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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 9개국 탐방
날짜:2011년 9월 7일 수요일~18일 일요일 11박 12일
여행국: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마케도니아,알바니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2011년 9월 7일 인천공항, 카타르공항,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 인천공항 출발
여행은 7일부터지만 미팅은 9월 6일 밤10시다. 카타르항공 QR883 밤 12시 50분 도하행 비행기로 여행을 시작한다. J8창구에서 가방을 부치고 111게이트로 이동했다. 별관으로 모노레일을 타고 갔다. 보딩은 밤 12시~12시 20분까지다. 도하까지는 9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차는 -6시간이다. 밤을 날아서 간다. 도하에서 다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행을 환승해야 하는데 가방은 루마니아 부카레스트까지 한번에 수송된다. 도하에는 새벽 4시 50분 도착 예정이다. 도하에서 부케레스트행은 오전 8시 25분 카타르항공 QR943이다. 카타르항공은 2,4,2 좌석제다. 우리 부부는 39A, 39B로 창가 좌석이다. 의자 뒤에 모니터가 있다. 5-Star카타르항공은 역시 쾌적하고, 특히 착륙시 소음이 좋고 안정적이었다. 비행기 동체길이가 길고 날개가 크다. 여행 첫날이 좀 힘든 일정이다. 그러나 발칸반도는 미지의 순수한 땅이기에 보람되고 기쁜 여정이다.
* 카타르 도하공항에서 루마니아행 환승
기내식 2회 제공받으며 자면서 왔다. 아시아 대륙을 밤새 날아왔다. 루마니아로 가기 위해 도하공항에서 환승한다. QR943이며 현지시각으로 오전 8시 25분 비행기다. 도하는 새벽 4시 25분 정시에 도착했다. 현지 온도는 33도다. 밖은 덥고, 공항 안은 시원하다. 2~3시간 여유가 있어서 휴식했다. 탑승 게이트는 3번이다. 도하공항 2층 휴게실도 상당히 넓고 좋다. 부카레스트행 오전 8시 25분 비행기 보딩은 7시 40분이다. 지금 시각 5시 30분, 새벽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1층에는 면세점이 있다. 도하 가격표에서 4.5로 나누면 유로화 가격이다. 45라면 10유로의 가격인 셈이다. 결코 싸지 않은 물가다. 2층 로비에는 하얀 천의 옷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른 이슬람교의 직원이 있다. 카타르는 사막 국가다. 사막에 건설한 나라다. 여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이다. 사막에서 보는 일출이 장관이다. 사막에 세운 건물들도 비경이다. 산도, 풀도 없는 망망한 사막이다. 승객을 실어 나르는 버스가 연달아 다닌다. 분주한 공항의 아침 풍경이다. 온통 카타르항공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다. 우리의 비행기는 정시보다 1시간 지연하여 이륙했다.
* 카타르 도하에서 루마니아 부케레스트 가는 항로
카타르 도하에서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로 가는 항로는 끝없는 사막이다. 중동의 사막 지대가 창밖에 전개된다. 풀 한포기 없는 건조한 풍경, 우리나라라면 푸른 나무가 가득일 텐데, 나의 조국은 축복의 땅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사막으로 이루어진 산도 진풍경이다. 가끔은 물이 고인 호수 부근에 민가 마을도 보인다. 사막인데도 반듯반듯 구분지어 놓았다. 염전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티그리스강이 비행기 모니터에 나오고 강줄기가 창밖 지상에서도 보인다.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인 중국의 황하강, 인도의 갠지스 강, 이집트의 나일 강,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그 중에서 1개의 강을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큰 감동이다.
비행기는 흑해로 들어선다. 아까와는 다르게 푸른 산자락과 구름이 흑해를 둘러싸고 있다. 흑해는 이스탄불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하며 본 바다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리도 보았었다. 모니터 지도에 내가 여행한 암스테르담, 헬싱키, 리스본, 카사블랑카, 등이 나온다. 흑해만 넘어가면 바로 루마니아다. 지금 타고 가는 QR943 카타르항공은 3,3 좌석제로 우리 부부는 30E, 30F로 맨 뒤의 창가 좌석이다. 그래서 5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지상을 다 관찰할 수 있었다. 한국시간 새벽 4시경, 현지시간 오전 10시경 기내식이 나왔다. 치킨, 감자튀김, 계란야채말이, 치킨소세지, 빵, 쨈, 요쿠르트, 과일, 주스 등 좁은 식판에 골고루 한가득이다.
