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후국. 또는 후고구려국이라 불리는 나라는 발해와 같은 시기에 고구려를 계승하여 존속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체로 요동반도쪽에 위치해있다는 견해가 있을 뿐, 현재까지 깊이 있는 연구가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홍길동도서관 사이트를 운영하는 이상운 님(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생)의 글이 있기에 옮겨왔습니다.
아래 글에 대해서 나는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참고할 많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옮겨보았습니다. 고구려후국의 자료라고 명시한 것 중에 일부는 발해를 의미하는데 이를 고구려후국이라고 명시한 것이나, 또는 지명고증에서 몇가지 무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구려후국에 대해서 이만큼 연구한 글이 있다는 자체가 반가웠습니다. 참고로 이상운 님은 소수민족 지역경제를 전공하기 때문에 역사 전공자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 회원님들의 역사 인식의 폭을 넓혀주는 글이라고 생각되어 옮겨왔을 뿐입니다.
이상운 님에게 사전 양해를 받지 못했지만, 악의가 아닌 선의로 받아줄 것이라고 믿고 퍼온 것입니다.
1.<고구려후국>의 존립
발해존립 전기간 그 서남지역에 <고구려후국>이 서있었다. <고구려후국>은 발해국의 중앙정부에 직속되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역은 발해국영역의 뗄 수 없는 한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고구려후국>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못하였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내외학계에서 발해의 <고구려후국>에 대한 연구가 겨우 시작되게 되었다.
<고구려후국>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아직도 일부 학자들속에서도 그 존립여부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편역사발전을 위하여 역사연구에서 공백으로 되고 있는 <고구려후국>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키는 것은 민족사연구분야에서 절박한 문제로 나서고 있다. 특히 발해의 서남부지역의 영역문제를 밝히는 이 글에서 그 존립문제를 밝히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도 선차적인 요구로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후국>의 존립문제와 관련하여 발해의 서남변이 각각 다르게 그어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해의 서남부지역을 논하기에 앞서 그 지역에 위치한 <고구려후국>의 존립문제에 대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오늘의 평안남도의 서부지역과 요동지역에는 고려(고구려)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서있었다. 이 나라를 동명성왕이 세운 고구려(고려라고도 한다. 기원전 277-기원668년)나 왕건이 세운 고려국(918년-1392년)과 구별하여 고려라는 이름을 가진 발해의 후국이라는 뜻에서 <고구려후국>이라고 부른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아직 왕건이 세운 고려국이 역사무대에 등장하기 이전시기부터의 역사기록에 <고려>라는 나라이름이 자주 보이는데 이 <고려>(<고구려후국>)의 역사를 밝히는 것은 비단 그 역사를 해명하는데서 뿐 아니라 발해의 영역문제를 전면적으로 밝히는데 기여할 수 있다. 지금도 이러저러한 부당한 자료를 들고 나오면서 <고구려후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고구려후국>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비단 영역문제해명에 이바지할 뿐 아니라 발해 영역을 왜소화하려는 그릇된 견해에 대한 타격으로 될 것이다.
최근 시기에 이르기까지 <고구려후국>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초보적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역사자료가 매우 적은 것과 관련된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 선행 연구자들의 고심어린 연구에 의하여 이 문제에 대한 연구성과들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성과에 기초하여 <고구려후국>의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후국>의 존립과 수도, 영역에 대하여 서술하려고 한다.
먼저 <고구려후국>의 존립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이 시기 기록에 나오는 <고려(고구려)>관계기사가운데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을 회유무마하며 이 지역을 계속 점령하기 위하여 당나라가 옛 고구려의 마지막왕 보장왕과 그의 아들 고덕무, 손자 고보원과 그 밖의 옛 고구려왕족들을 각각 요동지방에 파견하여 세운 나라 아닌 <나라>에 대하여 전하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그 존립문제를 밝히기 위하여서는 그러한 자료를 가려내는 것이 선차적인 문제로 나선다.
<고구려후국>의 존립에 대하여 주장하는 일부 일본인학자들 가운데는 고덕무의 <안동도독>임명을 놓고 소고구려국(<고구려후국>을 이렇게 명명하였다.)의 건립과 직접 관련시켜 고찰하는 사람도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유민은 나라가 멸망한 후 고토수복을 위하여 당나라점령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장기간에 걸쳐 줄기차게 벌려왔다. 그리하여 모두 옛 고구려지역에서 당나라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이 치렬하게 벌어졌으며 동모산일대와 평안도 성천지방에서는 점차 그들이 큰 정치세력으로 단합되기 시작하였고 반침략적인 권력기구를 형성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투쟁이 가장 치렬하게 벌어졌던 성천에는 고려소국이 수립되었다. 고려소국은 698년 발해황제국가가 형성된후에는 그 후국으로 되었다.
