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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南民戰)과 민투(民鬪)를 통해 본 이재오 고찰
요즘 이곳 조토마에서 하도 이재오를 남민전총책이니 우짜니 하는 헛소리하는 분들이 있어서 명확한 이해를
돕고자 남민전과 민투에 대해 소개를 하며 진정한 민주투사였던 이재오님에게 신군부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이재오님을억울하게 옥살이 한 사실을 확실하게 교육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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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南民戰)과 민투(民鬪)
1.먼저 남민전(南民戰)과 민투(民鬪)와는 분명 전현 다른 조직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남민전과 민투조직에 대한
명확한 고찰을 통하여 당시,이재오의원이 얼마나 핍박받은 가운데서도 이처럼 위대한 인물로 각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가를 말하고자 한다.아울러, 당시 자신의 신문에 난 사진을 누가 찢거나 밟아도, 혹은 식당에서 누가 박정희를
욕하는 소리만 나와도 잡아다가 감옥에 쳐넣었던 무소불위의 독재자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그에게 양육되어 온
보안사령관이란 직에 있는 사람이 참모총장을 어찌하여 버리는 하극상의 대부 전두환 신군부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얼마나 헌법에 명시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인권을 탄압하고 유린하며 왔느가를 제대로
본인은 명확하게 알리고자 한다...
2,본인은 박통이 죽기전 2년전 부터 신군부의 전두환정권,노태우정권,그리고 민주화정부인 김영삼정권,
자칭 평화론자인 김대중정권,그리고 말도 끄집어 내기 싫은 떠벌이 노무현정권이 집권하는 시기까지 나름대로
배우고 군에서 주야장천 이념교육에 혈안이 된 군사정권의 충노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으로서 오늘
명백히 본인이 알고 있는 박통,전통,노통의 군사 3골수통 정권이 얼마나 인권탄압을 하였고, 얼마나 사람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담보로 하였으며,자신들이 비리를 감추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민주투사들을 죽이고, 감옥에 넣고,
국민을 매도하여 왔던가를 명명백백 고발하고자 한다.
3.먼저 이해를 돕기위해 군사정권의 최대 골수통 두사람의 이력을 소개한다.
가.박정희
(1)1917.11.14일 정사년생으로 5남2녀중 막내.
(2)1942년 만주 신경군관학교수료.1944년 일본육사졸업 소위임관
(3)1945.해방이전까지 관동군 중위로 복무
*2009.2.7일 박통 독립군토벌이란 친일행적을 편집한 류근찬씨가 무죄로
최종 선고되는 등 박의 친일행적이 명백히 드러났음.
(4)1946년 국군창설가담
(5)1949년 여수.순천10.19 사건때 빨치산에 가담한 경력으로 군법회의 회부
사형선고 .동료장교덕에 감형 석방
(6)이후 문관으로 육본정보국에 근무,6.25전쟁발발에 소령복귀
*이과정에서도 많은 빨치산경력으로 곤란겪음
(7)1953년 육군준장,1961년 소장진급.2군부사령관 보직.
(8)1961.5.16김종필등 육사 8기생을 주축군사혁명 주도
⇒군사정권(국가재건최고회의)
*군정기간 사회단체 해체,용공분자와 깡패 검거소탕,댄스홀/고급요정 폐쇄,
부정축재처리법 공포,생활간소화,문맹퇴치운동실시,화폐개혁,
농어촌고리채 정리,국토경제개발계획 착수등 조국 근대화 전기 마련
(9)1965.한일수교 정상화⇒당시 엄청난 반대 불구 추진
*박통 이전정권에서 35억불의 피해보상액 요구 협상진행중
⇒군사독재정권의 정권장악에서 제1의 요소인 국민의 의식주 해결 빌미와
당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인 기간산업(도로,철도,항만,시설)
육성을 위한 외자필요로 일본과 진행중인 피해보상액 요구
⇒일본의 군부정권의 급속한 당시상황에 피해보상액 8억불(3억불 무상,
기계원조, 5억불 차관도입)에 합의 국교정상화 수립 국민적 졸속
회담으로 반대에 부딪힘.
cf)이때 불합리한 국교수교에 반대한 분들이 바로 이명박,이재오,김문수,
손학규,서청원등 민주화 투사들임.⇒물론 박통은 당연 이들을 감옥에
넣었음은 자명함.