집에서 2011년 9월 6일 화요일 오후 7시 30분에 나왔는데 지금 한국시간으로 2011년 9월 7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이다. 24시간 동안 비행기 탑승과 환승 대기시간으로, 거의 하루를 상공에서 머물고 있다. 루마니아 부케레스트까지는 아직도 1시간은 날아가야 한다. 유럽 전역을 여행할 때, 날아간 영토는 시베리아 상공이었는데 이번 발칸반도 여행은 기막힌 비경의 사막지대를 날아간다. 이런 여정의 힘이 나를 세계로, 세계로 이끌고 있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항 도착
도하에서 장애인 운동선수들의 탑승으로 휠체어까지 싣느라 1시간 늦게 이륙했는데 부카레스트에는 거의 정시에 착륙했다. 현지시각으로 오후 2시경이다. 청명한 날씨다. 루마니아 영토는 반듯한 경작지가 많았다. 나무숲도 많았다. 산이 없는 평야였다. 부카레스트 공항은 아담하다. 버스에 승차하니 온도가 29도라고 뜬다. 현재시각 오후 2시 50분이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항 주변 풍경
여기는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다. 부카레스트에 있는 이곳 공항의 정식 명칭은 오토페니OPTOPENI 공항이다. 우리를 배웅 나온 버스는 불가리아 차이고, 운전기사도 불가리아인이다. 한국 교포 가이드는 1998년에 루마니아에 와서 14년째 거주하고 있단다. 때 묻지 않은 땅이라고 입 소문을 타고 흘러, 좋은 여행지로 꼽히며 찾아오는 관광지란다. 루마니아에는 나무가 많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공항 주변에도 푸른 나무들이 많다. 소박한 건물들도 보인다. 발칸반도의 먼 나라에 왔다는 것에 대하여 가슴 벅찬 순간이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가는 길
아름다운 길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부카레스트 시내에 다다르자 속도를 내지 못한다. EU 가입 후 차량 증가로 도로주행이 복잡해져서 그렇다. 부카레스트는 기쁨이 넘쳐나는 곳, 기쁨이 샘솟는 곳이란 뜻이다. 녹지대 공원이 많다. 목축지대 시절에 목동 이름이 부크레스크였는데 그것에서 유래하여 지금의 부카레스트가 되었다. 카롤1세 때 프랑스 파리의 도시 형태를 본떠 방사형 진입 도시로 발전시켰다. 프랑스 지방과 유사한 지역 이름도 많다. 주변 국가가 모두 슬라브계 민족인데 루마니아인은 라틴계 민족이다. 국명인 루마니아România도 로마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혈질이어서 예술인, 음악가, 조각가 등이 많다. 세계 100대 화가도 많다.
루마니아에는 3가지 유명한 것이 있는데 체조요정 코마네치, 드라큘라, 독재자 차우세스쿠다. 부카레스트는 1977년 대지진과 차우세스쿠 독재자의 도시 개혁으로 자연 파괴,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현재는 아름다운 자연이 많이 손실되었다.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많은 도로의 건설로 유명한 건물도 많이 없앴다. 유럽의 모든 동구 공산권이 무혈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이루었는데 루마니아는 유혈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이루었다. 차우세스쿠가 헬리콥터로 도망간 곳이 혁명광장이다. 지금 그 혁명광장으로 가고 있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혁명광장
혁명광장은 부카레스트의 도심 대로변에 있다. 광장 주변에는 루마니아 초대 왕 카롤1세 동상, 국립중앙도서관, 비밀회의경찰청사, 구 공산당본부, 그리고 건너편에는 왕궁, 왕궁 성당인 정교회 등이 있다. 하얀 색상의 25m 높이 혁명승리 기념비가 오롯하다. 피 흘린 혁명용사들의 조각상도 있고 1400명의 희생자 명단도 새겨져 있다. 체조요정 코마네치를 중앙으로 루마니아의 유명한 축구, 정구 선수 세 사람의 사진도 걸려 있다. 구 공산당 본부 건물 문 3개가 있는 국기 위, 저 발코니에서 차우세스쿠는 연설했다는데 사람은 간 곳 없어도 여전히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저 높은 건물 옥상에서 헬리콥터로 도주했다.
