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약도 車若島(1918 ~ 1950)】 "광복군 제3지대 입대 후 부대 교육훈련 및 전방 공작임무 수행"
1918년 9월 8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차영상(車永祥)이다. 1944년 10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일제는 침략전쟁의 전황이 수세에 몰리자 한국인들에게까지 징병제를 강요하였다. 이때 강제 징집되어 평양의 일본군 제30사단 제50치중병(輜重兵) 부대를 거쳐 중국으로 차출되었다. 강제 징병과 폭력이 만연한 일본군의 내무생활로 인해 복무하는 것에 환멸감을 느끼던 중, 부대 내 한국인 병사들과 뜻을 같이하여 수차례 탈출을 기도하였다.
1944년 5월 18일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같은 평안도 출신 부대원이었던 노능서(魯能瑞)·승영호(承永祜) 등과 함께 완전무장 상태로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 국민혁명군 측에 투항하였다. 1944년 6월 중국 국민당이 한국인 청년간부 육성을 위해 안후이성(安徽省) 린취안(臨泉)의 중앙육군군관학교 분교 내에 설립한 한국광복군훈련반 제1기로 입소하여 5개월간 초급 간부훈련을 이수하고 국민혁명군 중위로 정식 임관하였다.
당시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속되었다가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투항한 한국인 병사들이 늘어남에 따라, 안후이성 일대에서 첩보·연락과 동지 초모(招募) 활동을 담당하던 김학규(金學奎)를 대장으로 제3지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때 전이호(全履鎬)·변영근(邊榮根) 등과 함께 김학규에게 발탁되어 1944년 11월부터 지대 창설 기간(基幹) 요원으로서 군사훈련과 정훈(政訓)을 망라한 교육 분야를 담당하였다. 부대 편제가 확정되자 제3지대 1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전방 공작임무에 자원하여 1945년 5월 후베이성(湖北省) 우리뎬(五里店)에서 김은석(金銀錫)·백운룡(白雲龍)과 함께 미군 항공지원 유도를 위한 무선중계소 설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한커우(漢口) 일대에서 현지 국민혁명군과 함께 통신망 구축과 유격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우리뎬 일대의 특파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김일수(金日洙)·정일한(鄭一漢) 등과 함께 일본군 무장해제 작업과 관할 내 치안 유지, 한국인들의 신변 보호와 귀국 절차 원호를 담당하다가 1946년 상하이(上海)를 거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