(10)이후 베트남파병,정권연장을 위한 3선개헌을 통해 유신헙법이란 악법 제정
(11)새마을 운동 주창 : 근면,자조,협동이란 구호와 방향제시는 그럴 듯 하였으나 상대적 빈민층에겐
가난의 악순환 초래하는 불합리성을 낳음
(12)유신정권을 통해 절대빈곤 해결엔 기여하였으나, 날로 심화된 상대적 빈부격차와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 및 국민들의 민주화의 거센 요구로 국민지지가 약화되자 정권의 연장을 위해
긴급조치를 통해 민주투사들을 억울하게 감옥에 넣는 대악수를 두게 됨
(13)박정희는 1961.5.16~1979.10.26일 죽기전 까지 군정1년반을 포함, 제5~9대대통령으로서 장장
18년 5개월동안 대한민국의 국권을 맘껏 휘둘러온 조국근대화와 산업화에 끼친 공적이 있는 인물임.
(14)반면,그가 일으킨 월남파병으로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 독일 간호사파병 으로 돌아 오지 못한 동포를 낳고,
4대 의혹사건인 증권파동 부정, 회전당구사건, 워커힐 사건,새나라자동차 사건등의 치유 될 수 없는
부정사건이 일어 났으며,특히 35억불을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 36년과 정신대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졸속한 회담으로 8억불중 3억불은 물건,기계를 가져오다 보니 실제 1/10의 무상지원을 고려하면 7~9년전
이미 전쟁피해보상을 받은 인접 아시아국가인 미얀마,태국,말레이시아,베트남,필리핀, 중국이 적게는 현금으로
3억불에서 15억불을 받은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식민지배를 수십년 더 핍박받고 게다가
위안부들의 피해를 고려한다면 그렇게 졸속하게 한일수교회담을 통해 거지 동냥받듯한 돈만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참고로 당시 기계로 일본 무상원조를 받다 보니 결국 기계가 고장나고 부품이 훼손되면 결국
일본으로부터 그 부품을 가져와야 기계가 작동되다 보니 결국은 또다른 식민지배를 IMF가 터진
1997년까지 경제적 식민지배를 받아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음.
소결론
박정희는 그의 행적을 볼 때 일제 앞잡이 역할을 하였음을 분명 엿볼 수 있고,1949년 10월19일 여수.순천
빨치산 연루된 행적을 볼 때 분명 북괴 공산당 하수인 역할을 한 공산당출신임도 알 수 있다.어찌든 그는
군사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아 당시 초근목피를 연명하던 많은 굶주린 사람을 살리었고, 조국근대화와 산업화에
앞장서와 국운을 세우는 대통령이었음엔 틀림이 없으나, 졸속한 한일수교정상화로 당연히 받을 수 있었던
피해보상을 1/4밖에 받지 못하였으며,4대 의혹사건,새마을 운동의 모순,장기집권을 통한 엄청난 폐단을 낳았고,
긴급조치등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민주투사들을 감옥에 가두는 전횡을 일삼은 많은 공이 있는 반면 많은 과실을
남긴 대통령이었음.
나.전두환
(1)1931.1.18 경남 합천 출생,
(2)1951년 대구공고 졸업
(3)1955년 육사 11기 육군소위 임관
(4)1960 미국육군보병학교 수료
(5)1951.5.15군사혁명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 비서관
(6)1966 제1공수 부단장
(7)1967 이후락 당시 경호실장의 추천으로 수경사 30경비대대장
(8)1969 서총천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
(9)1970년 백마부대 9사단 29연대장
(10)1973년 육군 준장 진급
(11)1976년 경호실 차장보
(12)1977년 육군 소장 진급(156명 동기생중 최초)
(13)1978년 1공수특전여단장 보직
(14)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
(15)1979.10.26 대통령시해사건으로 하나회 주도하 실권 장악
(16)1979.12.12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강제 연행(총격전)
(17)1980년 중장진급
(18)1980.5.18 계엄포고령 10호(게엄 전국 확대 시행)
(19)1980.5.18 5.18광주민주화 운동 진압
(20)1980.8.16 최규하 압박 하야
(21)1980.822 육군대장 예편
(21)1980.8.27 통일주체국민회에서 제 11대대통령 취임
(22)1981.2.25 선거인단 대통령 간접선거.90,2% 득표로 12대 대통령 당선
(23)1983년 아웅산 묘소 참배 테러사건 발생
(24)1988년 4월 13일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직 및 민정당 명예총재직 사퇴
(25)1988년 초,국회청문회 출석 유혈진압과 5공권력비리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로 11월23일 대국민
사죄와 함께 재산헌납 발표,백담사 은둔, 1990.12.30일 하산
(26)12·12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수천억원에 이르는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수감.사형을 구형.
