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슬하
정끝별
썩지도 못하는 고무대야가 엎드린 채 끝내 품었던 것들
습습한 부엽토와, 부엽토에 반쯤 파묻힌 소주병과 손잡이가 빠진 호미와
푸석해진 검은 비닐봉지와, 비닐봉지 속 여전한 영빈중화반점 일회용 라이
터와 판콜에이 갈색병과
그런데 저 빨간 고무대야는 언제부터 엎드려 있었을까?
지난 늦여름 붉은 흙에 엄마를 묻고 있을 때 한낮 햇살 아래 한갓진 흰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오래전 가을 아버지를 묻을 때도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는데
열리면 움직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 누가 다녀간 걸까?
인기척에 놀란 지네인지 노래기인지 소주병에서 뛰쳐나와 으다다다 다
급하게 마른 풀더미 틈으로 사라졌다 더는 지키지 못한 아버지 취중 진
담처럼
그래 판콜에이는 아버지 만병통치약이었지
비닐봉지를 들어내자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 가까스로 기어가다 피딱
지처럼 말라비틀어진 담쟁이덩굴 열매들 사이에서 그쳐 섰다 엄마도 먼
길 가다 느릿느릿 멈춰 서곤 했는데
왜 하필? 지렁이도 오래 그치면 큰 개미들 몰려올 텐데
봄은 어디까지 왔나 한식 즈음이면 식솔들을 이끌고 발부리로 땅을 툭
툭 차며 소주와 간편 제수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산길을 오른다
생전의 아버지 엄마처럼
유해한 몸으로 품어내는 무해한 것들도 있는 거라며
한식에 한나절을 슬다 유해한 것들을 고무대야에 쓸어 담아 산길을 내
려온다 누가 생일을 맞았는지 마을 사람이 팥시루떡을 돌리고 있다
엄마 아버지는 이제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인간을 버리고서야
정끝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시),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로 등단.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