당나라 침략세력을 반대하는 투쟁이 가장 치렬하게 벌어진곳에 건립된 <고려국>은 응당 고구려유민들의 당나라를 반대하는 투쟁과정에 건립되었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앞에서 본 일본학자는 <고려국>의 왕을 당나라의 <요동도독부>의 장관과 동일시하였으며, 따라서 이 나라가 당나라의 <원조>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즉 당나라의 이족통치수법의 기미정책의 산물로 보았다.
<고려국>에 대한 그의 그릇된 견해는 사료적안받침이 없는데다가 국가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초래된 것이다.
그는 <자치통감> 권202 당기 의봉 원년(677년) 2월 정사조에 <공부상서 고장(보장왕-인용자)으로써 요동주도독을 삼고 조선왕을 봉하였다.)고 한 기사에 근거하여 <고려국>의 건국년대를 잡고, 그 <나라>가 바로 <소고구려국> 즉 우리가 말하는 <고려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국>은 처음부터 당나라점령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치렬하게 벌린 나라로서 당나라의 기미정책의 산물인 요동주도독 <조선왕>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나라였다.
그는 또한 <책부원귀> 권977 외신부 항부 개원 3년(715년) 2월 조에 실린 고려(고구려)왕 막리지 고문간에 관한 기사를 <고려국>과 관련 시켜보고 있다. 그가 인용한 <책부원귀>의 기사는 아래와 같다. <돌궐 10부락의 좌상 오돌지철과 우상 오노실필오후근 및 고려왕 막리지 고문간과 도독부사대 등이 각각 무리를 이끌고 돌궐로부터 연이어 와서 투항하였는데, 전후 2,000여장(막)이다.>같은 책 권974 외신부 포이 개원 3년 8월조에는 당나라에 투항한 고문간이 요서군왕의 봉작을 받은 기사가 실려있다.
위에서 든 기사에 보이는 고장이나 고문간은 당나라를 반대하는 투쟁과정에 임금으로 된 사람이 아니라 당나라가 이름만 붙여준 <임금>이었으며,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항전을 벌린 <고려국>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은 성격의 기사로서는 <책부원귀> 권964년 외신부 봉책 당나라 현종 선천2년(713년) 2월조에 실린 고려(고구려)의 대수령 고정부를 특진으로 봉한 내용을 전한 기록을 더 들수 있다.
당나라는 고정부를 특진으로 봉한 같은 달에 대조영을 <발해국왕>으로 봉하는 어리석은 놀음을 벌리었다. 이것은 당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을 분열과 와해시키기 위하여 저들의 주군인 고구려의 이전 왕실귀족 대수령 고정부를 특진으로 임명하여 대조영의 발해국과 대립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취해졌다. 그러므로 고정부가 당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의 지휘자인 <고려국>왕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다. 고정부가 왕자리를 차지한 <고려국(고구려국)>은 있은 일도 없다. 그것은 다만 당나라가 고구려유민들의 세력을 와해 시키기 위하여 조작한데 지나지 않았다.
위에서 든 실례들에서 본바와 같이 이 시기 기록에 나오는 <고려(고구려)>가 <고려국>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역사연구가들은 진짜 <고려국>관련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다루어야 역사의 진실을 바로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면 <고려국>에 대하여 전하는 기사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제부터 그것을 하나하나 보기로 하자.
<고려국>과 관련이 있는 <고려>라는 나라이름이 역사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684년이후의 일이다. 이 <고려>기사는 고구려가 망한 후 16년만에, 대조영의 발해국이 서기 14년 앞서 보이는 기사로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이에 대하여 <책부원귀> 권358 장수부 입공 이효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이효일은 옥검위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측천무후의 문명 원년(684년)에 이경업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효일에게 명령하여 이를 격파하게 하여 7,000여명의 목을 베었다. ....경업은 급해맞아 그 아우 이교유와 당지기, 두영인, 낙빈왕 등과 더불어 경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강도에 도망치고 그 처자들을 데리고, 윤주에 도망쳤으며, 또한 배를 타고 <고려>에 도망하려고 하였다.>
이 기사는 당나라 측천무후의 전제정치가 더욱 심하여져 극도에 이르게 되자 그를 제거하기 위한 당나라 종실과 대신들의 반대가 비등해져가던 가운데 그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진 이경업의 난(亂)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다.
