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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위기 관리능력을 키우자!
참고말씀: 출17:13-15; 삿13:25; 14:6,19; 16:28-30; 삼상7:12; 왕상19:3,4; 사55:1; 슥4:6; 요4:14
읽을말씀: 삿15:14-19
주제말씀: 삿15: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 엄청난 대승을 거둔 비결!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삿15:15,16)
‘1:1000의 싸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가능하다고 봅니까?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대결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이 싸움이 소설 속의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사사 삼손과 블레셋 군대의 싸움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블레셋 군대는 철제 무기들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던 반면 삼손은 번번한 무기조차도 없어서 나귀 턱뼈로 싸웠습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15절 상) 인원으로 보나, 무기로 보나 상대가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이겼습니까? 삼손입니다. 혼자서 천 명을 쓰러뜨린 것입니다.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15,16절) 결국 삼손이 이긴 것입니다. 이겨도 보통으로 이긴 게 아니고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이 대단한 싸움을 싸울 수가 있었습니까? 앞 절에서 우리는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14절)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그에게 갑자기 임하신 것입니까? 여호와의 영, 곧 성령님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4절 중) 우연의 일치입니까? 아닙니다. 삼손이 등장할 때부터 줄곧 함께 하셨으며,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삿13:25) 삼손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삿14:6 상) /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삿14:19 상)
그가 다곤 신전의 기둥을 부서뜨려서 그 가운데에 있던 블레셋 사람 3,000여 명을 한꺼번에 죽일 때에도 하나님께 자신을 강하게 해달라고 간구 했고요.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삿16:28-30)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엄청난 승리들은 삼손이 아니라 그를 강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하)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습니까? 모든 일에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과 능력, 경험 등입니까? 단언컨대, 우리의 힘만으로는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무엇으로는 무조건 이깁니까? 하나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할렐루야!
* 승리 공식뿐만 아니라 위기관리 공식도 필요합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삿15:18)
수학 문제를 푸는 공식이 있듯이 인생에도 여러 가지 공식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공식들을 찾아서 적재적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공식이란 무엇입니까? 일종의 패턴(pattern)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생활패턴, 소비패턴, 행동패턴, 대화패턴, 투자패턴, 투구 패턴, 타격 패턴, 공격패턴, 성장패턴, 신앙패턴 등 우리가 보고 듣고 접하는 대부분이 나름대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간단한 놀이를 통해 패턴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놀이입니까? ‘하노이의 탑’ 놀입니다. 언젠가 KBS 프로그램 ‘스펀지’에서 여러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랑스의 수학자가 고안한 퍼즐로 탑처럼 쌓은 원반을 다른 고리로 그대로 옮기는 교구인 ‘하노이의 탑’ 실험을 했습니다. 이 놀이에는 ‘한 번에 하나씩 옮기기’와 ‘작은 원반 위에 큰 원반이 놓일 수 없다’는 단 두 가지 규칙만이 존재했으며, 가장 적은 횟수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성공한 학생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다보니까 패턴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생소한 교구인지라 처음에는 당황스럽지만 하다 보니 점점 패턴이 보이게 되고 나중에는 아주 쉬워지더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공부 잘하는 비결 역시 ‘패턴을 읽어내는 것’ 아닐까요? 어떤 과목을 공부하든 그 속에는 나름대로 패턴이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그 패턴을 읽어내려고 노력해보십시오.
