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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맨밑)
특이한 행동과 화려하게 수놓인 망토가 유독 눈에 띄었던 “마초 맨”랜디 새비지는 80~90년대 WWE를 대표했던 슈퍼스타들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선수였다. 엘리자베스를 늘 대동한 채 당당한 위풍으로 링에 올라섰던 새비지는 헐크 호건, “라우디” 로디 파이퍼, 안드레 더 자이언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큰 인기를 누렸다. 다분히 의도적인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던지는 “Ohhh, yeeeeaaahhh”나 “Dig it!”등의 한마디만으로도 그는 어떤 관중이든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랬던 새비지가 이제 그의 목소리를 다른 곳에 사용하려 한다. 바로 랩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서 그는 지난 10월, 첫 힙-합 CD인 ‘Be a Man’을 발표하고 새로운 인생의 서막을 열었다.
새비지의 이전 커리어, 즉 레슬러로서의 활동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으며, 마치 천직처럼 보였다. 50~60년대를 풍미했던 안젤로 포포(Angelo Poffo)의 아들인 그는 레슬링의 비즈니스 세계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은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많은 레슬러들이 기회를 잡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왔죠. 덕분에 저는 TV에 출연했던 많은 선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95%는 제게 정말 잘해주었죠. 악수도 해주고 말이죠. 어린 시절에 저는 스타들 틈에서 자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초맨의 말이다.
고교 시절, 랜디 포포는 풋볼, 농구, 야구를 했었다. 사실, 그는 야구 선수가 될 것처럼 보였다. 졸업 후 그는 곧장 마이너리그에 진출, 세인트 루이스 캐디널스, 신시네티 레즈,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팜 리그에서 선수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그러나 몸 속에서 끓고 있던 링에 대한 열망은 결국 그를 레슬링 세계로 불러들였다. 이미 아버지가 그 바닥 최고의 스타로 자리 잡고 있던 터라 그의 도전은 어렵지 않았다. 70년대 중반에 프로에 데뷔한 그는 레슬러이자 프로모터였던 올 앤더슨(Ole Anderson)이 던진 “저 녀석은 마치 야만인(savage)처럼 레슬링을 하는군”이라는 한마디 덕분에 그 유명한 ‘랜디 새비지’라는 링네임(ring name)을 갖게 된다.
새비지는 디트로이트, 텍사스 등의 무대를 전전하며 활동했으며 후에는 켄터키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던 단체인 국제 챔피언십 레슬링(ICW)에 합류하기도 했다. 멤피스에서 제리 제럿(Jerry Jarrett)과의 오랜 갈등 관계를 마친 새비지는 아버지와 동생, “leaping” 레니 포포(Lanny Poffo : WWE에서의 링네임은 Genius)와 함께 프로모션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랜디의 인생이 바뀐 것은 바로 전화 한 통화 덕분이었다.
“빈스 맥맨(Vince McMahon)이 제게 말했죠. 기회를 보장해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의 저를 만들어주었죠.”그가 말했다.
화려함을 추구했던 새비지는 당시 규모를 확장해가던, 그리고 결국에는 세계 시장을 주도 하는 대형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단체로 거듭났던 WWE에 적격이었다. 1985년 6월 17일, 뉴욕 퍼킵시(poughkeepsie)에서 치러진 쇼를 통해 마초맨 랜디 새비지는 마침내 WWE 선수로서 팬들에게 첫 선을 보였다. 팬들은 그의 독특한 인터뷰 스타일과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고난도 공중 기술에 이내 사로잡혔고, 그의 주가는 상승하였다.
1986년 초, 그는 보스턴 가든에서 티토 산태나(Tito Santana)로부터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을 빼앗았으며, 이는 1년 넘게 지속되었다. “제가 WWE로 이적한 후 가진 첫 타이틀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작이었죠. 저는 신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마초맨이 진정으로 그 진가를 인정받은 것은 바로 그가 챔피언십을 빼앗겼던 경기였다. 디트로이트 폰티악 실버돔에서 치러졌던 레슬매니아 III에서 새비지와 릭키‘The Dragon’스팀보트(Ricky Steamboat)는 말 그대로 역사에 남을 명 승부를 연출해냈다.
