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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제3권 / 세기(世紀) 3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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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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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의 여러 이(夷)에는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의 족속이 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이들 모두와 길을 통하였다. 《상서전》
《한서》에는 고구려(高駒麗)ㆍ부여(扶餘)ㆍ한(韓)은 있으나 여기에서 말한 이 한(馯)은 없다.
이 한은 바로 저 한(韓)과 같은 것으로, 음은 같으면서 글자 모양만 다른 것이다. 《상서소(尙書疏)》
○ 《정씨집운(丁氏集韻)》에, “한(馯)은 하(河)와 간(干)의 반절(反切)로 음은 한(寒)이다.
동이(東夷) 별종의 이름이다.” 하였다.
○ 《모시(毛詩)》에,
커다란 저 한성은 / 溥彼韓城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 燕師所完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 王錫韓侯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 其追其貊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아서 / 奄受北國
그곳의 제후가 되시었도다 / 因以其伯
하였다. 《모시》
옛날에 주 선왕(周宣王) 때에도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과 가까웠기 때문에
《모시》에 “커다란 저 한성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한 것이다. 그 뒤에 한의 서쪽[韓西]에서도
한씨(韓氏)라는 성(姓)을 썼는데, 위만(衞滿)에게 정벌되어 바닷가로 옮겨 갔다. 《잠부론(潛夫論)》
왕응린(王應麟)이 말하기를,
“왕숙(王肅)이 ‘지금의 탁군(涿郡) 방성현(方城縣)에 한후성(韓侯城)이 있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모시》의
한혁(韓奕)에 ‘저 커다란 한성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도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군현지(郡縣志)》에
‘방성의 옛 성이 탁주(涿州) 고안현(固安縣) 남쪽 17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디 연의 옛 읍이었다.”
하였다. 《지리통석(地理通釋)》
시에서 말한 퇴(追)와 맥(貊)은 연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한(韓)은 연의 북쪽에 있고 맥은 한의 북쪽에
있는 나라이다. 한이 이미 연에 귀속된 뒤에 한이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에 한(漢)나라 초기에는
삼한(三韓)이라고 하였다. 《연사(燕史)》
○ 《일하구문(日下舊聞)》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사(燕史)》를 지은 곽조경(郭造卿)의 설과 《잠부론(潛夫論)》의 설이 서로 증명이 된다.”
시(詩)에 “커다란 저 한성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도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왕숙(王肅)은 “지금의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잠부론》에는 “옛날에 주 선왕(周宣王) 때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과 가까웠다. 그 뒤에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바닷가로 옮겨 가서 살았다.”고 하였다.
한나라 때에는 상고 시대와의 간격이 멀지 않았으니 전해진 것이 있었을 것이다. 《일지록(日知錄)》
살펴보건대, 왕부(王符)는 “주 선왕 때 한나라가 연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뒤에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바닷가로 옮겨 가서 살았다.”고 하였고, 왕응린(王應麟)과 고염무(顧炎武)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그 설을
옳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에서 말한 한나라 제후가 과연 기씨(箕氏)를 가리켜서 말한 것인가?
이것은 분명하게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가령 한이 과연 희성(姬姓)의 나라로 진(晉)에서 병탄한 한(韓)이라고 한다면, 이는 연의 백성들이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현(鄭玄)이 “평안할
때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고 한 것은 천착이다.
왕숙은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뜻이 정현을 힐난하는 데 있으나, 역시
맥(貊)과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왕부의 설에 의거하면 한이 연의 동쪽에 있어서 맥 땅과 연결됨을
증명할 수가 있다. 퇴(追)란 곳은 선유(先儒)들이 대부분 자세히 모른다고 하였는데, 이는 필시 예(濊)나
맥(貊)의 부(部)에 속한 종족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말한 ‘양산(梁山)’은 바로 요서(遼西)의 양문산(梁門山)인데,
《사기》의 연세가(燕世家)에 “역수(易水)의 동쪽은 나뉘어져서 양문(梁門)이 된다.” 하였고,
《수경주(水經註)》에 “습수(濕水)는 양향현(良鄕縣)의 북쪽 경계를 가로질러 양산(梁山)의 남쪽을 거쳐서
고량수(高梁水)로 나온다.” 하였다.
정현은 이에 대해 한(韓)의 진산(鎭山)이라고 하였다. 또 소(疏)에서는 《이아(爾雅)》의 “양산은 진에서
망제사를 지내는 곳이다.”라는 글을 인용하여 정현의 설을 증명하였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
○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다. 《삼국지》에,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하였다.
첫 번째는 마한(馬韓)이고 두 번째는 진한(辰韓)이고 세 번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이며, 그 북쪽은 낙랑과 연접하였고 남쪽은 왜(倭)와 연접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며, 북쪽은 예(濊)ㆍ맥(貊)과 연접하였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남쪽은 역시 왜와 연접하였다.
한은 모두 78국이며, 백제(伯濟)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이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사방의 지역이 4천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 지웠는바,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 가운데서 마한이 가장 크므로 여러 한이 함께 그 종족을 진왕(辰王)으로 세웠는데,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삼한(三韓)의 땅을 모두 다스렸다. 여러 나라 왕들의 선대(先代)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마한 사람들은 읍과 부락에 뒤섞여 살았고 성곽(城郭)이 없었다. 그리고 남쪽의 경계가 왜와 가까웠으므로
역시 문신(文身)을 한 자들이 있었다.
진한(辰韓)의 노인(老人)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인(亡人)으로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에서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라고 하였다.
나라를 이름하여서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고 하며, 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 따르는 것을
‘행촉(行觸)’이라 하고, 서로 호칭하기를 ‘도(徒)’라 하여, 말이 진(秦)나라 사람들과 비슷하였으므로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성책(城柵)이 있고 집이 있으며, 여러 작은 별읍(別邑)에는 각각 우두머리가 있는데, 큰 우두머리는
신지(臣智)라 하고, 그다음으로는 험측(險側)이 있고, 그다음으로는 번지(樊祗)가 있고, 그다음으로는
살해(殺奚)가 있고 그다음으로는 읍차(邑借)가 있다.
변진은 진한과 더불어 뒤섞여 살았는데, 성곽이 있었고 의복이 모두 같았으며, 언어와 풍속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왜와 가까웠으므로 문신을 새긴 자들이 자못 있었다. 《후한서》
○ 마한(馬韓)에는 원양국(爰襄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애양국(愛襄國)으로 되어 있다.
ㆍ모수국(牟水國)ㆍ상외국(桑外國)ㆍ소석색국(小石索國)ㆍ대석색국(大石索國)ㆍ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ㆍ
신분활국(臣濆活國)ㆍ백제국(伯濟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백제국(伯齊國)으로 되어 있다.
ㆍ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ㆍ일화국(日華國)ㆍ고탄자국(古誕者國)ㆍ고리국(古離國)ㆍ노람국(怒藍國)ㆍ
월지국(月支國) 살펴보건대 목지국(目支國)의 잘못이다. ㆍ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치리모로국(治離牟盧國)으로 되어 있다.