(27)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
(28)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실현.나흘 뒤인
12월 22일 김영삼 정부 특별사면 풀려남.
소결론
이처럼 대외관계와 대북관계 및 스포츠외교 분야에서 다소 진전된 모습을보였으며, 경제부문에서도
3저호황에 힘입어 물가안정·수출신장·대외무역 흑자를 기록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를 나타낸 반면, 대내적으로는
자유를 억압하고 자신의 정권찬탈을 반대 하는 민주화 세력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없는 죄도 가져다
붙이어 죄를 만들어 민주운동을 하는 투사들을 탄압하여 감옥에 넣거나 고문으로 죽게하였고,
사회정화운동이란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인권을 유린하는 등 군사독재정치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 폭군으로서 당시 전두환을 사형을 시켰다면, 이후 정권들이 부정,부패,부도덕을
낳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전두환정권의 군사독재정권은 대한민국 민주정치를 30년이나
후퇴시키는 고려 무신정권이상의 정권이었기에 이땅에 다시는 그런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는 미개한 나라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감시자가 되어야 이땅의 굳건한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릴 것이라 단언하며 지금부터
남민전과 민투를 하나 하나 짚어 보면서 이재오가 남민전과는 상관이 없는 억울한 옥살이로 없는 죄를 신군부에
아부하는 정치검사에 의해 받게 된 과정을 낱낱이 소개하니....이후 이 문제를 논하는 자들이 없기를 분명
밝혀 두는 바이다...
1.南民戰 이란?
南民戰 사건은 북한 金日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남조선 革命을 꾀한 반란사건으로 國家保安法상 反國家團體를 구성한
불법단체로서, 이들은 북한을 理想的(이상적)인 國家로 보는 사람들이 조직한 反국가 단체라고 規定하고 있다.
警察 發表에 따르면 南民戰 사건은 1964년 因革黨, 1974년 民靑學聯 사건의 배우 조종자였던 이재문(당시 45세)을
總責으로 국가보안법,반공법,긴급조치위반자 등이 核을 이루어 점조직 방식으로 運營되어, 그동안 74명을 포섭,
學園가를 中心으로 시중에 浸透해 反정부鬪爭을 표방하면서 社會變亂을 기도하고, 궁극적으로는 北韓의 통일노선을
指向 한 사건이라고 한다.
다시말하면 南民戰은 반외세,반미,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폐지,김일성을 찬양한
친북정권이 바로 南民戰이다...
2.民鬪란?
民鬪(한국민주투쟁위원회)라는 組織은 思想的인 냄새가 없는 단체이나 신군부정권의 앞잡이 박모00공안검사가
이재오를 엮어 넣기 위해서 조사하는과정에서 南民戰의 指示와 操縱을 받는 南民戰 의 行動隊 같은 역할을 한 組織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團體로 신군부가 규정한것인데,이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들인지라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民鬪鬪士들과 민투 관련자들을 自由분방하게 두면 또다른 데모를 통한 주의주장이 發生할 것이 뻔한
이치기에 당시의 獨裁政權의 當爲性에 비위를 맞추기 위한 檢察과 法院이 신군부의 눈치를 보느라 함께 엮어
共産黨을 찬동하는 南民戰 단체사건의 범주에 민투를 포함시키므로써 여러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남민전산하 일부
조직원이 민투에 가입한 흔적을 발견 그것을 가지고 “옳거니~하면서” 자신의 의견에 반한 이재오 민투 組織들을
除去하기 위한 수단으로 南民戰의 예하 단체로 規定하여 처벌한 것이다.