스포츠 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구선수들은 상대 투수의 투구패턴을 읽어내려 하고, 투수 역시 상대 타자들의 타격패턴을 읽기 위해 부단히도 애씁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것이 읽히는 순간 쉽게 공략 당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축구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비를 잘하는 선수는 상대방의 공격패턴을 누구보다도 빨리 읽어내어 그 흐름들을 차단해내는 선수일 것입니다. 골 잘 넣는 선수 역시 상대진영의 수비패턴을 재빨리 읽어내 그 패턴이 가지고 있는 허점을 찾아 골로 연결시키는 선수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여러 가지 패턴들이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큰 승리 뒤에 곤고함이 찾아오거나 오르막 이후에 내리막이 있다는 것 등 말입니다. 본문을 봐도 그렇고,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으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18절)
엘리야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승리 뒤에 무엇이 어김없이 찾아왔습니까? 곤고함입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19:3,4)
* 올라가는 법뿐만 아니라 내려오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삿15:17)
만약 삼손이나 엘리야가 성공하는 공식뿐만 아니라 위기관리 공식을 배웠다면 어땠을까요? 올라가는 법뿐만 아니라 내려오는 법이나 떨어지는 방법을 배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훨씬 더 연착륙했을 것입니다.
연착륙(軟着陸)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비행기 등이 속도를 줄여 충격 없이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말합니다. 왜 연착륙이 중요합니까? 비행기 사고의 70%가 처음 이륙 3분, 착륙 8분 ‘마의 11분’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착륙 순간인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라가는 것도 배워야겠지만 내려오는 것도 잘 배워두어야 할 것입니다.
위기나 추락을 피할 수 없다면 내려오는 법이나 떨어지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오죽했으면 운동 중에 낙법(落法)이라는 게 있겠습니다. 참고로, 낙법이란 유도나 체조 따위에서, 메치기를 당해서 나가떨어지든지 갑자기 넘어지게 되는 경우에 아무런 위험도 없이 자기의 몸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만일 삼손이 연착륙을 염두하고 있었다면 승리 직후에 무엇을 했어야만 할까요? ‘턱뼈의 산’(라맛 레히)이라는 이름보다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여호와 닛시)나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도움의 돌’(에벤에셀) 등으로 지었으면 어땠을까요?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무찌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출17:13-15) /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7:12)
그래도 삼손은 목이 말라 다 죽게 된 상황에서도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 큰 구원을 베푸셨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추락하면서도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18절 상)
우리는 이 점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이는 그의 연착륙을 도울 뿐만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이륙을 위한 좋은 발판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곤고함이 엘리야의 것에 비해 무척이나 짧았음을 주목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롱런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 승리 공식뿐만 아니라 위기관리 공식도 잘 배워두고 있습니까? 인생의 완주를 위해서 평소에 올라가는 방법뿐만 아니라 내려오는 방법이나 추락하는 법 역시 잘 익혀두고 있느냔 말입니다.
* 떨어졌을 때는 주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삿15:18)
떨어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떨어졌으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위급상황에서는 신속함이 생명입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면 대개 이런 문구가 보입니다. ‘응급실 진료는 접수순이 아니라 응급순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시간을 끌게 무엇입니까? 떨어졌으면, 아니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신속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목이 말라 죽게 되자 곧바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18절 상) 뭐라고 하면서 부르짖었습니까? 첫째, 자신의 하나님의 종임을 고백했습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므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책임져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한 것입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18절 중)
둘째, 하나님께서 승리의 주역(主役)이심을 선포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큰 구원을 이루어주셨음을 공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천 명을 모두 무찌르셨으며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18절 중)
셋째, 자신이 여기서 죽는 것은 곧 하나님의 수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한 것입니다.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18절 하)
결국 그는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샘물입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19절 상) 또 그 샘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었고요? 회복과 소생입니다.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19절 중)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떨어졌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들을 위해 언제나 샘, 곧 회복과 소생을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부르는 자의 샘’이라는 엔학고레의 뜻처럼 말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어디에서 이 샘물을 나게 하셨습니까? 레히의 한 우묵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19절 상) 불모지, 곧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물 한 모금 나오질 않을 것 같은 곳, 오아시스는커녕 작은 물웅덩이조차도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서도 하나님은 터뜨리셔서 샘물이 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도무지 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도 샘물이 나게 하신 분임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 오늘도 생수를 구하고 있습니까? 회복과 소생의 근원이신 예수님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고 있느냔 말입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사55:1 상)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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