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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묵상글 (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 지혜 빌려주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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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지혜 빌려주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빠지는 것도 있지만 좋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복잡한 것이 별로 없고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중요한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비슷하게라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중요하지만
돈과 사람.
돈과 사랑,
일과 사랑을 선택해야 할 경우
헷갈림이나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사람과 사랑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 건강이 많이 나빠지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여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사랑하기에 제일 좋은 황금기이고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황금기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에 딱 좋은 이 시기를 허비하거나 낭비하면 안 되는데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낼 것인가?
오늘은 이 점을 독서와 복음에 비춰 나눠볼까 합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것은 오늘 주님께서 하시듯
젊은이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죽은 과부의 외아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육체의 힘으로 치면 젊은이가 저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기가 더 많이 꺾여 있습니다.
나이로 치면 젊은이들이 더 팔팔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더 많이 지쳐 있습니다.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곧 방황하다가 지친 것입니다.
성숙한 인간의 첫 번째 요건이 인생의 확고한 목표를 갖는 것인데
젊은이의 특징 중 하나가 아직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확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인가 하고 가고 저 길인가 하고 가다 보니 지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헤맸는데도 아직 길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은 거지요.
그러므로 이런 그들에게 저도 그 나이에 그랬던 경험을,
그러다가 마침내 길을 찾은 경험을 들려주고,
더 나아가 가야 할 곳을 찾도록 도와줘 일어나 길을 가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젊은이는 방황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실패하는 것이 젊은이이고,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좌절하는 존재가 또한 젊은입니다.
이렇게 좌절감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다가가
한 번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 인생 실패가 진짜 실패이고,
넘어진 것이 실패가 아니라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진짜 인생 실패임을 일깨우며
다시 일어나도록 손잡아 일으켜 세워주며 걸림돌을 디딤돌 삼도록 도와야겠지요.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제자요 아들인 디모테오에게 주는 가르침들입니다.
이제 제가 참으로 해야 할 것도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형제들이 하도록
디모테오에게 사도 바오로가 하듯이 지혜를 빌려주는 것임을 묵상하는 접니다.
그런데 지혜 빌려주는 것은 저 뿐 아니라 여러분도 그러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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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7,16)
오늘 <복음>인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루가 8,40-56)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요한 11,17-44)와 함께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죽은 이를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1열왕 17,17-24)라든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2열왕 4,32-37),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이야기(사도 9,36-43)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간청해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일어나라”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이를 손수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누구의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아들을 잃은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베풀어집니다.
이는 당신 자신이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심, 곧 메시아임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당신의 큰 자비를 드러내줍니다. 곧 율법에 따르면,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을 타는 행위이지만, 율법을 너머서는 그 자비의 힘으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보고 싶은 것은 이 광경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응은 바로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 자신의 반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7,16)
우리는 여기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일”이 어떻게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체험에서 오는 “두려움”은 성서 안에서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카 5,8)라고 했던 것처럼, 무서움과 공포, 거부와 배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요, <또 다른 한 가지>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단지 무서움이나 공포의 감정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내 감사와 찬양, 사랑과 예배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의 체험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전능함 그리고 위대하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왜소함과 무능함 그리고 죄를 발견하면서 오게 되는 회개와, 바로 그분이 자신의 주님임을 깨닫고 믿게 되면서 감사와 찬양, 예배와 사랑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머물 자리를 준비합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사랑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들어오게 하는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이끌고 들어갈 수 있도록 두려움이 그대 마음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지혜 1,28)”(요한서간 강해 9,4)
이처럼, “두려움”이라는 바늘을 통해, “사랑”이라는 실이 꿰매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다른 어떤 것 때문에가 아닌, “하느님을 사랑으로 두려워할 것”(규칙서 72,9)을 말합니다. 곧 “두려움”과 “사랑”이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또한 그는 <규칙서>의 머리말에서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아이들아 와서 듣거라. 하느님 두려워함을 가르쳐 주겠노라”(머리말 12)
오늘,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배우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루카 7,16)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 7,14)
주님!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시듯,
당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누워 잠들어 있는
저를 일으켜 세우소서!
죽음의 길 벗어나 생명의 길 걷게 하소서!
