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장관 수5:10~15절 2024.2.11. 주일 오전 예배
*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존재
10,11절에 이스라엘은 할례 후에 유월절을 지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을 지켰고 시내산에서도 유월절을 한번 지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할례를 하지 않은 자는 유월절을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육신이 아닌 약속을 따라난 자라는 표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로 살아났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할례와 유월절은 이스라엘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존재인데 그 약속은 곧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역시 육신을 부인하고 오직 어린양의 피만 높이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과연 무엇입니까? 성도의 의무입니까? 복을 위한 통로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유는 그러한 예배에는 할례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이 부인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롬12: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예배인데, 영적 예배는 우리 몸이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내 몸이 산 제사로 드려진다는 것은 결국 내 몸이 제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 몸이 제물이 된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육신의 죽음이란 육신이 부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부인은 자기 이성과 사고로 판단하고 생각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에 자기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의 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배란 내 육신이 부인되는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것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성령 안에서 가능한 것이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이라는 것이 구약식으로 말하면 축복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하고 유월절을 지킬 수 있는 땅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 증거가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는 '너희는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는 존재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내려진 하늘 음식이었기 때문에 축복의 땅에 들어온 이상 만나는 필요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할례를 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행위는 이미 가나안 땅을 얻은 자로서의 행위입니다. 가나안을 얻기 위한 준비 운동도 아니고 싸움을 앞둔 자로서 승리하기 위한 의식도 아닙니다. 이미 가나안을 얻은 자로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자인가?'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할례이고 유월절입니다.
* 하나님을 위한 종
13~15절에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란 분이 나타납니다. 13절에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다는 것은 전투를 앞둔 긴장감으로 가득찬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여호수아의 가는 길을 막아섭니다. 그럴 때 여호수아에게 떠오른 생각은 '이 사람이 누구편이냐?'는 것입니다. 우리편이냐 적의 편이냐는 것이 여호수아의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서있는 분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답이 나옵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오신 분은 여호수아의 편도 아니고 가나안 족속의 편도 아니고 단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라는 신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시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해 버린 답이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적과 아군은 '나'를 중심으로 구분됩니다. 나를 위한 자는 아군이고 나를 해롭게 하는 자는 적군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언제나 나를 돕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합니다. 내 일을 도와주는 하나님, 잘되게 해주는 하나님, 이것이 인간의 이성과 사고에서 만들어진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생각으로 여호수아도 칼을 들고 선 사람을 봤을 때 '누구를 위한 자냐?'는 것이 맨 처음의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합니다. 군대의 최고권자로 온 것이지 누구를 돕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 한마디를 가지고 오늘날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을 위해서 신을 찾습니다. 자기를 돕는 역할자로서 신을 찾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모습이며 인간의 이성과 사고에서 나온 신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를 도와 달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마치 하나님을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신으로 여깁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사업을 하는 교인이 있다고 할 때 우린 그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형제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관계로 인식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 사람보다는 나를 더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내 신앙이 더 좋기 때문에 나를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의 일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라지만,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은 오직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시고 일하실 뿐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는 말씀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위한 종이 있을 뿐입니다. 이점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호와의 종이다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인이 종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종이 주인을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 내가 아닌 하나님이 일하심
15절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는 상황과 동일합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면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은 '모세 네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집니다. 여호수아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여호수아는 단지 여호와의 종으로서 살아가면 됩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여리고 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방법을 모색하고 전투를 걱정하는 권리가 없습니다. 싸우라고 할 때 나가서 싸우면 되는 것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오직 여호와의 싸움에 동원된 군사입니다. 우리의 싸움에 군대장관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에 군대장관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싸움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나의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싸움에 몰두한 삶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가 서로 부흥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싸움입니까? 어떻게 그러한 싸움에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내 자식이 남보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싸움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서슴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악하고 더러운 땅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싸움에 동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사시에 우리를 지키기 위한 '동원 예비군'이 아닙니다. 칼을 빼어든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와 마주서 있습니다. 칼을 빼어 들었다는 것은 전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에 누가 대적자로 서 있는 것이 됩니까?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싸울 대상은 여호수아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이성과 사고가 부정되지 않는 존재, 육신이 부인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여호와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앞에서 종으로서 굴복했다는 것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가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싸움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도우심을 기다립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우리를 대적으로 삼으십니다. 포기되어지지 않은 나의 이성과 사고, 육신의 모습,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대적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사는 것은 모두가 주님의 은혜이지 않습니까? 육신의 싸움은 우리를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만 따라가는 삶은 평안입니다. 우리를 이기는 삶을 살려고 하지 말고 이미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인도하신 대로 안심하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