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濟州李氏(제주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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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濟州島
濟州(제주)는 韓半島(한반도)의 南西(남서) 海上(해상)에 位置(위치)한 우리나라 最大(최대)의 섬(島)이다.
名稱(명칭)도 島夷(도이)·州胡(주호)·耽牟羅(탐모라)·涉羅(섭라)·乇羅(탁라)·耽羅(탐라)·濟州(제주)等(등) 時代(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新羅(신라)의 屬國(속국)이었던 耽羅國(탐라국)은 938年(太祖21) 高麗(고려)의 屬國(속국)이 되었고,
1105年(肅宗10)부터는 郡(군)을 設置(설치)하여 直接(직접)다스리다가 1153年(懿宗7) 郡(군)을 縣(현)으로 고쳤으며,
1211年(熙宗7)에 耽羅郡(탐라군)을 濟州(제주)로 改編(개편)하였다.
1271年(元宗12)에 三別抄(삼별초)가 濟州道(제주도)에 雄據(웅거)하면서 蒙滑(몽골)에 마지막까지 抗爭(항쟁)을 벌이다가
1273年에 敗(패)한 後(후) 濟州島(제주도)는 元(원)나라의 直轄地(직할지)가 되어 牧馬場(목마장)이 設置(설치)되었다.
其後(그후) 約(약) 1世紀(1세기) 동안 濟州島(제주도)는 高麗(고려)와 元(원)나라 사이에 所屬(소속)이 여러 차례 바뀌는
複雜(복잡)한 過程(과정)을 겪다가 1367年(恭愍王16)에 完全(완전)히 高麗(고려)에 回復(회복)되었다. 朝鮮(조선) 太宗(태종)때
오랫동안 傳來(전래)되어온 城主(성주)·王子(왕자)의 稱號(칭호)가 廢止(폐지)되고 實質的(실질적)인 行政力(행정력)속에 包含(포함)된다.
1416年(太宗16) 漢拏山(한라산)을 境界(경계)로 山北(산북)을 濟州牧(제주목), 山南(산남)을 兩分(양분)하여 東(동)쪽에
旌義縣(정의현), 西(서)쪽에 大靜縣(대정현)을 設置(설치)하고 全羅道(전라도)에 所屬(소속)시켜 統治(통치)하였다.
1864年(高宗1) 大靜(대정). 旌義(정의) 兩縣(양현)을 郡(군)으로 昇格(승격)시켜 全羅道觀察使(전라도관찰사) 管割下(관할하)에
두었다. 1895年(高宗32) 地方制度(지방제도) 改正(개정)으로 23府制(23부제)를 實施(실시)함에 따라 濟州府(제주부)를
設置(설치)하여 旌義郡(정의군)·大靜郡(대정군)을 管轄(관할)하도록 했다.
1896年에 다시 13道制(13도제) 實施(실시)로 全羅南道(전라남도) 濟州郡(제주군)·旌義郡(정의군)·大靜郡(대정군)이 되었다.
1914年에 郡面(군면) 廢合(폐합)으로 旌義郡(정의군)·大靜郡(대정군)과 莞島郡(완도군) 楸子面(추자면)이 濟州郡(제주군)에
倂合(병합)되어 濟州郡(제주군)은 濟州道(제주도) 全域(전역)을 管割(관할)하게 되었다.
1915年 島司制(도사제)로 改編(개편)되어 濟州島(제주도)가 되었고,1946年 道制(도제) 實施(실시)로 全羅南道(전라남도) 管割下(관할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46年에 비로소 全羅南道(전라남도)에서 分離(분리)되어 濟州道(제주도)로 昇格(승격)하고 北濟州郡(북제주군)및 南濟州郡(남제주군)을 新設(신설)했다.
1955年에 濟州邑(제주읍)을 市(시)로 昇格(승격)하였고,1956年에는 西歸面(서귀면)·大靜面(대정면)·翰林面(한림면)을
各各(각각) 邑(읍)으로 昇格(승격)하고 翰京面(한경면)을 新設(신설)하였다.
1980年에 涯月面(애월면)·舊左面(구좌면)·南元面(남원면)·城山面(성산면)을 邑(읍)으로 昇格(승격)했으며, 1981年에
西歸邑(서귀읍)과 中文面(중문면)을 合하여 西歸浦市(서귀포시)로 昇格(승격)하였다.
1985年에 朝天面(조천면)을 邑(읍)으로, 1986年에 舊左邑(구좌읍) 演坪出張所(연평출장소)를 牛島面(우도면)으로
昇格(승격)하였다.
科擧及第者(朝鮮時代)
李挺春(이정춘) (1596 丙申生) : 武科 仁祖2年(1624) 增廣試 乙科
李基隆(이기륭) (1594 甲午生) : 武科 仁祖2年(1624) 增廣試 丙科
李熙林(이희림) (1597 丁酉生) : 武科 仁祖2年(1624) 增廣試 丙科
等 모두 3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武科 3名)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濟州李氏(제주이씨)는 1985年에는 摠 87家口 441名,2000年에는
摠 416家口 1,578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