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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해모수부터 17대 손으로 고추모의 다물국시을 실현한 고리(고려) 광개토태왕
고구려의 방어전술이 빗나가는 바람에 모용선비(연)의 침략으로 국내성이 유린.파괴되고,
미천왕의 시신이 도굴되고, 태후와 황후를 비롯한 5만여명의 고구려 백성들이 끌려 갔고,
백제공격으로 살해당한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비참한 죽음으로 무기력함으로 국가위기에 봉착했던
고구려를 어떻게 부국강병의 나라로 건설할 것인가가 광개토태왕에게 주여진 정치적 과제였다.
광개토태왕은 다시는 고구려가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략과 약탈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이 절대 필요함을 인지하고, 세계 최대의 철생산지를 보유한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군의 어떠한 공격도 막아낼 수 있고 군사를 보호할 수 있는 세계 최강의 찰갑 기마군을 증강했다.
백제정벌을 위해서 수군도 증강시켰다. 지금 광개토태왕이 대한민국에 존재한다면
한반도 재침을 노리는 일본의 막강해진 군사력에 대비하여 해군력 증강을 중심으로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오로지 강한 자주국방만이 국가를 유지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이 준비한 튼튼한 자주국방은
고구려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끌고간 거란을 정벌하여
잡혀간 1만여명의 백성들을 데리고 왔으며,
백제.왜.가야 등 남한.열도지역을 평정하여 백제의 항복을 받아냈고,
모용선비족의 연나라를 정벌하고 고구려 유민 고운을 제후로 세우고
황하 이북지역인 유주까지 차지하고 통치했다.
안으로는 민생에 힘써 오곡이 풍족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이 없게 하였고,
불교사찰들을 많이 지어 백성들이 평안과 안식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광개토태왕은 가혹한 직접통치가 아니라,
자치권을 부여하여 고구려를 중심으로
더불어 공존하는 사해(세계)의 영락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광개토태왕이 사해로부터 열제(만왕의 왕)로 칭송받는 이유가 되었다.
[자료]21세기에 더욱 필요한 광개토태왕의 글로벌 리더십
요즘 우리 경제계의 최대 이슈는 단연 ‘샌드위치론’이다. 재개된 일본의 고속성장과 중국의 무시무시한 추격 사이에 낀 한국은 이렇다 할 성장엔진을 확보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한미FTA 체결이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아직 득실을 분명히 예측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불확실성일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침체와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21세기의 세계경제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열악한 자원적․지정학적 조건을 오히려 기회요인으로 삼을 수 있는 안목과 배포,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을 200% 활용하는 선택과 집중의 벡터경영, 그리고 무엇보다 철저한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한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과 마인드 패러다임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멀리는 대우 김우중 회장에서부터 가깝게는 한화 김승연 회장에 이르기까지, 우리 경제의 근간을 떠받치고 있다는 핵심기업들의 현실은 글로벌 마인드, 뉴패러다임과는 동떨어져도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샌드위치론’이니 ‘너트크래커론’이니 하는 위기담론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해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답답한 현실국면을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열어젖힐 돌파구는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때 동북아의 주역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자 했던 광개토태왕의 고구려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1,600여 년 전의 고구려는 중국대륙의 강대국들과 초원세력, 한반도의 강력한 내부 경쟁자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당시 고구려가 처해 있던 상황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보다 훨씬 더 열악했고 비관적이었다. 그런 고구려가 어떻게 그토록 단기간에 명실상부한 대제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광개토태왕의 고구려가 언제까지나 역사적 향수의 대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광개토태왕의 경영 노하우와 리더십은 미래를 위한 오늘날의 경영이론으로 새롭게 계승․완성시켜 새로운 국운융성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광개토태왕 경영의 9가지 핵심 경쟁력
▯ 자신감에 근거한 대포용의 국제감각
광개토태왕의 고구려는 무엇보다 강력한 군사력에 근거한 자신감으로 동북아 제국(諸國)을 호령하면서도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종족을 아우르는 대포용의 리더십으로 진정한 ‘세계제국’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21세기의 세계경영환경에서 우리 기업들이 진정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기술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로 뻗어나감과 동시에 현지시장의 고유성과 특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포괄하는, 말 그대로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무한한 영토적 상상력
광개토태왕은 결코 침략과 약탈의 차원이 아닌, 고구려를 침략하고 약탈했던 주변 국가들에 대한 응징과 반격으로써의 쉼없는 남정북벌∙동토서략을 통해 다양한 문화권과 기후대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개척함으로써, 오랫동안 반도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던 우리 민족이 비로소 대륙적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본질적으로 ‘글로벌리즘’이란, 단순한 지역적․공간적 활동영역의 의미를 넘어 사고의 지평을 무한히 확장시키며 웅대한 비전을 현실화해나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미 경제경영의 세계에서 국경은 없다. 세계로 나아감으로써 시야를 키우고, 시야를 키움으로써 다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 지속경영을 위한 내부경쟁력
광개토태왕의 정확한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었다. 이는 살아 생전 태왕의 업정과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외정(外征)의 업적을, ‘평안(平安)’은 내치(內治)의 업적을 칭송하는 의미이다. 이렇듯 광개토태왕은 지칠 줄 모르는 남정북벌의 과정 속에서도 안으로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여 ‘호태왕(好太王)’ ‘영락대왕(永樂大王)’ 등으로 칭송받던 복지군주이기도 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정치와 경영은 조직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것이자 궁극적으로는 조직 구성원들의 복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 구성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이제는 기업들 역시 실질적인 경영성과를 바탕으로 지속경영(영락)과 사업안정(평안)을 동시에 추구하는 조화경영을 펼쳐야 할 것이다.
