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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는 항상 저의 관심사였습니다.
어린시절 구원파적인 말씀을 전하는 여자 목사님의 집회에서 그 여자 목사가 말했습니다. 믿으라고-
믿는다고 종이에 적어서 내라고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셨는데 끝내 적지 못하는 여자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저 또한 적으면서도 지금 나의 삶이 믿는 자의 삶이 맞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어서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봐도 야동 보고 자위행위를 끊지 못하던 그 시절의 나는 구원 받을 참된 믿음을 갖은 사람이 아닌데..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야고보 사도가 말한 행함이 있는 믿음은 무엇인가?
루터, 칼빈을 오해하여 팽배해지는 방종사상에 대항하여 웨슬리가 그토록 강조했던
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초대교회에서 청교도, 한국의 순교자들에 이르기까지 뿌리들의 이야기를 망라하여
오늘날 팽배해져있는 인스턴트 구원관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사용되기를 기대하며
오랜 기간 자료들을 수집하여 만든 소책자를 공유합니다.
이 자료는 자유롭게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인스턴트 기독교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진 정통은 무엇인가?
참된 기독교에 대한 변증서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찌니라
(욥기 8:8)
목차
서문 3
행함과 성화를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 4
초대교회 교부들의 증언 12
청교도들의 증언 16
복음주의자들의 증언 19
칼빈주의자들의 증언 30
신비가들의 증언 40
한국의 초대 순교자들의 증언 46
서문
오늘날 루터와 칼빈의 교리를 오해하여 오직믿음과 오직은혜를 방종사상으로 삼는 사상이 팽배하여졌습니다. 저는 도마와 같은 사람인지라 오직 성경을 말씀 하시는 담임 목사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성가들의 저서들을 수집하며 부흥운동을 연구하는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악한 세대 가운데 뿌리들의 이야기를 알고 뿌리들의 이야기를 선포하는 것이 도움이 될 부분이 있다고 판단 돼서 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고전들을 접할수록, 뿌리들의 이야기들을 캐낼수록 그들의 메시지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공통점들은 연세중앙교회와도 닮아있습니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는 사상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도 복음이고 신약도 그 복음의 연장선이자 완성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상도 잘못된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이어져온 뿌리들의 이야기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지만 지면상의 이유로 이 책에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과 회개와 성령의 감동으로 설교함에 대해서 다루려고 합니다.(필요에 따라서 다른 주제들도 섞였음) 주변에 인스턴트 구원관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많은 회원들을 보며 이런 종류의 변증책의 필요성을 느끼던 가운데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말세의 때 악한 세대 가운데 팽배하게 퍼져 있는 인스턴트 구원관에서 영혼들을 구해내는 일에 사용되기를 바라며 서문을 마칩니다.
엮은이, 정석영
행함과 성화를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
(마태복음 5장)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장)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장)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7장)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에스겔 36장)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로마서 3장)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6장)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7장)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갈라디아서 5장)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이사야 30장)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고린도전서 1장)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마태복음 7장)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누가복음 13장)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6장)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고린도전서 9장)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요한계시록 22장)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누가복음 6장)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로마서 6장)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한복음 13장)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5장)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야고보서 2장)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로마서 8장)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갈라디아서 5장)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마태복음 5장)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요한복음 14장)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1서 2장)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초대교회 교부들의 증언
초대교회 속사도 이그나티우스(사도 요한의 제자)
신비가
이그나티우스는 열광적인 심장과 극한 상황에 긴장된 신경을 가진 신비주의자이다.(헨리 비텐슨 저 ‘초기 기독교 교부’)
이그나티우스는, 그가 쓴 모든 서신서에서, 자신의 별명(호)가 “테오포로스”(Theophorus)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 별명(호)는 “하나님을 지고 가는 자”(bearer of God)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원어를 보면 “하나님을 지고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다닌다는” 뜻이다. 이그나티우스가 이러한 별명을 사용한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김광채 교부 열전)
성령의 감동으로 설교하라
내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야기된 분열에 관한 사전 정보에 근거하여 이것을 말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묶여 있는 그분이 내가 인간의 주선으로 그 정보를 알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십니다. “감독 없이는 결코 행동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키십시오. 일치를 사랑하고. 분열을 피하십시오.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십시오.”라고 설교하신 분은 성령이십니다.(Ibid. 7 이그나티우스)
로마의 클레멘트
이렇게 설교하라
하나님의 은혜의 종들(즉 예언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회개에 관해 설교했다.(Ibid. 8. 1 로마의 클레멘트)
행함이 있는 믿음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의 일원이기 때문에 거룩함에 속하는 것들을 행하도록 하자 ... 일치를 이루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훈련을 받고, 험담과 비방을 멀리하고, 말로써가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되자 ... (다른 서신에는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도 있다. 그는 야고보서와 같이 행함과 믿음을 둘 다 강조하며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강조하였다.)(Ibid. 30 로마의 클레멘트)
이레니우스(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의 제자)