684년에 들어와 오래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고종이 죽자 아들 중종이 즉위하자 고종의 황후 측전무후는 그를 내쫓고 중종의 아우 예종을 왕자리에 올려놓고 전제정치를 더욱 강화할데 대한 꾀임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렇게 되자 적지 않은 종실귀족들과 고관들이 음으로 양으로 그의 집권을 반대하여 나섰다. 이경업은 바로 그들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는 684년 즉 측천무후의 광택 원년에 양주에 본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옥검위대장군으로 임명된 이효익이 30만 대군을 끌고 진격해오자 크게 패하여 강도에 도망쳐갔고 처자들을 데리고 이미 차지하였던 윤주에 도망쳐갔다가 거기에서 다시 배를 타고 <고려>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고려>에 옮겨가기전에 정부군의 추격으로 해릉경계에서 해풍을 만나 곤경에 빠진데다가 휘하장수 왕니상에 의하여 살해당하였으므로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자치통감> 권203 당기 측천무후 광택 원년 11월 경신)
이경업이 도망가려고 한 <고려>는 어떤 나라이며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겠는가. 그는 도망은 목숨을 보존하려는데 있었던 것만큼 그가 가려고 한 나라는 당나라세력이 미치는 곳이 아니고 그 반대세력이 지배하는 곳이였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도망가려고 한 <고려>는 본래부터 당나라를 반대하는 기운이 농후한 고구려유민들의 거주지역이었다. 이경업은 당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이 자리잡고 있던 이러한 나라 즉 <고려>에 가야만 당나라의 징벌을 면하고 목숨을 도본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기사는 이경업이 배를 타고 도망가려고 한 <고려>가 어느곳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가 떠난 강소성일대에서 당나라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배를 타고 갈만한 데는 당나라본토의 바닷가 지역이 아니라 요서 또는 요동이나 한반도의 서해안일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요서지방은 당나라의 군대가 종종 드나드는 곳이며 한반도의 중부이남 바닷가 지역은 후기신라가 차지한 곳이었으므로 그가 피신하려는 <고려>는 요동반도나 조선반도 북부의 서해안 지역이였을수 있다.
발해국을 <고려>로 표현한 기사도 있으나 발해국은 서해안에 5경 15부에 속한 본토영역은 얼마 가지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이경업이 피신하여가려고 한 <고려>는 발해본토가 아니였을 것이다. <고구려후국>의 영역을 찍어서 론하는 것은 뒤로 미루더라도 위에서 본 기사를 통하여 이경업이 도망가려고 한 <고려>의 위치를 요동이나 한반도의 서북부로 추론할 수 있다.
8-9세기에 들어와서도 <고려국>에 대하여 전하는 기사가 보인다.
<당회요>권100 잡록 성력 3년 (700년) 3월 6일조에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동쪽으로 고려국에 이르고 남쪽으로 진랍국(안남의 남쪽, 샴의 동쪽에 위치)에 이르며 서쪽으로 파사(이란), 토번 및 견곤(흉노의 서쪽)도독부에 이르고 북쪽으로 거란, 돌궐, 말갈(발해-인용자)에 이르는데 모두 8개 번(이족)이 있다. 이밖에 멀리 떨어진곳은 이역으로 치며 그 사신들에게는 해당 규정에 따라 응당료를 지불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700년경에 당나라의 동쪽에 <고려>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사에서 <고려>가 당나라의 동쪽에 있다고 한 것은 앞에서 든 684년 기사에 당나라의 이경업이 도망가려고 한 <고려>가 바로 옛 고구려의 영토 즉 <고려국>지역이였다는 것을 다시금 확증하여준다고 본다. 다음으로 이 기사는 발해의 통치밑에 있던 <고려국>이 독자적으로 대외무역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사에서 <요>를 준다고 한 것은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외국 무역에 대하여 상투적으로 써오는 필법이다.
위에서 든 기사는 8-9세기에 <고려(고구려)>라는 나라가 고구려가 망한 후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려후국>에 대하여 전하는 기사들을 좀 더 들겠다.
1.<책부원귀>권972 외신부 조공조에는 <원화 13년(818년) 4월 고려에서 악기 및 악공 2부를 보내왔다.>고 하였다.