民鬪(한국민주투쟁위원회)는 반군부독재를 규탄,유신헌법을 반대한
민주주의를 표방한 지식인들인 서울시네 중.고교 교사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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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民鬪(한국민주투쟁위원회)조직을 이끌고 있는 이재오 의원은 이미 敎師들의 地下組織인 서울시내
중·고교 교사조직의 민투名譽總裁를 맡은 죄로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구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중에 남민전사건이 터졌는데 분명 민투와 남민전은 성격과 내용이 다른.....즉, 民鬪는 긴급조치 9호로,
南民戰은 국가보안법으로 拘束處理한 것인데...어찌된 것이 신군부의 조작수사로 이재오의원을 남민전
산하단체로 엮은 것이다.
그런 일면의 배경을 보면, 10·26이 일어나고 긴급조치가 解除됐는데,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전두환 정권은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된 民鬪鬪士들을 석방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는데...이재오의원의 석방되었을 때 오는
파급효과가 두려워 어떻게든 그들 신군부정권엔 걸림돌이 될 것은 뻔한 이치, 이재오를 엮어 넣을 방법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침 옥중에 있는 동안에 남민전 조직이 민투조직을 끌어 들이기 위해서 남민전 일부조직이
민투조직에 가입을 한 것이다...
바로 MB연대에 명사랑,명박사랑,등등의 단체에 이것 저것 가입하는 것처럼,남민전이 민투조직을 흡수하기 위하여
남민전단체회원 일부가 민투에 가입한 것인데, 때마침 신군부의 아첨을 하며 그들로 부터 눈치밥을 먹든
박00검사와 강00검사는 어떻게 하면 엮을까를 고심하던차에,이런 일부 남민전 조직이 민투에 가입한 것을 찿아 내어
이것을 가지고 이재오를 얽어 매어 그에게 혹독한 고문과 압박으로 남민전 산하단체로 엮어 구속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신군부政權이 들어서는데 사전 整地作業으로 민주화운동 한 사람들을 감옥에서 내보내지 않고 國家保安法으로
옭아 매기 위하여 남민련 예하단체로 몰아 붙인 것이다....
이것이 충분히 가능하단 것은 밑에서 세부적으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알고 있는 당시
사회정화추진위원회란 것을 만들어 그곳에서 전국의 전과자들을 죄다 자신 신고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갱생의 길을 열어 준다면서 6개월만 국가에 일을 하면 모든 전과를 없애준다고 거짓말로 유혹하여 많은
전과자들이 서로 다투어 입대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인 것이다...
이 삼청교육대의 폐단은 정말 천인공노할 만행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아주 극악무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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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總指揮劍士가 박00이고,그 밑에서 기대며 일하다 民政黨 全國區의원을 받은 사람이 바로 강00인데,
昨今의 法의 잣대에 비추어 볼 때 당시의 신군부의 無所不爲의 勸力의 橫暴를 본다면 “식은 죽먹기보다
裁判結果를 뒤집기 쉬울 것”은 뻔한 이치일 것이다.
李在五 전최고위원이 자신은 “緊急措置 9護 違反”으로 拘束됐고,南民戰은 국가보안법 위반 으로 구속됐기 때문에
전혀 다른 事案임에도 불구하고 박00 공안검사는 李在五 최고위원이 구속됐던 1977년 당시에는 民鬪가 南民戰의
산하단체인지 몰랐는데,1979년 南民戰의 주범 이재문이 검거되고, 南民戰 組織圖가 나오면서 밝혀졌다고 主張하며,
당시에 진작 남민전 조직인 줄 알았으면,李在五 최고위원을 緊急措置 9護 違反으로 구속하지 않고,
南民戰 組織인 國家保安法을 適用하였을 것이라며,결국 후일 南民戰 하부조직이라는게 밝혀진 후 대법원에서는
국보법 위반으로 刑을 확정 받았다고 하는 허위 주장을 지금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3.박00검사의 虛構性
박00 검사의 法治的인 論理에 대한 虛構性은 당시 人權을 蹂躪한 검찰공안수사方法의 악형
(고문수사...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등)에서 잘 볼 수 있는데,여기 이재오가 직접 겪은 고문수사를 소개 하므로써
당시 박00검사의 허구성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 세칭 악마들의 고향의 5층 調査實-조사실 이라기 보다 고문실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
물을 마음대로 먹일 수 있는 목욕탕(욕조실), 대소변을 처리하는 변기, 책상 하나, 의자 둘,단색의 벽과 천장,
전기고문을 할 수 있는 침대,아무리 소리쳐도 밖에 새나가지 않는 防音壁,높은 자들이 감시 할 수 있는 TV장치...