ㆍ소위건국(素謂乾國)ㆍ고원국(古爰國)ㆍ막로국(莫盧國)ㆍ비리국(卑離國)ㆍ점리비국(占離卑國)ㆍ
신흔국(臣釁國)ㆍ지침국(支侵國)ㆍ구로국(狗盧國)ㆍ비미국(卑彌國)ㆍ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ㆍ고포국(古蒲國)ㆍ치리국국(致利鞠國)ㆍ염로국(冉路國)ㆍ아림국(兒林國)ㆍ사로국(駟盧國)ㆍ내비리국(內卑離國)ㆍ
감해국(感奚國)ㆍ만로국(萬盧國)ㆍ벽비리국(辟卑離國)ㆍ구사오조국(臼斯烏朝國)ㆍ일리국(一離國)ㆍ
불리국(不離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불미국(不彌國)으로 되어 있다.
ㆍ지반국(支半國)ㆍ구소국(狗素國)ㆍ첩로국(捷盧國)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는 서로국(棲盧國)으로 되어 있다.
ㆍ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ㆍ신소도국(臣蘇塗國)ㆍ막로국(莫盧國)ㆍ고랍국(古臘國)ㆍ임소반국(臨素半國)ㆍ
신운신국(臣雲新國)ㆍ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ㆍ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ㆍ일난국(一難國)ㆍ구해국(狗奚國)
ㆍ불운국(不雲國)ㆍ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ㆍ원지국(奚池國)ㆍ건마국(乾馬國)ㆍ초리국(楚離國) 등
총 50여 국이 있다. 그 가운데 큰 나라는 1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로, 총 10만여 호이다.
백성들은 한곳에 뿌리박고 살며 농사를 짓는다.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흩어져 살고 있고, 국읍(國邑)에는
비록 주수(主帥)가 있기는 하나 고을과 마을에 뒤섞여 살고 있어서 제대로 잘 제어하지 못한다. 《삼국지(三國志)》
○ 《진서(晉書)》에는, “마한에는 무릇 작은 나라가 56개가 있으며 각각 우두머리가 있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마한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 《후한서》에서는 54개 나라라고 하였는데,
《위지(魏志)》에는 막로국(莫盧國)이 거듭 실려서 55개 나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 진한(辰韓)은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처음에는 6개 나라였다가 나뉘어져서
12개 나라로 되었고, 변진(弁辰) 역시 12개 나라이다.
이저국(已柢國)ㆍ불사국(不斯國)ㆍ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ㆍ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ㆍ근기국(勤耆國)
ㆍ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ㆍ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ㆍ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ㆍ
염해국(冉奚國)ㆍ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ㆍ변락노국(弁樂奴國)ㆍ군미국(軍彌國)ㆍ변군미국(弁軍彌國)ㆍ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ㆍ여담국(如湛國)ㆍ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ㆍ호로국(戶路國)ㆍ주선국(州鮮國)
ㆍ마연국(馬延國)ㆍ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살펴보건대, 제국기(諸國紀)에 상세히 보인다.
ㆍ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ㆍ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ㆍ마연국(馬延國)ㆍ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ㆍ
사로국(斯盧國)ㆍ우유국(優由國)이 있는바, 변한과 진한을 합하여 모두 24국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미국 아래에 또 변군미국이 있으며, 또 마연국이 두 곳에 있으니, 이는 반드시 베껴 쓰는 자가
잘못 적은 것이다. 이 두 나라를 삭제하면 24국이 된다.
○ 또 살펴보건대, 변진 역시 진한이다. 그 지역이 서로 맞물려 있어서 백성들이 뒤섞여 살고 있는 탓에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어디라고 분명하게 나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지》에서도 뒤섞어서 쓰면서 오로지
변진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변진 두 자를 붙여 표시하였는바, 그들이 뒤섞여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큰 나라는 4, 5천 호이고, 작은 나라는 6, 7백 호로 총 4, 5만 호이다. 이들 12개 나라는 진왕(辰王)에게
속하였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고, 진왕이 스스로 서서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상동》
○ 《위략(魏畧)》에는, “그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마한에게 제압당한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옛날에 한수(漢水) 남쪽의 지역이 삼한(三韓)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마한이 가장 커서 지금의
전라도, 충청도 및 경기의 남쪽 지역을 점유하였다. 그 뒤에 진(秦)나라 사람들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나오자, 마한에서는 지금의 경상도 지역을 떼어 주고는 그곳을 진한이라고 칭하였다. 진(秦)이 진(辰)임은
《춘추좌전》의 ‘진영(辰嬴)’을 근거로 하여 증명할 수가 있다. 진한 가운데서 또 한 종족이 나뉘어졌는데,
이를 변진(弁辰)이라 한다.
○ 당초에 조선 왕 준(準)이 위만(衞滿)에게 격파당하고는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닷가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는 스스로 서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후한서》
○ 《위략》에는, “준의 자식과 친척으로서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이를 인하여 한씨(韓氏) 성을 썼다.
준은 바다로 가서 왕이 되어서는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하였다.
○ 준이 마한의 땅인 금마군(金馬郡)에 살펴보건대,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다. 도읍을 정하니, 백성들이
많이 귀속하였다. 5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가 바로 마한 왕으로, 진한과 변한이 모두 그에게
귀속하였다. 《조선세기(朝鮮世紀)》
○ 준왕의 후예는 끊어졌다. 《삼국지》에, “지금 한인(韓人) 가운데에 여전히 그의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 하였다. 마한 사람들이 다시 스스로 서서 진왕(辰王)이 되었다. 《후한서》
○ 원봉(元封) 초에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안사고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의 나라이다.” 하였다.
글을 올리고는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는데, 조선 왕 우거(右渠)가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서》
○ 삼가 살펴보건대, 《후한서》에, “마한이 가장 커서 함께 그들의 종족을 세워 진왕으로 삼았다. 그 뒤
조선후 준(準)이 위만에게 격파당하고는 바닷가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한 다음 스스로 서서 마한
왕이 되었다. 준의 후예가 끊어졌다. 그러자 한인(韓人)들이 다시 스스로 서서 진왕이 되었다.” 하였다.
그렇다면 우거 때 진국이라 칭하는 것은 바로 기준(箕準) 이후의 마한이니,
안사고가 이를 진한(辰韓)이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기씨(箕氏)가 멸망한 것은 이미 우거 때보다 앞이었다.
그렇다면 기준이 취한 마한, 기씨 이후의 마한, 기씨가 세운 마한, 합하여 세 마한이 있는 것이다.
○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건무(建武) 20년(44)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조공을 바쳤다. 염사는 읍명(邑名)이다. 광무제가 소마시를 봉하여
한염사읍군(漢廉斯邑君)을 삼고는 낙랑군에 속하게 한 뒤 사시마다 조회하게 하였다. 《후한서》
마한은 후한 때 중국과 통하였다. 《문헌통고》
○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 12월에 고구려ㆍ마한ㆍ예ㆍ맥이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 왕(夫餘王)이 아들을 파견하여 주군(州郡)과 힘을 합쳐서 격파하였다. 《후한서》
○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금마군(金馬郡)에 있었던 마한이 아니다.
혹 백제(百濟)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 영제(靈帝)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 군현들이 제압할 수가 없었다.