2.<책부원귀>권970 외신부 조공조에도 당나라 <중종 경룡 4년(710년) 4월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내조하였다.>고 하였다.
3.<신당서>권220 고려전에는 <원화말(820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악공을 바쳤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4.<당회요>권95 고구려조에도 <원화 13년(818년) 그 나라에서 악물 2부를 보내왔다.>고 하는 기사가 있다.
5.<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흥덕왕 2년(827년) 3월조에도 <고구려중 구덕이 당나라에 들어가 불경을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여러 절간 중들을 모이게 하고 그를 영접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든 기사들에 나오는 <고려> 또는 <고구려>는 요동반도의 남단과 조선반도북부의 서부지역에 위치하였던 발해의 <고구려후국>을 의미하는 것이였다. <책부원귀>,<당회요>,<삼국사기> 등에실린 <고려> 또는 <고구려>의 기사는 668년에 고구려가 망한 다음 918년에 고려가 성립되기전까지의 것을 취급한 것이므로 그것은 모두 요동반도의 남단과 한반도북부의 서부에 존재한 발해국의 후국이였던 <고구려후국>을 가리키는 것이였다.
**827년에는 삼국의 하나였던 고구려가 없었으므로 고구려중이라고 한 사람은 <고구려후국>의 중으로서 당나라에 갔다가 후기신라에 온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2.수도
<고구려후국>의 영역을 취급하는 것만큼 수도문제는 취급하지 않아도 무방하겠지만, 이 나라의 존립에 대하여 좀 더 명확한 표상을 주기 위하여 수도의 위치를 밝히려고 한다.
역사기록과 유적, 유물 자료에 의하면 고려후국이 차지한 영내에는 수도로 비정할 만한 조건을 갖춘 2개의 지점이 있다. 하나는 성천의 흘골성이며 다른 하나는 신의주의 국내성이다. 그러나 <고구려후국>안에 같은 시기에 2개의 수도가 나란히 있을 수 없으며 그것들은 각각 시기를 달리하여 존재하였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자세히 보기로 하자.
<신증동국여지승람>권54 성천도호부 성곽조 흘골산성의 세주에는 <(흘골산성은) 강선루의 서쪽에 있다. 세상에 송양이 쌓은것이라고 전하는데 천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다. ... 궁궐터가 남아있다.>고 하였다.
최근에 이곳 궁궐터에 대한 현지조사에 의하면 흘골성과 그 일대에서 나온 유물들은 고구려시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 견해는 정확하다고 본다.
그런데 고구려시기에 오늘의 성천이 수도로 된 일이 없고 부수도로 된 일도 없었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 시기에도 이곳은 수도 또는 부수도로 된 일이 없다. 이처럼 흘곡성의 궁궐터가 고구려의 것도 아니며 고려와 조선의 것도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도대체 어느시기의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런데 이 궁궐터와 그곳에서 나온 유물들을 고구려의 것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고구려 멸망직후 10여년 이후의 것으로 보면 유적, 유물의 성격과 편년에서도 모순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유적에 대하여서는 고구려가 망한 후 발해건국전까지의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다음으로 국내성에 대하여 보자
<고구려후국>이 차지한 곳으로 보이는 영내에는 흘곡성외에 또하나의 수도가 있었다. 그것은 압록강하구에 위치한 국내성이였다.
국내성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들을 <고려사>와 <조선실록>을 비롯한 역사책들과 지리책들에 있다.
<고려사>권82 병지 성보 덕종 2년(1033년)조에 평장사 유소가 쌓은 장성에 대하여 서술하면서 <북쪽경계의 관방을 설치하였는데, 서해바닷가의 옛 국내성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1,000여리에 이른다.>고 하였다. <세종실록>권88 22년2월 신묘조의 기사에 <북쪽경계의 관방은 서해변의 옛 국내성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에 흘러드는 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른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 권95 24년 정월 기묘조의 기사에는 <의주(오늘의 신의주)>야일개의 남쪽 장성아래 바위에 새긴 글에 경인년 11월22일... 이 돌의 남쪽 60자되는 곳에 향나무를 파묻었다.>고 하였다.
이 밖에 <동국여지승람> 권53 의주 고적조에도 국내성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다.