▯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조직구성력
광개토태왕이 개척했던 거대 영토에만 주목한다면, 우리는 태왕을 한낱 무장(武將)에 국한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태왕은 거대한 영토를 개척함과 동시에, 새로 편입된 모든 종족들까지 자유롭게 참여하는 제도적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러한 민주적∙참여적 인프라가 있었던 덕분에 태왕의 고구려군은 끝없이 대륙으로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글로벌 기업을 표방한다 하더라도 그에 걸맞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조직구조를 갖추지 못한다면 허황한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특히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 현장경영과 동기부여의 리더십
광개토태왕은 민족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외정과 내치의 도정에서 늘 현장에 있었다. 적을 칠 때에는 늘 선봉에서 독전(督戰)하는 친정(親征)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고, 연속되는 전쟁에 지친 백성들의 사정을 몸소 살피며 위로하여 생전에 ‘평안호태왕’이라는 미칭을 얻었다. 어느 조직에서나 가장 강력한 무형적 유산은 경영자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이다. 또한 이런 리더십은 경영비전의 모습으로 현실경영에 반영된다. 하지만 솔선수범과 현장 경영의 리더십이 없다면 조직원들의 진정한 자발성을 이끌어 내지 못하게 되어 조직의 비전은 현실화되지 못한다. 리더십이란, 호령하고 지시하는 계급적 권위가 아니라 구성원들로부터 자발적으로 옹립되는 강력한 실행력이다.
▯ 인간중심의 경영철학
영락 5년에 광개토태왕은 염수 지역의 비려(稗麗거란)를 정벌했는데, 그 이유는 비려가 납치한 고구려 백성들을 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가볍게 보지 않겠다는 애민정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사실 원초적인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던 고대 국제사에서 이러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왕이란 그리 흔하지 않다. 이 처럼 태왕은 거대한 제국을 경영하면서도 풍부한 인간적 감성을 보여 주어 백성들과 이족들을 감동시키곤 했는데, 심지어는 태왕의 인간적 면모를 흠모한 정벌대상국의 귀족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태왕의 개선을 뒤따르기도 했다. 이렇듯 ‘인간미’는 조직의 내부에 흐르는 정서적 유대를 강화하여 결과적으로 조직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된다. 따라서 ‘글로벌 무한확장’이라는 크고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면, 발밑의 작은 것들에 주목하는 세심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잃으면 성공도 없다.
▯ 창업정신의 창조적 재해석
고추모는 고구려를 창업하자마자 인접한 비류국을 병합하고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라고 명명한다. ‘다물(多勿)’이란 옛땅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즉, 고조선을 계승하고 그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고구려 창업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창업의 꿈은 광개토태왕 대에 이르러 마침내 실현된다. 만주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열도,그리고 서쪽으로는 중국 동.북부 지역은 물론, 몽골 동부와 연해주 일대에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고조선의 실지를 회복함과 아울러 고조선이 추구했던 ‘천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이는 창업시기의 꿈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여 또 하나의 성장엔진으로 삼은 광개토태왕의 탁월한 경영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의 기업들은 변화된 환경을 이유로 창업시기의 비전을 섣불리 청산하거나, 반대로 창업정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변화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초심을 유지하되 변화된 시대의 요구에 맞도록 창조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야 말로 조직의 정체성과 경쟁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방법이다.
