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 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 모양이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
"도로써 다스리라!"(고추모 유언)
광개토대왕비문의 철학과 사상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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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문의 왜곡과 올바른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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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문의 발견과 한국의 근현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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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곧 우주법칙으로 순리다.고추모는 나라를 순리로 통치하라고 아들 유리왕에게 유언을 남긴 것이다.
[광개토태왕비]
"추모왕(고추모)께서 유류왕에게 이르기를<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라>고 유언하시고 황룡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셨다.""백잔(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신민이였다.그런데, 신미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매번 백잔(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삼으려 하니 왕이 분노하여 직접 수군을이끌고 백제와 왜를 정벌하고 왜의 본거지를 쳐서 18개 성을 취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
"광개토태황은 성덕융성하여사해가 열제라 칭했다.18세에 광명전에 등극하여천악을 연주하셨다..손수 말을 타시고마니산 제천단에 올라 제천하시고 천악을 즐기셨다..웅진 등을 정벌하신 후에 이른 아침에속리산에 올라 제천하고 돌아 오셨다..광개토태황이 수군을 이끌고바다를 건너 왜국을 정벌하여 임나(대마도)에 연정를 세웠다.광개토태황의 명령없이는 모든 왜가 움직일 수 없었다.평량(감숙성)까지 모두 평정되었다..백제.신라.거란.왜가 모두 조공을 바치니 해동의 극성기였다."
[후한서-한전]
"동과 서가 바다로 접하고사방둘레가 4천리인데, 마.번.진 3한인들이거주하고 있다. 3한 중에 마한이 가장 크며,3한 지역의 왕노릇을 한다. 마한과 번한 남쪽으로왜와 접하고 있다."<왜>는 본래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을 의미한다.광개토태왕 이후로 <왜>는 열도를 가리킨 말이 되었다.광개토태왕이 정벌했다는 백잔과 왜 지역은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 지역을 정벌했다는 의미다.
나주 영산강 지역의 반남고분에서 남3한 시대에 해당하는 왕관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반도 서남해와와 열도를 지배했던 왜왕(일본천황의 기원)의 왕관이라고 봐야 맞다.열도의 전방후원분이 모두 영산강 중심의 서남해 무덤양식이다.
당시 영산강 지역은 왜국의 중심지로 해양무역의 중심지로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하여 백제와 신라가 우러워보고 두려워하는 국가였다. 광개토태왕은 한반도와 열도의 해상세력를 이어 주는 임나(대마도)에 고려연정을 세워 백제와 왜의협력을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대마도는 고려시기에 동아시아 해상권을장악하여 약탈하는 왜구들의 본거지가 되어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동남아를 약탈하였다. 고려의 최무선과 이성계가 왜구토벌에 나서고명나라 영락제가 왜구토벌에 나서고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한 배경이다.
그런데,대부분 머리를 빡빡 깍은 왜구의 머리스타일을 보면 전형적인 흉노선비족이다. 따라서 동아시아를 약탈한 왜구들의 실체는왜의 노예들을 의미하는 왜노로침략과 약탈과 강간을 통하여생존을 유지했던 초원세력임을 알 수 있다.1-4세기에 중국과 초원에서 바다와 동해안을 타고 영남으로 유입된 흉노선비족이 대마도를 거점으로 열도로 이주해 갔음을 알 수 있다. 피는 절대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나온 나라고 가야.신라는 흉노에서 나온 나라들이다.
따라서 당시 한반도지역에서 신라를 동맹국으로 삼는 고구려와 가야.왜를 동맹국으로 삼는 백제가 벌인 전쟁은 부여의 주인자리를 놓고 벌인 고구려와 백제의 부여패권전쟁이였고,부여시조 해모수와 부여 동명왕(고두막)의 국호와 혈통과 황통을 모두 계승한추모왕 고추모의 고구려가 승리했고광개토태황 시기에 고구려를 부모국으로삼는 것을 전제로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통치방식을 통하여 고조선의 옛영토를 모두 회복하는 다물을 실현했던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와 열도는 본래가 더불어 살았던 단군공동체 지역이 아니겠는가? 유전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핏줄이 동일한 만큼 국가주의를 넘어서침략주의를 버리고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고추모의 유언처럼 <도/순리>에순종하여 더불어 살아야 겠다./윤복현
전남 나주 고분군과 해(왜)국-알 신앙를 반영한 무덤양식
광개토태왕이 수군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 정벌한 왜국는
[한단고기]기록에도 나오지만 충청.호남지역이였다.
