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것을 목격하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의 외아들을 돌봐달라고 소리 지릅니다(37절, 38절).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외아들이 귀신에 사로잡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일으키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 쫓아내 주기를 간청했지만, 제자들이 할 수 없었다고 하소연합니다(39절). 마태복음 17:15에서는 이 사람의 아들은 간질 환자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간질(癎疾, Epilepsy)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문의 단어는 “셀레니아제타이”(σεληνιάζεται)이고, 그 원형은 “셀레니아조마이”(σεληνιάζομαι)인데 미치다, 간질에 걸리다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 영어 성경에서는 주로 lunatic(미친)이란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간질과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으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귀신이 그 아들을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39절, 42절). 간질 증세가 모두 귀신의 역사(役事)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귀신이 이런 증세를 일으키도록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들으시고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한탄하시면서 그 아들을 데리고 오게 하였고, 귀신을 꾸짖으시고 떠나게 하셔서 낫게 하셨습니다(41절, 42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지적은 일차적으로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꾸짖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異蹟)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이러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참된 믿음보다는 병 나음과 귀신 쫓아냄에 대한 관심만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참된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세대를 향한 한탄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탄식은 아들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는 그 아버지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것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능력도 행할 수 있는데, 그러한 믿음이 부족한 것에 대한 탄식일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목격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43절).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놀랍게 여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44절). 예수님께서 귀에 담아 두라는 말은 아마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보고 놀라워하면서 감탄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감탄하며 하나님의 위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시사(示唆)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 묻기도 두려워서 그저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었습니다(45절).
이런 와중에 제자들에게는 “누가 크냐?”라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46절). 여전히 제자들도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적인 관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신 주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곁에 세우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47절, 48절).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는 말씀은 스스로 낮추고 겸손한 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서 귀히 여김 받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이 세상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제자들은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었기에 금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49절). 요한이 말한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보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요한이 볼 땐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 제자들의 무리에 들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선을 그어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한의 이야기에 예수님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지지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50절). 아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그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믿고 있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를 들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와 같은 자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였지만, 겉으로 볼 땐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자들이니, 사람들 중에는 은연중(隱然中)에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나름대로 나누어 구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사도라고 칭하시면서 특별히 돌보시고 이끄셨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만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거나,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특권층으로 자신이 속한 열두 제자를 구분하려는 요한에게 누구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주님의 복음을 전하거나,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종종 자신들을 영적 특권층으로 만들려는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끼리끼리 뭉쳐서 파벌을 형성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자들은 잘못되었다고 나누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따르며, 주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라면 그들의 사역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 크냐?”라는 변론에 이어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구별하여 특권층으로 분류하려는 생각을 주님께서는 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따르고, 겸손한 모습으로 “종의 도”(Servantship)를 가지고 행하는 자들로 이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고,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주님의 종들로 세워져 가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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