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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 스크랩 모리스 슈발리에
초립동 추천 0 조회 138 11.10.14 15: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모리스 슈발리에(1888-1972/프랑스 빠리출생).

빠리의 2대명물의 하나인 슈발리에는 가고 이제 에펠탑만 남았다.

"스트로 햇트"에 스틱을 휘두르며 노래하고 춤추던 빠리의 멋장이 모리스 슈발리에가 세상을 떠났다(72년 1월 1일). 향년 83살, 동양식으러 말한다면 옹자가 몇번 붙을 노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젊은 세대에게는 <하오의 연정>, <지지>, <화니> 등의 영화 그리고 올드팬에게는 30년대의 할리우드의 로맨틱한 영화의 배우로 더 알려진 그에게는 사실상 연령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가리켜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위트만은 "한잔 샴페인의 거품같은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첨으로 대중앞에 나타나 노래 한 것이 12살 때인 1900년이고 은퇴공연을 가진 것이 80살이던 1968년이니까 그는 20세기의 개막과 함께 꼬박 68년을 쉬지않고 선령한 인간들의 애환을 노래로 달래고 그들에게 꿈을 주는 스타로서 연기하며 "누구에게나 어두운 면이 있는 인생... 에게 삶의 영기를 붇돋아주었던"(그의 말) 향긋한 거품 어린 한잔의 샴페인 이었던 것이다.

모리스 슈발리에는 1888년 9월 12일 빠리의 메닐 몽땅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빅또르 샤를르는 도장공이었고 어머니 죠세핀은 레이스 제조공으로 가난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슈발리에가 8살 때 집을 나가 어머니의 짐을 벅찼다. 슈발리에는 10살 때까지 초등교육을 마치고 어린 몸으로 직업을 찾아나섰다. 조판공. 못공장 직공 그리고 형 뽈과 함께 "슈발리에 브러더즈"라는 이름으로 곡예도 했으나 가수로 전업하여 어느 카페에서 아마츄어로 출연했다. 그때 슈발리에는 반주음보다 세 음정이나 틀려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12살 때 뜨로와 리옹 카페에서 직업적인 데뷔를 한 뒤 싸구려 바라이티 카페로 진전했다. 그 당시 풍습대로 코에 빨간 칠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관객을 웃기기도 했다. 그가 결정적인 명성과 인기를 얻게된 것은 21살에 빠리의 레뷰단 폴리 베르제르에 채용된 때부터였다.

노래외에도 권투가 장기였던 그는 링으로 나갈까 뮤직홀에 설까하는 기로에서 뮤직홀을 택한 것이다. 그 당시 폴리 베르제르에는 "백만달러의 각선미"라고 선전하는 인기가수 겸 무희 미스땡게가 있었다. 슈발리에는 운좋게 15살이나 위인 그녀의 상대역이 된 것이다. 이 새 콤비의 레뷰 <딩구는 왈츠>는 너무도 유명한 것이었다. 둘이 노래하면서 스테이지의 카페에서 딩굴다 스테이지 밖으로 굴러떨어져 다시 일어나는 기상천외의 레뷰 넘버였다. 25살 때 입대한 그는 1차대전중 부상을 입고 독일 포로수용소에에 수감되었다. 그 당시 그는 영국군 포로를 만나 영어를 배웠다. 그가 후에 프랑스 특유의 억양의 그 유머러스한 영어를 하게 된 기초는 이 포로 수용소에서 다져진 것이다. 그는 곧 국제 적십자사의 포로교환으로 귀국, 훈장을 타고 다시 폴리 베르제르로 돌아와 미스땡게의 콤비가 되어 재기공연을 가졌다.