계명을 지킬 것이냐, 지키지 않을 것이냐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그를 믿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선이고, 이것이 또한 인간의 삶이다.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 악인 것처럼, 이것은 또한 인간의 죽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친절함을 보여주었을 때 인간은 복종의 선함과 불복종의 악함을 배웠다. 그의 마음은 경험으로 선과 악의 차이를 감지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더 나은 것을 택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결정을 행사할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하여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이렇게 말함으로 주님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옛 법을 명백히 했다.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마치 그가 그 자신의 삶을 소유한 것처럼, 그 자신이 결정할 힘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강제없이 하나님의 의도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지만, 그의 의도는 항상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계획은 모두 선하다. 그가 천사들에게 선택의 능력을 준 것처럼(천사들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선택의 능력을 주었다. 복종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을 소유할 것이고, 그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것을 누가 보유하느냐 하는 것은 그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 ... 만약 본래 어떤 사람은 악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선하다면,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원래 갖추고 있는 선으로 인해 칭송받을 가치가 없을 것이다. 또 악한 사람들도 그들이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선을 받아들이고 이룰 수 있는 힘과, 마찬가지로 선을 쫓아버리고 성취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잘 질서지어진 공동체 안에서 선한 사람들이 칭찬받는 것은 정당하고 ... 악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을 다루는 하나님의 태도와 관계해서 모두 더욱 사실이다. ... 만약 무엇을 행하거나 혹은 행하지 않을 힘이 우리에게 없다면 사도들은 어떤 것은 하고 다른 것들은 금하라고 충고할 어떤 근거를 가졌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처음부터 자유로운 결정을 소유하고, 인간을 자기 모습대로 지은 하나님도 자유롭기 때문에, 인간은 선을 붙잡으라고 충고받는다. 그 선은 하나님에게 복종함으로써 충만히 성취 된다. 그리고 행함에서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도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와 구속받지 않는 선택을 보전한다. 그가 말하기를, “너의 믿음대로 되라.” 이것은 마치 그가 그 자신이 결정할 힘을 지니는 것처럼, 믿음은 인간이 그 스스로가 소유하는 어떤 것이다.(Ibid. 4. 37. 1 이레니우스) (이 글을 여기 실은 이유는 자유의지가 옳고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과 경륜이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정과 자유의지를 모두 말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심해에 속한 비밀한 그 둘의 조화를 어느 한 곳에 치우쳐 생각하지 말고 균형 있게 인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첨부합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사역(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한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도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빛을 저버리고 자유의 법을 어기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실패를 통해 자신들을 죽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롭고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로 창조 되었기 때문이다.(Ibid 4.39.3 이레니우스)
순종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인 인간들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위로는 아들이 아니다. 인간들 가운데 아버지에 의해 의절 당한 불순종의 아들들은 본래는 아들이지만, 그들은 더 이상 부모의 상속자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의절당했고 아들이기를 그쳤다. (Ibid. 4. 41. 2-3 이레니우스)
성령으로 행하라
아버지의 영이 있는 곳에는 살아 있는 인간 ... 성령에 의해 주장되는 육신, 즉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성령의 성질을 띠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 인간이 있다. ... 성령을 받아,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삶을 산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다. (Ibid 5. 9. 2-3 이레니우스)
청교도들의 증언
청교도들의 설교관
설교란 “하나님의 예언적인 음성이다.”라는 확신이 청교도들로 하여금 설교의 가치를 굳게 붙들게 했고, 모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설교 사역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말씀을 선포하도록 만들었다.
(청교도 신학과 신앙/ 서창원 저/ 지평서원)
청교도 목사 사무엘 크룩의 설교관
그는 항상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으로 설교했다.(Haller, op. cit., p.132)
청교도 목사 코튼 매더의 설교관
“진리의 불을 지피라. 그 진리들이 당신의 손에서부터 흘러나오게 하라. 최초로 복음을 설교했던 사도들에게 임재하신 그 성령이 함께하는 혀는 진리 위에 타오르는 하늘의 불꽃이다.”
청교도의 주일 개념
그들은 주일에 구약의 안식일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했고, ‘안식일 엄수주의’를 유출 시켰다. 그들은 철저하게 오락을 금하고, 장사나 자신을 위한 모든 행위를 배격하며, 주일을 온전히 예배와 교제와 선행하는 데 아낌없이 바쳤다.
청교도의 경건생활
청교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들의 경건한 삶일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철저한 안식일 엄수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적 박람회장에서 한 주간에 필요한 모든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그들에게, 주 중에 들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경건한 삶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경건한 삶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나타낸, '성경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성경적인 사람들인 청교도들은 오늘도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증언하고 있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 성도들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새 부대에 담은 새 술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영적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칼빈은 성찬예식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를 점검하는 교회의 책임을 매우 강조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만 강조하고 이에 수반되는 성결한 삶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영의 내적 임재를 증명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없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의 설교
(회개에 대한 지옥불의 설교)
존 번연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할 때면 특별히 신경 쓰는 일이 있었다. 죄에 대한 것이었는데, 먼저 죄인에 대해 기록된 말씀을 들려주어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 경고했다. 그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용서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반드시 확인시켜주었다.
그가 죄에 대한 문제와 해결의 길에 각별히 마음을 쏟았던 것은 그만큼 절실한 과제었기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죄의 자각과 회개보다 우선 되어야 할 문제가 없다.