차우세스쿠는 1918년 출생하여 1967년부터 공산당 서기장으로 24년간 온갖 독재를 행해온 독재자다. 시민들의 감시가 있어 왔는데 반정부 데모의 발단은, 헝가리 접경지역인 타미쇼아라의 라슬로 목사가 그의 만행을 헝가리에 보고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독재자는 그것을 무시하고 단속 명령만 내리고는 이란을 방문했다. 돌아와서는 그런 소요를 무마하려고 공산당 노동자 최소 인원만 남기고 10만명의 관제집회를 동원했다. 혁명광장 구 공산당 본부 앞, 바로 이곳이다. 1989년 12월 21일, 총 집결 시키고 공산당 건물 2층 발코니에서 혁명을 연설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차우세스쿠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자 건물 옥상에서 비밀경찰이 총을 발포했다.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피를 본 시민들은 민주화에 동참하여 반정부데모로 폭동을 일으켰으며 차우세스쿠 독재자는 물러나라고 외쳐댔다. 독재자는 옥상에서 헬기를 불러 부인 엘레나와 보좌관 1명을 태우고 도주했다. 의형으로 여겨오던 김일성이 있는 북한으로 날아가려고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부카레스트에서 35Km쯤 떨어진 지방을 날아갈 때, 정부에서는 조종사에게 교신으로 귀환하라고, 멈추지 않으면 발포한다고 명령했다. 고속도로에 착륙해서는 조종사와 보좌관마저도 헬기 운전을 끄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두고 도주해버렸다. 지나가던 농부의 신고로 차우세스쿠는 붙잡혔다. 결국 군부에서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70Km 떨어진 곳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의 변호사도 용서할 수 없다며 변호를 포기하고, 정규군 군인들도 그의 독재에 폭발적으로 반항하며 서로 그 독재자를 총살하는 군인이 되겠다고 나섰다. 차우세스쿠 부부는 1989년 12월 25일 오후 5시 30분에 160여발의 총살을 맞아 벌집 형상으로 처참하게 사형 당했다. 국립묘지에도 못 가고 시민공원 묘지에 그들 부부의 무덤이 있다. 죽어서도 부부는 50m 떨어진 반대 방향에 묻혀 있다. 차우세스쿠 부인을 차우세스쿠2세의 독재자로 세우려 음모해서 그의 부인도 미워하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에서는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묻으면 죽어서도 못 만난다는 말이 있어서다. 북한 김일성 체제를 모방하려고 했다. 루마니아의 유혈혁명 장소였던 이곳, 루마니아 민주주의 초석이었던 이곳, 바라보기조차 두렵고 소슬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위가 처연하다. 정녕 민주화의 바람은 루마니아를 평온하게 이끌고 있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차우세스쿠 궁전
부카레스트 도심을 달리던 버스의 창에 전면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덩이의 건물이 보였다.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아 직감으로 차우세스 궁전임을 알게 해준다. 지금의 모습은 1984년부터 1989년까지 5년간 건축했다. 700명의 기술자가 24시간 동안 논스톱으로, 20만명의 인력으로 2조원을 들여 세운 국방건물 궁전이다. 동서남북으로 동일한 모습이 특징인데 지상으로도 84m, 지하로도 84m, 지상 건물 높이만큼 지하에도 건축했다. 70%만 건설되었고, 지금도 지하 건설 중이다. 방이 3000개나 된다. 전 세계에서 미국에 있는 펜타곤 건물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김일성을 만나고 지은 건물이다. 김일성과는 총 9회 만났는데 의형제를 맺었다. 차우세스쿠 부부가 북한을 방문 했을 때, 그의 부인 엘레나가 김일성 주석궁 큰 건물을 보고 그보다 더 크게 세계적인 규모로 짓자고 하여 지은 건물이 차우세스쿠 궁전이다. 지진이 잦은 루마니아에서 이곳은 지반이 가장 튼튼한 곳이다. 궁전 자리는 부카레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유럽의 ‘작은 파리’라고 불릴 만큼 부유하며 고풍스런 건물이 많은 곳이었는데, 차우세스쿠는 여기 있던 성당 외 모든 건물을 밀어내라고 명령하고 궁전을 건축했다. 그로 인해 당시 부카레스트 도시의 1/3이 허물어진 것이다.
궁전 앞에는 큰 광장과 샹드리제 모방 거리까지 만들어 놓았다. 광장에서 마이클젝슨의 공연도 열렸단다. 웅장한 건물은 웬만큼 떨어진 거리인데도 사진기에 다 담아지지 않는다. 한참을 걸어간 샹드리제 모방 거리에서나 전경이 겨우 담겼다. 독재와 잘못 이끌어준 아내로 인하여 패망한 정치로 낙인 찍히며 비참하게 죽어간 한 사람의 슬픈 역사 현장이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챠우세스쿠 궁전 앞 샹드리제 모방 거리
궁전에서 조금 걸어가니 길게 뻗은 도로가 있다. 울창한 나무가 하늘 높이 솟구치고 중앙 분리대에는 분수가 솟구친다. 루마니아주 41개를 상징하는 41개의 분수대다. 상당히 넓은 폭의 큰 도로다. 프랑스의 샹드리제 거리를 모방하여 건설한 도로다. 최대 번화가다. 백화점, 주상복합건물, 부카레스트 대학 건물 등 양 옆으로 즐비하다. 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다. 모두 차우세스쿠가 건설했다.뒤로는 오후 4시를 가리키는 시계탑과 함께 차우세스쿠 궁전이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다. 인도에는 자전거 전용도로 표식까지 그려놓아 질서정연하다. 도로변 공원에 루마니아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나와 휴식하는 모습이 정겹다. 도로의 맨끝에는 아주 우람한 분수가 힘차게 분무한다.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비경의 거리다.
*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 시가지
부카레스트에는 전차, 버스, 지하철 3가지 교통시설이 있다. 도로에 전차가 많이 다닌다. 공군위령자탑 꼭대기에 십자모양의 사람 동상이 높이 세워져 있다. 모스크바 대학을 모방한 건물이 있는데 현재는 루마니아 프레스 건물이다. 가로수가 보리수다. 도심 공원이 크고 많다. 세계1차대전 승전기념으로 세운 개선문이 오롯하고 그 곁에는 아주 큰 공원을 조성했다. 광장도 많다. 루마니아의 수도이며 ‘작은 파리’라고 불리는 부카레스트는 승리의 광장에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도로들이 마치 파리 개선문에서 뻗어나가는 거리를 연상시킨다. 속담에 ‘서두르면 망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루마니아 국민성은 낙천적이고 게으르단다. 학창시절 책에서 배운 공산국가 루마니아, 그러나 굶주리고 헐벗은 모습의 도시는 결코 아니다.
