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만드는 드라마 - 에고를 초월하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것들
에크하르트 톨레...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中에서
에고를 초월하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것들
에고는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 속에 숨겨져 있는 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 목소리 - 자기도 모르게 쉼 없이 일어나는 강박적인 생각의 흐름과 그것에 동반하는 감정들 - 와 너무도 완전히 동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 소유당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상태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당신은 그 생각하는 자를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것이 에고가 지배하는 마음이다.
에고가 지배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 즉 모든 기억, 모든 해석, 의견, 관점, 반응, 감정 속에 ‘나(에고)’라는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무의식이다. 당연히 당신의 생각, 다시 말해 당신 마음속 내용물은 성장 배경, 문화, 가족 배경 등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다. 모든 마음 활동의 중심은 집요하게 반복되는 생각들, 감정들, 반응 형태 등 당신이 가장 강하게 동일화되어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독립체가 에고 그 자체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당신이 ‘나’라고 말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에고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고는 생각과 감정, 당신이 ‘나와 나의 이야기’로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기억의 덩어리들, 부지불식간에 연출하는 습관적인 역할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국적, 종교, 인종, 사회적 지위, 정치적 충성 같은 집단적 동일화도 포함된다.
에고의 내용물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든 에고에는 동일한 구조가 작용한다. 다시 말해, 에고는 단지 표면에서만 다를 뿐 깊은 아래서는 모두가 같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같은가? 에고는 동일화와 분리를 먹고 산다. 당신이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마음이 만들어 낸 자아, 즉 에고를 통해 살아간다면, 그 정체성의 기반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은 본래 변화하기 쉽고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하면서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나’라는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에고는 그 반대 생각인 ‘남’이 필요하다. 개념적 ‘나’는 개념적 ‘남’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남’은 내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할 때 가장 확실한 ‘남’이 된다.
에고가 지배하는 이 무의식적인 행동 양식의 한쪽 끝에는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불평하는 에고의 강박적인 습관이 놓여있다. 예수가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가?”하고 말한 것도 이것을 가리킨다.
이 행동 양식의 다른 쪽 끝에는 개인 간의 물리적 폭력과 국가 간의 전쟁이 있다. 성경에는 앞에 나온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적혀 있지 않지만 당연히 그 대답은 이러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때, 나 자신이 더 크고 우월한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만과 분함
불만은 에고가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선호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모든 불만은 마음이 만든, 당신이 완전히 믿고 있는 작은 이야기이다. 불만을 큰 소리로 말하든 단지 생각 속에서만 하던 차이가 없다. 자기와 동일시할 것을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 않으면서 불만만으로 즐겁게 생존하는 에고도 있다. 그런 에고의 포로가 되면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습관이 되고 당연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면전에 대고 하든, 혹은 흔히 하듯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든, 심지어 생각 속에서만 하든,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것은 이 패턴의 주된 부분이다. 욕하기는 이런 분류표 붙이기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이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을 이기려는 에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이 무의식 바로 아래쪽 차원에서 당신은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있으며, 또한 그보다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물리적 폭력이 있다.
분함은 불만과 함께 따라오는 감정이자 사람들에게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일이며, 이것은 에고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보태준다. 분함은 억울해하고, 분개하고, 자신이 부당하게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탐욕, 부정직, 진실성 부족, 현대 그들이 하고 있는 짓과 과거에 한 짓, 그들이 말한 것, 그들이 하지 않은 것, 했어야 하며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등에 대해 계속해서 분개한다. 에고는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눈감아 주지 않고 그것을 아예 그들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바로 당신 안의 무의식, 즉 에고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잘못’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완전한 오해이며, 적을 만들어 자신이 옳고 우월함을 느끼도록 조건 지어진 자기 마음의 투영일 수가 있다. 잘못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그것에만 집중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함으로써 그 잘못을 확대하는 경우도 흔하다. 당신이 반응하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것을 당신은 자신 안에서 강화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에고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에고를 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행동이 에고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집단적 기능장애의 표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만 그것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 마치 그것이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대응하려는 충동이 사라진다.
에고에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의 온전한 정신을 끌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온전한 정신이란 조건 지어진 상태와는 반대인 조건 지어지지 않은 의식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뿌리 깊은 무의식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절적인 단계를 취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 경우에도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최고의 보호 장치는 깨어 있는 의식을 갖는 일이다. 당신이 에고라는 무의식을 그 개인의 문제로 분류하면 누군가는 적이 된다. 대응하지 않는 것은 허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대응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말이 용서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눈감아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에고를 꿰뚫어 모든 인간 존재의 본질인 온전한 정신을 보는 것이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상항에 대해서도 불평하고 분개하기를 좋아한다. 사람에 대해 가능한 것은 상황에 대해서도 가능하다. 즉 상황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늘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표현된다. ‘이 일은 일어나서는 안 돼. 나는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아.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어.’ 그리고 물론 에고의 가장 큰 적은 지금 이 순간, 즉 삶 그 자체이다.