‘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깨우쳐주지 못하고 해결의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나의 수고는 헛된 것이다. 집을 짓는 자가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집을 짓는다면, 그 집이 아무리 훌륭하게 지어졌더라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테니까.’
존 번연은 죄와 그 무서운 결과를 강조하면서 회개에 대한 지옥불의 설교를 했고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존 번연의 증언 2
구원은 끊임없는 회개의 전 과정이다.
복음주의자들의 증언
존 웨슬리
회개에 대한 지옥 불의 설교
회개에 대한 지옥 불의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듣는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고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짧게는 1주일 길게는 수개월 동안 벌벌 떨면서 방주이신 예수께로 향했다.
거짓 선지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사가 마귀의 대사로 변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가르쳐야할 자가 세상의 지옥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영생의 길이라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따라 좁은 길로 가지 말고 넓은 길로 가라고 한다. 거짓 선지자의 가장 뚜렷한 표적은 넓은 길로 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하늘로 가는 참된 길은 좁은 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늘로 가는 참된 길은 산상수훈 전체가 지정한 그 길이다. 그러므로 그 길로 가라고 가르치지 않는 모든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산상수훈 설교 전체가 지정한 하늘 가는 길이란 곧 겸손, 애통, 온유, 거룩한 의로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선행,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 등이다. 그러므로 이밖에 다른 것을 하늘 가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이다.
청교도의 후예 마틴 로이드 존스의
거짓 선지자가 전하는 메세지의 특징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을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말씀이 거의 없다. 그의 메시지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하나 상세하게 열거하지 않는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하다." "성경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일관성이 없고 모호한 설교 때문다. 거짓 선지자들은 설혹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경을 조화있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빛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뱀의 혀가 둘로 갈라져있는 것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 어떤 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설교하다가 어떤 때는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의 특징이다.
이같은 전제를 말한 후 로이드 존스는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다.
1)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곧 사랑이다.
2) 거짓 선지자는 심판과 지옥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반세기동안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3) 거짓 선지자는 죄의 사악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4) 거짓 선지자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은 그저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된다. 하지만 청교도나 웨슬레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위인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다.
5) 거짓 선지자는 성결한 생활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다.
6) 거짓 선지자는 자기 기만의 위험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안한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방해한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항상 ' 예수를 바라봐야 ' 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자신을 시험해보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는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웨슬리나 휫필드,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자기 검토와 죄의 의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기독교 생활을 추천한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통 교단에 속해있고 아무리 큰 교회를 목회 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것을 빠트리고 설교하는 자는 누구든 거짓 선지자임이 분명하다.
21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리던 복음주의자 A. W. 토저의 울고 계시는 예수님
이미 오래 전에 영국의 참신한 그리스도인인 윌리엄 부스는 앞으로 기독교가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예언 하였다.
"다가오는 세기의 가장 큰 위험은 성령 없는 신앙,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죄사함, 거듭남 없는 구원, 지옥 없는 천국이 될 것이다"
A.W. 토저 선지자는 오늘날 교회가 무력하게 된 까닭은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령에 관해 설교하기 때문이고, 회개를 체험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단순히 "믿음"만을 강조하고 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이 "믿음" 이외에 덧붙히는 것은 모두 이단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상당수 교인들이 가벼운 입으로 믿는다고 시인하면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모든 죄가 사함 받아 의롭다라고 칭함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문구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이르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도 바울이 위와같이 말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쓴 기록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전체 기록문서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행위를 강조 하였고, 더 나아가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강조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작성한 문서 이후에 나온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기록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당시 사도들의 중심적인 메세지는 "회개"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의하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사도행전 17장 30절에 의하면,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였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설교한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사도행전 8장 22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것이고(사도행전 20장 21절) 마음과 행동의 철저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사도행전 26장 20절) 그리고 성경 히브리서 기록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장 14절)
다시 말해서, 당시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과 함께 선을 행하야 하고, 진실로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거듭나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라고 강조 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죄로 망하리라"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느니라"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느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는 나에게 와서 겸손을 배우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 뜻대로 행한 자라야 들어가리라"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등등등....