* 브라쇼브로 이동하며 본 루마니아 들녘
부카레스트에서 브라쇼브로 이동한다. 부카레스트에서 브라쇼브까지 버스로 2시간 30분 소요된다. 오늘 그곳에서 유숙할 것이다. 소문과는 다른 루마니아라고 한다. 집시가 없고 깨끗하다. 자본주의지만 사회주의 잔재로 박물관 등 관람시 철저하게 시간제로 퇴근한다. 발칸은 아직 관광개발이 안 되어 있다. 루마니아는 영어로 ‘로무니아’인데 ‘로마 사람들의 언어와 풍습을 지닌 토지’란 뜻이다. 로마가 2차 침공으로 서기 105년 겨울에 언 다뉴브강을 건너서 쳐들어왔다. 그 당시 왕은 자결했다. 그때부터 다치아Dacia 왕국과 로마인이 합병했다.
루마니아는 유럽 중간 면적의 크기로 유럽에서 7번째 큰 나라다. 인구는 2천 7백만명이다. 이웃 나라 불가리아는 9백만명이다. 카르파티아 산맥, 구릉, 평원으로 형성된 지형이다. 2700m의 산이 있다. 부카레스트에서 1시간까지는 산이 없다. 나무 숲, 지평선의 나라다. 유럽 젖줄이며 9개국을 거치는 도나우강이 루마니아를 마지막으로 거치며 흑해로 흘러간다. 원유가 동유럽 최대 산유국이다. 또한 아름다운 산과 강, 평원의 소유국이다. 지금 유전지대를 지나고 있다. 들녘에 커다란 송유관 등 유전시설이 세워져 있다. 지하자원까지 축복 받은 나라다. 로마도 금생산을 위해 침공했다. 2007년에 EU에 가입했다. 그때부터 독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와 함께 영어를 사용한다. 87%가 루마니아 정교회 교인이다. GNP 8천불, 평균 월급이 450유로다. 27개 EU 가입국 중 경제 수준은 뒤에서 2번째, 물가는 앞에서 5번째로 어려운 경제상황이다. 차우세스쿠 시절부터 경제 정치로 물가가 비싸다. 모두 수입해서 사용한다. 고기와 빵만 싸다. 물가 상승 우려로 EU의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레이 화폐를 쓴다. 1레이는 4유로의 가격이다.
루마니아 땅은 한반도의 1.1배다. 북위 43도 위치인데 한국과 날씨는 유사하다. 여름 6시간, 겨울 7시간 시차다. 여름에는 43도까지 기록의 고온이다. 5월에 반팔을 입는다. 습도가 없어서 고온을 견딘다. 10월이면 눈이 내리고 겨울에는 영하 25도까지 최저기온을 기록한다. 1995년 대우조선, 대우전자가 최초로 진입했고 지금은 삼성까지 들어와 있다. 200명의 교민이 사는데 80%는 상사주재원이다. 순수 교민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중 하나가 가이드 가족이란다.
끝없는 옥수수 밭이 이어지던 들녘이다. 루마니아의 1/3이 평야다. 식용, 동물사료용으로 옥수수, 밀, 해바라기를 다량 재배한다. 원래 1차산업국으로 농업이 주업이었다가 차우세스쿠 시대에는 2차산업국으로 공업을 발전시키다가 그의 처형 후 다시 1차농업국이 되었다. 대기업농은 500ha 소유로 약 150만평의 농사를 짓는다. 그런 광활한 평야지대가 끝나고 우람한 산녘에 접어들자 갑자기 비가 온다. 무서울 만큼 세차게 온다. 산중 철로도 곁에 가까이 보인다. 철로변에는 목재가 쌓여 있다. 산자락의 민가와 화물열차도 있다. 평원과 산맥의 절경을 동시에 보는 루마니아 여정이다.
* 루마니아 휴게소
산 깊은 마을의 아름다운 휴게소에 정차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버스는 2시간 30분마다 휴식을 취해야 하는 교통규칙이 있다. 가이드는 화장실을 학교라고 지칭하며 잘 다녀오라고 하여 우리는 웃었다. 그러나 휴게소 건물이 참으로 아름다워 학교라 해도 손색이 없다. 색상도 곱고, 꽃 화분이 건물마다 걸려 있다. 화단에도 고운 꽃들이 가득하다. 앞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우람한 산이 있어 더욱 비경이다. 깊은 심호흡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이국의 정취를 체감했다.
