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진다’는 말이 있다.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이 말의 근원으로 지적되는 가부장적 사회에 도전하는 여성을 극화한다.
주인공 노라는 일견 행복한 부인이며 행복한 엄마다.남편 헬머와의 관계도 좋아 보인다.헬머는 노라를 ‘내 종달새’ ‘내 다람쥐’ 등 작고 귀여운 동물의 이름으로 부르며 사랑스런 어린아이처럼 대한다.그는 “너무 돈이 많이 드는 애완동물”이라고 장난스럽게 나무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진정 행복인줄 알았다
노라에게 헬머는 대등한 관계의 배우자라기보다 그녀의 필요,특히 금전적 필요를 해결해주는 윗사람인 것처럼 보인다.그녀는,아빠를 보면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늘 남편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며 농담조로 돈이 많으면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어놓겠다는 말까지 한다.누가 보아도 두사람 사이는 완벽해 보이며 노라는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몇 번이고 되뇐다.
노라의 불행은 '코록스타드'라는 인물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다.그는 헬머가 책임자로 곧 취임할 은행의 직원인데 부정한 행위를 한 혐의로 파면당할 위기에 있다.그가 찾아온 사연은 이렇다.과거에 헬머가 중병으로 다 죽게 된 적이 있었다.담당의사는 남유럽으로 가 요양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고 했고 급전이 필요했던 노라는 크록스타드를 통해 돈을 빌렸다.현재 노라는 틈틈이 돈을 모아 빚을 갚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남편 몰래 친정아버지의 이름으로 차용증을 쓰면서 병석의 아버지 대신 노라가 서명했고 서명한 날짜가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사망한 뒤로 적혀 있었다.크록스타드는,그것은 문서위조 행위인데 현재 자기도 똑같은 사유로 파면당할 위기에 있다고 말한다.그러니 노라 자신의 과오를 봐서라도 남편에게 부탁해 자신을 파면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만약 파면당할 경우 그는 그녀의 문서위조 행위를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노라의 반응은 단순했다.그녀는 자신의 행위가 불법일지 모르나 그것은 순전히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부끄러워하기보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항변한다.법을 위반해 야기되는 사회질서 파괴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그녀의 행위가 중대한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남편이다.
○그러나 나는 한갓 ‘애완동물’
아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헬머는 크록스타드를 파면한다.크록스타드는 노라가 쓴 차용증의 서명위조를 폭로하겠다는 편지를 헬머 앞으로 써 우편함에 넣고 가버린다.우편함의 열쇠는 헬머 혼자만 가지고 있어서 노라는 어쩔줄 몰라한다. 그녀는 남편이 우편함을 열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지연작전을 쓴다.
한편 노라의 친구로 크리스틴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노라에게 사건의 내막을 듣고 크록스타드를 만나 노라의 가정을 파괴하지 말라고 설득한다.사실 두 사람은 한 때 애인 사이였는데 가정 사정으로 인해 크리스틴이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세월이 지나 다시 혼자가 된 그녀는 크록스타드에게 이제라도 한 지붕 아래서 살자고 설득한다.그녀의 간청에 의해 새 삶의 의욕을 얻은 크록스타드는 앞서의 의도를 포기하는 편지를 써서 두 번째로 우편함에 떨어뜨리고 간다.
노라는 남편이 편지를 읽을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잘 안다.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관대하게 용서해 주리라고 기대한다.아니 자신의 행위를 열렬히 칭찬해주기를 꿈꾼 것이다.우편함을 열고 첫번째 편지를 읽은 헬머는 사색이 되어 그녀와 그녀의 친정아버지의 부도덕성을 비난한다.
○8년만에야 진지한 대화
그러면서도 자신은 반드시 크록스타드를 매수하여 이 곤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그리고 그녀와는 남들의 눈이 있으니 함께 살면서 형식상 부부관계를 유지하되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모든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선언한다.두번째로 뜯은 봉투에서 헬머는 크록스타드가 자신의 기도를 포기하는 편지와 동봉한 차용증을 발견한다.그는 기쁨에 겨워 우린 살았다고 외치고 차용증을 찢어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다시 전처럼 지내자고 말한다.기대했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노라는 오히려 남편의 위선과 비열함만을 적나라하게 본 것이다.
집을 나가기 전 노라는 헬머에게 대화를 요청한다.그녀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녀의 어조는 도전적이었다.
“당신은 나를 몰라요.그리고 나는 오늘 저녁에야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었어요”“우리가 결혼한지 8년이 되었어요.그런데 당신과 내가 남편과 아내로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 아세요?”
그녀에게 집은 동등한 인격을 가진 부부의 공간이 아니라 남편과 남성중심 사회가 만든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내 엄마 이전에 인간
자신은 어려서 아버지의 인형이었고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인형에 불과했다는 것이다.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여자의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만류하는 헬머에게 노라는 자신이 엄마나 아내이기 전에 인간이며 현재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그리고 그 일은 자기 스스로밖에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노라는 선구자다.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그녀는 평생을 유복한 가정의 안주인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행을 용감하게 떠났기에 우리는 그녀를 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들은 20세기의 여성해방운동이 노라가 집을 나가면서 문을 닫는 ‘쾅’ 소리에서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