여러분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4대 복음서가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주된 가르치심은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 거룩해 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삶을 행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매일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며,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며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여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마음을 깨끗하고 청결하게 유지 하면서 성결을 이루어 나가도록 영적 변화를 일으켜 성화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아래와 같이 사랑의 손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너희 악한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영접해 다오"
"너희 삶의 주인이 내가 되도록 하여다오"
"그리하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여 너희를 성화시켜 반드시 구원하리라"
이러한데도,
우리는 가벼운 입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 받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러하다면, 천국의 문은 넓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음이라"
여러분들, 가벼운 입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였다가,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꾸짖으시면 얼마나 망연자실 하겠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태복음)
오늘날, "회개 없는 그리스도 영접"/ "회개 없는 죄사함"/ "거듭남 없는 구원"/ "십자가 없는 신앙"/ "행함이 없는 믿음"의 한국 교회를 향하여 오늘도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21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리던 복음주의자 A. W. 토저의 인스턴트 기독교
“인스턴트 기독교”라는 말은, 우리가 한두 가지 믿음의 행위로 영혼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런 후에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근심을 제거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으므로,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다는 관념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인스턴트 구원관) 거의 모든 복음 사회에서 발견되고 있다. 인스턴트 기독교에는 신약성서의 신앙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동적이고 일회적인 특성이 있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신앙 행위를 종착점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영적 발전을 향한 갈망을 저지한다. 그것은 기독교 생활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독교 생활의 본질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며 성장 지향적이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새로운 기독교인은 새로 태어난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성장하려면 영양분을 섭취하고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의 행위는 두 개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존재, 즉 하나님과 화목한 인간 사이에 개인적인 관계를 설정한다는 사실과 한 번의 만남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인스턴트 기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단 하나 또는 두 개의 경험 안에 포장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자연계의 운용 법칙이 발전하고 있음을 자랑한다. 그들은 고난, 십자가를 지는 일, 그리고 실제적인 순종의 성화 효과를 무시한다. 또 영적 훈련의 필요성, 올바른 종교적 습관 형성의 필요성, 그리고 세상과 마귀와 육체를 대적하여 싸워야 할 필요성을 못 본 체 한다.
믿는다는 원초적인 행위에 잘못 몰두하게 되면 내적으로 만족하면서도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심리상태에 이른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실망감을 준다.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시며, 세상은 너무나 가까이 있고, 육체는 너무나 강력하여 저항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동적인 축복의 보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들을 깨어 있으면서 지켜주고 그들을 위해 싸우며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덜어주며, 내세를 기다리는 동안 자유로이 이 세상을 즐기도록 배려해 준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21세기의 정통이다. 빌립보서 3:7-16*을 기록한 바울은 신앙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그가 과연 인스턴트 기독교인들을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 생각에 바울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21세기의 선지자 A.W 토저의 증언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 아니라 행함장'
흔히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음장이라고 알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사실 행함장이다. 히브리서 11장을 한 번 읽어보라 믿음으로 행한 행동들이 기록되어있다.(엮은이: 토저가 하고 싶은 말은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얼마나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킬 수 없는지, 믿음과 행함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는지,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칼빈주의자들의 증언
칼빈이 말하는 경건의 정의와 중요성
경건은 칼빈 신학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존 T. 맥닐이 말하는 것처럼, 칼빈의 신학은 "그의 경건을 상세히 펼쳐 놓은 것이다." 칼빈은 신학을 경건의 경계 안에 두리고 결심했다. 프란시스 1세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쓴 목적에 대해, "다만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기술함으로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pietas]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었다."고 말한다.
칼빈에게,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를 가리킨다. 이 태도에는 참된 지식, 진실한 예배, 구원에 이르는 신앙(saving faith)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두려움, 신실한 복종, 공손한 사랑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경건)을 포함한다. 자신의 1차 교리문답서에서, 칼빈은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서 공경하며, 그분의 공의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하는 순수한 감정 속에 있다."고 쓴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경건을 더 간명하게 정의한다. "나는'경건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유익에 대한 지식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결합된 공경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에 대한 이 사랑과 공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동반하고, 삶의 모든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모든 부분은 일관되게 경건을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또는 [기독교 강요] 초판의 부제의 진술 곧 "경건에 대한 전체 개요와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제반 사항을 거의 망라함 : 경건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라는 진술도 마찬가지다.
칼빈의 주석들 역시 경건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칼빈은 디모데전서 4장 7-8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가 열심과 능력을 다해 오직 경건(pietas)에 힘쓴다면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처음이요 중간이요 끝이다. 경건이 충분히 이루어지는 곳에서 부족함이란 없다. 따라서 결론은 우리가 오로지 경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경건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바랄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그[베드로]는 생명을 언급할 때 마다, 마치 경건이 생명의 영혼인 것처럼, 즉각 경건(pietas)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
존 오웬은 회개에 대한 지옥 불의 설교를 하는 존 번연의 설교를 즐겨 들었는데 한 귀인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그렇게 해박하고 유식한데 왜 저런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를 듣습니까?”
그러자 존 오웬이 대답했다. “내가 저 땜장이와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다면 나의 모든 지식을 버리겠습니다.”
청교도의 후예 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도 칼빈주의자였지만 회개에 대한 지옥 불의 설교를 즐겨 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단 5초만이라도 지옥에서 사람들이 고통받는 장면을 본다면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 할 것입니다.” 그의 탁월한 회개에 대한 지옥 불의 설교 중에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설교가 있는데 그 설교는 책으로도 출판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도 웨슬리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과 같이 짧게는 1주일 ~ 길게는 수개월 이상 벌벌 떨면서 방주이신 예수께로 향하였다고 한다.
칼빈주의자 조지 휫필드
회개에 대한 지옥불의 설교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지만 회개에 대한 지옥 불의 설교를 했다.
칼빈주의자 J.C 라일이 말하는 휫필드
사도적인 권위
조지 휫필드는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도의 권위를 갖춘 진정한 복음전도자였습니다.