위에서 든 기사들에 의하면 의주(신의주)의 고린주 즉 야일개(야일포)지방에 국내성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의주의 국내성이 고구려 시기의 수도 국내성이였겠는가 아니면 다른 그 어떤 성이였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고구려의 국내성이 즙안에 있었으므로 의주의 국내성은 고구려국 당시의 수도였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학게에서 공인된 사실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과 구별되는 국내성문제는 고구려의 후신으로 자처한 <고구려후국>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쉽게 풀릴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고구려시기의 소도 국내성과 함께 <고구려후국>의 수도 국내성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두 개의 국내성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데서부터 지난 시기 적지 않은 사가들이 그 지명에서의 실수를 하였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명나라때의 진강부를 고구려시기의 국내성으로 보았으며(<연암선집> 도강록) 이익은 의주대안의 압록강서쪽지역에서 고구려의 국내성을 찾았다. (<성호새설>권1 하 지리문 발해황룡) 이 밖에 안정복은 올라산성과 위나암성의 음이 비슷하다 하여 올라산성을 국내성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모두 고구려에만 국내성이 있었으며 그것도 한곳에만 있는 것으로 본데서 잘못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후국>은 성천의 흘골성과 의주의 국내성 즉 두 개의 수도성에 대한 기록과 유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개의 수도성을 동시에 있은 것으로 보겠는가 또는 시기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의 견해로서는 어떤 점에서 보나 <고구려후국>은 두 개의 수도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고 본다. 그중 어느 하나가 그 앞시기의 수도이며, 다른 하나가 그 뒤시기의 수도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앞시기에는 성천의 흘골성에 수도가 있었으며, 그것이 뒤날의 의주(신의주) 야일개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추론하는 근거의 하나는 <고구려후국>이 나라의 이름과 수도의 이름을 고구려의 것을 그대로 본땄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후국>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의 이름을 그대로 본딴 것이 틀림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첫 번째 수도이름을 고구려의 것을 본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첫 번째 수도로 보는 흘골성은 고구려의 첫 수도인 흘승골성과 이름이 너무나도 비슷하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첫 수도를 흘승골성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승>자가 잘못되여 끼여들었을 수 있고 다른 기록들에서는 <승>자가 빠졌을 수 있다. 그런데 <승>자가 빠지거나 끼여든 것은 문제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흘승골성이나 흘골성은 모두 졸본 또는 졸본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졸본천을 비류강으로 보고 흘골산성을 졸본천이 감돌아드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권54 성천도호부조)
고구려의 첫 수도 이름인 흘승골성과 <고구려후국>의 수도이름인 흘골성을 같은 것으로 보는 근거는 수도의 이름이 같은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천의 흘골성근처에는 고구려의 건국전설과 관련되는 이름이 매우 많이 붙어있다.
객사인 동명관과 동명성왕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건넜다는 강선교 및 그것과 관련된 누정인 강선루, 하늘에 올라갈 때 건넜다는 승천교가 있을 뿐아니라 골령, 해원, 냥곡 등 고구려초기의 역사이야기를 전하는 고구려 수도근처의 기명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흘골성근처에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후국>사람들이 첫 수도를 건설하면서 고구려건국초기의 수도명칭뿐아니라 건국자 동명성왕과 관련되는 유적을 이곳에 다시 그대로 옮겨놓으려는 염원과 관련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추측된다. 이러한 추측이 정확하다면 흘골성은 <고구려후국>의 첫 수도인 것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후국>은 수도를 옮기면서 <삼국사기>에서 <(흘승골성에서) 국내성에 수도를 옮겼다.>(<삼국사기>권13 유리명왕 22년 겨울 10월조)고 한 그 사실자체까지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추론에 근거하여 고구려가 졸본성(흘승골성)에서 국내성에 옮긴 것과 똑같이 <고구려후국>도 졸본성(흘골성)에서 오늘의 신의주 야일개-국내성에 옮긴 것으로 자기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후국>사람들이 성천의 흘골성(졸본성)에서 신의주 국내성으로 옮긴 것으로 자기 나라 역사를 서술한 것을 후세 자가들이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서술한데 <고구려후국>의 역사를 정확히 전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성천에 <고구려후국>의 수도를 정하였을 당시에는 압록강이 남의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는 사업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며 다른 항전세력들도 이웃에 남아있었던 점에서도 수도 위치로서 흘골성이 매우 적합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고구려유민들이 한반도에서는 물론 요동지방에 있던 당나라세력 즉 <안동도호부>를 몰아내고 요동지방의 고구려 옛 땅을 많이 수복한 후 <고구려후국>은 정치적 중심인 수도를 나라의 중심지역인 국내성에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고구려후국>은 요동지방의 인민들을 관할하에 넣고 통치하기 위하여 수도를 신의주지방으로 옮기고 그 명칭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름을 본따서 국내성으로 불렀을 것이다. <고구려후국>은 요동지방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영역이 확대된 조건에서 수도를 졸본성(성천)에서 북쪽으로 옮기지 않고서는 확대된 영역과 그곳 주민을 통치하기 어려웠다. 물론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역사지리책에 수도를 옮긴데 대하여 직접 전하는 기사가 없다. 그러나 <고구려후국>이 모든 면에서 고구려의 것을 본딴 것으로 보아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할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고구려후국>의 졸본성궁궐터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으며, 성이 도성으로서도 완비되지 못한 것을 보면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있은 시기도 10여년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제 2 절 <고구려후국>의 동변과 북변
<고구려후국>의 영역에 규정하는 네변가운데서 서변은 바다이며 남변은 발해의 남변에서 서술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 동변과 북변에 대하여서만 취급하겠다.