백성들이 난리에 고통을 받아 유망하여 한으로 들어오는 자가 많았다. 《상동》
○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쪼개어 대방군(帶方郡)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수습하고 군사를 일으켜서
한과 예를 치자, 옛 백성들이 조금씩 돌아왔다. 이 뒤로 왜와 한이 모두 대방군에 속하였다. 《삼국지》
○ 위(魏)나라 경초(景初)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 태수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과 낙랑 두 군을 평정하였다. 한(韓) 땅에 있는 여러 나라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하사하고 그다음의 사람들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책(幘)을
쓰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가 군(郡)에 나가서 조회할 때는 모두 책을 빌려 쓰고서 나갔으며,
스스로 인수를 차고 책을 쓴 자들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상동》
○ 위 제왕(魏齊王) 방(芳) 정시(正始) 7년(246) 2월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邱儉)이 고구려를
토벌하고, 5월에 예(濊)ㆍ맥(貊)을 토벌하여 모두 격파하였다. 한(韓)의 나해(那奚) 등 수십 나라가 각각
종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나해국은 마한에 소속된 구해국(狗奚國)인 듯하다.
○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국을 통치하였다고 해서 진한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역관(譯官)이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있자, 신지(臣智)가 한(韓)의 분노를
자극해서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방 태수 궁준(弓遵)과 낙랑 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서 정벌하여, 두 군이 비로소 한국을 멸망시켰다. 《이상 모두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부종사는 바로 낙랑 남부(南部)의 종사(從事)이다. 오림이 진한을 공격한 것은 정시(正始) 7년의 일이다. 이 일은 사군사실조(四郡事實條)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 진류왕(陳留王) 경원(景元) 2년(261) 7월에 낙랑의 외이(外夷)인 한(韓)과 예(濊)가 각각 그 족속을 이끌고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상동》
○ 진 무제(晉武帝) 함녕(咸寧) 2년(276) 2월에 동이(東夷) 8개 나라가 귀화하였다. 7월에 동이 17개 나라가
내부(內附)하였다. 《진서(晉書)》
○ 살펴보건대, 진(晉)나라 때 동이가 조공하고 내부한 것은 모두 삼한(三韓)의 여러 나라들이 한 것이다.
○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동이의 세 나라에서 전후로 1천여 명이 각각
종족과 부락을 이끌고 와서 내부하였다. 《상동》
○ 4년 12월에 동이의 9개 나라가 내부하였다. 《상동》
○ 태강(太康) 원년(280)에 마한의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면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 진한의 왕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한의 왕은 신라 왕(新羅王)을 가리킨다.
○ 6월 갑신에 동이 10개 나라가 귀화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2년 6월에 동이 5개 나라가 내부하였다. 《상동》
○ 3년에 장화(張華)가 도독유주제군사(都督幽州諸軍事)가 되어 신구(新舊)를 모두 어루만져 받아들이자,
오랑캐와 중국 사람들이 모두들 흠모하였다. 이에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살면서 중국과 4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대대로 중국에 부속되지 않고 있던 동이의 마한ㆍ신미(新彌) 등 20여 개 나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상동》
○ 8년 8월에 동이의 2개 나라가 내부하였다. 《진서》
○ 9년 9월에 동이의 마한 등 7개 나라가 교위(校尉)에게 나아가 내부하였다.
24개의 군국(郡國)에 누리가 있었다. 《상동》
○ 10년 5월에 동이 11개 나라가 내부하고, 12월에 동이 가운데 아주 먼 곳에 있는 30여 나라가 와서
포로를 바쳤다. 《상동》
○ 태희(太煕) 원년(290)에 마한, 진한이 또 동이 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에게 나아가 방물을 바쳤다.
《상동》
○ 진 혜제(晉惠帝) 원강(元康) 원년(291)에 동이 17개 나라가 교위에게 나아와 내부하였다. 《상동》
○ 진 효무제(晉孝武帝) 태원(太元) 7년(382) 9월에 동이 5개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상동》
○ 진 무제 함녕 연간에 마한 왕이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이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 삼한은 대개 백제와
신라에 병탄(幷呑)되었다. 《통전》
○ 삼가 살펴보건대, 마한 왕은 본디 자신이 직접 조회한 일이 없으니, 두우(杜佑)의 설은 틀렸다.
지금 사람들 가운데에는 요동(遼東)을 일러 삼한(三韓)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 이에 대해 상고해 보면,
《상서》의 서(序)에 “성왕이 이미 동이를 정벌하였다.” 하였고, 《상서전》에 “해동의 여러 나라에는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 등의 족속이 있다.” 하였고, 《상서정의》에는 “《한서》에
고구려(高駒麗)ㆍ부여(扶餘)ㆍ한(韓)만 있고 이 한(馯)은 없는데, 한(馯)은 바로 한(韓)이다.” 하였고, 《후한서》
광무기(光武紀)에는 “건무(建武) 20년에 동이의 한국(韓國) 사람이 백성을 이끌고 낙랑에 와서 내부하였다.”
하였고, 동이전(東夷傳)에는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마한이고, 두 번째는 진한이고,
세 번째는 변진(弁辰)이다. 《진서(晉書)》와 《양서(梁書)》 두 책에는 변한(弁韓)으로 되어 있다.
모두 78국이다.” 하였고,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는 “정시(正始) 7년에 관구검(毌邱儉)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한(韓)의 나혜(那奚) 등이 각각 종족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하였고, “진류왕(陳留王) 경원(景元) 2년에 낙랑의 외예(外裔)인 한(韓)이 각각 그 족속을 이끌고 와서
조공하였다.” 하였으며, 《진서》의 장화열전(張華列傳)에는 “동이의 마한, 신미 등의 여러 나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하였고, 두우의 《통전(通典)》에는 “삼한의 땅은 해도(海島)의 가에 있으며,
조선의 동남쪽에 있다.” 하였다. 이상이 그 봉역(封域)과 조공(朝貢)에 대한 본말이다.
유희(劉煕)의 《석명(釋名)》에는 “한양(韓羊), 한토(韓兎), 한계(韓鷄)는 본래의 법이 한국(韓國)에서 하는
바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고, 후위(後魏)의 양고(陽固)가 지은 연색부(演索賦)에는 “아득히 먼 삼한이여,
풀옷 입은 사람들이 유유하구나.” 하였다. 이상이 그곳의 풍토이다. 《송사(宋史)》
천문지(天文志)에는 “구국(狗國) 사성(四星)이 건성(建星)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삼한(三韓)ㆍ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험윤(玁狁)ㆍ옥저(沃沮) 등을 주관한다.” 하였다.
이상이 그곳의 점상(占象)이다.
《송사》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숭녕(崇寧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 이후에 비로소 삼한통보(三韓通寶)를
주조하였다.”는 말이 있고, 《요사(遼史)》 외기(外紀)에는 “고려 왕자(高麗王子) 삼한국공 훈(三韓國公勳
순종(順宗)을 말함), 삼한국공 옹(三韓國公顒 숙종(肅宗)을 말함), 삼한국공 우(三韓國公俁 강종(康宗)을
말함)”라는 말이 있고, 지리지(地理志)에는 “고주(高州)에 삼한현(三韓縣)이 있다. 진한(辰韓)이 부여로 되고
변한(弁韓)이 신라로 되고 《북사(北史)》에는 “진한(辰韓)이 신라로 되었다.” 하였다. 마한(馬韓)이 고려로
되었다. 개태(開泰) 연간에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하고 삼한의 유민(遺民)을 포로로 잡아 와 그들이
머무는 곳에 현(縣)을 두었다.” 하였다.