누군가에게 실수와 부족한 점을 말해주어 바로 잡는 것과 불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불만을 품지 않는 것이 반드시 나쁜 품질이나 악한 행동을 참고 견디는 것은 아니다. 수프가 식었기 때문에 종업원에게 따뜻하게 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에고가 아니다. 사실만을 말하기 때문이며, 사실은 언제나 중립이다. “어떻게 나한테 다 식어빠진 수프를 갖다 줄 수 있지?”
이것은 불만이다. 여기에는 ‘나한테’라는 의식이 있고, 식은 수프에 개인적인 모욕을 느껴 소란을 피우는 ‘나’, 누군가 잘못되었다고 만들기를 즐기는 ‘나’가 있다. 이 불만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에고를 기쁘게 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때로는 실제로 에고가 변화를 원하지 않고 있음이 명백한 경우도 있다. 그러면 계속 불평하고 불만스러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불만스러워하는 바로 그 순간 머릿속 목소리를 잡아챌 수 있는지, 즉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좋다.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그 에고의 목소리를. 그리고 그 목소리를 알아차릴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그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그 ‘알아차림’이 본래의 당신이다. 배경에는 알아차림이 있고, 전면에는 그 목소리, 즉 생각하는 자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에고로부터 해방되고, 관찰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 안의 에고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에고가 아니라, 단지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에고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다. 오래된 마음의 방식이나 생각의 습관은 당분간은 여전히 살아남아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배후에는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이 가진 추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아차릴 때마다 매번 힘이 약해질 것이다.
맞대응과 원한
분함은 불만과 종종 붙어 다니는 감정이지만, 때로는 그것보다 더 강한 분노나 그 밖의 감정적 흔들림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분함은 더 강력한 에너지로 충전된다. 이때 불만은 에고가 스스로를 강화시키는 또 다른 방식인 ‘대응’으로 바뀐다. 맞서서 반응하거나, 화내고 소란을 피울 그다음 것을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금세 그 대상을 발견한다. “이건 불법이야.” “어떻게 네가 감히․․․․․․․․․․․․․․. ” 이런 사람들은 약물 중독이 아닌 분노와 감정 폭발 중독이다. 이것 또는 저것에 맞서서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자아에 대한 느낌을 강화하는 것이다.
오래 지속된 분함은 원한이라고 불린다.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영구적으로 ‘대립’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원한은 많은 사람들의 에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집단적인 원한은 국가와 부족의 정신 속에 몇 세기 동안이나 남아 있을 수 있으며,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기름을 붓는다.
원한은 어떤 먼 과거에 일어나 사건과 관계된 강한 부정적 감정이다. ‘누가 나에게 한 일’, ‘누가 우리에게 한 일’을 강박적으로 계속 생각하거나, 머릿속에서 혹은 분명하게 입 밖으로 내어 반복해 이야기함으로써 그 사건은 늘 살아있는 상태가 된다.
원한은 또한 삶의 다른 영역들도 오염시킨다. 예를 들어, 원한을 생각하고 느끼는 동안 그 부정적인 감정 에너지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고, 눈앞의 사람에 대해 말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깊은 원한이 한 가지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대부분의 영역이 그것에 물들고, 에고의 덫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자신이 여전히 원한을 품고 있는지, 가기 삶에서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 누군가가, 즉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만약 그렇다면, 생각 차원과 감정 차원 모두에서 그 원한을 알아차려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원한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들에 대한 신체적 반응인 감정을 느껴야 한다. 원한을 내려놓으려고 시도하면 안 된다.
원한은 내려놓거나 용서하려고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원한이 거짓 자아의식을 강화시켜 에고를 제자리에 유지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음을 당신이 보게 될 때, 용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보는 것이 곧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에고가 지배하는 주된 구조 중 하나를 해체하라는 의미이다.
과거에게는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머무는 것을 막을 힘이 없다. 오직 과거에 대한 당신의 원한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원한이란 무엇인가? 오래된 생각과 감정의 응어리이다.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리게 만들기
잘못 찾아내기와 맞대응과 마찬가지로 불만도 에고의 생존이 달린 금(선)긋기와 분리 의식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불만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에고를 강화한다. 에고에게 우월감을 주는 것이 그것이다. 우월감은 에고가 커질 수 있는 토대이다.