그의 설교
순전한 복음만을 전했다. 이제까지 청중들에게 알곡만을 전달한 설교자는 거의 없었다. 일단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서면 파티나 자기 주장, 개인적인 관심사나 사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죄, 심령, 예수 그리스도, 성령, 절대적으로 필요한 회개와 믿음과 성결 등등 핵심적인 주제들을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전했을 뿐이다.
영혼의 필요한 사정을 알고 설교한 성령의 설교
휫필드는 하나님께로부터 각 사람의 영혼에 대해 개별적으로 주신 메시지를 받아 전하는 것처럼 사람들 모두를 직시했다. 그 결과 휫필드의 청중들은 대개가 그의 설교가 특별히 자신을 위한 설교라고 생각했다.
율법폐기론에 대한 경계
율법폐기론자(그리스도를 믿어서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는 악한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은연중에 구원에 대한 기대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휫필드 목사님은 위와 같은 율법폐기론을 반대했습니다.
거룩함
휫필드 목사님은 이러한 복음의 기본 교리가 경건에서 나오는 거룩한 길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쳤습니다. 고인은 자유주의자나 율법폐기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고인이 가진 원칙이나 실천한 바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교리들이 그에 반대하는 주장들보다 성결을 더욱 자유롭고 풍성하게 이루게 한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이 가르침들만이 신자들이 올곧고 거룩하게 신앙을 실천하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복음에 순종하여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확증하고 선행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확증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랑과 화평, 성결을 추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을 증명하십시오(딤후 2:22).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모든 가르침이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이끈다는 사실과 거룩함을 장려하지 않는 가르침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죄를 멸하지 않는 교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가르쳐 불경건함과 속된 정욕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딛 2:11-12).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십시오(골 3:12-13). 이같이 거룩한 생활과 말을 통해 어떤 은혜를 받았고 또 누리고 있는지 명백히 드러내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헐뜯던 자들이 바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칼빈주의자 사무엘 루터포드의 증언
(불후의 기독교 고전 사무엘 러더퍼드의 편지(ch북스)의 저자)
율법폐기론 주의(Antinomianism)
(그리스도를 믿어서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
이것은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가 깊이 관심 있게 다룬 또 다른 논쟁거리였다. ‘율법폐기론자’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율법폐기론 주의자는 1640년대 하나의 중요한 분파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섬긴(롬 7:25) 바울과 같은 사람을 율법주의자로 선언하였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구원으로부터 율법을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한 이단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은혜를 부정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루터포드는 이 이단을 그가 1648년에 특별히 반 율법주의에 대해서 다룬 <영적 적그리스도에 대한 개요>라는 책을 내기 전 여러 저술에서 언급하고 있다. 율법폐기론 주의자들의 교활함은 그들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성결한 삶을 위한 긍정적인 잣대로서 율법의 활용을 반대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잘못을 로마서 3:31, 6:1-2, 갈라디아서 5:13에서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그러나 모세에 의해서 전달된 이 십계명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영구적인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이 명백한 것이다. 1.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이 도덕법을 지키라고 하였다.(롬 13:8-10, 약 2:1-12)......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 속에 이 놀라운 사실들, 즉 모세가 이것을 믿음의 교리로 명령하였고 그것들이 모세의 십계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계명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2.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에 그림자를 제거하는 성경말씀이 있다.(행 15장, 갈 5장, 골 2장).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제거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영적 적그리스도, 2부 p.6)
순종에 대한 새로운 의무는 십계명의 본질을 변질시키지 않는다. ...... 복음의 의무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 복음은 완전함의 높이를 낮추지 않는다. 복음도 율법이 명령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동일한 수준을 명령한다. 왜냐하면 율법도 거룩하고 순전하며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며 그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고 명령하심에 있어서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48, 베드로전서 1:15, 신명기 27:26, 갈라디아서 3:10(상게서, 2부 p.8)
우리에게 주어진 칭의는 율법폐기론 주의자들이 꿈꾸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죄를 완전하게 삭제하거나 뿌리를 뽑거나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칭의를 기만하고 있다. 따라서 의롭다함을 받은 자에게는 죄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우리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경미한” 것들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칭의가 죄인의 죄책을 법정적인 측면에서 제거하는 것이요 또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복종에서 면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상게서 2부 p.17).