뒷날의 함경도와 평안도를 가르는 계선이 바로 발해때 <고구려후국>의 봉변이다. 두 도의 경계에 위치한 낭림산맥과 북대봉산맥을 경계선으로 하여 발해때 <고구려후국>과 남경남해부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지방의 역사지리에 대하여 전하는 후세의 기록들을 낭림산맥과 북대봉산맥의 서쪽지역과 동쪽지역을 갈라서 달리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낭림산맥과 북대봉산맥에서 서쪽과 동쪽 지역 군, 현들의 건치연혁기사들은 서술형식과 내용이 서로 다르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두 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각 군, 현의 연혁기사에는 고구려시기의 연혁을 밝힌 다음 <여진이 차지하였다.>고 씌여있고, 계속하여 고려와 조선 시기의 연혁이 실려있다.
이 서술은 물론 부정확하다. 고구려의 멸망한 후 이 지역은 발해의 5경15부의 하나인 남경남해부의 관내였으며, 그때까지만 하여도 여진이 기여들어 세력을 뻗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여진이 이 지역에 밀려들어 일정한 세력지반을 가지게 된 것은 발해 멸망 후 아직 왕건의 고려국이 이 지역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원만히 실현하기 어려웠던 어느 한 시기였다.
<고려사>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자들이 고구려 멸망후 이 지역 군, 현을 여진이 차지하였다고 서술한 것은 발해를 우리나라의 민족사에서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였던 그릇된 역사관과 관련된다.
이 책의 편자들이 고구려 멸망후 고려가 서기까지의 시기에 이지역이 발해의 영역에 속하였던 사실을 외면하고 그때부터 벌써 여진이 이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서술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심히 외곡한 매우 엄중한 죄과를 범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발해를 외면한 실례는 <신증동국여지승람>함경도 길성현(길주)의 건치연혁조에서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이 차지하였다.>고 한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실례는 낭림산맥과 북대봉산맥의 동쪽지역에 위치한 모든 군, 현의 건치연혁서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산맥의 서쪽지역에는 역사상 단 한번도 여진이 밀려들어와 세력지반을 닦은 일이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지역 각 군, 현의 건치연혁에는 <여진이 차지하였다.>고 한 서술이 없는 대신 <고려>관계연혁이 서술되여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고려>라고 한 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를 가리킨 것인가?.