"야망의 전설" 프로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危壓感을 금할 수 없는 악마의 소굴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채 우선 30분가량 5~6명의 건장한 사내들로부터 무차별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얼굴이 붓고,코피가 쏟아지고, 눈에 멍이 들고, 다리, 무릎, 팔, 가슴 할 것 없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그리고 나서 "너 南民戰에 가입했지?” “남민전 이라니요.”
다시 고문, “너 이재문이 알지?” “모릅니다.”다시 고문. 그렇게 시작된 고문은 5층에서 3층 소위 사장실이라는
넓은 방으로 옮겨 넓은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들 고문자들은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고 고문팀의 책임자는 나를 두 번이나 투옥시킨 장본인이었다.
넓은 목욕탕에 들어갔다.
희미한 전깃불이 들어왔다.
문이라고는 출입구밖에 없고 출입구는 2중문으로 사장(?)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알몸이 되었다.
죽음의 공포에 내 생식기는 대추씨 만해졌다.
두 발목을 밧줄로 묶고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역시 밧줄로 묶어서 무릎을 두 팔 사이로 넣고 굽힌 무릎 사이로
침대봉을 넣어 거꾸로 매달았다. 얼굴에 젖은 수건을 덮었다.
이제부터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이 시작되는구나...
나는 이미 겪은 경험에 따라 살아나가길 체념하고 빨리 내 의식이 사라져 주기를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게 기원했다.
“나를 빨리 거두어 주소서.”
수건으로 덮은 얼굴 위로 고춧가루를 탄 주전자 물을 붓기 시작했다.눈,코, 입으로 들어가는 맵고 따갑고 화끈거리는
고통에 혼신으로 버둥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침대봉이 부러지고 다시 막대기가 끼워졌다.
그들은 熟練工처럼 침착했고 나는 짐승처럼 버둥거리다 지쳐 意識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다시 5층 조사실(?)로 올라왔다.
“남민전 가입했지?”
“나는 南民戰이라는 團體는 알지도 못합니다.”
“너 이재문이 알지?”
내가 地下運動을 하면서 만난 선배는 ‘김’입니다.
시월유신하 최대의 지하조직으로 알려진 남민전의 책임자 이재문씨는 김사장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의 本名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대표로 있던 지하조직은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약칭 “민투”였고 나의 조직명은 한국주였다.
민투의 조직원은 대부분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이었다.
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 그들 모두가 나와 함께 처절한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식이 돌아오면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고문이 시작되면 무조건 “예”,“예”하고 그것은 짐승과 같았다.
10일간의 지옥에서 서대문구치소 1사 상 21방으로 돌아오니 천국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천국이 있다면 아마 이런 곳이 아닐까?
감옥의 감방은 비어 있는 10일간 쥐들의 자유광장이었다.
나는 창틀사이로 보이는 하늘 한 조각을 보고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그 후 나는 15년을 구형받고 5년을 선고받아 복역중 83년 8월 15일 特使에 의한 형 執行停止로 출옥했다.
나는 나를 짐승으로 만든 고문자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間性을 야수로 만든 分斷40년, 그 분단의 냉전논리를 政權維持의 도구로 이용한 軍事獨裁정권을
용서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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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군부의 權力은 無所不爲 그자체였음을 否認 할 수 없다.
당시 三淸敎育隊 시절에 내가 勤務한 부대에도 전과17-20여범의 전과자와 실수로 초범으로 한명이 삼청교육대에
입대하여 왔는데......
이당시 동기생인 0대대 박00(현역중령)군이 실제 敎官으로 나는 삼청교육대 警戒支援 및 夜間에 일직사관으로
勤務를 하며 이들을 統制하는 位置에서 있었는데,참으로 당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통제하였지만 참으로
지금도 그분들을 만나면 미안하고 그저 사과하는 맘이 들 수 밖에 없고 특히나 그들을 非常戒嚴 解除후,
갑자기 어느날 밤,수십대의 대형관광버스가 오고 갑자기 身體檢査란 명목으로 삼청교육 대원들을 새벽4시에
기상시켜 한명 한명씩 檢査후 버스에 태우면서 포승줄로 묶어 버스당 30명에 이를 감시하는 引率者
한 대당 1개 분대 規模로 실탄 장전한 狀況에서 경북에 있는 오지 00교도소로 移管하였을 때 참으로 같은
人間으로서 슬프고 솔직히, 그동안 그들과 수개월간의 生活을 통해 人間的인 精도 들고 그들의 立場을 이해하며
조금만 기다리면 집으로 돌려 보내 줄것이란 말로 慰勞하곤 하였는데 이렇게 靑天霹靂과도 같은
보호소 감호처분이라니...