바다로 이어진 영산강을 중심지역으로 삼고 있었던
해(왜)국은 한반도 서남해지역과 열도를 지배했던 해상강국
광개토태왕이 임나(대마도)에 고구려연정을
설치한 이유는 한반도와 열도의 모든 해양세력을 통제하고,
백제와 왜의 협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나주=연합뉴스) 김태식.전승현 기자 = 영산강 유역에 자리한 전남 나주에는 3∼7세기에 걸쳐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밀집해 있다.
한국 고고학계나 문헌사학계 대부분은 이들 고분이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지방에 지배력을 본 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하던 시기에 이 일대에서 활약했던 백제 지방호족의 무덤이라 보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삼국사기는 기원을 전 후한 백제 시조 온조왕 때 이미 백제에 게 멸망당했다고 했지만 중국 사서에 는 292년까지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 으로 엄연히 기록돼 있는 마한의 근거지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하나도 나주 고분군 의 비밀을 명쾌히 밝혀 주지는 못한다.
우선 큰 것이 길이 50m를 넘는 나주 고분이 무령왕릉을 비롯해 백제 옛도 읍인 공주나 부여지역의 백제왕실 무덤과는 규모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크기 하나만 보면 이 일대 고분은 경주 지역 신라고분과 비견된다.아무리 지금의 전남지방 백제 지방호족이 세력이 컸다 해도 부여나 공주의 백제 왕릉을 능가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한 이들 고분이 마한왕(족)들의 무덤이라는 설명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 가지다. 중국사서가 비록 마한이 292 년까지 중국 왕조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고는 있을 망정 이 무덤 조성시기와 대체로 일치하는 백제 팽창기에 마한은 급격히 위축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거대 고분이 밀집해 있고 또 이곳에서 금동관이나 금동신발,환두대도 등이 출토되는 것을 볼 때 적어도 나주 일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갖춘 고대왕국이 자리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측 역사서나 중국,일본 역사서 어디에도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 남지방에 왕국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나주 고분이 백제지방 호족이나 마 한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한국학계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지금의 전남지방은 백제 동성왕때인 498년 백제가 탐라국을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까지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갔다는 대목에서 비로소 한국 역사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즉 적어도 역사기록만으로 볼 때 498 년 이전 전남은 한국 고대왕국 중 어느 나라 땅도 아니었다.
그러면 나주지방을 중심으로 거대 고분군을 축조했던 주인공은 과연 누굴까?
이 대목에서 기존 한국 사학계나 고고 학계가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하지만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고대 왜(倭)의 한반도 남부 거주설이 주목을 끈다.
사실 일본학계 일부에서는 지금도 광개토왕에게 토벌당하기 전인 서기 400 년쯤 이전에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 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본 학자들이 왜는 본래 근거지를 현재의 일본열도에 두고 한반도 남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 재야사학자 들은 원래 왜는 한반도 남부에 있다가 일본열도로 밀려간 한반도 동이족의 한 갈래라고 본다는 점에서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사실 왜가 한반도에서 쫓겨나기전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고 가정하면 왜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는 광개토왕비(414년 건립)의 신묘년 조 기록이나 4세기말 왜가 신라와 백제의 왕자를 인질로 삼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무리없이 설명되는 점이 없지는 않다.
또한 고고학적 유물로 볼 때도 서기 400년경 이전에는 일본열도에 고대왕 국이 성립되지 않았으며 응신왕릉을 비롯한 거대 고분군이 일본열도에 집중 출현하는 것이 5세기 초반 이후라는 점이 왜의 한반도 남부 거주설을 부추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