교통 정체에 대해, 정치인들에 대해, ‘자기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부유층’이나 ‘게으른 실직자들’에 대해, 혹은 직장 동료나 헤어진 배우자에 대해, 남자나 여자에 대해 터뜨리는 불만이 어떻게 에고에게 우월감을 줄 수 있는지 금방 알기 어려울 수도 있다.
여기 에고가 우월감을 느끼는 이유가 있다. 불만을 말할 때, 당신은 자신은 옳고 불만과 거부반응의 대상인 그 사람이나 상황은 잘못되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만큼 에고를 더 강화시켜 주는 것은 없다. 옳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 의견, 판단, 이야기 등과 같은 정신적 입장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옳기 위해서는 당연히 틀린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에고는 옳기 위해 누군가를 틀리게 만들기를 매우 좋아한다. 바꿔 말해, 자신의 더 강한 자아의식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틀리게 만들 필요가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상황도 불만과 반응을 통해 틀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주장은,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자신을 상상 속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에고가 갈망하는 것이 그 우월감이며, 그것을 통해 에고는 자신을 강화시킨다.
환상이 자신을 방어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은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고 말하는데 누군가 정반대라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당신이 옳고 그가 틀리다. 당신이 옳다는 것은 번개가 천둥보다 앞서는 것을 관찰하는 일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은 옳을 뿐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도 안다. 여기에 에고가 개입되어 있는가?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단순하게 말한다면 에고는 전혀 개입해 있지 않다. 자기 동일화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과의 동일화인가? 마음과의 동일화,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 입장과의 동일화이다. 그러나 이 동일화는 쉽게 끼어들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내 말을 믿어, 내가 잘 아니까.”하고 주장하거나 “왜 늘 내 말을 믿지 않지?” 하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곳에 이미 에고가 끼어든 것이다.
에고는 ‘나’라는 작은 단어 뒤에 숨어 있다.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라는 단순한 발언은 진리이지만, 이제 그것은 에고라는 환상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 ‘나’라는 허구의 느낌에 오염된 것이다. 이제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되고 정신적 입장으로 바뀌었다. 누군가가 ‘내’가 한 말을 믿지 않으면 ‘나’는 위축되거나 모욕당했다고 느낀다.
에고는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인다. 감정이 일어나고, 방어 심리와 심지어 공격성까지 나타난다. 당신은 진실을 방어하려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든 진실은 방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빛도 소리도 당신과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자기 자신’이라는 환상, 즉 마음이 만들어낸 대체물을 방어하는 것이다. 환상이 그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간단하고 명확한 사실마저 이처럼 에고의 왜곡과 환상에 영향을 받는다면, 의견이나 관점, 판단처럼 ‘나’의 자아의식과 쉽게 뒤섞일 수 있는 덜 객관적인 생각 형태들은 얼마나 왜곡이 심하겠는가?
모든 에고는 자신의 의견과 견해를 사실 그 자체와 혼동한다. 더 나아가, 객관적인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반응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모든 에고는 선별적으로 인식하고 왜곡되게 해석하는 데는 달인이다. 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알아차림을 통해서만 사실과 의견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오직 알아차림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볼 수 있다. 저것은 상황이며 이것은 상황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분노임을 알고, 그런 다음 그 상황에 접근하는 다른 방식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을 보는 다른 시각과 다른 대응 방식이 있음을. 오직 알아차림을 통해서만 제한된 한 가지 관점에서 벗어나 그 상황이나 사람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진리 —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검증 가능한 단순한 사실들의 경우는 별도로 하고,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고 확신하는 것은 개인의 인간관계뿐 아니라 국가, 민족, 종교 간의 상호 관계에서도 위험하다.
그러나 만약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믿음이 에고가 자신을 강화하는 방법들 중 하나이며, 자신은 옳고 남은 틀리게 만드는 것이 사람들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지속시키는 마음의 기능장애라면, 그렇다면 행동과 행위, 그리고 믿음에는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는 것일까? 그것은 몇몇 기독교인들이 우리 시대의 최대의 악이라고 보는 윤리적 상대주의(인간 행동의 지침이 되는 절대적 진리 따위는 없다는 사고방식)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진리는 자신들 쪽에만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자신들만 옳다는 믿음은 행동과 행위를 광기 수준으로까지 전락시킨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 자체가 여실히 보여준다. 종교는 몇 세기 동안이나 자신들이 내린 교리와 성서 - 혹은 ‘진리’ - 의 좁은 해석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가진 자가 있으면 고문하고 화형에 처했다. 그런 행동은 옳으며, 그 이유는 희생자들이 틀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희생자들은 너무도 틀리기 때문에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다. 진리가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그 ‘진리’란 무엇인가? 당신이 믿어야만 하는 이야기, 즉 한 묶음의 생각이다.