쪼개어 나누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상처도 축복이 되게 하시고, 아픔도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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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때때로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그와 반대로 오히려 두려움을 가질까?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먼저 청원한 것도 아닌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면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3,7)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집중하길 바랍니다. 은총의 결과물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영원한 하느님...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28.31).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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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4년 103위 시성식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례로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시성식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을 하면 교회는 가경자라는 이름으로 조사를 시작합니다. 교회는 면밀한 검토와 표징을 토대로 ‘가경자’를 복자품에 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복자품에 오른 분들에 대해서도 시간을 두고 기도한 후에 비로소 ‘성인품’에 올리게 됩니다. 교회의 시성식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특별한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한번 시성된 성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 않고 공경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시성식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하고, 증언을 들어야 하고,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2014년에 124위 시복식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례로 광화문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황 방한 준비 위원회에서 일하였습니다. 124위의 복자가 성인품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한 치의 오차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해방이 되기 전인 1943년 먼 타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은 그분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려하였지만 북한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였고, 대한민국 공군이 우리의 영공으로 돌아오는 유해를 호위하였습니다. 그분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그분의 흉상은 다른 독립투사들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설치되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던 독립군들의 정신을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따르자는 취지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부는 홍범도 장군이 과거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흉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합니다. 그분이 공산당에 가입했던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인 러시아와 민주주의인 미국은 연합국으로 같은 편이었습니다. 제국주의인 일본,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대한민국이 아직 해방되기 전이었고, 이념으로 세계가 양분되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훈장을 바란 적도 없었고, 흉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같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권에 따라서 훈장을 주었다가 취소한다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흉상을 만들었다가 철거한다면 이 또한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역사 앞에서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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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식당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는 뜻은 그 식당이 맛집이라는 뜻입니다.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뜻은 그 사람 혹은 그를 잃은 사람의 성품과 삶이 좋았다는 뜻입니다.
과부가 외아들의 관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과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켜줄 사람이 없는 과부입니다. 거기다 외아들입니다. 아들이 둘이나 셋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동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과부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살아갈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슬픔과 처참함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얼마 전 사람을 살리려다 하늘로 떠난 해병대원이 떠오릅니다. 외동아들이라고 울부짖던 그 어머니도 떠오릅니다. 그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례식에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과부와 함께 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슬픈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깊고 슬프고 처참한 고통을 주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기쁨과 환희와 희망으로 바꾸십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아들을 과부에게 돌려줍니다.
이제 과부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의지할 수 있습니다.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단 하나를 돌려주심으로서 모든 것을 선물하십니다.
주님의 단 하나의 선물은 그렇게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물이 우리의 모든 것이 희망과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단 하나의 은총이 우리 모든 삶에 빛이 되어주기를 바래봅니다.
반대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외국인이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물론 음료도 주문했습니다.
이내 음식과 음료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외국인은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대!
반대!
종업원은 당황했습니다.
음식이 잘못나온건 아닌지 당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경험만은 점장님은 뒤에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빨대달래~^^
사소한 곳이지만 경험은 빛났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없었다면 사소한 것을 끝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경험들도 그렇게 순간순간 빛날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경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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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제가 된 후, 다른 나라에 참 많이 다녔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도 꽤 많이 다녔고, 한인교회에 강의를 위해 다녀온 적도 많습니다. 또 친구와 가족과 여행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다닌 것을 아는 어떤 분이 제게 가장 기억나는 나라는 어디였냐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도 좋았고, 성모 발현지 순례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곳보다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1등은 안식년 때 신부들과 함께했던 유럽 여행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에 허리를 삐끗했는데, 함께하는 열흘 동안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간 신부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진통제 먹으면서 버텼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잊지 못할 여행이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파도 꾹 참으면서 계획했던 곳을 빠지지 않고 다 다녔고, 그래서인지 그 장소들도 더 기억에 선명하게 남습니다.
사실 우리는 쉽고 편한 것만을 찾습니다. 또 별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지내길 원합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까요? 오히려 강한 인상이 남았던 때는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날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지금 더 힘을 내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편하고 쉬운 것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너무나 힘든 고통과 시련도 자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때 주님께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 내게 잊지 못할 시간을 또 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굳은 믿음을 갖는다면, 포기와 좌절이 아닌 희망을 좇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가 장례 일행을 만나게 됩니다. 특히 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어머니를 보시게 되지요. 이때 “울지 마라.”면서 직접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서 관 속에 있는 이에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시자, 죽은 이가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과부라고 표현된 것을 보면, 이미 남편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이 슬픔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 상태에 계속 머무르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손길을 느끼면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마음 깊이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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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을 사는 데는 딱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기적인 듯 사는 것’, 또는 ‘아무 것도 기적이 아닌 듯 사는 것’(알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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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간미(人間味) 넘치는 예수님 닮기
-인간미 넘치는 사람-
오늘도 밤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나서며 하늘의 별들을 보고 불암산 정상을 확인한후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만세육창”후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맨먼저 찾는 어머니요, 어머니 앞에서 이런저런일을 털어 놓던 일이 생각납니다. 끝기도후는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면 어머니 앞에 털어 놓는 아이처럼 어제 하루 있었던 모든 일을 하느님께 털어 놓으며 시작하는 하루요,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쓰는 강론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밤마다 외딴곳에서의 시간도 이런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戰士)’이다.”