너무나 안타까운 맘 금할 수 없어 저들도 울고, 보내는 우리도 울은 悲劇的인 사건이 아닐 수 없는 新軍部 政權에서
냉혹한 정치논리의 犧牲楊이 되었던 삼청교육대의 歷史的인 비리를 우린 經驗하였다.
이러한 삼청교육대의 胎動은 내가 10.26사건(생도2학년) 이후부터 신군부가 執權하던 時期에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시절인 1980년 9월5일부로 소위로 任官,1981년 1월말경에 보병0사단00연대에 補職되어 소대장을 하던중,
80년8월4일부,社會淨化推進法의 一環으로 三淸敎育隊를 設置하였는데, 設置의 目的은 사회불량자,전과자등을
A,B,C,D 4개등급으로 索出하여 최초 2만여명에서 나중엔 경찰간의 競爭心理로 작용하여 6만여명을 넘은 市民들을
不法으로 逮捕하여 이중 훈방하고 약 4만명을 삼청교육대에 編成하였고, 이들을 各級 部隊로 보내어 최초 4주만의
敎育만을 잘 받으면 집으로 돌려 보내줌과 동시에 前過記錄을 말소 해준다고 誘惑 하였으나,
결국 1981년4월 戒嚴令이 해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약7400여명의 人員에 대해선 보호 감호처분으로 1-5년간을
監護所에 넘겨져 감옥생활을 하게 하는등 치졸한 政權維持 手段을 위한 신군부의 社會 統治 方法의 手段과 도구로
이용한 新軍部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暴力 및 人權蹂躪 사례로 노00 정권이 피해 접수를 시작 했을 때 접수된
추가건수에 따르면 군부대내 사망 54명,후유증 사망 397명, 부상/상해 2786명 의 추가 被害者가 있었다.
노00정권은 이에 대한 報償 및 名譽回復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고, 피해자들이 國家를 상대로 내건 團體 訴訟은
현재까지도 "時效가 지났다 "라는 이유로 成果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國會가 약속한 三淸敎育隊 特別法은 계속 결재가
미뤄지며 다음 回期까지 넘어가 自動廢棄 되기만을 反復하고 있는 실정이다.
솔직히 너무나 당시 新軍部 政權의 統制에 의한 무한한 暴力과 壓迫은 우리의 고귀한 人權을 蹂躪 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을 지시받고 따르는 軍의 役割은 한마디로 이루 形言할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處世術이었다.
4.南民戰 事件의 수사 재판 日誌
가.1979.10.9
-구자춘 내부부 장관 1차 수사발표
-총책 이재문(당시45세)등 20-명 검거,54명 지명수배
-자금마련 위해 3차례 강도행각 벌여 50만원 상당 금품 털었고 동아건설
최원석 전회장 집 털려다 경비원 칼로 찌름
나.1979.10.16
-2차 수사 발표
-25명 추가 검거.문학평론가 임헌영 자수
다.1979.10.26 박정희 전대통령 서거
라.1979.12.8
-치안본부 68명 검찰에 구속 송치
-긴급조치 9호 해제
마.1979.12.11
-서울지검 공안부 31명 구속기소,나머지 불구소 기소
바.1980.2.4
-서울형사지법 합의 13부,73명에 대한 1심 공판
-주범 이재문 법정 진술
사.1980.4.28
-김영삼 신민당 총재,윤보선 전 대통령,함석헌,문익환목사등 874명이 “민투-민학련 관련 피고인들에게 관대한
처바란다”는 진정서 제출
아.1980.5.22
-1심 선고 공판 : 이재문,안재구,신향식,최석진(4명)사형선고
-이해경,임동규,박설률,차성환(4명)무기징역 선고
-나머지 65명에게 징역 15년~징역8월,집행유예 1년 선고
자.1980.9.5
-서울고법 형사2부 배만운 부장판사 2심 선고공판
-이재문,신향식에게 사형 선고
차.1980.12.23
-대법원 확정 판결
-대법원 형사 4부 (재판장 정봉원,주심 이일규)
結論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는 최대 규모의 지하조직 책임을 맡아서 유신반대운동을 한 것인데 이재오가
당시 안동 오원춘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민투 구성원 일부가 남민련 구성원들과 겹쳐져 있었는데,
이 무렵 이재오는 감옥에 있을때 공안당국에서 겹쳐져 있는 요원들을 가지고 남민전하고 민투를 엮어서 마치
남민전이 산하단체인냥 만든 것으로 민투가 출발할 때만 해도 남민전이라는 건 없었고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민투는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전념을 하였던 단체로서
이들은 공산주의와 김일성을 전혀 찬양하지도 않았고, 국가보안법 폐지도 주장하지 않았으며, 주한미군 철수도
주장하지 않은 오직 반독재,반유신헌법에 투쟁한 단체이다.