▯ 명분과 실리의 앙상블
광개토태왕의 외정 특성은, 끝없이 대륙으로 뻗어 나가면서도 특별한 원한관계나 전략적 필요가 없는 한, 강압적 병탄을 하지 않고 형제국으로 대우하며 종법(從法)적 질서를 구축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폭력적 지배와 가혹한 수탈은 오히려 지역경제를 낙후시키고 현지인들의 저항을 야기하는 법이다. 광개토태왕은 이 처럼 대형(大兄)적 명분과 지속가능한 실리를 동시에 추구할 줄 아는 현명한 CEO였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사회책임경영(CSR)’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글로벌기업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브랜드와 실익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매우 유용한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 확대구성의 코어 마인드
광개토태왕은 점ㆍ선ㆍ면이 어우러지는 세트화된 국가운영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렸다. 영토 곳곳에 수많은 성(城)을 쌓아 전략적ㆍ경제적 근본을 확고히 하고, 천리장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그 성(점)들을 이어 전략적ㆍ경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며, 그 무수한 점과 선들이 모여 비로소 고구려 제국의 대영토(면)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시장을 개척하여 고객접점을 확보하고, 시장진입 이후에는 고유의 솔루션과 네트워크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고, 그렇게 확보한 시장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라야 비로소 ‘글로벌기업’의 위상이 확보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치밀한 단계적 접근과 각 단계의 입체적․변증법적 상호작용은 지속가능조직의 핵심방법론이 되고 있다.
광개토태왕이 실현한 중핵 코리아
[태왕사신기]광개토태왕 역의 배용준
"광개토경호태황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 나서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라 불렀다." -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영락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 " - [광개토태왕 비문]제 1면 5행 -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실때 예로써 천악을 연주했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셨다.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께 천제를 올렸는데 이때도 천악을 쓰셨다. -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
불과 18세의 소년왕으로 즉위하여 39세의 청년왕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최대의 정복군주였다.
재위 2년 (392)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았는데 이듬해 백제의 왕숙 무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이를 되찾기 위해 쳐들어 왔을 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태왕이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역으로 공격하여 패배시켰다고 적었다. 관미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기습해 패퇴시킨 것이다.
고구려왕 담덕이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 북변을 공격해 석현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백제의 진사왕은 담덕이 용병이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 맞서 싸우지를 못하니
한수(한강)이북의 여러 성이 함락되었다. - [삼국사기]백제본기 진사왕 8년조 기록 -
재위 3년 (393) 백제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내침하자
광개토 태왕은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였다.
재위 4년(394)에도
백제와 패하(지금의 예성강)에서 겨루어 대파하고 8천여명을 사로 잡았다.
재위5년 (395) 서북방 거란족이 거주하는
요하 상류지역인 염수 방면으로 진출하여 600-700영을 격파하고 개선했다.
재위 6년(396)에도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00촌을 함락시키고 서울을 공략해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주종의 조약을 맺고 남녀 1천명과 왕의 동생과 대신 열명을 인질로 잡고 돌아 왔다. 181p
영락 8년에 정예군을 보내어 백신(帛愼:연해주 방면 숙신 지칭)과
토욕(土谷:감숙성.청해성 방면 토욕혼 지칭)을 정벌하였다.
토욕이 바로 평량지역인데, 북위 서쪽에 있던 모용선비족의 나라다.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사]에도 광개토태왕이 토욕을 정벌한 해에
고구려인들 54만이 북위 수도에 가득차니 수도를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광개토태왕이 북위를 완전히 제압해 버리기 위해서
북위의 군사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토욕을 정벌함과 동시에
고구려인들을 북위 수도로 대거 이주시켜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북위는 결국 고구려 귀족의 딸이 왕비가 됨으로써
고구려의 제후국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영락 10년조(400)에는 광개토태왕이 신라지역을 점령한
왜.가야 백제연합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광개토태왕은 신라의 구원요청으로 5만 대군을 파견해
신라의 경주 부근까지 이르렀고 그 곳을 정령하고 있던
왜군은 고구려 구원병을 보고 달아났다.
고구려군은 임나(대마도)까지 추격해 종발성을 함락시키고
연정을 만들어 모든 왜를 고구려에 통제시키고
열도왜와 백제와의 교류와 협력을 차단해 버렸다.