이것에 의거하여 본다면 삼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와 내지(內地)에다가 두고 그들이 있는 곳을 현으로
삼으면서 삼한(三韓)이라는 이름만 취한 것이다. 이는 바로 한(漢)나라 때 상군(上郡)에 구자현(龜玆縣)이
있는데, 이를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라고 하여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지금 사람들이 이에 요동을
삼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지를 가지고 외국(外國)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그 까닭을 따져 보면, 천계(天啓
명나라 희종(熹宗)의 연호) 초에 요양(遼陽) 지역을 잃어버린 이후에 장주(章奏)를 올리는 글에서 요양
사람을 일러 삼한이라 한 데에서 근본하는 것으로, 이는 요양 지역을 외국으로 치부한 것이다. 지금 요동
사람들이 이에 이것으로 자칭하는데, 이것 역시 스스로 외국으로 자처하는 것일 뿐이다. 《일지록(日知錄)》
[주-D001] 한성(韓城) :
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섬서성(陜西省) 서안시(西安市) 한성현(韓城縣)이라는 설과
하북성(河北省) 고안현(固安縣) 방성(方城)이라는 설이다. 김상기(金庠基)에 의하면 서주(西周) 시대에는
섬서성의 한성에 있다가 동주(東周) 시대에는 하북성 한성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4쪽》
[주-D002] 연의 백성들이 :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후한 때 사람인 정현(鄭玄)의 전(箋)에는 ‘평안한 시기에
백성들이[燕師]’로 되어 있으며,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는 “옛날 주 선왕(周宣王) 때에도 역시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燕)에 가까웠다.”고 하여 연을 나라 이름으로 해석하였으며,
명나라의 곽조경(郭造卿)은 《연사(燕史)》에서 “한은 연의 북쪽에 있으며, 맥(貊)은 한의 북쪽 나라이다.
한이 이미 연에 귀속된 뒤 한은 뒤이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고 하여, 역시 연을 나라 이름으로
해석하였으며, 청나라 말기의 학자 장병린(張炳麟)은 《태염문록속편(太炎文錄續編)》 권1에서 여기에 나오는
한성(韓城)의 위치를 북경의 북방에 있는 고안현(固安縣)으로 비정하고 연을 오늘날의 북경 일대로
비정하였다.
북한의 이지린 역시 연을 나라 이름으로 보면서 “이 연(燕) 자의 해석에 따라서 맥(貊)의 거주 지역이
달라지게 된다. 중국의 고힐강(顧頡剛) 교수는 ‘서주(西周) 선왕(宣王) 때의 연은 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
서부에 위치하였으며, 맥은 그 북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춘추 시대 때 맥의 위치는 이미 후일의 연나라의
훨씬 서북쪽까지 이르고 있는바, 《시경》 한혁편(韓奕篇)에 보이는 맥과 연은 절대로 전국 시대의 연과
그 북방과의 위치 관계로 인정할 수 없다.” 하였다.《고조선연구 153~156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후대 중국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연은 나라 이름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주-D003] 그 뒤에 …… 갔다 :
이곳의 원문은 ‘其後韓西 亦姓韓 爲衞滿所伐 遷居海中’이다. 이에 대해 《잠부론》의 전에는 “살펴보건대,
한서(韓西)는 대개 조선(朝鮮)을 말한다. 조(朝)가 잘못하여 한(韓) 자로 되었고, 서(西)는 즉 선(鮮)이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서방(西方)을 선방(鮮方)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이병도는
“여기의 한서(韓西)를 성명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보면 문장상 한(韓)이 겹들어 가고 또
동서(同書)의 문례로 보더라도 서(西)는 확실히 방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후국(韓侯國)의
서쪽이라고 해서는 아래의 구절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래의 구절은 분명히 조선에 관한
이야기인데, 조선의 위치가 한후국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는 말이 되지 아니하므로, 나는 일찍부터 ‘한서’를
‘한동(韓東)’의 오(誤)로 보았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48쪽》
[주-D004] 국(國) :
국의 성격과 규모에 대하여 이병도는 하나의 부족 국가로서 그 영역과 인구가 한 군현(漢郡縣)의 일개 현에
불과하다고 파악하였다. 김원룡(金元龍)은 철제 농구(鐵製農具)를 사용하는 사회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부족
국가로, 천관우(千寬宇)는 지역 단위로서의 성(城)의 병합을 거치면서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김정배(金貞培)는 인구 1만 명 정도의 군장 사회(君長社會)로, 백남욱(白南郁)은 국읍(國邑)과 별읍(別邑)을
중심으로 하는 상호 보완적인 생활 공동권을 형성하는 지역 집단(地域集團)으로서 대략 50리 내외의
반경을 가진 지역 범위일 것으로 추단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6쪽》
[주-D005] 진왕(辰王) :
삼한 전체, 특히 마한 제국(諸國)의 맹주로서 아마도 여러 소국(小國)과의 주종(主從) 관계를 통하여 중국
군현과의 접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병도는 “진국(辰國)은 진왕(辰王)의 나라란 뜻이고,
진왕은 제부족 사회(諸部族社會)의 맹주국(盟主國)인 목지국(目支國)의 군장(君長)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0쪽》
[주-D006] 목지국(目支國) :
고대 삼한 시대 마한에 있던 소국(小國)이다. 아직 국가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부족 사회였으며,
위치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목지국의 군장은 진왕(辰王)이라 하며, 주위의 모든 소국을 지배하였고,
여러 소국들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盟主)로 삼았다.
목지국에는 군장이 있어 이를 진왕(辰王)이라 하였다.
[주-D007] 우리들은 …… 주었다 :
이 기록에 의하면 진한(辰韓) 소국(小國)이 기원전 3세기 후반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전국계(戰國系) 유민 집단(遺民集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를 참고로
고찰하면, 전국계 유민의 후예를 일부 포함한 위씨조선(衛氏朝鮮) 유민이 마한의 동쪽, 즉
소백산맥(小白山脈) 이동 지역인 경상도 방면으로 이주함으로 인한 새로운 정치 세력의 대두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7쪽》
[주-D008] 나라를 …… 도(徒)라 하여 :
진한에서 방(邦)ㆍ호(弧)ㆍ행상(行觴)ㆍ도(徒) 등 중국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의 기사에 대해서는
한족(漢族)이 진시황을 피하여 한반도로 와서 정착하였다는 위의 기사와 함께 무시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낙랑(樂浪) 방면에서의 유이민(流移民)도 있었을 것이므로, 고대 중국어에서의
차용어(借用語)가 행해진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999쪽》
[주-D009] 말이 …… 비슷하였으므로 :
이 부분의 원문은 ‘有似秦語’이다. 이 부분이 《삼국지》에는 ‘有似秦人’으로 되어 있다.