* 루마니아 산중 도로
루마니아는 2007년 이전만 해도 특수지역이었던 곳이다. 그 이후부터 관광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럽 외곽의 발칸반도 국가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곳이다. 버스는 루마니아의 알프스인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길로 접어든다. 아슬한 산길을 넘어가는 운전이다. 운무가 저 아래 산계곡을 휘감으며 뽀얗게 피어오른다. 부카레스트 와곽에서 보았던 그리도 드넓은 평원은 먼 이야기처럼 아련하고 지금은 깊은 산중 도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발칸국가에서는 특히 여권 분실을 조심해야 한다. 서유럽 소매치기가 발칸에 많이 들어와 있다. 알바니아에서 여권을 분실하면 그리스까지 가야하고, 마케도니아에서 여권을 분실하면 헝가리까지 가야한다. 또한 발칸은 하루에 사계절이 들어 있다. 그래서 매일 포근한 잠바와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 시간약속, 여권주의, 필수품준비를 당부한다.
* 루마니아 산정 십자가
산을 넘어가자 산길 도로변 나무아래에 과일 장수가 수박을 수북이 쌓아 놓고, 다른 과일과 함께 좌판을 벌이고 있다. 산자락 아래 아담한 마을이 있고 산정 높은 곳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1차대전 때 승전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종교심을 키우려고 세웠다. 브라쇼브 시내에 접어들자 공원에는 시민들이 한가로이 휴식하고 있다. 여기는 산악지대로 해발 600m의 고지마을이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2~3m가 쌓인다. 좋은 묘지는 시내에 있다. 묘지에 대하여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다. 사망시에는 부조금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결혼시에는 많이 받는다. 빈부 격차가 극심하다. 10%의 부유층이 있는데 그들에게 자가용 자랑은 부자가 아니다. 개인 헬리콥터 소유자가 부자 축에 든다. 마당에서 헬리콥터를 탑승한다. 500억 소유자도 있다. 1989년 국가소유였던 땅을 모두 과거에 개인 소유 문서가 있을시 다 돌려 주었다. 남은 땅만 국유지다. 나무 벌목 사업자가 신흥 부자다. 브라쇼브 시가지에도 나무가 많다. 아름다운 풍경의 산중 도시다.
* 루마니아 브라쇼브 호텔 투숙
브라쇼브에 온 것은 인근 지역에 있는 브란 지방의 드라큘라성을 가기 위해서다. 내일은 모닝콜 6시 30분, 7시 조식, 8시 출발이다. 로비는 유럽식으로 0층이다. 로비층을 G로 표시하기도 한다. 1층이 한국의 2층이다. 이곳 호텔에서 로비층은 PR로 표시되어 있다. 석식은 세팅 메뉴로 세르비아식 볶음밥이다. 감자, 돼지고기, 과일 등이 나와서 맛있게 먹었다. 우리 부부의 방은 306호다. 발칸반도의 국가는 모두 전압이 220V이며 한국의 전기코드와 동일하여 좋다. 산 아래 붉은 지붕의 집들이 동화 속 풍경처럼 아름답고 달이 하늘에서 더욱 고운 풍경을 자아낸다. 먼 나라, 발칸반도 여행의 첫날밤이다.
2011년 9월 8일 목요일 루마니아 드라큐라성, 팔레슈성
* 루마니아 브라쇼브 호텔 출발
호텔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방에서 보아도 그렇고 밖에 나가서 보아도 산을 둘러싸인 마을이 아담하고 예쁘다. 고운 색상이 집들의 푸른 산과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산바람이 불고 날씨가 쌀쌀하다. 어제의 낮 기온과는 일교차가 크다. 이제 드라큘라성이라고 불리는 브란 성으로 간다.
* 루마니아 드라큘라 성 가는 길
드라큘라 성은 브라쇼브에서 남서쪽으로 32km 떨어진 브란 마을의 산꼭대기에 있다. 브라쇼브 시가지를 지나간다. 도심 곳곳에 잘 가꾸어 놓은 화단이 화사한 비경을 선사한다. 건물들로 웅장하며 유럽풍의 육중한 양식이다. 아침 출근시간이라서 차와 사람이 많이 보인다. 브라쇼브는 루마니아 5대 도시 중 하나다. 공업도시로 만년필을 최초로 만든 곳이다. 루마니아는 인구 40만명을 넘는 도시가 없다. 기초응용학, 의술 쪽으로 기술이 높은 나라다. 신장결석 방출의료 최초국, 당뇨병 논문 최초 보고국이다. 항공기술자, 과학자가 많고 중화학공업이 발달했다. 또 대농업국으로 보통 500ha씩 소유하고 있으며 농지정리가 잘 되어 있어 기계로 농사짓는다. 가축으로는 말이 농사짓고 소는 우유만 생산한다.
산간지방은 목축업을 한다. 목초지가 많다. 지금 지나는 곳이 산간지방으로 목초지대다. 들녘에 동물이 보이고 목초를 쌓아 놓은 농가도 보인다. 동물 우리를 둘러쳐 놓은 곳도 있다. 푸른 초지가 광활하다. 루마니아는 1948년 북한과 수교를 맺었다. 한국보다 먼저 북한을 알았다. 남한을 잘 모른다. 남한과는 1990년에 수교를 맺었다. 대우 자동차가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시골 마을을 지나 좁은 도로를 따라 드라큘라 성이 있는 브란 지방에 도착했다.
