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안 동백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아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근한 낙화가 안쓰러워 주워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놓았습니다. 쉬임없이 그 짓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뒤 나는 년년히 서정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워다가 드리던~ 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아줄 이가 땅 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주워모은 꽃들은 저절로 내 손에서 땅 위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시집 푸르른 날> --------------------------------------------------------------- 서정주(1915-2000) 대한민국 시인, 시와 삶을 입체적 으로 쓰고 살았음. 호는 덜 된집 미당
미당의 뮤즈는 친척 부인(자서전에서는 장모님)이었나보다. 동백꽃의 꽃말은 조심스러운 미덕, 자랑, 최고의 사랑스런.이다. 그 꽃들을 피운 하늘 한자락의 고고하고 아름다운 면을 보여주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성숙한 겸숙함을 가진 여성. 신화 속의 여성과도 같은 면을 보여주는 그런 꽃잎이 떨어져 땅바닥에 있는 것이 안쓰러워 그 꽃 잎들을 모아 부인의 치마폭에 갖다 드린 마음으로 서정시를 썼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신령스런 마음으로 순수한 열정으로 고결함을 갖다 바친다는 개인적인 바램으로
그런데 그런 순수한 열정을 받아줄 이는 이 지상에 없다는, 그래서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꽃잎은 있으나 그 꽃잎은 다시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더럽혀졌다. 자신의 순수 서정은 없어진 거다 어쩌면 시를 이렇게도 점, 선으로 쓰지 않고 면으로, 평면으로도 아닌 입체적인 시를 쓰시는 분이 복잡미묘한 인간사에 얽혀서 후학들에게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지. 친일 시, 전두환 생일 축하시를 써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진짜 굉장방장한 서정시들이 그 자체로 대접하기가 꺼려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