[주-D010] 신지(臣智) :
삼한 시대 군장(君長)의 칭호의 하나이다. 이병도는 “신(臣)은 대(大)를 의미하는 옛말인 것 같고,
지(智)는 벼슬아치, 장사치, 조라치, 갖바치 등의 직업자(職業者)의 호칭인 ‘치’의 사음(寫音)일 것이다.
즉 신지는 대인(大人)ㆍ대관(大官)의 뜻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0쪽》
[주-D011] 마한에는 …… 있다 :
이 마한 54국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이병도의 설과 천관우의 설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韓國古代史硏究 262~266쪽》 《천관우, 마한 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1979》
소국명 / 현재의 지명 - 이병도 설 천관우 설
원양국 경기 수원 음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일대?
모수국 경기 수원 일대 경기 양주
상외국 경기 수원 장안, 우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소석색국 경기 서해의 섬 경기 강화 교동
대석색국 소석색국 부근 경기 강화
우휴모탁국 경기 부천 강원 춘천
신분활국 경기 양성 경기 가평?
백제국 경기 광주 서울 강남
속로불사국 경기 통진 지방 경기 김포 대곶, 월곶
일화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탄자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리국 경기 양주 풍양 경기 여주?
노람국 경기 이천군의 음죽면 일대 경기 이천군?
월(목)지국 충남 직산, 성환 평택 등지를 포함한 지역
자리모로국 경기 이천군의 일부(노람국과 인접) 충남 서산 지곡
소위건국 미상 충남 보령군
고원국 미상 충남 당진
막로국 미상 충남 예산, 덕산
비리국 전북 옥구군 회면 일대 충남 예산, 덕산
점리비국 전북 고부군? 충남 홍성군 결성
신흔국 충남 옛 진잠현? 충남 온양군?
지침국 충남 대흥 지방 충남 예산군 대흥
구로국 충남 청양군? 충남 청양군
비미국 옛 비인현(충남 서천의 일부) 충남 서천군 비인
감해비리국 충남 홍성군 충남 공주군
고포국 미상 충남 부여군
치리국국 충남 서산군 지곡면 일대 충남 서천군 한산
염로국 미상 전북 익산군 함열
아림국 충남 서천군? 충남 서천군
사로국 충남 홍성군 장곡면 충남 논산군 은진?
내비리국 미상 충남 대덕군 유성
감해국 전북 함열 전북 익산군
만로국 충남 보령군의 일부인 남포 전북 옥구군
벽비리국 전북 김제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대 전북 김제군
구사오조국 전남 장성군 진원면 일대 전북 김제군 금구
일리국 미상 전북 부안, 태인?
불리국 전남 나주군 전북 부안, 태인?
지반국 미상 전북 부안, 태인?
구소국 위명(僞名)으로 간주 전북 정읍군 고부
첩로국 미상 전북 정읍군
모로비리국 전북 고창군 전북 고창군
신소도국 충남 태안(서산) 전북 고창군 흥덕
막로국 중출(重出)로 간주 전남 영광군
고랍국 전북 남원군 전남 장성군
임소반국 전북 옥구군 전남 광산, 나주?
신운신국 충남 천안군? 전남 광산, 나주?
여래비리국 전북 여산 지방 전남 화순군 능주
초산도비리국 전북 정읍군 전남 진도군 군내면
일난국 미상 전남 영암군
구해국 전남 강진군 전남 해남군 마산
불운국 충남 공주의 서부? 전남 보성군 복내 이복성?
불사분야국 전북 전주군 전남 승주군 낙안
원지국 미상 전남 여수군
건마국 전북 익산군 전남 장흥군
초리국 미상 전남 고흥군 남양
[주-D012] 진한(辰韓)은 …… 24국이다 :
한치윤은 군미국과 변군미국을 같은 나라로 보아 총 24국이라 하였으나, 이병도와 천관우는 이를 다른
나라로 보아 총 25국으로 하였다. 이들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이병도의 설과 천관우의 설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韓國古代史硏究 274~276쪽》 《천관우, 진ㆍ변한 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 20, 1976》
소국명 / 현재의 지명 - 이병도의 설 천관우의 설
이저국 경북 안동군 경북 영주군 풍기(기목)
불사국 경북 창녕군 경북 안동
변진미리미동국 경남 밀양군 경북 예천군 용궁, 상주군 함창 포함
변진접도국 경남 칠원 미상(경북 상주?)
근기국 경북 영일군 경북 청도
난미리미동국 경북 의성군 경남 창녕군 영산
변진고자미동국 경남 고성군 경남 고성
변진고순시국 미상 경남 사천, 삼천포
염해국 경남 울산군 미상(경북 대구?)
변진반로국 경북 성주군 미상(경남 합천?)
변릭노국 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 미상(경남 진주?)
군미국 미상 경북 칠곡군 인동
변군미국 경남 사천군 경북 칠곡군 약목, 성주
변진미오야마국 경북 고령 지방 경북 고령, 성산 포함
여담국 경북 군위군 경북 의성군 탑리, 군위
변진감로국 경북 금릉군 개령 일대 경북 금릉군 개령, 선산 포함
호로국 경북 상주군 함창면 일대 경북 영천
주선국 미상 미상(경북 경산군 자인, 경산?)
마연국 미상 경남 밀양
변진구야국 경남 김해 일대 경남 김해
변진주조마국 경북 금릉군 조마면 일대 경남 함안군 칠원, 마산
변진안야국 경남 함안군 경남 함안
변진독로국 경남 동래군 경남 동래
사로국 경북 경주 경북 경주
우유국 경북 청도군 경북 울진
[주-D013] 준의 …… 썼다 :
이 부분의 원문은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이다. 이에 대하여 이병도는 “《위략》의 찬자는 준왕이
‘자호한왕(自號韓王)’이라 하였기 때문에 고국에 억류된 그의 아들과 친족들도 인하여 한씨(韓氏)를
모칭(冒稱)한 것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조선 왕 준이 남쪽으로 도망해 오기 이전의 반도
중부 이남에는 아직 한(韓)의 칭호를 가진 지방이 없었고 준이 한왕이라 칭한 것도 본디 자신의 성이
한씨였기 때문에 그렇게 자칭한 것이다. 또 고국에 억류된 친족들도 새삼 한씨를 모성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 역시 그러한 까닭에 한씨라고 인성(因姓)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50쪽》 또 ‘及親’을
‘우친(友親)’으로 보는 데 대해 상고해 보면, 《동사강목》에, “이정귀(李廷龜)가 쓴
기자숭인전비(箕子崇仁殿碑)에 ‘마한 말기에 잔손 3인이 있었는데, 친(親)이란 사람은 뒤에 한씨(韓氏)가
되고 평(平)이란 사람은 기씨(奇氏)가 되고 양(諒)이란 사람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한 친(親)은 바로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말한 ‘기준의 아들 우친이 머물러 있다가 한씨로
모성하였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東史綱目 附錄 卷上 考異》
이병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세보(世譜)를 보면 그들의 원조(遠祖)를 기자로 삼고 있다. 이것은 《위략(魏畧)》의 글에 의거한 것인데, 그 세보에는 《위략》에 운(云)이라 하고 기자의 후에 우친(友親)ㆍ 우평(友平)ㆍ우량(友諒)이 있어, 그중에 우량이 마한을 공격하여 이기고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너무도 심한 날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날조자는 《위략》의 글에 나오는
급(及) 자가 《문헌통고》와 같은 서적에 잘못 우(友) 자로 와전된 것을 그대로 보아, 그 밑의 친(親) 자와
합하여 ‘우친(友親)’이란 인명으로 오독(誤讀)한 후 진일보하여 우 자의 항렬을 붙이어 우평, 우량 두 허위
인물을 더 추가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51쪽》
[주-D014] 염사(廉斯) :
지금의 아산(牙山)으로 비정된다. 이병도는 “아산은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으로, 아(牙)의 훈(訓)은 ‘엄’이며,
아산현의 뒷날 이름이 음술[陰峯, 陰岑]로, 그 음이 염사와 흡사하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5쪽》
[주-D015] 공손강(公孫康) :
위(魏)나라 초기의 장수로 공손도(公孫度)의 아들이다.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 태수로 있으면서 고구려 왕
이이모(伊夷模) 즉 산상왕(山上王)을 공격해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또 낙랑 지방에 세력을
뻗쳐 대방군을 설치하고, 한(韓)ㆍ예(濊)도 공격하였다.