*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성
카르파티아 산맥의 북쪽 지방 브란에 있다. 작은 호수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중세마을이다. 드라큘라 성도 본명은 브란 성이다. 브란 성은 루마니아 남부 왈라키아 지역과 중북부 트란실바니아를 잇는 교통 요충지 브란 통과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했다. 1377년에 착공해서 1382년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꾸준히 증개축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 드라큘라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루마니아 제1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박물관에 드라큘라 영주가 사용하던 고문 도구를 비롯하여,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물건들을 진열하고 관람객에게 내부를 공개한다. 드라큘라는 아일랜드의 작가 스토커가 1897년에 발표한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 Dracula’ 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 소설은 책뿐만 아니라 연극으로,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신화적 괴기 소설이다.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한 고성에 혼자 사는 드라큘라 백작이 있었는데 영국인 하커가 이 성을 방문하여 백작이 낮에는 관 속에서 자고 저녁이면 관에서 나와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흡혈귀에 피를 빨려 죽은 피해자 역시 흡혈귀가 된다는 무서운 이야기다. 이 드라큘라 성을 이해하려면 시대적 배경과 그 당시의 사회에 대하여 알아야겠기에 네이트의 지식창에 올려진 자료를 참고했다.
드라큘라는 뱀파이어류 소설 주인공의 원조다.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저술하던 19세기 후반은 교통수단이 발전하여 귀족과 갑부들이 세계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특히 당시 최강대국이던 영국인들은 세계의 다양한 풍물에 대한 관심이 한참 고조되고 있던 때라 외국의 괴담을 주제로 한 괴기 소설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스토커는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 당시 유행하던 흡혈귀(뱀파이어) 전설과 악명 높은 악마의 자식인 블라드 드라큘라 쩨뻬쉬 공작의 명성을 적당히 조합하여 뱀파이어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를 집필한 것이다. 이 소설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유사 작품이 만들어져 '흡혈귀(뱀파이어) 문학'이라는 장르를 형성하기에 이르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스토커가 저술한 드라큘라의 모델인 블라드 쩨뻬쉬는 1431년에 태어나 1476년에 죽은 루마니아의 장군이자 작가다. 당시 루마니아가 위치한 발칸반도는 오스만 트루크의 이슬람 세력과 그리스도교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쩨뻬쉬는 불가리아의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있던 루마니아의 옛 왕국 중 하나인 발라히아 왕국의 도시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트란실바니아는 트루크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을 트루크 즉 터키에서 볼모로 지내게 된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몸값을 지불하여 다시 발라히아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헝가리 제국 군대가 쳐들어와서 다시 쩨뻬쉬는 헝가리로 몰모로 잡혀 간다. 1456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온 쩨뻬쉬는 왕위 계승자로 인정을 받은 다음 왈라키아 지방을 다스리는 공작, 왈라키아 공으로 추대된다. 그 당시 루마니아는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몰도바의 세 지방으로 구분되었다.
그는 왕위, 왈라키아 공에 오른 후 군사를 조련하여 터어키와 헝가리를 상대로 용감하게 전쟁을 했다. 특히 1461년에는 트루크의 술탄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여 이듬해 메메트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군대를 이끌고 게릴라전법으로 저항하여 나라를 지켜냈다. 볼모 생활 중 적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 가득히 담고 있던 쩨뻬쉬는 트루크와의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포로들을 길 위에 나란히 눕혀 놓고 가시가 박힌 큰 바퀴를 사람 몸 위로 지나가게 하거나, 기다란 창으로 항문을 깊게 찔러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상태 그대로 길가에 세워 두어서 창이 포로의 몸무게로 인해 점점 파고들어 결국 입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인 쩨뻬쉬는 루마니아어로 '가시,' 또는 '꼬챙이'를 이르는 말로 바로 이 잔인한 처형법에서 기원했다. 포로들이 창에 꿰어져서 길 양쪽에 줄줄이 세워져 있는 장면을 본 트루크군이 그 잔인함에 질려서 왈라키아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한편 그는 내정에도 힘을 쏟아서 귀족들의 횡포를 누르고 당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독일인 상인의 특권을 제한하여 민생 안정 및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는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훌륭한 정치를 편 성군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독일계, 혹은 게르만계 상인들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자 그들을 역시 꼬챙이로 찔러서 대량 처형하고 그들을 비호하던 400여명이 넘는 독일계 카톨릭 사제들을 산채로 태워 죽였기 때문에 서유럽에는 그가 잔인한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쩨뻬쉬가 드라큘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쩨뻬쉬의 아버지인 블라드 드라큘은 헝가리의 지그문트2세로부터 용Dracul이라는 칭호를 받아 이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불가리아어에서는 명사 뒤에 소유형 어미 a 를 붙이면 '~의 아들'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쩨뻬쉬를 '드라큘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드라큘라Dracila'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 가문은 용의 그림이 들어간 문장을 사용하였는데 불가리아 말로 용은 'dragon' 이라고도 하지만 'dracul' 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dracul에는 용 이외에 '악마'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드라큘라는 불가리아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독일인 상인들의 착취와 트루크의 침입으로부터 구해준 '용의 자식'으로, 트루크인들과 독일인들에게는 자기 민족을 잔인하게 죽인 '악마의 자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한편 쩨뻬쉬는 트루크가 내세운 다른 왈라키아공, 대립공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현재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루마니아 남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데아르제쥬시에 소재한 브란성은 실제로 블라드 쩨뻬쉬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다만 이 성이 바위 위에 세워졌고 옛날부터 트란실바니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곳으로 악명을 얻었던 데다가 루마니아 정부의 드라큘라 관광지 개발 계획과 맞물리면서 드라큘라 성으로 소문이 난 것이다. 한편 아직도 루마니아 남부 포에나리성 인근의 아레프 마을에서는 1년에 두차례씩 블라드 쩨뻬쉬를 위한 축제를 벌인다.