두 산맥의 서쪽지역은 봉건시기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고구려가 차지하였고, 그 멸망후에는 발해에 속한 <고구려후국>이 차지하였으며, 그후에는 왕건의 고려국이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위로 소급하여 <고구려후국>과 고구려(고려)의 세 나라가 모두 고려라느 이름을 가지고 이 지역의 영토와 주민을 다스렸다. 그러므로 그저 고려라고만 하면 왕조의 시대구분과 그에 대한 이해에서 일정한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고려사>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역사지리책들에서는 후국시기의 군, 현 소속을 <본래 고려에 속한 땅인데>라고 표현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연속적으로, 계기적으로 존속한 4개의 고려국을 구분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후국에 선행한 고려는 고구려라고 하여 후세의 것과 구별할 수 있고, 또 고려는 장기간 강국으로 존립하였으므로 추가적인 설명이 없이도 그것대로 많은 경우 통할 수 있었으나, <고구려후국>만은 <본래고려>라고 하여 <본래>라는 말을 덧붙여야만 그 시기가 명백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고 처음으로 쓴 <고려사> 지리지와 그것을 그대로 본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자들은 시기와 지역을 정확히 구분하기 위하여 고구려->발해(<고구려후국>)->고려로 내려오면서 민족사가 계통적으로 이어진 지역 즉 여진이 중간에 끼여든 일이 없는 영서쪽지역을 발해멸망후 여진이 침입한 일이 있는 영동쪽지역과 엄밀히 구별하여 서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사>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군, 현 건치연혁서술에서는 발해멸망 후 여진이 한때 낭림산맥과 북대봉산맥의 이동지역의 군, 현을 차지한 사실이 빠짐없이 밝혀져 있다. 함흥에서 온성에 이르는 함경도지방의 모든 군, 현이 연혁이 이런 식으로 서술되여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48 함경도 함흥부의 건치연혁조에 <본래 고구려의 옛땅이었는데 오랫동안 동여진이 살고 있었다.>고 하였다. 함흥에서 장진(오늘의 낭림)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두 산맥의 동쪽지역은 이 책 편찬당시 함흥에 속하였으며 영서쪽에 위치한 <고구려후국> 또한 이 산맥들을 계선으로 영동쪽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같은 책 권50 온성도호부의 건치연혁조에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이었는데 여진이 틈을 타서 들어와서 살고 지명을 다온평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낭림산맥과 북대봉산맥의 바로 서쪽에 산맥을 따라 평행으로 줄지어 포친된 군, 현들의 연혁은 이와는 상반되게 서술되여 있다.
맹산-<신증동국여지승람>권55 맹산현 건치연혁조에 <본래 고려의 철옹성이였는데, 현종 10년에 맹주로 명하였다.>고 하였다.
덕천-같은 책 권54 덕천군 건치연혁조에는 <본래 고려의 요원군이였는데 목종 4년에 덕주방어사로 명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연원-같은 책 권55 연원군 건치연혁조에도 <본래 고려의 연원진이였는데, 태조 5년에 영천현에 속하였다.>고 하였다.
희천군-같은 책 권54 희천군 건치연혁조에서는 <본래 고려의 청새진이였는데 고종 4년에 ...위주방어사로 승격되였다.>라는 기사를 남기었다.
이 군, 현들의 건치연혁서술은 낭림산맥과 북대봉산맥 이동지역의 건치연혁서술형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지역에는 고구려멸망후 곧 <고구려후국>이 서있었으므로 여진이 밀려들어와 발을 붙이고 세력을 뻗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의 건치연혁서술에서 차이나는 것은 <동국여지승람>의 자료작업을 담당한 사람들이 도별로 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서는 그러한 지방적차이가 거의 없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들은 모든 군, 현의 건치연혁을 같은 틀에 넣고 일률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개의 도안의 군, 현 건치연혁에서도 같은 서술형식을 취하지 않은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실례로 평안도를 들면 <고구려후국>이 위치하였던 지역과 여진이 옮겨와 살고 있었던 적유령이북 군, 현의 건치연혁서술이 차이나며 황해도의 경우에는 황주와 그 관하 3개 영현의 건 치연혁서술이 이여의 군, 현의 것과 서로 다르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적유령이북 군, 현의 건치연혁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산군(초산군)-<신증동국여지승람> 권55 이산군조에 <본래 여진이 살던 두모리이다. 고려공민왕때부터 인구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으며, 조선의 태종 2년에 이주라고 명하였다.>고 하였다.
벽동군-같은 책 권55 벽동군 건치연혁조에는 <본래 여진이 살던 임토, 벽단 땅인데 고려공민왕 6년에 이성만호 김진 등을 파견하여 이를 물리치고 임토를 음당으로 고쳐 벽단에 소속시키고 남계의 주민들을 뽑아서 그 호구를 충실하게 하였다. 조선의 태종 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하였다.>고 하였다.
강계-같은 책, 강계도호부의 건치연혁조에서는 <옛날 독로강장(자강)이라고 하였는데, 고려 공민왕 10년에 만호를 두었다.>는 기록을 남기였다.
위에서 든 기사들에 의하면 발해멸망후 이산(초산), 벽동, 강계 지역에는 여진이 들어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 권58 지리지3에서는 그 바로 남쪽에 위치한 군, 현의 건치연혁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에 실린 기사들을 들겠다.