[주-D016] 둔유현(屯有縣) :
이병도는 “둔유현은 원낙랑(元樂浪)의 남쪽 경계로, 지금의 황해도 북단의 황주(黃州)에 틀림이 없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49쪽》
[주-D017] 하호(下戶) :
하호의 개념 규정 문제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대체로 사회경제사 측에서는
‘노예(奴隷)’나 ‘농노(農奴)’ 혹은 그와 유사한 층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김철준(金哲俊)ㆍ홍승기(洪承基)
등은 ‘민(民)’으로, 김용덕(金龍德)은 ‘속민(屬民)’으로 보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D018] 유주 자사(幽州刺史) :
유주(幽州)는 주대(周代)에는 산동성 북부와 하북성 및 만주의 금주(錦州), 열하성(熱河省) 동남 지방을
지칭하였다. 유주가 공식적인 지방행정 구역이 된 것은 전한(前漢) 때로, 대군(代郡)ㆍ상곡(上谷)ㆍ 탁군(涿郡)ㆍ어양(漁陽)ㆍ우북평(右北平)ㆍ광양(廣陽)ㆍ발해(渤海)ㆍ요서(遼西)ㆍ요동(遼東) 및
한사군(漢四郡)을 포괄하는 동북 변방 일대를 총칭하였다. 이때의 치소(治所)는 북경(北京) 부근에 있는
계(薊)였다. 서진(西晉)에 들어와서는 창려(昌黎)ㆍ요동(遼東) 등지를 평주(平州)에 이관시키고 난하(灤河)
이서(以西)의 지역에 한정되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2쪽》
[주-D019] 오환(烏桓) :
부족의 이름으로, 오환(烏丸)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본래 동호(東胡)의 별종으로, 한나라 때 흉노에게
멸망당하였는데, 나머지 종족들이 오환산(烏桓山)으로 도망쳐 들어가 살면서 산의 이름을 종족명으로
삼았다.
[주-D020] 삼한통보(三韓通寶) :
고려 때 사용한 화폐로, 성종(成宗)에서 숙종(肅宗) 때까지 중국의 화폐를 모방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 사용한 것인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해동역사 제3권 / 세기(世紀) 3
예(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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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예인(穢人) 전아(前兒)인데, 전아는 원숭이와 같이
생겼다. 《급총주서(汲冢周書)》
예(穢)는 한예(寒穢)로 동이의 별종이다. 《급총주서주》
○ 예는 북쪽은 고구려ㆍ옥저(沃沮)와 접해 있고, 남쪽은 진한과 접해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와 맞닿아
있고, 서쪽은 낙랑(樂浪)에까지 이른다. 예와 옥저ㆍ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후한서》
○ 한 무제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살펴보건대, 《한서》에는 ‘동이
예군(濊君) 남려’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진작(晉灼)은 주석하기를, “예(濊) 자는 옛날의 예(穢) 자이다.”
하였다.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요동으로 와서 내속(內屬)하니, 그 지역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 《상동》
○ 《한서》에는, “무제가 즉위한 지 몇 년 뒤에 팽오(彭吳)가 길을 열어 예, 맥, 조선에 통하게 하고
창해군을 두니 연(燕)과 제(齊) 사이에 있는 백성들이 창해군 쪽으로 이동하였다.” 하였다.
○ 《사기》에는, “장량(張良)이 협객을 구해 한(韓)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倉海君)을 만나 역사(力士)를 구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제를 습격하였다.” 하였다.
○ 여순(如淳)의 주에는, “진나라의 군현 가운데는 창해(倉海)가 없다. 혹자는 동이의 군장(君長)이라 한다.”
하였다.
○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한서》 무제기에, ‘원년에 동이 예군 남려 등이 항복하자
창해군(倉海君)으로 삼았는데, 지금의 맥예국(貊穢國)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 맞다. 태사공(太史公)이
《사기》를 지을 때 이미 항복하여 군(郡)으로 삼았으므로 스스로 쓴 것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팽오가 길을 열어 예ㆍ맥ㆍ조선에 통하게 하고는 창해군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남려가 항복한 것이 팽오가 길을 통한 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3년 봄에 창해군을 혁파하였다. 공손홍(公孫弘)이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 쓸모없는 땅을 떠받드는
것이니 혁파하기 바란다.”고 여러 차례 간하자, 상이 얼마 있다가 허락한 것이다. 《한서》
○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멸하고 낙랑ㆍ진번ㆍ임둔ㆍ현도 사군(四郡)을 나누어 두었다.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켰다.
이에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의 예와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그 뒤에 영토가 너무 크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나누어 영동의 7현(縣)에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두었다. 《후한서》
○ 한 광무제 건무(建武) 6년(30)에 동부 도위(東部都尉)를 없애고 영동의 지역을 모두 버렸다. 그러고는
그곳에다가 우두머리[渠帥]를 세워 현후(縣侯)로 삼고는 모두 새해 초에 조하(朝賀)하게 하였다. 그곳에는
큰 군장(君長)이 없고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 등의 관직이 있으며, 노인들은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는데, 언어와 풍속이 대체로 서로 비슷하다. 《상동》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예국(濊國)은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이다. 한 무제 초년에 창해군을 두었다가
수년 뒤에 혁파하였다. 조선을 멸함에 미쳐서 예 땅에 임둔군을 두었으니, 영동(嶺東)의 7현이 바로 그
지역이다. 뒤에 7현을 도위에게 예속시켰다가 한 광무제가 도위를 혁파하고 다시 토착의 우두머리를
봉하여 예후(濊侯)로 삼았는데,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등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을 칭하였다.
○ 예(濊)는 지금의 조선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며, 호구가 3만이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그 지역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중국과 오랑캐가 조금 구별되었다.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동쪽 7군은 동부 도위가 통치하였는데, 모두 예 땅 사람들을 백성으로 삼았다. 뒤에 도위를
혁파하고 그곳 지역의 우두머리를 봉하여 후(侯)로 삼았다. 지금의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종족이다.
한나라 말기에 다시 구려(句驪)에 속하였다.