드라큘라 성이 있는 마을은 아름다웠다. 입구에 예쁜 기념품 상가가 즐비하고 높은 곳에 오롯이 서 있는 성이 비경이다. 입장권을 사서 관리하는 노인에게 주고 들어갔다. 조금 언덕진 길을 걸어서 올라가니 십자가 돌비가 세워져 있다. 서은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내부로 들어서니 백작이 살았던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드나들던 빙그르 돌아가는 좁은 계단과 벽면의 출구, 우물 등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꽃 화분을 장식하여 조금은 두려움을 덜어주기도 한다. 송곳니 두 개로 피를 빨아 먹는다고 알려진 무서운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드라큘라가 싫어하는 것 3가지는 마늘, 십자가, 햇볕이다. 한 마디로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 전쟁영웅 백작으로 지옥에서 온 용의 아들이며 왈라카이 공국의 영주였던 아버지를 처형한 배반자를 모두 항문에 말뚝을 막아 죽이는 말뚝처형 살인자로 변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기초로 탄생된 소설이다.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인 블라드 공작이 유폐되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이 성은 15세기에는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 왕자의 소유가 되었다. 체페슈 왕자는 영국 소설가 브람 스토커에 영감을 줘 소설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백작으로 탄생했다. 왈라키아 공국의 영토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까지 미쳤고, 전 유럽 대륙의 교회에선 드라큘라를 칭송하는 성가들이 불려지기도 했다. 루마니아 공산권 시절에는 정부 소유였으나, 1920년 브라쇼브 주민들이 루마니아 마지막 왕의 조카 폰 합스부르크의 할머니인 마리아 여왕에게 성을 기증했다. 폰 합스부르크씨는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냈고 아주 따스한 추억들이 있다고 했다. 조부가 주인이었으며 왕비 마리아의 여름 별장이다. 드라큘라 성은 현재 개인 명의로, 시가 900억원이다. 드라큘라 성을 관람하고 1시간 정도 이동하여 시나이아의 팔레슈 성에 간다. 팔레슈성은 루마니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그리고는 중식 후 다시 부카레스트를 경유하여 불가리아로 간다. 루마니아에서 꼭 보고 싶었는 드라큘라 성을 다 관람하고, 다시 평온한 호수와 울창한 숲의 언덕길을 내려오며 루마니아인들의 사고처럼 드라큘라는 무서운 자가 아니라고 가슴 속에 다시 저장하였다.
* 루마니아 시나이아로 이동
팔레슈성이 있는 산간지방 시나이아로 간다. 드라큘라 성에서 시나이아까지는 75km다. 들녘에 목초지가 많다. 소떼, 양떼, 목부도 평화롭게 보인다. 미개발로 경관이 좋다. 마을 입구에는 공동묘지도 있다. 붉은 기와지붕의 마을이 아름답다. 도시가스관이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다. 산을 넘어 간다. 산세도 목조 건물의 예쁜 집들도 스위스와 유사하다. 벌목한 나무가 도로변에 쌓여 있다. 카르파티아의 진주라 불리는 루마니아 최고의 산악 휴양도시 시나이아에 도착했다. 자연 속 아기자기한 중세 도시로 시가지 전체가 아주 고풍스럽다.
* 루마니아 펠레슈 성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갔다. 이곳일까 하고 본 건물은 카페로, 카페조차도 성처럼 지어놓았다. 아직 보이진 않지만 예사롭지 않은 성이라는 예감이 든다. 길목에는 여인들이 과일을 팔기도 한다. 우람한 나무들 향취에 심호흡하며 걷고 있을 때,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르는 우아한 자태의 펠레슈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위가 카르파티아 산맥 능선으로 싸여 있어 푸른빛이 스며 들며 고요한 비경이다.