남민전은 반외세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반독재민주를 겸했던 운동 단체로서김일성 찬양,공산주의 찬양,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 이적단체로서 민투와는 전혀 다른 단체인데 공안당국이 강압수사로서
모든 자료를 뭉뚱그려서 남민전 사건으로 표현, 위의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을 같이 더하여서
南民戰 事件으로 몰아 넣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투는 민투 투사였던 이재오의 말씀처럼 분명 남민전사건과는 아무런 연관이
불구하고 박모00이 신군부정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짜낸 강압수사의 대표적인 경우로서,박모00은
남민전 사건에 대한 법률적인 측면이란 얄팍한 미명하에 민투가 남민전이라는 증거가 있고 그래서 법원에 기소하여
대법원이 인정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증거도 없이 이재오가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도 상식밖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그런 주장은 얼마전 자기가 내연에 있던 여자 비서에게 맡긴 30억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재판을 신청한 참으로 웃지 못할 치사스런 면을 보아도 그의 인간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에 불보듯
그이 말이 허구임을 우린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린 여기서 오늘날 처럼 민주화가 되어 있다고 하는 데도 노xx가 작금의 재판 잣대를 맘대로 휘젖고 있어
법의 올바른 정의실현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당시 인간백정이 난무하던 고문기술자들의 고문에 의한
강압수사 전문기관에서 하는 일인데 오죽 하였을 것
인가 말이다.즉 다시말해서 이승만 15년,박통 군독재정권 19년,전00.노00 군사독재정권10년, 민주정권이란 김00,
김00,그리고 현정권14-5년간의 법의 잣대는 누가 보아도 정권의 실세에 의해 그 죄의 유무가 되어 오고 있는
소위 말하는 “有錢無罪, 無錢有罪”처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달리 “有勸無罪, 無權有罪”와 별반 차이 없음을 볼 때,
박00 당시검사의 얘기는 결국 신군부 정권의 비위에 맞추어 져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수 있고 결국 그는 소위
말하는 황xx로 불리어져 無所不爲의 2인자로써 영화를 누렸지만 결국 후에 그의 정치적인 입지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진리를 보여준 것이기에 結論的으로 그의 말은 民鬪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었음을 알 수 있고,이것으로
인해 그는 평생 政治劍士란 굴레에서 영원히 역사가 존재하는 한 박00은 이 汚名에서 절대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하여 이제는 더는 이재오가 남민전 조직이라는 그런 어불성설의 표현을 쓰는
자가 이땅에 한사람도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이재오만한 서민을 섬기는 서민을 위한 정치철학을 가진 사람, 그처럼 정의롭고 오직
나라만 생각하는 사람,
그의 도덕적, 청렴결백함을 위하여 힘껏 노력하는 사람 이런 곧은 정치인이 다가오는 미래 통일한국시대
거장으로서 힘찬 행진을하는 모습을 보기를 기대하면서 남민전과 민투에 대한 내용을 기고하면서 글을 마친다
첫댓글 정말 오늘 이글을 보지 않았더라면,전 솔직히 이재오님을 좌로 볼 뿐 하였답니다.제블러그로 퍼 갑니다.
이글은 울 회원님들이 꼭 필독하여야할 사항이네요...
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