○ 이적(夷狄)들이 다시금 서로 공격하였다. 오로지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지금까지도 공조(功曹)와
주부(主簿) 등 여러 조(曹)를 두고서 모두 예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상 모두 삼국지》
○ 위 제왕(魏齊王) 방(芳) 정시(正始) 6년(245)에 낙랑 태수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 궁준(弓遵)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구려에 복속하였다는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다. 이에 불내예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상동》
○ 8년에 예왕(濊王)이 대궐에 나아가 조알하자, 다시 불내후(不耐侯)를 제수하였다. 예왕은 백성들과
뒤섞여 거처하였으며, 네 계절마다 군(郡)에 와서 조알하였다. 두 군에 전역(戰役)이 있거나 조세(租稅)를
거둘 일이 있을 경우, 예의 백성들에게도 조세를 내게 하고 사역을 시켜서 군의 백성들과 똑같이
취급하였다. 《상동》
○ 후위(後魏) 소성제(昭成帝) 건국(建國) 2년(339)에 동쪽의 예와 맥이 내부하였다. 《후한서》
[주-D001] 예군(濊君) 남려(南閭) :
이병도는, 예군 남려는 지금의 통구(通溝) 방면에 있던 대수맥(大水貊)의 군장(君長)으로 대수와 소수(小水)
유역의 사회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최고 맹주일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356쪽》
[주-D002] 창해군(蒼海郡) :
한나라 무제(武帝) 때 지금의 통구 부근에 설치한 군현으로 원삭(元朔) 원년에 설치되었다가 원삭 3년에
폐지되었다. 예ㆍ맥은 본디 지금의 통구 부근에 근거를 두고 있다가 세력이 약해지면서 후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으로 옮겨 왔는데, 후대의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이 두 예ㆍ맥을 혼동하여 예ㆍ맥이
본디 강원도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잘못 동예전(東濊傳) 속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주-D003] 단단대령(單單大領) :
단단대령의 위치에 대하여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으며,《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의 이른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
《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04] 영동의 7현(縣) :
옛 임둔군(臨屯郡)에 있었던 7현을 가리킨다. 안정복이나 한진서(韓鎭書)는 모두 이 7현의 위치를 지금의
관동 지방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병도는 이 7현을 덕원군(德源郡) 부근에 있던 동이현(東暆縣),
안변(安邊)이나 통천(通川)에 있던 불이현(不而縣) 즉 불내현(不耐縣), 문천(文川)이나 고성(高城)에 있던
사두매현(邪頭昧縣), 함흥(咸興) 부근에 있던 부조현(夫租縣), 영흥(永興)에 있던 화려현(華麗縣),
평강(平康)이나 회양(淮陽) 두 곳에 있던 전막현(前莫縣)과 잠대현(蠶台縣)이라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96~208쪽》 북한의 이지린은 “불내(不耐)를 국내성(國內城)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영동 7현의 위치를 압록강 즙안(楫安) 지역에서부터 요동반도 동해안의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조선연구 191쪽》
[주-D005]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 :
이 세 가지 칭호는 한군현(漢郡縣)에서 조금 큰 토착 사회(土着社會)의 족장(族長)을 후로 봉하고, 그다음을
읍군으로, 가장 작은 것을 삼로로 불렀던 데서 온 것이다. 이들은 상호 같은 자격, 같은 성격을 가지고
병립할 수 있었으며, 고대국가 체제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지배체제 안에서의 상하(上下) 층서(層序)
구분의 칭호는 아니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4쪽》
[주-D006] 소성제(昭成帝) :
북위(北魏)의 척발십익건(拓跋什翼犍)을 가리킨다. 도무제(道武帝) 때 고조(高祖)로 추존되었으며, 39년간
재위하였다.《北史 卷1》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해동역사 제3권 / 세기(世紀) 3
맥(貊) 맥(貉)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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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에는 백곡이 자라지 않고 오로지 기장만이 자란다. 성곽, 궁실, 종묘와 제사 지내는 예가 없으며,
제후의 폐백과 음식에 관한 법도가 없으며, 백관과 유사(有司)가 없다. 그러므로 세금을 20분의 1만
거두어도 풍족하다. 《맹자》
맥은 동북쪽의 오랑캐이다. 《급취편성씨주(急就篇姓氏註)》
유주(幽州)의 동쪽은 예와 맥까지이다. 《유주목잠(幽州牧箴)》
궁벽하고 먼 맥 지방은 말이 시(詩)를 채집하는 자에게 전해지지 않고, 땅에는 정삭(正朔)이 미치지 않았다.
《문선 칠명(文選七命)》
○ 무왕이 상(商)을 정벌하자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모두 다 복종하였다. 《상서》
○ 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는 구맥(九貉)의 사람을 관장한다. 《주례(周禮)》
구맥은 주나라에서 복속한 나라의 숫자이다. 《주례주(周禮註)》
구맥은 바로 구이(九夷)로 동방에 있다. 《주례소(周禮疏)》
○ 추관(秋官)의 맥예(貉隷)는 동북쪽의 오랑캐를 정벌하여 얻은 자들을 뽑아서 원역(員役)으로 삼은 것이다.
《주례주(周禮註)》
○ 《모시(毛詩)》에,
선왕(宣王)께서 한후에게 / 王錫韓侯
퇴족과 맥족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 / 其追其貊
비가죽을 조공으로 바치고 / 獻其貔皮
표범가죽과 말곰가죽을 바치는도다 / 赤豹黃羆
하였다. 《모시》
○ 《주자집전(朱子集傳)》에는, “퇴(追)와 맥(貊)이란 나라가 와서 공물을 바쳤다.” 하였다.
경전(經典)에서 말한 맥은 대부분 동이(東夷)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방씨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한다고 한 데 대하여 《정지(鄭志)》에, “조상(趙商)에게 답하기를, ‘구맥은 바로 구이이다.’ 하였다.” 하였으며, 또 추관(秋官)의 ‘맥예(貉隷)’에 대한 주에, “동북쪽의 오랑캐를 정벌하여 얻은 것이다.”
하였다. 이 맥은 동이의 종족이다. 그런데 북쪽에 나뉘어 살았으므로 선왕 때 한후(韓侯)가 통솔한 것이다.
