사랑의 문, 지혜의 문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벽은 변하여 문이 되고, 부패인생은 발효인생이 되고, 태풍은 미풍이 되는 인생이 펼쳐진다고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착한 목자하니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생각납니다. 이제는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된 분이지만 추기경님에 관한 숱한 일화들은 언제 들어도 신선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하루를 마칠 때면 경당에서 기도를 바친후 그날 받은 편지에 대한 짧든 길든 꼭 친필의 답신을 써 보냈다는 일화입니다. 또 하나는 8백명이 넘는 교구 사제들의 영명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친히 축하전화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추기경님과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영적우정을 나눴던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일화도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추기경님이 선종전 6개월, 사경을 헤매실 정도로 병석에 누워 지내실 때라 합니다. 어느날 한 자매님이 수녀님을 방문하여 자초지종 남편에 대한 곤경에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며 살려 달라, 도와 달라 애걸복걸하더라는 것입니다.
모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4년 선고를 받고 2년동안 수감중이었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정신적으로 폐인이 될 위중한 상황인지라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의 아내가 수녀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수녀님도 딱한 사정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정말 염치불구하고 병석에 계신 추기경님께 탄원서를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자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빙그레 웃으시더니 말씀하셨답니다.
“그래, 그러면 수녀가 내 마음을 담아 한 번 탄원서를 써봐!”
추기경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 수녀님은 온갖 정성을 다해 탄원서를 썼고, 타이핑하여 드리니 추기경님은 정독하신후 간병인의 부축으로 힘겹게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친히 추기경 이름을 쓰고 싸인한 후 직인을 달라하여 또 떨리는 손으로 직인을 찍어 수녀님께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어 수녀님은 곧장 직접 법무부 장관에게 전달했고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극적으로 8.15일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출옥하게 되어 살아 났다는 일화이니 그 당사자에게 추기경님과 수녀님은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돌아가시면서 한목숨 살린 추기경님입니다.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또 사랑과 지혜가 넘쳤던 위대한 어른 김수환 추기경이었는지요!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고, 선생은 많은데 스승이 없는 시대라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지는 추기경님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님이셨습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김수환 추기경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를 섬기로 오신 착한 목자 영성을 배우고 실천하여 날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착한 목자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입니다. 종들중의 종이라는 교황님이 아닙니까!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 바로 섬김은 복음의 핵심적 덕목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되는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착한 목자 영성을 배우고 실천하여 문이신 주님을 닮아 갈 수 있을런지요! 답답한 벽이 아니라 활짝 열린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하늘문이 되어 살 수 있을런지요? 셋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순종과 경청입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평생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수행 역시 선택-훈련-습관의 경로를 밟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감동하여 마음이 꿰질리듯 아파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십시오. 저마다 죄를 용서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가 착한 목자 예수님과 함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명과 책임을 다하면서 복음 선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회개의 완성입니다. 역시 평생 과제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숙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 때, 사랑과 지혜, 겸손의 삶이요, 성소의 실현이자 하느님 꿈의 실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한 우리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여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둘째, 순종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한 주님이십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추상적인 순종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순종의 여정입니다. 성소 실현의 여정과 함께 가는 순종의 여정입니다. 영적 성숙의 잣대가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주님은 고난과 순종을 통한 종과 섬김의 영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순종하는 영혼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치유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순종의 선택이요 순종의 훈련이요 순종의 습관화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성소의 실현입니다.
셋째, 경청입니다.
경청은 영성의 기초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경청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순종과 겸손입니다. 주님과 소통의 대화인 기도도, 형제들과의 원활한 소통의 대화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은 영성생활의 필수적 기본요소입니다.
하느님은 마치 침묵중에 모두를 듣는 “귀”자체여. 모두를 보는 “눈”자체라 생각됩니다. 참으로 잘 듣고 잘 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에서도 목자와 양들의 관계는 들음과 따름으로 요약됨을 봅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경청하여 주님을 따를 때,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고 성소의 실현, 하느님 꿈의 실현입니다. 역시 경청의 선택, 훈련, 습관이 중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성소 실현의 여정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부각되는 회개, 순종, 경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소의 실현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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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 이루어졌습니다!>
작년 8월 말에 옛 성전 철거공사로 시작된 배둔성전 건축공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중간에 설계 변경이 있어서 좀 늦어졌지만 ㅎㅎ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집을 짓는데 도움을 주신 많은 천사님들, 형제자매님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천사님들의 기도와 도움으로 이루어 낸 기적입니다. 주님과 천사님들의 힘으로 다 이루어졌으니, 이제 부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배둔공동체가 부활하라고 아름다운 성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께 주어진 사명을 모두 마치시고 나서, "다 이루었다."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안에서 보면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절대적 전제이고, 부활은 죽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1베드2,21)
베도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과 부활의 본보기입니다. 내가 죽어야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가 부활할 수 있다는 '진리의 본보기'입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인 성소(聖召)에서 사제와 수도자와 선교사들처럼 특별한 부르심(특별성소)을 받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특별성소의 증진을 위해 기도하고, 특별헌금도 봉헌하는 날입니다.
현재는 '성소의 위기'입니다. '특별성소의 위기'는 더욱 심각합니다. 그 위기는 '보편성소의 위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잘 죽어봅시다! 잘 죽어야 부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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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lZ8Ay2Wi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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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10)
입구와 출구는
모두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막힌 문을
열어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이십니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장 깊은 관계는
부르심의
관계입니다.
부르심의 관계는
사랑하지 않으면
걸어갈 수 없는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픔도 없습니다.
성소(聖召)의 삶은
사랑과 함께
자라나는 삶입니다.
어제의 부르심보다
주님을 향한
오늘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먹여
키우십니다.
다른 나로
태어나는
순간들을
맛보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더 이상
제 자신과
싸우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시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제는
서두르지 않고
마음의 길을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드라마틱한
성소의 삶을 위해
두 손을 모아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광야도 풍랑도
목초지도 잔치도
시골도 도시도
모두 성소의
삶이었습니다.
한세상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을 하며
기쁘게 살렵니다.
하나의 기적이
한 사람의
성소에서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이 시대
이 땅의
소중한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마음의
성소주일입니다.
행복한 사제와
행복한
신자분이길
뜨겁게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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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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