그의 복장에 대한 에피소드도 유명한 것이다. 대전이 끝난 뒤인 1919년 런던공연을 떠난 슈발리에는 런던 거리에서 턱시도에 스트로 햇트를 쓴 멋쟁이를 발견했다. 이 옷에 감명을 받아 귀국하자 스트로 햇트를 쓰고 턱시도를 입고 "카지노 드 빠리"의 스테이지에 섰다. 그때부터 그의 스트로 햇트는 유행이 바뀌더라도 그대로 그의 머리에 얹혀지고 그의 스트로 햇트는 유행이 바뀌더라도 그대로 그의 머리에 얹혀지고 마침내는 슈발리에의 특징을 이루어 주는 것이 되었다. 허무주의의 다다이즘의 풍미하던 20년대의 빠리에서는 "레뷰"가 차가 인기를 잃고 오페레뜨가 판을 쳤다. 슈발리에는 <데데>라는 오페레뜨에 주연으로 출연, 성공을 거두었고 오랜 컴비던 미스땡게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상대역인 이본느 발레와 결혼했다(26년).

무성에서 토키로 넘어가던 그 당시의 할리우드는 새로운 배우를 찾고있었다. 배우가 말한다는 그 놀라움속에서 미성과 미모를 함깨 갖춘 스타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명한 제작자 어빙 살버그와 파라마운트 사장 제씨 라스키가 그를 할리우드에 초청, 이렇게 하여 그의 할리우드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파라마운트와 계약한 그의 첫작품 <빠리의 노래>는 그다지 호평이 아니었지만 이어 <러브 퍼레이드>, <파라마운트 온 퍼레이드>(한국상영) <메리 위도>, <웃는 중위> 등에 출연하며 주 2만달러의 개런티를 받았고 35년 어빙 살버그와 다투어 빠리에 돌아올 때까지 12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어서 당시 여인들은 슈발리에식 영어발음을 흉내내고 그의 노래를 흥얼댔다는 것이다. 이로써 슈발리에는 "프랑스적 유머" "영국적인 의상" 그리고 "미국적인 춤과 신선미"로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프랑스인이 되었고 동시에 명실공히 국제적인 스타가 된 것이다. 이 시대에 그는 부인 발리와 6년간의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끝맺고 35년 빠리로 돌아왔다. 빠리에서는 영국 왕 죠지 6세앞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2차대전시 빠리가 나치에게 점령당했을때 그는 그 당시 애인이던 유태인 니타 라야를 구출하기위해 깐느 별장으로 갔다. 종전 후 그는 나치에 협력했다고해서 도돈느에서 난폭한 군인들에게 하마트면 죽을뻔한 위기를 겪고 빠리로 왔다. 그러나 빠리서도 냉담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사실상 슈발리에는 많은 유태인을 구출했고 도와주었으며 포로들 앞에서만 공연했다는 것이다.

종전이 되었을때 그의 나이는 57살. 연예계에서는 새로운 스타들이 기라성같이 나타났다. 슈발리에는 어떤 전기를 찾지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가 창안해 낸것이 "원맨 쇼"였다. 하루 저녁 공연을 내내 혼자서 꾸며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이것이 주효하여 1947년 미국과 카나다 등지의 순회공연에서 역시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는 자기 목소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감사해야 할 것은 내가 어떤 특정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 이야기 조 반 노래 조의 내 목소리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다른 가수의 그것과 달라 관객을 흥미를 끄나보다"는 것. 사실 어떤 삼류가수도 그보다 더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목청으로 노래하는데 나는 심장으로부터 노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소리의 비결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노래는 20년대의 <나의 루이즈>, 소녀의 슬픈 사연을 담은 <발랭띠느>나 40년대의 <싸바싸바>, <신비갈 광장> 그리고 50년대 <지지>에서의 노래 등이다.

30년대 할리우드에서 돌아온 후 모모(빠리지앙들이 부르는 슈발리에의 애칭)는 <침묵은 금>(르네 클레망 감독) 등에 출연했고, 미국에서 사장 사랑받는 이 프랑스스타는 할리우드를 떠난지 22년만에 다시 미국의 은막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미 그때는 핸섬한 스타가 아니라 흰머리가 날리는 멋쟁이 노신사로서 <하오의 연정>(57년), 지지>, <깡깡>, <화니> 등에 출연했다. 특히 뮤지컬 <지지>에서는 아카데미 명예상을 획득했다. 여기서 그는 20세기 초엽 프랑스의 "벨 에포크"의 나이 지긋이 든 바람둥이 멋쟁이로 나타나 관록을 보여주었다. (출연영화는 모두 40편)

