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욥 38,1.8-11; 2코린 5,14-17; 마르 4,35-41
연중 제12주일; 2024.6.23
1.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연중 제12주일인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호소하는 이 말은 그의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면서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처럼 살아가라고 권고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당신을 따라 살 수 있도록 복음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하는 권고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살아가라는 호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열두 제자처럼 예수님의 공생활 3년 동안 사도로 양성받지 않고서도 그 어느 사도에 못지 않게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정확하게 깨달았고 또 그 신비를 살기 위해 열성을 쏟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그의 신앙은,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2-23) 하고 말할 정도였고, 그분의 부활에 대한 그의 신앙도,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하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우선은 우리들 각자의 구원과 완성을 위한 것이고 결국은 이 세상의 구원과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친다고 호소하며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로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함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도 없이 못박히신 이유는 그분이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모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도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부활도 하느님의 권능으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2. 욥기가 전해 주는 하느님의 권능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하느님께서 자연 현상을 움직히시는 당신의 권능을 상기시키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한 말이다.”(욥 38,8-11)
위에 인용해 드린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욥기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은 노아 시대에서부터 바빌론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친 것들입니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욥은 특정한 시대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상상력으로 꾸며낸 가공 인물은 더욱 아닙니다. 욥기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정통한 현자들이 후대의 유다인들을 위해 교훈을 전해 주고자, 자신들이 기대하고 있는 의인의 표상을 종합하여 내세운 일대기입니다. 따라서 욥은 실제로 나타났어야 했다고 보는 이상적 인간형인 동시에 욥기는 시련이 그칠 날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의인화된 역사의 기록입니다.
특히 오늘 욥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당시에 일어난 전 지구적 변화 사태를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 대대로 전해주던 대홍수 설화를 담은 것인데,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의 배후에 하느님께서 계시지만 대홍수 당시에 그 변화가 가장 컸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창세 1,5-6) 그리고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으며,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창세 7,11-12) 사십 일 간의 대홍수가 그친 후에도, “땅에 물이 점점 더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었습니다.”(창세 7,19) 그 이유를 창세기에서는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깊은 바다 속 지각의 지하수맥을 모두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깊은 지각에 흐르는 물은 뜨거운 용암이니, 이 말은 화산 폭발 사태가 대규모로 일어났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화산이 폭발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화산재가 분출됩니다. 그러면 이 재가 공중의 수증기를 모으는 핵이 되어서 큰 비가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땅에 물이 점점 더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었습니다.”(창세 7,19) “물은 산들을 덮고도 열다섯 암마나 더 불어났습니다.”(창세 7,20) '암마'는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균 46cm로 칩니다. 그러니까 물이 산들을 덮고도 열다섯 암마의 높이만큼 더 불어났다는 말은 690cm, 거의 7m 높이만큼 전 지구를 뒤덮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자,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살덩어리들,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땅에서 우글거리는 모든 것,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숨지고”(창세 7,21) 말았는데, 그렇다면 그 많은 비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요?
3. 대홍수로 심판을 자초한 세상의 죄악
하느님께서는 한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시고자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창세 1,6) 하고 말씀하셨고,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갈라놓으신 다음,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습니다.”(창세 1,7-8)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자, 궁창 위에 모아 놓으신 물을 죄다 쏟아지게 하시고, 바다 속 지각 안에 있던 지하수맥까지 몽땅 터트리셔서 지구 안팎에 조성해 모아 놓으신 물을 죄다 심판의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홍수 때에 쏟아졌던 그 많은 물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답이 오늘 욥이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 전 지구적인 조산운동, 조륙운동, 지각변동이 산과 바다, 모든 대륙에서 일어나서 바다는 더 깊게, 산은 더 높게 만드시어 물을 가두셨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의 고산 지대에서 발견되는 조개류 화석이라든지,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북극 지방이나 시베리아 지방에서 대홍수 직후 갑자기 기후가 추워져서 얼어 죽은 맘모스 떼의 뱃속에서 열대 지방의 식물성 음식물이 발견되는 것 등이 그 증거입니다.