요즘 새롭게 정의한 제 신원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예수님 닮기”
-인간미 넘치는 사람-,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사람, 매력 만점입니다. 사전에서 찾아 봤습니다.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답고 따뜻한 느낌” 이런 이들이 진짜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신적일수록 인간적이고 인간적일수록 신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자 인간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된다는 역설의 진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평지설교 끝날 무렵 복음이 두 소주제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와 “내 말을 실행하여라”였습니다. 참으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듯이 표정이나 언행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비로소 좋은나무에 좋은열매의 사람들임을 말해 주는 복음입니다.
요즘 자주 보는 유투버에서 무수한 공직자들의 표정이나 언행을 보면서 너무 실망하게 됩니다.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그 무슨 직위든 “사람이 먼저 되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지식공부는 뛰어나고 권모술수나 처세술이 뛰어나 높은 직위에 올랐을지 몰라도 사람되는 공부는 정말 엉망진창 수준이하들인 경우 너무 많습니다. 인성이나 품성이 말이 아닙니다. 지성, 감성, 영성도 전무하고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 존중심도 없고 상식이하인 경우 너무 많습니다.
새삼 사람되는 공부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주 하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괴물이나 폐인도 많다고 말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비정非情의 야만시대, 사람이라 하지만 괴물, 악마, 폐인같은 사람도 세상 도처에 널려 있고 영육이 아픈 병든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영육의 건강을 위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살아야 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지옥은 텅비어 있고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반면 평지설교후 예수님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얼마나 멋집니까! 어제 예수님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백인대장의 노예를 치유하시며 그의 믿음에 감탄하셨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불쌍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간미에 매혹된 사람들은 세상 역사상 얼마나 많았는지요!
교회는 싫어도 예수님은 좋아했다는 간디, 복음의 산상설교와 참행복 선언은 종파를 초월해 대부분 영성가들이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 찬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전 불교학의 석학碩學이라 할 수 있는 심도학사를 이끌던 개신교 신자인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지병으로 9월8일 80세에 선종했습니다. 신문에서 읽은 일부 기사를 인용합니다.
-“선생님은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시면서 왜 그리스도교를 떠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너무 좋아.”
어느 햇살 따사로운 오후의 대화였다. 길희성 선생님은 경계없이 종교를 연구하고 불교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셨지만, 당신의 영적 뿌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였다. 종교학자로서 이웃 종교를 탐구하시면서 당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깊고 풍요롭게 하셨다고 해도 좋겠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이웃 종교와 벽없이 소통하셨다고 해도 좋겠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얼마나 아름답고 극적인지요! 그대로 파스카 신비가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일행과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일행 행렬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조우遭遇합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의 대조입니다. 예수님의 개입으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외아들을 잃고 울며 가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이르시고는 관에 손을 대시며 죽은 젊은이에게 명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죽비소리와도 같이 은혜롭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화두로 삼아 사시기 바랍니다. 여기 “일어나라.”는 부활을 뜻하는 말마디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군중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외치는 다음 고백이 진리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둘의 고백 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을 만나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인 우리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수님을 닮은 교회지도자의 자격과 봉사자의 자격을 갖출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요. 비단 교회뿐 아니라 정치, 사회지도자도 이런 자질을 갖추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데가 없어야 하고,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하고,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대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사람들입니다. 비단 교회지도자의 자질일뿐 아니라 이런 정치, 사회지도자의 자질이자 우리 인간이 갖춰야 할 자질이요 품성이겠습니다. 이어지는 봉사작의 자격도 우리 자신의 됨됨이를 살펴보게 합니다.
“봉사자들도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되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역시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훈련되고 습득된 좋은 인품과 자질의 사람들이 경제, 사회, 교육, 정치 등 모든 각 분야에 배치되어 업무를 수행한다면 얼마나 멋진 사회요 국가가 되겠나 생각해 봅니다. 새삼 가정교육, 교회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의 총체적 난국이자 위기의 시대를 개탄하며 지니는 생각입니다. 그나마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은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하시니 위로와 힘을 받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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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곳>
루카 7,11-17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그곳>
홀로라도 쉼 없이
가야할 길 걷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아도
내가 멈춰야할
그곳 있으니
거기에 가엾은 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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