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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는 과연 어느 쪽입니까? 왼쪽입니까? 오른쪽입니까?
마지막 날에 전혀 다른 두 부류의 동물인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모든 사람을 갈라놓겠다는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면, 꽤 두렵고 섬뜩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협박성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 양떼를 향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 담긴 격려의 말씀입니다. 달릴 곳을 열심히 달린 사람들을 향해서는 위로와 칭찬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이 땅에 강생하신 메시아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모습은 아주 작은 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지상 생활 동안 보여주신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한 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분께서는 위엄과 영광으로 가득한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당신 왕좌에 좌정하십니다.
목자로서 살아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양들을 불러 모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의 외침 앞에 어떤 사람들은 기쁘게 호응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권능과 심판을 행사하시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 왕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릴 것입니다. 커다란 쇠뭉치가 달린 긴 지팡이로 목자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두 편으로 갈라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은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세상 속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헐벗고 떠도는 이들, 병들고 갇힌 이들을 기꺼이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왼쪽에 앉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백번 천번 기억해야 할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종말에 가서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가 실천한 이웃 사랑이 맏형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져보니 오늘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닌 신앙이 아무리 고고하고 수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깊이 숙이고 겸손하게 작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태오 25,31-46
하느님께서 마지막에 심판하셔야만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이들은 당신도 그렇게
대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을 생각하면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이완의 유명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 첸넝추안 씨는 지난 12일 캄보디아 남부 시아누크빌에서 생방송을 진행했습니다.
많은 타이완 청년이 납치 감금, 장기 적출 등의 피해를 본 국제 인신매매 조직의 본거지를 찾아 잠입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사람에게 들켰고, 붙잡히는 장면은 고스란히 생중계됐습니다.
방송은 그대로 중단됐고 첸 씨 가족들이 급히 나서 연락이 두절 됐다며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첸 씨는 몸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모습으로 다음날 방송에 등장했습니다.
전기 고문과 심한 구타를 당한 뒤 가까스로 탈출했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건은 크게 회자 됐고, 캄보디아 경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이틀 만에 고문, 구타 사건은 자작극으로 드러났습니다.
첸 씨가 동료 한 명과 함께 군복과 가짜 총, 대본 등을 준비해 조회수를 올릴 목적으로 가짜 영상을 찍었던 겁니다.
현지 경찰 브리핑에 수갑을 차고 나온 이들은 뒤늦게 사과하고 선처를 호소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캄보디아 1심 법원은 사회불안 조장과 국가 이미지 훼손 혐의로 이들에게 각각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형이 확정되면 현지에서 형기를 채운 뒤 추방될 예정인데 타이완에선 동정론보다는 국제적 망신이란 반응이 많습니다.
왜 타국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게 자국의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는 게 될까요? 왜 대부분의 타이완 사람이 부끄럽다는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우리도 마지막 때에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으면 이런 심판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다른 나라를 존중하지 않으면 자기 나라도 존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이미지는 그 사람이 살던 나라가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어른들을 무시하면 그것은 그 부모도 그런 존재임을 보여주는 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양과 염소로 나뉘는 최후 심판 이야기입니다.
양은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이들을 예수님 대하듯 살았고 염소는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사랑은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이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이 부모라는 정체성 때문입니다.
부모는 당신 사랑으로 자녀에게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했던 그 존중을 받을 대상임을 압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 사람으로 보이게 된 것은 모두 부모의 덕분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대하는 것은 그래서 부모에게 보답하는 일이 됩니다.
반면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으면 부모도 무시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 자녀로
대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잘 대할 수 없고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이 부모를 존중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자세는 부모에게 받은 정체성 때문이고 부모를 존중하면 그 선물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씨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성장한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자세가 곧 부모의 인성을 보여줍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는 이 정체성을 주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좋은 부모에게서 나쁜 자녀가 나올 수 없습니다. 부모는 좋은데 그 아이의 인성이 나쁘다면 그는 분명 다른 이를 부모로 선택한 것입니다. 성장하는 동안에야 괜찮겠지만, 끝까지 부모의 수준까지 사랑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결국 그를 자녀로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 자녀를 모기와 함께 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양과 염소가 나누어집니다.
먼저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 모든 만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순절에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굶주리시고, 당신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종들 안에서 헐벗으신 분이시다. 모든 병을 고쳐 주신 분은 당신의 종들 안에서 병드셨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시는 분이 당신의 신자들 안에서 감옥에 계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혼자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으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주님께서는 옳은 일을 한 그들을 칭찬하셨다. 아버지께 복을 받는다는 것! 이렇게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35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얼마나 큰 복됨인가! 그분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신다.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 하신다.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지,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들의 행실을 단죄하신다.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그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죄받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이 이런 단죄를 받았다면 악마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46절) 죄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해 주며, 그분을 닮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모시고 사랑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부터
준비된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사랑을
받아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보살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피와 살을
나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빚진 목숨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쓰러진 자들을
가장 먼저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우리에게
밥을 주시고
물을 주시고
우리를
따뜻이
맞아들이시고
옷을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감옥에 있을 때
제일 먼저
찾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작은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소외된 이들을
더 다정하게
더 따뜻히
반겨주시는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께
해 드리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의
참된 길입니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나라의
삶입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나라는
여기 이곳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심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여기가 바로
준비된 나라
구원입니다.
실천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실천을
되찾아 주시는
사순시기입니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본당 교우들이 제게 늘 바빠 보인다고 하십니다. 단체 모임에 강복 주러 갈 때 거의 뛰다시피 다니는 모습을 보고, 또 무슨 일이든 서두르게 하는 모습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 책상을 보며 충분히 공감합니다.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책상을 채우고 있는 책과 노트, 그리고 필기구들은 저의 바쁨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정표를 두 달 치씩 확인하며 사는 것 역시 바쁘게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그리고 아는 지인의 부고 소식을 계속 들으면서 제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십 중반을 살았으니 분명한 것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바쁘게 지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려고 늘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던 중에, 운동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허리가 아프니 다 힘들어졌습니다. 걷는 것도, 눕는 것도 심지어 양말 신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앉았다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힘들어서 천천히 또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겸손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면서 살았는데, 무엇이든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 나와 함께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떠올리고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영광스러운 심판관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시지요. 즉,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 신심 행위가 심판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 이웃에게 어떻게 실행했는지가 그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묵묵히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능력과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기준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와 희생, 봉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나의 구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그저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려고 태어난 것이다(헬라스 브릿지스).
6)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심판의 기준!
오늘 복음(마태25,31-46)은 장례미사 복음으로 종종 듣는 '최후의 심판 기사'입니다.
우리의 여정은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두 개의 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끝'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끝'입니다.
두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죽음 후에 맞이하게 되는 심판을 '사심판'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맞이하게 되는 심판을 '공심판'이라고 합니다.
'사심판'은 죽은 사람이 받는 개인 심판이지만,
'공심판'은 세상 종말을 의미하는 최후의 심판으로써,
죽은 이와 산 이가 함께 받는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는 나의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나의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심판 때에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고, 이 칭찬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쇠가 됩니다.
오늘 독서(레위19,1-2.11-18)와 복음이 이 분명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
서로 사랑합시다!
7)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가장 작은 이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그들의 키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네.
우리가
등을 돌리고 돌아서서
모르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네.
복음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