캄보디아의 미치광이 독재자 폴 포트가 죽이라고 명령한 백만 명의 사람들 중에는 안경 쓴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왜인가? 폴 포트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이 절대 진리였으며, 그 절대 진리의 폴 포트 해석에 따르면 안경을 착용한 사람들은 지식인 계급, 부르주아지, 농민의 착취자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폴 포트가 주장한 그 진리도 단지 한 묶음의 생각에 불과했다.
가톨릭을 비롯한 교회들이 윤리적 상대주의를 현대의 악 중 하나로 비판하는 것은 물론 아주 틀리지 않다. 그러나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장소에서 절대적 진리를 찾는다면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발견할 수 없는 장소란 교리, 이념, 계율, 이야기 등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생각은 기껏해야 진리를 가리켜 보일 수는 있지만, 결코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똑같이 틀릴 수도 있고 똑같이 옳을 수도 있다. 그것을 에고를 위해 봉사시킬 수도 있고, 진리에 봉사시킬 수도 있다. 자신의 종교만이 ‘진리’라고 믿는 다면, 그것을 에고에 봉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사용할 때 종교는 이념이 되고, 사람들 사이에 편 가르기와 갈등뿐 아니라 우월감이라는 환상을 심는다. 진리에 봉사할 때 종교적 가르침들은 깨달은 존재들이 남긴 표지판과 지도가 되어 다른 사람들도 영적으로 깨어나고 형상과의 동일화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도울 것이다.
절대적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다른 모든 진리들은 그것으로부터 퍼져 나온다. 그 진리를 발견할 때 당신의 모든 행동은 진리에 맞춰질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진리를 반영하거나 환상을 반영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진리를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언어는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단지 진리를 가리켜 보일 뿐이다.
그 진리는 당신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 당신이 진리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면 매번 속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예수는 이것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로 전하려고 했다. 예수의 이 말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직접적으로 진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잘못 해석하면 커다란 장해물이 된다. 예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존재, 모든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존재인 그 생명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 신비가들은 그것을 ‘내면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진아), 즉 내면에 거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 차원과 연결될 때 - 그 차원과 연결되는 것은 당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이지 특별히 기적적인 성취가 아니다 - 당신의 모든 행동과 관계들은 당신이 깊은 내면에서 감지하는 모든 생명과의 일체감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율법, 계명, 계율, 규정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과 단절된 사람들, 자기 내면의 진리와 분리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것들은 에고의 최악의 폭주를 막는 역할을 하겠지만, 종종 그것에서조차 실패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성 어거스틴은 말했다. 언어로는 이것 이상으로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집단 차원에서 “우리는 옳고 너희는 틀리다.”는 사고방식은 국가 간, 인종 간, 민족 간, 종교 간, 이념 간의 갈등이 오래되고 극단적이며 고질적으로 일어나는 세계 분쟁 지역에서 특히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대립하는 당사자들은 어느 쪽이든 자신들의 관점, 자신들의 이야기와 동일화되어 있다. 즉 자신들의 생각과 동일화되어 있는 것이다. 양쪽 모두 자신들과 다른 관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 역시 타당할 수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언론인 요시 할레비는 ‘대립하는 이야기의 조정’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세상의 많은 지역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것이 불가능하고 그럴 의지도 없다.
대립하는 어느 쪽이든 자신들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철저히 믿는다. 양쪽 모두 자신들은 희생자로, 상대방은 악의 무리로 간주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인간이 아닌 적으로 개념화해 왔기 때문에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까지 온갖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인간적인 마음의 고통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공격과 보복, 받은 만큼 되받아친다는 광기 어린 악순환에 빠져 있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집단 측면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에고는 ‘나’라는 개인적인 에고와 그 작용 방식은 동일해도 훨씬 더 광기 어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서로에게 가한 폭력의 상당수는 범죄자와 정신이상자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극히 ‘정상적인’ 훌륭한 시민이 집단적 에고에 봉사하며 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 행성에서는 ‘정상’이라는 것이 ‘정신 이상’과 동일한 의미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 정신이상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생각과 감정과의 완전한 동일화, 즉 에고이다.