고구려는 신라왕의 구원요청을 수용하여 신라구원을 명분으로 출병해
죽령 남쪽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세우는 등 신라의 왕위 계승까지 개입했다.
연나라의 모용성은 3만 군사를 이끌고 표기대장군 모용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리를 빼앗았다.광개토대왕은 곧 반격에 나섰다.
광개토태왕에게 있어 연나라는 반드시 멸망시켜야 할 고구려의 원수였다.
재위 11년 광개토태왕은 군사를 보내
숙군성 (지금의 요녕성 북진)을 공격해 연나라 평주자사 모용귀에게서 성을 빼앗았다.
광개토태왕은 13년(403) 겨울 11월에도 연을 공격했다.
광개토태왕 14년(404) 정월에는 연나라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는 등 다툼이 계속되었다.
재위 14년 (404) 왜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황해도)지역을 침입한다.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해 왜-백제 연합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재외 16년(406) 연나라에 대한 응징을 재차 가하고
재위 17년(407) 5만 대군을 보내 6개 성을 빼앗는 동시에
갑옷 1만벌과 많은 무기 노획하고 유주지역 등
잃어버린 옛 서토땅을 모두 회복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맹공격에 맨붕상태가 되어 항전의지를 상실한
연나라 왕실에서 한족 출신으로 중위장군이였던 풍발이 용성으로 잠입해 연나라왕 모용희를 죽이고
고구려유민이며 모용보의 양자였던 고운을 추대해 임금으로 삼는 사건이 있었다.
고운은 고구려 출신이었다. 고운은 고구려인 고화의 손자로 무예가 뛰어나 태자시절 모용보가 양자로 삼았다.
이는 고구려에 굴복하니 나라만 보존해 달라는 요구였던 셈이다.
연나라 국왕으로 고구려 유민출신 고운이 즉위하자,
광개토태왕은 재위 17년 사신을 북연에 보내 축하하고 제후로 인정해 주었는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종족의 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재위 20년(410) 지금의 목단강 유역의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국 사람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의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는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임천.와산.괴구.복사매.우술산.진을례.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 때에 곧 백제.신라.가락의 모든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이지않고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 지역)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대마도)와 이왜의 무리는 모두 신하로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룬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
"이에 열제께서는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임천.와산.괴구.복사매.우술산.진을례.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이 기록에서 광개토태왕이 수군을 이끌고 서해바다를 건너서 정벌했다는 백제와 왜 지역은 지금의 충청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임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 해상세력인 왜는 영산강 지역을 중심으로 전라도.경상도 해안지역과와 열도였기 때문이다.
감숙성 평량시에서 고구려성을 발견했다. 평량성은 고구려성이었다.
[환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거란과 평량이 광개토태왕 시기에 고구려에 다 평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거란을 복속시킴으로써 그 세력권 내에 있던 평랑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평량은 흉노족의 본거지인 감숙성 지역이다. .. 평량이 수중에 들어 오자 실크로드로 연결되는 통로가 열렸다. 이것은 감숙성에 있는 돈황석굴의 고구려계 벽화에서 확인된다. 오직 [환단고기]만이 밝혀주는 사실이다.
둔황석굴 [敦煌石窟(돈황석굴)]
중국 간쑤성[甘肅省] 둔황현[敦煌縣] 남동쪽 20km 지점에 있는 불교유적.소조불상(塑造佛像)과 벽화 등의 불교미술품 외에 많은 고문서류가 발견되어 동서문화교류사 또는 중국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1907년 영국의 A.스타인과 그 다음해 프랑스의 P.펠리오에 의해 알려졌다. 명사산(鳴沙山) 기슭에 길이 1.6km에 달하는 크고 작은 600여 개의 불교석굴이 있는데, 둔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의 조사에 의하면 불상조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은 469개소에 달한다.
▲ 돈황 석굴에서 발견된 벽화. 성벽이 고구려 양식인 ㄷ자 형인 '치'양식으로 되어 있어 고구려 성임을 보여 준다.
서역인과의 문물 교류
고구려 벽화 속의 서양인은 또 있다. 씨름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매부리코에 눈이 부리부리하다. 이렇듯 당시 고구려에는 많은 서역인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초원지역과 중국 동.북부지역과 한반도와 열도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육로와 바다로 모두 연결된 코리아 중핵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강성했고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왔다. 광개토태왕을 고구려 백성들이 <좋은 임금=성군>이란 의미의 <호태왕>으로 충분히 기록할만 했던 고구려 부흥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