한(漢)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는 그 종족이 모두 동북쪽에 있어서 병주(幷州)의 북쪽에 다시는 맥의 종족이
없었다. 이에 또 말하기를, “그 뒤 퇴니 맥이니 하는 종족들은 험윤(玁狁)에게 몰려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한 것이다. 《모시정의(毛詩正義》
시에 나오는 ‘기퇴기맥(其追其貊)’에 대하여 《보전(補傳)》에서는, “맥은 북방에 있는 나라로 선성(先聖
공자를 가리킴)이 만맥(蠻貊)에 대해서 말한 설이 있다. 퇴는 북방에 있는 나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하였고, 모씨(毛氏)는 “퇴와 맥은 융적(戎狄)의 나라이다.” 하였고, 소씨(蘇氏)는 “퇴와 맥의 사람을
준 것이다.” 하였고, 정씨(鄭氏)는 “한나라 초기에 맥의 종족이 모두 동북쪽에 있었다.” 하였고,
직방씨(職方氏) 구맥(九貊)의 주에서는 북방에 있다고 하였으며, 공씨(孔氏)는 “맥이라고 말한 것은 미워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시지리고(詩地理考)》
‘기퇴기맥’에 대하여, 정현은, 경전에서 말한 맥이 대부분 동이족을 가리키는데 한(漢)나라 때에는 이른바
예와 맥이라는 종족이 모두 동북방에 있으므로 이를 인하여 《모시전(毛詩箋)》의 끝에서 두 마디 말을
첨가하면서 “그 뒤 퇴니 맥이니 하는 종족들은 험윤에게 몰려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하였다. 여기에서
강성(康成 정현의 자임)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그 설을 끌어다 댄 것을 알 수가 있다. 《일지록(日知錄)》
○ 《모시》에,
노 희공이 서택까지 차지하여 / 遂荒徐宅
바닷가까지 이르렀도다 / 至于海邦
회의 오랑캐와 만맥의 족속까지 / 淮夷蠻貊
모두가 따르는도다 / 莫不率從
하였다. 《모시》
노 희공(魯僖公) 때 맥이 노에 가까웠다. 《모시정의》
○ 제 환공(齊桓公)이 승거(乘車)의 회합을 세 번 열고 병거(兵車)의 회합을 여섯 번 열어 제후들과 아홉 번
회합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북쪽으로는 고죽(孤竹)ㆍ산융(山戎)ㆍ예(穢)ㆍ맥(貊)ㆍ구진하(拘秦夏)까지
이르렀다. 《관자(管子)》
○ 《사기》에는,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병(幷)과 대(代)를 격파하고 호(胡)와 맥(貉)에
임하였다.” 하였다.
○ 《사기》 흉노전(凶奴傳)에는, “묵특(冒頓)이 강대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모두 복종시켰다. 좌방(左方)의
왕(王)과 대장(大將)들은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상곡(上谷)과 맞닿아 있고, 그 이후는 동쪽으로
예ㆍ맥ㆍ조선과 접해 있었다.” 하였다.
○ 한 고조(漢高祖) 4년(기원전 203) 8월에 한왕이 초(楚)를 공격하여 광무(廣武)에 주둔하였는데, 북쪽의
맥(貉)과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맥은 동북쪽에 있다. 삼한(三韓)의 족속은 다 맥의 종족이다.” 하였다.
연(燕)에서 날랜 군사를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 《한서》
신이 살펴보건대, 이것이 중국에서 오랑캐들에게서 처음으로 군사를 빌려온 것이다. 무릇 오랑캐들은
이리나 승냥이와 같으니,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망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일이 있을 때 그들의
힘을 빌릴 경우에는 비록 한때의 뜻은 시원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뒷날의 폐해는 반드시 없다고 보장할
수가 없다. 한 고조가 이런 일을 한 뒤로 후세의 중국 임금들이 가끔 오랑캐들에게서 군사를 빌렸다.
그러나 이익을 얻은 것은 적고 폐해를 받은 것은 많았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한 지 수년 만에 팽오(彭吳)가 안사고가 말하기를, “사람의 이름이다.” 하였다.
예ㆍ맥ㆍ조선의 길을 열었다. 《한서》
살펴보건대, 《사기》 평준서(平準書)에 “팽오가 조선을 멸하고 창해군을 두었다.[彭吳賈滅朝鮮置滄海]”고
한데 대하여 《사기색은》과 안사고는 모두 “팽오는 사람의 이름이다.” 하였다. 그런데
《통감고이(通鑑考異)》에는 “조선을 멸하고 창해군을 둔 두 가지 일 가운데 어느 것이 가(賈)의 계책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으니, 이는 팽오가(彭吳賈)를 사람의 이름으로 본 것으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동사(東史)에는, “우수주(牛首州)에 팽오비(彭吳碑)가 있다.” 하였고, 또 “단군(檀君)이 팽오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리게 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팽오가 한나라 때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우리나라가 처음 열렸을 때 팽오라는 자가 있어서 처음으로 길을 통하게 한 것으로
여겨 드디어 단군의 신하라고 한 것이니, 아주 틀린 것이다. 우수주는 지금의 춘천부(春川府)로 바로 맥국의
도읍지이다.
○ 명제(明帝) 영평(永平) 2년(59) 정월 신미에 광무황제(光武皇帝)를 명당(明堂)에다 제사 지내었는데,
오환(烏桓)ㆍ예(濊)ㆍ맥(貊)이 모두 와서 제사를 도왔다. 《후한서》
○ 《후한서》에 또, “광무제 건무 원년에 오한(吳漢)이 우래(尤來), 대창(大槍) 등 적(賊)을 추격하여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에 들어 왔다가 오환(烏桓)과 맥(貊) 사람들에게 격파되어 몰살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곳에서 말한 맥 사람은 고구려와 소수맥(小水貊)을 가리키는 것이지,
춘천(春川)에 있는 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 안제(安帝) 원초(元初) 5년(118) 6월에 예ㆍ맥이 고구려와 더불어서 현도를 침입하였다. 《상동》
○ 건광(建光) 원년(121) 정월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이 두 군의 태수를 이끌고 예와 맥을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4월에 예와 맥이 다시 선비(鮮卑)와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 11월에 예와 맥이 고구려ㆍ마한과 함께 현도성을 포위하였는데, 부여 왕이 아들을 보내어서
주군(州郡)과 함께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 12월에 예와 맥이 유주(幽州)와 병주(幷州) 두 주를 침입하였다. 《상동》
[주-D001] 정삭(正朔) :
정(正)은 1년의 시작을, 삭(朔)은 한 달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전하여 달력이나 역수(曆數)를 지칭한다.
제왕이 건국하면 달력을 고쳐 천하에 반포하여 통치 지역 내에서는 모두 그 달력을 행하였다.
[주-D002] 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 :
직방씨는 주대(周代)의 벼슬 이름이다. 《주례(周禮)》 하관(夏官)에 속하여 천하의 지도(地圖)를 맡아
보았으며,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물(貢物)을 관장하였다.
[주-D003] 경전(經典)에서 …… 모시정의(毛詩正義) :
이 부분이 원문에서는 《모시전》의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모시전》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모시정의》에
들어 있다. 원저자가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듯하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 구주산(句注山) :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의 서북쪽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안문산(雁門山)이라고도 한다.
[주-D005] 살펴보건대 …… 모르겠다 :
이병도는 “《한서》의 ‘팽오천예맥조선(彭吳穿濊貊朝鮮)’을 《한서》보다 앞서 된 《사기》 평준서에 대조하여
보면, 거기에는 ‘팽오가멸조선운운(彭吳賈滅朝鮮云云)’이라 하여 천(穿) 자가 가(賈)로 되고 예(濊) 자가
멸(滅)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기》의 원문이 어느 때 사오(寫誤) 혹은 판오(板誤)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86쪽》
[주-D006] 소수맥(小水貊) :
압록강의 지류(支流) 동가강(佟佳江)의 예맥(濊貊), 압록강 유역의 예맥족을 대수맥(大水貊)이라 하고,
졸본 부락(卒本部落)을 소수맥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고구려가 일어났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정신문화연구원, 1987, 172쪽 주》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출처] 096. 해동역사(海東繹史) 제3권 / 세기(世紀) 3|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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