율법폐기론 주의자들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거나 죄를 인하여 책망을 받는 일을 하지 않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양심 속에 그 어떤 죄책감도 남아있지 않게 한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의롭다할지라도 믿음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죄인들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다. 죄인들은 모든 죄책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가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는 것을 보신다. 우리의 정죄를 위한 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정죄 받지 않게 하셨기 때문이다. ...... 믿음은 죄에 대한 모든 감각을 제거할 정도로 양심을 마비시키지 않는다. ...... 그러나 둘째 아담이 우리 영혼 속에 빛을 들고 오셔서 전에 숨겨져 있던 죄가 무엇인지 보게 하고 알게 하시며 믿음의 조명하에 느끼게 하신다.(상게서 2부 p.230-231)
신자의 내적 평강을 성화가 아닌 칭의로부터 추적하는 것은 율법폐기론 주의의 오류이다. ‘칭의의 열매인 평화는 양심의 법정에 있는 것이다.’(죽으시는 그리스도, p.127)
나는 데니, 이튼, 크립스, 솔트마쉬 같은 사람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다. 그들 모두는 다 율법 폐기론 주의자들인데 하나같이 다 불신앙을 가르친다. 옛 아담의 육체의 일을 가르친다. 우리의 연약한 감각, 죄 죽임의 결핍을 느끼는 것,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죄를 느끼고 죄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하는 것과 같이 죄의 몸을 지니고 있는 것을 불평하는 것 등은 다 불신앙적 행동이라고 가르친다.(상게서 p.620)
그것은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극히 작은 죄에 대한 것을 깊이 인식하는 것은 제대로 된 양심인 것이다. 다윗은 사울 왕의 옷자락 조금을 잘랐을 때 통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처럼 죄에 대한 자각은 살아 있는 양심의 증거물이다.(삼상 24장, 믿음의 시련과 승리, p191-192)
그러므로 우리는 둘째 아담이요 보다 나은 신랑인 그리스도와 결혼한 성도는 성화와 거룩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율법의 다스림과 지시하는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율법의 통치로부터 자유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의 전가된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보배로운 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구원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죽으시는 그리스도, p701)
무엇이 옳든지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분명한 것은 그 일에 어떤 충돌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유하게 한 성도들이다(요 8:36). 그 아들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지니라”(요 14:15)고 하셨다. 마태복음 28:20, 시편 119:45, 고린도전서 7:19-22, 베드로전서 2:16, 유다서 1:4, 누가복음 1:74-75을 참고하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결코 중생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두려워할지라. 그것은 그들 보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자격증처럼 참 자유를 남용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열매로 나무를 알지니라”고 하셨다.
설교는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것(루터포드의 요리문답 중에서)
문: 누가 말씀을 설명해야 합니까?
답: 말씀은 선명하며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빛입니다.(시 119:105, 벧후 1:19, 신 30:11) 구원을 향한 갈급한 상황에서는 스스로 설명되며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들(고후 2:11, 시 25:9/12, 요 7:12)이 빛 되신 말씀으로 그 말씀을 설명해야 합니다.
문: 어떤 이유로 그 말씀이(설교자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합니까?
답: 사람이나 교회가 하는 말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요 5:33-35, 마 16:17)
율법에 관하여(루터포드의 요리문답 중에서)
문: 우리가 예수 믿고 난 후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율법 사이를 중재하신 후, 우리는 그 율법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즐거이 행합니다.(고후 5:14, 시 119:30/63/97/105/127)
문: 율법의 완전함을 알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할 규범은 무엇입니까?
답: 네 가지입니다.
문: 첫째가 무엇입니까?
답: 율법은 모든 선한 것을 행하고 악한 것은 금하는 것입니다.
문: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답: 이것은 영적인 것이며 마음에 명하여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사 1:3, 렘 4:22, 렘 9:3) 선을 행하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며(신 6:5, 출 20:8), 의지와 애정으로 선을 택하고 선을 사랑하며, 그리고 악을 혐오하고 미워하며(신 30:19, 수 24:15, 살전 5:21), 그리고 모든 육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롬 6)
문: 셋째 규범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얼굴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적확한 틀 안에서 우리 영혼의 모든 힘을 가지고 완벽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마 22:37, 약 2:10, 빌 4:8, 롬 7:7)
문: 넷째 규범은 무엇입니까?
답: 순종의 수단을 명하여 모든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마 5:27-28, 욥 31:1, 신 6:3, 시 26:4-5)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도록 독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엡 4:29, 벧전 3:9-11)
십계명에 관하여(루터포드의 요리문답 중에서)
루터포드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면서 행위와 생각과 마음의 수준까지 장황하게 1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강해했는데 지면이 부족한 관계로 그 부분은 생략합니다.
문: 가장 강하고 잘 익은 욕망의 단계는 무엇입니까?
답: 질투와 악한 욕구가 일어날 때 그리고 악한 일을 수행하도록 분출되는 것입니다.
문: 그와 같은 욕망이 발생하는 특별한 죄악들은 무엇입니까?
답: 정욕과 탐심 그리고 교만함과 야망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쾌락과 재물 및 명예라는 세 가지 세상의 신들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문: 육체의 욕망에 대한 특별한 치유책은 무엇입니까?
답: 매일 슬퍼하며 죄의 몸을 죽이며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문: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솟구치는 모든 욕망에 대한 특별한 치료책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는 회개함으로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쾌락과 재물과 명예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신비가들의 증언
잔느 귀용의 깊은 성화의 6단계
페넬롱은 가끔 귀용 부인을 만났으며, 자신이 그처럼 갈망하는 체험에 대해 서신을 교환했다. 마침내 귀용 부인은 자아의 생활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필요한 단계에 관해 편지를 썼다. 페넬롱은 이것을 지적으로 매우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사실은 그가 그 후 귀용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그 요점을 요약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인, 나는 당신이 내게 보내준 편지에 기록된 내용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그 편지에서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에 의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혼의 특징이 되는 여러 체험을 묘사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게 기록해 보낸 견해들을 요약함으로 내가 그것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고자 합니다.