그는 근면했다. 할리우드에서 메리 픽포드의 집에 머물 때 그는 틈만나면 정장하고 잔디에 나가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구두쇠로 이름났다. 나치 점령시 그의 자택에 초대받은 친구들은 식탁에 그가 좋아하는 치즈가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 치즈 배급권을 얻지 못했으며, 암시장에서는 너무 비싸서 안 샀다는 것이다. 백만장자로서는 이해가 안될 정도의 절약가였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익힌 절약의 습성이었다. 그리고 항상 "어머니를 걱정했다"고 그와 공연했던 자네뜨 맥도날드는 말한 일이 있다. 이미 50년에 깐느 별장을 프랑스 작가 작곡가 협회에 기증하고 자신을 마느라 라 꼬께뜨의 자택을 어머니의 애칭인 "라루끄'라고 명명하고 어머니 흉상을 세워놓고 늘 어머니를 추모했다.

80살이 되던 1968년 10월 20일 상젤리제 극장에서 은퇴공연을 가진 뒤 70년에 <모모의 명상록>을 냈다. 1천 9백만달러의 막대한 그의 유산은 만년에 그를 보살펴 준 최후의 여인인 20년대 그의 상대역이었던 여배우 오떼르 메띠에 여사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는 <빠리 마치>의 기고가의 결론처럼 맨손으로 연예계의 정상에까지 올라가 자기 임무에 충실한 채 죽어간 20세기 전형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죽음은 재즈를 키워 온 미국의 암스트롱의 그것과 함께 연예계의 하나의 큰 사건이며 또다른 의미에서는 대중예술의 거인의 시대가 이제 끝나간다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장 꼭토의 말처럼 빠리의 2대 명물의 하나인 슈발리에는 이제 에펠탑만 남았다.

- 출처/불멸의 스타이야기(산영미디어).

▶ 모리스 슈발리에 출연작목록.


1.That's Entertainment, Part II (1976) (archive footage)
2.Monkeys, Go Home! (1967)
3.Panic Button (1964)
4.I'd Rather Be Rich (1964)
5.In Search of the Castaways (1962)
6.Jessica (1962)
7.Fanny (1961)
8.Breath of Scandal, A (1960)
9.Collants noirs, Les (1960) (voice)
10.Pepe (1960)
11.Can-Can (1960)
12.Count Your Blessings (1959)
13.Gigi (1958)
14.Private Little Party for a Few Chums, A (1957) (TV)
15.Love in the Afternoon (1957)
16.Cento anni d'amore (1954)
17.J'avais sept filles (1954)
18.Schlagerparade (1953)
19.Roi, Le (1950)
20.Ma pomme (1950)
21.Silence est d'or, Le (1947)
22.Pieges (1939)
23.Break the News (1938)
24.Avec le sourire (1936)
25.Vagabond bien aime, Le (1936)
26.Beloved Vagabond, The (1936)
27.Folies-Bergere (1936)
28.Folies-Bergere de Paris (1935)
29.Veuve joyeuse, La (1934)
30.Merry Widow, The (1934)
31.Amour guide, L' (1933)
32.Way to Love, The (1933)
33.Bedtime Story, A (1933)
34.Une heure pres de toi (1932)
35.Love Me Tonight (1932)
36.Make Me a Star (1932) (uncredited)
37.One Hour with You (1932)
38.Monkey Business (1931) (uncredited)
39.Smiling Lieutenant, The (1931)
40.Petit cafe, Le (1931)
41.Playboy of Paris, The (1930)
42.Grande mare, La (1930)
43.Big Pond, The (1930)
44.Paramount on Parade (1930)
45.Love Parade, The (1929)
46.Innocents of Paris (1929)
47.Affaire de la rue de Loureine, L' (1923)
48.Par habitude (1923)
49.Gonzague (1922)
50.Mauvais garcon, Le (1922)
51.Une soiree mondaine (1917)
52.Valse renversante, La (1914)
53.Mariee recalcitrante, La (1911)
54.Par habitude (1911)
55.Une mariee qui se fait attendre (1911)
56.Trop credules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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