탐욕, 이기심, 착취, 잔인함, 폭력이 여전히 이 행성 도처에 만연해 있다. 그것이 마음 밑바탕에 있는 기능장애 혹은 정신적 질환의 개인적, 집단적 표현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개인과 집단에 대한 개념적인 정체성을 만들어 “그는 이런 사람이다. 그들은 이런 인간들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 안에서 인식하는 에고를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혼동할 때, 이러한 오해를 자기 강화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당신의 에고가 흔히 하는 일이다. 자신이 옳고 그러므로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적으로 인식되는 상대방에 대해서는 비난과 분개와 종종 분노로 반응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에고에게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상대방이 분리된 존재라는 의식이 강해지고 상대방의 ‘타인성’이 점점 극대화되어, 상대방이 자신과 공통된 인류라고 더 이상 느끼지 않을뿐더러, 인간 존재로서 공유하고 있는 ‘한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도, 공통된 신성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린다.
에고의 특정한 패턴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해 강하게 반응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오인하지만, 사실 그것은 당신 안에도 있는 동일한 패턴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 안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도 없고, 그럴 마음조차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적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상대방 안의 무엇에 대해 당신은 가장 기분 나빠하고 가장 불쾌해하는가?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면인가? 탐욕? 권력욕이나 지배욕? 아니면 불성실, 부정직, 폭력적 성향?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방 안에서 당신이 가장 분개하고 강하게 반응하는 특성이 당신 자신 안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에고의 한 가지 형태일 뿐 그 이상이 아니며, 전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의 진정한 존재와 관계가 없고 당신의 진정한 존재와도 관계가 없다. 그것을 자신이라고 착각할 때만, 자신 안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 당신의 자아의식을 위협할 수 있다.
전쟁은 마음의 방식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이나 누군가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악을 뿌리 뽑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맞서 싸우고 있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이 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무의식과 싸우는 것은 당신 자신을 무의식 속으로 끌고 갈 것이다. 무의식, 즉 기능장애를 가진 에고의 행동은 그것을 공격하는 것에 의해서는 결코 물리칠 수 없다. 설령 상대를 물리칠지라도 무의식은 간단하게 당신 속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아니면 새로운 변장을 한 상대방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무엇과 싸우든 그것을 강하게 만들며, 저항할수록 끈질기게 지속된다.
오늘날 ‘무엇과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전쟁은 실패가 이미 결정되어 있음을 안다. 마약과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 암과의 전쟁, 빈곤과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범죄와 마약과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5년 동안 범죄와 마약 등 온갖 불법행위는 극적으로 증가했다. 미국 교도소의 수용 인원은 1980년에는 30만 명이 되지 않았지만 2004년에는 놀랍게도 210만 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질병과의 전쟁에서 우리는 항생제를 손에 넣었다. 처음에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고,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인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항생제의 남용과 무분별한 사용은 시한폭탄과 같으며, 슈퍼 박테리아(항생제 내성균) 때문에 전염병이 부활하고 폭발적으로 유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미국 의학 협회 저널>에 따르면 미국에서 심장 질환과 암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은 사망 원인은 병원 치료이다. 동종요법과 한의학은 병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 가능한 두 가지 예로, 이들은 병을 적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따라서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전쟁은 마음의 방식이며, 그런 사고방식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은 악으로 인식된 상대방을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든다.
설령 전쟁에 이긴다 해도 전과 동일하거나 종종 더 나빠진 새로운 적,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낸다. 당신의 의식 상태와 외부 현실 사이에는 깊은 상호관계가 있다. 당신이 ‘전쟁’이라는 마음의 방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당신의 감각 지각들은 왜곡될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선별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또한 그것을 잘못 해석한다. 그러한 망상 체계로부터 어떤 종류의 행동이 나올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없다면 오늘 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된다.
에고의 정체를 알아차려야 한다. 에고는 집단적 기능장애, 즉 인간 마음의 정신이상 증세이다. 에고의 정체를 알아차리면 더 이상 그것을 누군가의 정체성으로 오인하지 않는다. 일단 에고의 정체를 알면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것도 한결 쉬워진다.
그것을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불만을 품거나 책임을 묻거나 비난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있는 에고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증상이 심할 수 있지만, 모두가 똑같은 마음의 병으로 고통 받고 있음을 알면 자비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에고가 지배하는 인간관계의 드라마에 더 이상 기름을 붓지 않는다. 기름은 무엇인가? 대응이다. 에고는 그것을 먹고 번창한다.
...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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