1. 자신을 영원히, 그리고 정식으로 하나님께 바친 영혼이 취하는 첫 단계는 소위 표면적인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들, 즉 본성의 욕망과 성질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단계에 있는 영혼의 신앙 상태의 특성은 성실함과 그리고 믿음에 의해 유지되는 단순성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홀로 활동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와 자신의 능력을 따르며 협동한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승리를 얻는다.
2. 제 2단계는 내적 감각의 쾌락에 의존하던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단계에서의 싸움은 보다 가혹하고 오래 간다. 내면의 흥미와 취미에 대해 죽는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내면의 흥미와 취미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로 최초의 경험에서 즐기고 의지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행복을 잃을 때 하나님을 잃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영적 생명은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연합하는 데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결과이다. 약간 다른 방법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이 단계에서의 승리도 역시 믿음에 의해서 얻어진다.
3. 제 3단계는 우리의 표면적인 의나 내면적인 의에 의존하는 일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자아의 생활에서 형성된 습관들은 매우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에서나 어느 정도의 자기만족을 취한다. 영혼이 자신의 감각을 정복하고 이기고 큰 힘을 얻어 내적으로 즐거운 자극이 없이는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되면, 자신의 의와 진리와 절제 속에서 어느 정도의 만족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은 이기적인 만족이다. 영혼은 마치 이러한 의가 자신의 것이며 그것들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영접받는 양 그것을 의지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서는 죽어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에 대해서는 살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주시는 분에게서만 만족을 느껴야 한다.
4. 제 4단계는 우리가 내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과정에 포함되어있는 하나님의 조처(제기된 문제나 일을 잘 정돈하여 처리함. 또는 그러한 방식)에 대해 본성적으로 느끼는 반감에 대해 죽는 일이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에 크게 반발하였으나, 이제는 반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혼은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분명히 느끼며 또 그 믿음이 강력하므로 전에는 괴롭게 여겨졌던 불운한 것들을 이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인다. 영혼은 자신을 때리시는 손에 입을 맞춘다.
5. 우리의 신앙이 크게 발전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본성적인 인간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제 5단계로 새로운 생명이 임한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생명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보다 고귀한 의미에서의 새 생명, 즉 사랑의 생명의 부활이다. 과거의 영혼이 자력으로 구하던 은사, 그리고 하나님을 벗어나 구하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롭고 파괴적인 것으로 작용했던 것들이 만물을 주시는 위대한 분에 의해 풍성하고 충만하게 영혼에게로 돌아온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자기 피조물에게서 행복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피조물이 하나님을 벗어나서 소유하고 있는 기쁨과 번영을 부수며, 그 행복에 쓴 잔을 부으려는 것이다. 행복의 도덕률이 있으니, 그것은 도덕적 원리들이 불변하듯이 불변한다. 하나님은 거짓된 행복, 혹은 그릇된 원리에 기초를 둔 행복은 부수어 버리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불행으로 향하는 첨병(행군의 맨 앞에서 보내지는 병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것은 영혼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합일로 들어가게 하며 또한 영원의 샘에서 생명수를 마실 수 있게 함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확립하시기 위해서이다. 영혼은 자기 자신의 행위(즉, 하나님과의 협력 상태에 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행위)를 그치고 하나님이 자기 안에 살아 활동하시게 함으로 이 새 생명을 소유한다.
6. 여섯 번째로, 영혼의 뜻이 실제로 하나님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영혼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영혼이 유지하는 모든 관계(이것은 아마도 성향, 또는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에 있어서 하나님과 일치할 때 이 생명은 참으로 변화된 생명, 즉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명이 된다. 이 때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일치하게 되므로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고 여길 수 있다. 내가 생각건대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바 ‘이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상태인 듯하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으로 묘사되는 영혼에 거하시어 빛이 되신다.
이렇게 변화된 영혼의 거룩함은 거침없이 발전해 나간다. 그는 결코 자신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물러 정체하지 않고 새롭게 발전한다. 그의 생명은 사랑이며 그 사랑의 능력은 무한히 증대된다.”
성화에 대한 묵상
우리 자신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죄에 불과하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죄밖에 없다. 진리의 빛이 영혼 속에 베풀어 주는 경험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는 스스로 매우 비참하고 부패한 존재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 영혼은 줄곧 진리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혈로 죄악을 제거해 주신다. 심지어 죄를 범한 기억마저도 없애 주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죄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깨끗해졌다. 더이상 죄악이 있던 자리를 찾아볼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이전에, 우선 우리는 자신의 죄와는 전혀 무관한 체험을 해야 한다. 또한 오직 하나님께만 이끌리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치며(죄와 싸우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 하는가! 이러한 죄악들을 이기며 성화의 지경에 도달한 영혼은 순결하다. 그러나 이때의 순결함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어린양의 보혈로 씻겼으며, 자신이 보혈의 공로 아니면 나 하나도 해볼 수 없는 죄인임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인정하며 살아간다.