정주-<정주는 본래 고려의 송산현인데 덕종 2년에 성을 쌓았다....>
인주-<인주는 본래 고려의 영제현이다. 현종 9년에 인주방어사로 명하였다.>
의주-<의주는 본래 고려의 용만현이다....>
삭주-<삭주는 본래 고려의 영새현인데 현종 9년에 삭주방어사를 칭하였다.>
창주-<창주는 본래 고려의 장정현인데 정종 원년에 재전에 성을 쌓고 민호를 이주시켜 창주방어사로 하였다.>
운주(운산)-<운주는 본래 고려의 운중군인데 광종때 위화진으로 되었다.>
이 군, 현들은 모두 <고구려후국>에 속한 지역으로써 군, 현의 건치연혁서술이 적유령산맥의 이북지역의 건치연혁서술과는 다르다. 이것은 <고구려후국>의 북쪽경계가 희천, 향산, 운산에서 창성에 이르며, 창성에서 압록강을 따라 계속 서쪽으로 가는 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구려후국>의 북변은 압록강어구에까지 가지 않고 강하구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으로 뻗어 개주 즉 봉황성의 동쪽지점을 지나 천산산맥에 이르며 천산산맥의 줄기를 따라 요동반도의 영주에 이르는 선이다.
<고구려후국>은 천산산맥을 경계로 하여 발해본국에 속한 안원부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발해국존립시기에 요동반도는 남쪽이 <고구려후국>에 속하고 그 북쪽지역은 안원부에 속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유령산맥과 피난덕산맥의 남쪽지역이 당시 <고구려후국>에 속하였다는 것은 이 지역에 있던 군, 현의 건치연혁서술에서 모두 <본래 고려땅이다.>라고 한 것을 보아서도 명백히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본래 고려땅이였는데>라고 한 기사가운데는 양덕현에서처럼 고려시기까지 염두에 두고 쓴 것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고구려후국> 시기를 주로 염두에 두고 건치연혁을 서술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본래 고려땅이였는데>라고 한 기사를 <고구려후국> 시기의 것을 전하는 것으로 보면 이제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고구려후국>의 지방행정통치단위의 명칭과 그 분포에 대하여 정확히 밝힐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고구려후국>은 그 동쪽에서는 낭림산맥과 북대봉산맥을 경계로 하여 남경남해부와 접하고 그 북쪽에서는 적유령산맥과 피난덕산맥을 경계로 하였다. 그것은 창성이서에서는 강하구에 이르기까지 압록강을 따라갔으며, 강하구에서 강을 건너 북으로 봉황성 동쪽을 경유하여 천산산맥에 이르고 이 산맥을 따라 바다에 이르는 영줄기가 그 북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후국>의 북계는 동쪽에서는 서경압록부와 서쪽에서는 안원부와 각각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발해의 영역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발해의 서변과 서남부영역이 밝혀짐으로써 오늘의 평안남도북도의 서부지역과 요동반도의 넓은 지역은 발해국의 불가분리의 영토였다는 것이 명백해지게 되었다.
또한 발해의 북변이 밝혀져 발해의 영역이 오호쯔크해연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해명됨으로써 발해영역이 매우 광대하였다는 것이 논증되었다.
그리하여 영역문제를 놓고 발해국을 왜소화하려는 부당한 시도들에 대하여 타격을 줄 수 있게 되었으며, 주민구성문제와 발해고토에 선 <소국>들의 역사를 지역별로 정확히 고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첫댓글글이 올라온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뒤늦게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런 방식으로도 역사적 가능성을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좋은 자료를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리며, 이 논문을 쓰신 분도 더 발전하셔서 향후에 연구를 발전적으로 진행해주시기를 빌어봅니다.
한가지 드는 의문은, 이 논문에 따른다면 고려후국의 동쪽 경계가 압록부(서경)라면 북쪽 또는 서쪽 경계를 안원부라고 쓴 부분인데, 현재 한국 주류학계 비정으로는 장령부에 해당하는 점이네요. 안원부 비정이 정확히 되지 못한 때문인지, 안원부 접경설 기록의 근거/출처는 어떤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첫댓글 글이 올라온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뒤늦게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런 방식으로도 역사적 가능성을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좋은 자료를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리며, 이 논문을 쓰신 분도 더 발전하셔서 향후에 연구를 발전적으로 진행해주시기를 빌어봅니다.
한가지 드는 의문은, 이 논문에 따른다면 고려후국의 동쪽 경계가 압록부(서경)라면 북쪽 또는 서쪽 경계를 안원부라고 쓴 부분인데, 현재 한국 주류학계 비정으로는 장령부에 해당하는 점이네요. 안원부 비정이 정확히 되지 못한 때문인지, 안원부 접경설 기록의 근거/출처는 어떤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시금 흥미로운 논문 소개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