시나이아의 펠레슈 성은 루마니아 국보1호로 사계절 관광객이 많다. 카르파티아 산맥 봉우리와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주변 돌길이 운치를 더해준다. 카롤1세가 1875에서 1883년까지 나무로 지은 루마니아 왕실의 여름별궁으로 외경과 내경 모두 장관이다. 정교한 장식을 새긴 나무로 만든 건물 외관은 물론 건물 내부와 정원, 주변경관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독일 르네상스 양식의 진수이며, 이탈리아와 영국의 르네상스 양식과 로코코, 터키식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양식까지 대규모 건축물이다. 카롤1세는 이곳을 만들 때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것들을 사용하였으며, 전기로 천정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장치, 유럽 최초의 난방시스템 장치,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책장으로 위장된 비밀의 문 등 놀라운 내경이다. 170개의 방이 있으며, 도자기, 금은 접시, 크리스털 샹들리에, 멋진 조각들, 그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가구들까지 모두 호화롭다. 당시 유럽의 가장 중요한 2000여개의 그림들이 붙어 있는데,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를 비롯하여 10명의 유럽 작가들에 의해 그린 것이다.
내부 관람을 마치고 외경을 둘러보았다. 어마어마한 비경이다. 드넓은 정원에 수많은 조각상들과 나무, 꽃들이 성을 더욱 빛내고 있다. 펠레슈 성은 아득한 높이로 고고한 여인처럼 하늘 향해 오롯이 서 있다.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아 돌아서지지 않는, 오랜 기억 속에 남을 명소다.
* 루마니아 시나이아 시가지
펠레슈 성을 관람하고 다시 산길을 걸어 나왔다. 도로변에 가스관이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신기하다. 이곳 시나이아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휴식하며 시가지를 구경하기도 했다. 해발 2천 미터의 산악지대, 카르파티아 산맥이 둘러쳐진 산자락 아래 집들이 동화 속 궁전처럼 곱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귀족 저택이 많은 귀족 휴양지다. 건물에는 꽃 화분을 층마다 걸어두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시나이아는 인구 3천명으로 루마니아 기차가 오는 도시다. 부카레스트까지는 1시간 30분 걸린다. 시나이아를 떠나며 도심을 지날 때, 나무와 꽃들의 아름다운 도시임을 더욱 깊이 새겨주었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수도 가는 길
다시 부카레스트로 간다. 불가리아로 가는데 부카레스트를 거쳐 가는 것이다. 또한 루마니아 교포 남자 가이드는 부카레스트에서 헤어진다. 아쉬움으로 루마니아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코마네치는 14세의 체조요정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유치원 때부터 체조했다.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았다. 점수판을 9.99까지만 나오도록 만들어 놓아서 코마네치는 0.00으로 처리되어 전광판에 나왔다. 코치가 가서 따지자 죄송하다며 지금까지 체조 만점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명했단다. 세계 최초로 체조 만점자다. 학제는 초,중,고,대가 4,4,4,3년으로 초등과 중등과정을 마쳐야 졸업장이 나온다. 고등까지 의무교육이고 졸엄 후 취업이 가능하다. 월급 60%가 세금이다. 개인이 50%, 회사가30% 낸다. 학비, 진료비 무료다. 의약분업이 잘 되어 있다. 여성 진출 높은데 정교회 국가라서 위상은 남자보다 낮다. 농업에는 정부가 세금을 부담하며 지원해준다. 프랑스식 복지가 잘 되어있다. 부과세가 24%다. 정치인 월금이 4천에서 7천 유로다. 정년은 만 65세로 자신이 부은 만큼 연금이 나온다. 몇백 유로, 몇천 유로까지 나온다. 선호하는 직업은 회계사, 변호사다. 안정된 직업의 교사나, 의사는 월급이 적은 편이다.
산악지대에서 평야지대로 진입하자 목장, 옥수수밭, 광활한 목초지가 장관이다. 목가적인 소박하고 정겨운 나라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휴게소
도로변 강물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한다. 우리가 달려온 길이 뽀얗다. 휴게소에서 내리면 그것도 큰 여정으로 여기고, 나는 내가 밟고 선 땅을 소중히 생각한다. 여행은 명소만은 보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 나무 한 그루, 심지어 도로까지도 그 나라의 한 단면을 보는 것이다. 부케레스트가 가까워진 것 같다. 주변에 상가와 민가가 보인다. 다음 휴게소 불가리아 국경선 부근이다. 여기서 2시간 소요된다. 여기서부터는 평야지대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시가지
부카레스트 시가지를 관통하여 불가리아로 간다. 부카레스트에 들어서자 분수, 1차 대전 승전기념공원, 혁명광장 등 지난번에 본 시가지 풍경들이 이어진다. 도나우강의 지류인 딤보비차강이 시내를 흐른다. 1459년에 루마니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 왕이 요새를 만들었고, 그 후 왈라키아 지방의 군사,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으며 17세기부터는 루마니아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국내와 국제 교통의 최대 중심지다. 루마니아는 지하자원이 많다. 불가리아까지는 4시간 걸린다. 국경선 넘을 때 40분에서 1시간 소요된다.
*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경지대
해바라기 밭이 많다. 울창한 숲의 국경 마을이다. 여자 동상이 높게 서 있다. 현재시각 오후 4시 20분, 불가리아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국경지대 마을인데도 고요하다. 보통 시골 풍경과 다를 것이 없다. 국가와 국가 사이 이어지는 마디가 이리 쉬울까. 유럽 여행 중 항상 부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