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5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하여 가나안의 초입인 길갈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사고와는 전혀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완전무장을 하고 적과 싸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장해제라니요.
하지만 그 전쟁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여호와가 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은 동일하게 오늘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살이임을 믿사오니 나의 힘과 나의 의지로 하지 않고 날 택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임을 잠시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나는 힘이 없고 연약하며 무력한 자이오니 오직 주의 품에 거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그럼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하 14:12-24
제목 : 인간의 알량한 지혜가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나, 결국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통하여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12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의 여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을 내 주 왕께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13 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4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은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15 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당신의 여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오면 혹시 종이 청하는 것을 왕께서 시행하실 것이라.
16 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주의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
17 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
18 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바라노니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인이 이르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19 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20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 나의 묵상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고 그술로 도망한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다윗 또한 그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암논은 죽었지만 외가로 도망을 한 압살롬을 향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는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눈치 챈 요압은 압살롬을 데려올 계책을 준비한다.
드고아의 여인은 요압이 시킨 대로 다윗 왕에게 고한다.
죽은 남편의 씨를 이을 수 있게 동생을 죽인 형을 친지들에 의해 죽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 여인의 집요한 간청에 못 이겨서 공의를 집행하기보다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한편 드고아 여인은 사실 이 문제가 자신의 사건이 아니라 왕의 사건임을 아주 조심스럽게 밝힌다.
왕은 자신의 간청을 들어줌으로써 왕도 죄 있는 자가 되었다.
그것은 왕이, 왕의 집에서 내쫓긴 자 곧 압살롬을 집으로 다시 불러들이지 않은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다시 말하면 여인의 청을 들어준 왕이 오히려 자기 집의 내쫓긴 자를 부르지 않아서 결국 그 씨를 끊은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여인의 집에 복수를 금한 왕이, 자기가 자기의 집에 복수하는 꼴이 되고 만 셈이다.
여인이 말하기를 인간은 땅에 쏟아진 물을 담지 못하듯 반드시 죽는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생명을 보호하시고 방책을 베푸시며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 되지 않게 하신다고 하면서 인간의 생명에 끝이 있다는 여인의 생각은 결국 유한한 세상에서 이 생명을 만끽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녀가 살인자 아들을 살려달라고 왕에게 청원한 것은 아들을 죽이려는 백성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녀는 왕이 자신과 아들을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으려하는 것을 금해줄 것을 믿었다.
그 믿음대로 왕은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어 그녀를 위로하였는데, 이것은 왕이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악을 판단한 것이다.
한편 여인의 말을 들은 다윗은 사건 전체를 꿰뚫어본다.
곧 요압이 여인을 시켜서 압살롬을 집으로 데려오게 한 계책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요압에게 내쫓긴 자 곧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허락한다.
요압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왕에게 예를 표하고 그술로 떠난다.
그술에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온 압살롬에게 다윗이 명하기를 그의 집으로 가게 하여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다윗이 요압에게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허락하는 말이다.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아들 압살롬이 아니라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아들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야 남아 있지만 그는 아직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압살롬을 바로 왕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압살롬의 집으로 가게 하여 대면하지 않는다.
이를 보건대 다윗은 아직 압살롬과 화해할 생각이 없으며 그를 아들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범죄 후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했다.
그는 심판의 말씀 앞에 자기 죄를 자복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았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행하신 심판을 공의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심판은 공의로 나타났으며 그는 그 의를 기초로 나라를 세웠다.
드고아 여인이 간청한 동생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 대신 가족의 씨를 잇기 위한 화해의 청원을 허락한다.
그것이 곧 다윗에게는 올무가 되고 말았다.
그가 내쫓긴 자를 데려오지 않으면 그가 스스로 금한 복수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다윗은 여인을 이용한 요압의 청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압살롬과 어떠한 화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압살롬을 청년 압살롬으로 부르면서 말이다.
압살롬에게는 심판의 말씀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도 공의의 집행도 없었다.
다만 인간적 지혜와 모략으로 가득한 요압의 중재만 있었을 뿐이다.
결국 요압의 지혜는 당장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끔찍한 재앙을 예고한다.
그것은 압살롬은 반역자가 되고 다윗은 도망자가 되는 것이다.
요압의 중재는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한 인간적 처사이다.
다윗이 압살롬을 향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그 나름대로 지혜를 짜낸 것이다.
그렇게 요압은 다윗 왕을 자기의 계획안에 끌어들였으나 왕은 압살롬과 화해를 거부하였다.
공의를 외면한 인간의 중재는 한 때 형통해 보이나 그 결말은 사망이다.
인간적 화해보다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을 의롭게 하고 그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는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에 대한 공의를 담당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간의 중재자가 된다.
그리고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된 자만이 다른 사람과도 화목하여 그를 사랑한다.
작금에 교회 안팎으로 상담사역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상담의 근본적인 바탕은 인간은 선하기 때문에 잘 가르치고 상담을 하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환상에 근거한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은 선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죄인이라는 근본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한다.
상담은 요압의 지혜와 같은 인간적 지혜로 중재하는 기술이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학문이며 궁극적으로 깨어지고 어그러진 인간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상담은 상대의 옳지 않은 감정이나 죄를 드러내거나 자극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외면하는 인간 중심의 중재일 뿐이다.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바꿔보려는’ 요압의 지혜에 다름 아니다.
(20절, 우리말성경) 왕의 종 요압이 이렇게 한 것은 지금의 상황을 바꿔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린 인간의 지혜는 더 큰 문제와 고통을 부른다.
하나님의 심판만이 공의를 세우고 공의의 결과 하늘로부터 임하는 평화를 가져다 준다.
(시 94:15)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나는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부터 깨진 가정들이나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의 부부들과 많은 상담을 하여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고자 애썼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잘 하고 있으며 위로와 격려를 통해서 힘을 북돋워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적절하게 말씀을 섞어가면서 위로를 하니 많은 가정이 회복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위로는 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의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었음을 오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런 가정들을 위로하며 격려하였기에 지극히 인간적인 지혜를 짜내서 하는 가정사역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역의 결과는 잠시 좀 좋아지는 것 같고 안정이 되는 것 같지만 결코 온전한 결말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이 그것을 우리의 심령에 외친다.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은 결코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실재이며 하나님의 공의로 나타나는 엄중한 심판이 아닐 수 없다.
그 심판을 무시하고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불신자들이야 그런 심판은 아예 없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은 그 심판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공의의 심판만이 우리를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복음 중에 복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몇몇 가정을 회복시킨 후에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드는 마음이, ‘내가 참 잘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조차 하나님은 싫어하신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를 드러내는 나의 義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당신의 아들의 생명으로 살리셨다.
그리고 나를 또한 당신의 아들로 삼아주셨다.
(갈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다름 아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된 자를 말한다.
그런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인간의 지혜와 알량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우롱하려 했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요압이 청원했던 인간의 지혜, 그것은 결국 파멸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폭탄의 도화선이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이 나를 삼키게 하옵소서.
그 말씀 앞에서 나의 지혜나 지각은 그저 무용한 것들임을 인정하고 오늘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