대홍수 이전에는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창세 2,5) 그렇지만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기 때문에”(창세 2,6)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대홍수 이전에는 하늘 위에 떠돌던 물이 지구의 덮개처럼 작용하여 해로운 햇볕을 막아주는 한편 따뜻한 온기를 전달해 주었으므로 지구 상 어디에서나 고른 날씨가 가능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어도 지구 전체에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카인의 후예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어내신 것을 후회하실 만큼 죄를 저질러서 심판을 자초하였습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아담을 유혹하던 그 수법으로 카인의 후예들을 타락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에 물덮개가 사라지자 보호막이 없어진 지구 상의 날씨가 사나워졌고, 그래서 생겨난 극지방의 추위와 적도지방의 더위가 해마다 큰 비바람을 되풀이해서 불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욥기가 전해 주는 바, 자연 현상을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권능인 동시에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사람들의 죄악을 못 본 체 하지 않습니다.
4. 세상의 죄악과 하느님의 말씀
대홍수 이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죄를 저지르지 말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라고 축복을 내려 주셨지만, 노아의 후손 가운데에서도 니므롯 같은 자들은 또 다시 하느님께 거역할 뜻을 세우고 신아르 벌판에다 왕국을 건설하고는 그 중심에다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고 바벨탑을 세웠습니다.(창세 10,8-10; 11,2) 당신께 맞서려고 세운 바벨탑을 못마땅하게 보신 하느님께서 언어를 흩트려 놓으시자 바벨탑을 세우던 니므롯의 후예들이 온 세상에 퍼졌고, 이들이 자행하는 우상 숭배 풍조 속에서 불러내신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에서도 이 우상 숭배 풍조를 흉내내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신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어도 듣자마자 곧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듣고 나서 머리로는 알아듣는데 마음으로 깨닫는 바가 없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나서도 듣기 이전의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열매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꽤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세태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9)로 가르치신 후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처럼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제자들이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배를 타고 가시다가 돌풍을 만나셨는데, 배에 물이 가득 차도록 ‘의도적으로’ 주무셨던 것 같습니다. 그 옛날에 선실이 따로 마련되지 않은 나룻배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찰 지경인데 비를 맞으면서 잠을 잔다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이 당신을 깨우자, 그제서야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를 잠재우시는 명령을 말씀 한 마디로 내리셨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바람과 호수를 다스리시는 힘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뜻은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그분의 권능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죄를 짓게 부추기는 마귀의 유혹과, 이 유혹의 미끼가 될 수 있는 욕심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 후에라야 하느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서 많은 열매를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5. 권능을 지니신 말씀에 의지하라
‘의도적으로’ 바람과 호수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려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먹고 살기 바빠서 눈앞의 현실만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구경만 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감동이라도 주는가, 아니면 시간이나 돈에 손해만 보게 만드는가 등을 재빠른 두뇌회전으로 계산을 한 후 타산적으로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지도자라 하고, 이들의 행동을 리더십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바꾸기 위해서 무언가 일을 벌립니다. 그리고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과, 구경만 하는 사람들에게 행동동기를 부여하고 격려해서 각자가 받고 있는 소명대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오늘 기적도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말씀에 의지하여 세상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징표를 외면하려는 이기심의 바람을 잠재우십시오. 마음의 호수에서 출렁이는 욕심의 돌풍을 말씀으로 가라앉히십시오. 그리고 고요한 미풍으로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느끼는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하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말고 거룩한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닮으십시오. 그 옛날 바다를 가두어 풀과 나무가 돋아나는 땅에서 우리를 살게 하신 하느님, 구름으로 땅을 덮어 우리를 생기있게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다그치십니다. 이 사랑 안에 자연 현상을 움직이시어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