프랑소아 페넬롱의 증언
(잔느 귀용의 제자, 수많은 영성가들이 극찬한 불후의 고전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저자)
구원은 단순히 죄를 멈추는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덧붙여 선행이 추가되어야 한다. 천국의 상급은 너무나 큰 것이기에 감히 죄를 지을 수 없어 죄를 멀리하는 노예적인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받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들이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무서워서 그분을 섬기는 노예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영감을 받고 행동해야 한다.(그리스도인의 완전 중에서)
한국의 초대 순교자들의 증언
주기철 목사의 ‘하나님 앞에서 하는 생활’
하나님 앞에 사는 생활이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경건한 생활을 의미한다
전도서 5장 2절에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조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대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다는 것은 조심 없이 방자스럽게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장 29절에 있는 “이는 육체를 가진 아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란 말을 비추어 본다 해도 하나님 앞에 사는 자는 함부로 자긍하는 말이나 일절 말을 열지 않고 근신하고 삼가는 것이 합당한 줄 압니다.
우리는 웃어른 되는 부모나 스승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거나 경건하지 못한 태도는 삼갑니다. 만일 그것이 합당한 일이라면 세상 모든 아버지의 아버지이시오, 또 우리를 창조하신 자요, 우리의 생살권(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을 가지신 만능의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엄숙하고 경건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흔히 무의식중에 신자의 체면을 손상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에 매우 부끄러운 실수를 곧잘 합니다. 그중 보통 흔한 것은 야비한 농담입니다. 이 같은 농담은 성경에도 분명히 금했거니와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는 자로서는 도저히 취할 태도가 아닌 줄 압니다. 혹 어떤 교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경건되지 못한 농담이 오고 가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 것은 큰 유감입니다. 또 금방 울며 간절히 죄를 자복하면서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던 신자의 입에서 더러운 욕설을 포함한 농담을 말하는 수도 종종 발견하게 되니, 이 같은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생활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경건이란 예배 때뿐만 아니라 나의 일상생활 어디서든지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직한 생활을 의미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20절에서, 자기의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아닌 정직한 말임을 힘 있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감시가 나를 떠나지 않음을 느끼면서 모든 일에 정직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 정직이란 무엇입니까?
일절 사기적 행동을 끊어 버림입니다.
한 번 작정한 것을 변치 않음입니다.
결론
어떤 이는 “이 세상이 다 그런데 나만 경건하고 정직하고 태연하면 무슨 수가 있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흐려져도 주님은 거룩하니 우리는 오직 그를 따라 나갈 것이며 그 명령을 좇아 이 흐린 세상을 맑아지게, 명랑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깨끗한 후에 나도 깨끗해지겠다 하면 그 시기가 언제 돌아올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재삼 음미해야 하겠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천국 가는 계단 – 덕행에 대하여’
(베드로후서 1장)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인引 (1) 신앙에 대한 연속 (2) 덕행
덕이 무엇이뇨?
(1) 신앙의 결과 야고보서 2:17
(2) 도의 결과
2. 덕행의 실현
(1) 겸손 교만할 만한 처지에서 겸손[하는 것이]이 참 겸손
⓵ 지위 계급에서 겸손 ⓶ 유식 계급에서 겸손 ⓷ 유산 계급에서 겸손 ⓸ 용모 특출에서 겸손 ⓹ 신앙 계급에서 겸손
(2) 충성
⓵ 세상 국가 위하여 충성해도 민적 행복(이순신) ⓶ 천국 위하여 충성자, 교회에 덕을 끼침.
(3) 자비
⓵ 육신적 불행을 ⓶ 영적 죄악을
(4) 성결
⓵ 심리적 성결 ⓶ 언행에 대한 성결
(5) 화평
⓵ 화평한 심리(김봉선의 찬송?) ⓶ 화평의 언어 ⓷ 화평의 서신(강계 김창욱 장로의 1. 이혼 건을 화목시킴 2, 일본인을 선[으로] 대한 것)
손양원 목사의 ‘천국 가는 계단 - 경건에 대하여’
경건의 유익
(1)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됨
(2) 범죄치 않음
(3) 요동치 않음
결과
천국에 도달함.
손양원 목사의 ‘완전의 인물이 되고자 하는 이에게’
(마태복음 19:13- 26)
인引: 세상에 완전한 인물을 구하는 자 많으나 완전한 인물을 구하기는 극히 어렵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깨닫는 인물이라야 완전한 인물이 됩니다.(마태복음 19:20-21)
소년 부자가 계명을 다 지킴으로 완전한 인물이 된 줄로 알았으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였습니다. 청년 부자에게는 재물을 영생보다 더 사랑하는 고로 한 가지 부족한 것을 깨달으므로 하심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 오늘도 권면하시는 것이외다. 비록 진실한 교인이라도 한 가지 이상의 부족을 발견할 수 있음
신앙은 좋으나 계명에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거짓말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폄론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욕심에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간사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시기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음욕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교만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인색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습관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나태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혈기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용서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절제의 부족점,
신앙은 좋으나 고집의 부족점,
물론 이상 어느 것이든지 한 가지의 부족한 것으로도 구원을 얻는 데는 큰 지장이 되기 쉬운 고로 한 가지의 부족한 것이라도 깨달아 고쳐야 함. 소년 부자를 앞 거울로 삼을 것이라.(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 외에도 손양원 목사님의 거룩함과, 행함과,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강조하는 설교는 더 많으나 지면이 부족한 관계로 싣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