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있는 중학교 입학을 얼마 앞두고 갑자기 아버지가 M 시로 전근이 되어 입학 절차를 밟으러 찾아본 M 중학교는 겉보기에도 정이 가지 않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학교 안팎도 살풍경했지만 교사는 임시 건물처럼 허술했고 운동장을 넓히기 위해 바깥쪽 빈 터에 매립하고 있던 쓰레기 냄새가 지독해서 고향 중학교로 당장 되돌아가고 싶었다.
M 시는 항구 도시라 바닷가에 정박한 수많은 고기잡이 배들이 신기했고 산골인 내 고향보다 제법 도시다운 활기가 있었으나 학생들은 언행이 거칠어서
x팔, x새끼 같은 쌍소리를 거침없이 써서 친근감을 느낄 수 없었고 남녀 공학이라서 매일 오며 가며 대하는 여학생들도 산골 아이들과 비교하면 말씨가 거칠고 행동에 조심성이 없어 모두 선 머슴애들 같아서 말 붙이기도 싫었다. 부모가 고기를 잡거나 막노동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느라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은 집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어설프게 지은 교실도 바닥은 흙 바닥 그대로여서 마치 창고 같았고 산 비탈을 따라 지은 학교도 손 볼 곳이 많았던지 학생들에게 이틀이 멀다 하고 세숫대야, 곡괭이, 삽 같은 도구를 갖고 오라고 해서 오전 수업을 마친 후에는 멀리 바닷가에서 모래나 자갈을 퍼오게 하거나, 운동장 확장 공사에 동원하거나 학교 곳곳을 보수하는 작업을 시키는 일이 잦아서 학교가 공부하러 가는 데인지 일하러 가는 데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 당시에는 재정이 빈약해서 학생들 손을 빌어서 보수 공사를 많이 했다.
그러니 학교 분위기도 온통 공사판 같아서 어수선했다. 학생들도 장난칠 궁리나 했지 그리 열심히 공부하려 하지 않았고, 군사 혁명 직후라 위아래로 짙은 갈색 코르덴 재건복을 입은 선생님들은 대부분 회초리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매질로 아이들을 길들이려고 했다. 수업시간에 교사들이 사소한 일로 출석부로 학생의 머리를 마구 때리거나 몽둥이로 매타작을 해도 감히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얻어맞는 수밖에 없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상급생들이 들락거리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주로 학급에서 키가 큰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내서는 차려 자세가 정확하지 않다던가 길에서 상급생에게 경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마구 때렸다. 억울하기는 해도 조금이라도 말대꾸를 하면 주먹이 마구 날아오니 다소곳이 맞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들도 상급생들의 공공연한 폭행을 묵인하는 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걸 조장하기도 했다. 아이들 길들이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은 음악을 담당하였는데 그 당시로는 드물게 오동통한 체격에 얼굴도 동글동글했는데 매일 면도를 말끔히 해도 얼굴에 온통 수염 자국이 나 있는 털보였는데 학생들은 모두 그 선생을 개 털보 선생이라 불렀다. 멀쩡한 이름을 두고 털보라 부르는 것도 별로 좋지는 않은데 그 앞에 개(Dog)를 붙인 건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는 해병대 출신이라 그런지 말투가 거친 편이었다. 말썽부리는 아이에게 언젠가, “아이고, 이 동네 귀신은 눈까리가 까졌나? 이런 노무 새끼를 잡아가지 않고 뭐하고 자빠졌나.”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 정도 표현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었다. 그는 해병대식으로 연대 책임을 묻는다며 한 사람이 잘못해도 개인적인 구타보다는 단체 기합을 많이 주었다. 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을 느닷없이 운동장에 내몰고는 전원 운동장 열 바퀴 돌기, 선착순 집합 또는 학교 앞 산꼭대기까지 뛰어서 돌아오기 등을 시켰다. 늦게 오는 아이에게는 별도의 벌을 또 주었다.
그 당시에는 예고 없이 소지품 검사를 하는 일이 잦았다. 체육 시간에 교실에 두고 간 책가방을 검사하여 담배나 벌거벗은 여자 사진이 나오면 가방 주인은 엄청나게
얻어 맞았다. 그러고 나서는 학부모를 호출하여 주의를 주고, 학생은 오랫동안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고 교무실 바닥이나 복도에 꿇어앉아 반성문을 써내고, 게시판에 유기 정학 등의 처벌 내용을 올려서 전교생에게 알렸다.
그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 말썽부리는 아이들이 없을 것 같은데도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가리에 쇠똥도 벗어지지 않은 어린 것들이 바닷가에 있는 사창가를 드나들다 문제가 되기도 하고, 중학교 2학년 때에 지저분한 문제(남녀학생 열 두 명이 여관에서 group sex했다나 뭐라나)로 남녀학생 10여 명이 집단 퇴학당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고, 자잘한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몰래 자전거 체인이나 송곳 등을 갖고 다니다 교실에서 그런 흉기를 휘두르는 아이도 있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왕따와 같은 문제는 없었다. 교사의 권위도 인정되어 억울하게 얻어맞아도 교사에게 반항하는 아이는 없었다. 그러나 교사가 교육을 빙자해서 학생을 지나치게 구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당시에 사회 깊숙이 스며들었던 군사 문화가 학생들의 정서를 메마르게 하고 폭력을 조장했던 면도 있었다. 서울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사나 학생에게 이러한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학교 교육은 교사의 자질과 환경에 크게 좌우되는 것 같다.
그런데 군사 문화의 잔재가 거의 없어졌을 요즈음에 학교 폭력과 왕따가 크게 문제 되는 건 왜일까? 교사의 권위가 크게 떨어져서 선생이 학생에게 매 맞는 일도 드물지 않다던데. 폭력은 조폭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고 왕따는 일본 저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아도 중학교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전혀 없다. 대학교에 다닐 때 우연히 연락이 닿아 만난 친구들이 몇 있었어도 바로 잊혀졌고 개 털보 선생의 근황도 전혀 듣지 못했다. 졸업 후 40여 년이 지났어도 모교를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여학생은 주위에 없었지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얘기는 우리 중학교 때는 흔한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