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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1동 광승마을 입지(立地) 이 마을 어르신들과 마을을 둘러보면서 옛 집들의 흔적을 찾아봤다. 이 마을 김종남(84) 어르신은 “휴천1동사무소 앞에서부터 작은 골목을 따라 남쪽방향으로 내려가서 동부맨션(2차) 건물이 있는 곳까지 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도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송영선(전 중앙초 교장)씨는 “1960년대 광승마을은 200여 호에 1천여 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다”고 말했다.
광승마을의 역사
한편 국립지리원에 등록된 지명유래에는 「마을 앞 평야가 넓고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물 속 물고기가 뛰어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하여 넓을 광(廣)자와 오를 승(昇)자를 써서 광승(廣昇)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현재 쓰고 있는 휴천(休川)이라는 명칭(名稱)은 옛날 마을 앞으로 내가 흘렀는데 물이 자주 말라붙어 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아 내(川)가 쉬어 흐른다는 뜻에서 휴계(休溪)라 했는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휴천동이라는 새로운 지명을 만들었다. 당시 일제는 광승이라는 지명이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일제는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옛 지명 사용을 금하고 새로운 지명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디계시냐?”고 물었더니 “돈 벌로 산에 갔다”고 하면서 웃는다. 야성송씨(冶城宋氏)가 광승에 자리 잡은 것은 눌재(訥齎) 송석충(宋碩忠, 1454~1524)에 의해서다. 눌재는 단종 2년(1454년) 5월 28일 한성 호현방(충무로)의 본집에서 태어나 점필재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1478년(성종 9)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교유하던 인물들이 화를 입자 서간과 저술을 강물에 던지고 병을 빙자하여 영천군 광승으로 내려가 경서와 역사공부에 몰두했다. 눌재가 낙남(落南)하여 영주에 자리 잡은 것은 처가가 광승에 있었기 때문이다. 눌재의 부인은 옥천전씨로 통정대부를 지낸 휴계(休溪) 희철(希哲)의 딸이다. 휴계(눌재의 장인)는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상장군에 이르는 명문거족이었다.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12살에 즉위하였으나 숙부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것(1455년)을 본 휴계는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옥천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1457년 신병을 핑계 삼아 가솔을 거느리고 처가 곳인 영천(광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니까 휴계(장인)는 1457년에 광승에 터를 잡았고, 눌재(사위)는 1498년에 광승에 은거하였다. 휴계와 눌재는 모두 처가 곳에 터를 잡았은데 휴계가 41년 앞서 자리를 잡았으며, 눌재는 처가 곳에 세거지지(世居之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86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장’, 1990년에는 ‘애국장’을 받았다. 1991년 광승에 있던 묘소를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다. 휴천동 지석묘 및 입석
광승마을 사람들 김영갑(여, 82) 광승노인회장은 “2010년에 광승경로당이 개관되어 편히 쉬면서 각종 운동과 친교를 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휴천동 광승마을은 야성송씨 집성촌으로 역사 깊은 양반마을”이라고 했다. 이갑녀(87) 할머니는 “경로당에 나오는 대부분이 야성송씨 며느리들”이라며 “50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전체가 야성송씨뿐 이었다”고 말했다.
류말한(80) 할머니는 “60년전 마을의 모습은 넓은 들판 사이로 안동통로 신작로가 있고 길가에는 미루나무 가로수가 있었다”면서 “당시 들판 가운데 동수나무가 우뚝했는데 그 나무가 지석묘에 있는 동수나무”라고 했다. 권화자(84) 할머니는 “혹시 미나리꽝을 아느냐?”고 물은 후 “미나리꽝은 ‘미나리 논’으로 마을 앞에는 미나리꽝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말했다. 손봉희(81) 할머니는 “마을에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뚜께바위 전설이 있다”고 하면서 “이 전설은 집안과 가문을 살리기 위해 아들(송석장수)을 희생시킨 어머니의 슬픈 사연이 담긴 송씨 가문의 전설”이라고 말했다.
이 마을 김수명(72) 어르신은 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이 지역은 원래 논이었으나 영주 대수해(1961년) 이후 개발되기 시작하여 1980년경부터 슬라브단독주택이 많이 들어섰다”며 “30여년이 지난 지금 슬라브 방수가 새기 시작하여 최근(2010년 이후) 마을 전체가 옥상에 비가림지붕을 설치한 것이 마을의 새로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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