“제 생애 최고의 경기였습니다. 93,000명이 넘는 팬들 앞을 지날 때는 정말 황홀했습니다. 제 생애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죠. 입장권이 매진되었고 실내에서 치러진 공연 중에선 최고 기록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리키 스팀보트 같은 뛰어난 운동신경을 지닌 선수와 기량을 겨루었습니다. 그와의 경기는 제 기량을 세계에 알려주었습니다. 정말로 의미심장한 기회였죠.”
비록 그는 타이틀을 빼앗겼지만 대회를 통해 새비지는 더 큰 레벨에 올라설 수 있었다. 1987년 말, 그의 인기를 능가하는 자는 오로지 챔피언, 헐크 호건 뿐이었다.
마초맨에게 최고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88년 초, 호건이 타이틀을 빼앗긴 후였다. 그리고 새비지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치러진 레슬매니아 IV에서 네 차례의 토너먼트 경기를 모두 이기고 왕좌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는 1년내내 최고의 자리를 지켜갔다.
“정말 즐거웠던 나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부터 저는 그 섭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리더의 책임이었죠. 그 단체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즉, 인기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전적으로 리더의 책임이었습니다.”그가 말했다.
새비지는 호건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챔피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로부터 타이틀을 빼앗아간 선수도 바로 호건이었다. 88년에 힘을 합치며 ‘Mega Powers’를 결성했으나, 이것이 해체되면서 레슬매니아 V에서 맞붙게 되었던 것이다. 타이틀은 빼앗겼지만, 마초맨은 계속해서 WWE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그 와중에는 지독한‘마초 킹(Macho King)’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레슬매니아 VII에서는 엘리자베스와 극적으로 재결합하여 팬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소위‘신세대 스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반, 새비지의 플레이를 볼 기회는 줄어들었다. (레슬매니아 VII에서 그는 워리어와 패자가 링을 떠나는‘career-ending match’를 치렀고, 여기서 패하면서 각본상 한동안 경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나운서로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특히 ‘Raw’의 초대 중계 팀의 일원으로 활동한 활동을 보였다. 그런 새비지가 다시 링에 복귀한 것은 92년, 그는 릭 플레어와 생애 두 번째 타이틀을 놓고 결전을 펼쳤다.
하지만 새비지와 WWE의 인연은 계속되지 않았다. 94년 말, 그는 WWE를 떠나 구 WCW로 이적하였다. 비록 마초맨은 여러 차례 대 스타의 자리에 올라설 기회를 잡고 또 WCW 세계 챔피언 자리를 노릴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저는 빈스 밑에서 10년간 레슬링을 해오며 레슬링 단체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WCW로 이적해 5년간 뛰었지요. 그러나 WCW가 돌아가는 모습은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빈스 맥맨이 있을 때와는 전혀 달랐죠. 빈스는 리더였으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WCW는 모두가 따로 날았죠. 인디언은 없고 모두가 추장이었습니다. 혼란, 그 자체였죠” 마초맨이 말했다.
최근의 새비지는 반-은퇴 상태이다. 그는 독립 단체에서도 뛰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이뤄왔던 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새비지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2002년 블록버스터였던 스파이더 맨(Spider-Man)에서 레슬러 본소우 맥그로우 역할로 출연했던 것도 그 중 하나다.
“샘 레이미(Sam Raimi) 감독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로 유쾌한 일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일한다기보다는 그와 함께 일한다는 개념이었죠”
하지만 2003년 초, 새비지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바로 전 아내, 엘리자베스 휼렛의 사망 소식이었다. 비록 둘은 이혼해서 10년이 넘도록 만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레슬링 팬들의 마음 속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특별한 관계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친구에게 전해들었지요. 저는 그녀가 정말 안타까웠죠. 우리는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서로의 길을 가기로 합의했으니까요”
엘리자베스의 사망 후 마초맨은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것은 Big 3 레코드社 회장인 빌 에드워즈(Bill Edwards)로부터 랩 앨범을 내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가 바로 첫 앨범, ‘Be a Man’이었던 것이다.
“저는 늘 음악을 사랑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에 영향을 받게 되지요. 저도 그런 음악을 만들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치 빈스가 제게 뉴욕에 와서 레슬링을 하고, 제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주었듯, 저는 다시 한번 음악 세계를 통해 저를 표출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즘에는 잘 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자서전을 쓰고 있지만, 저는 책을 쓸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저는 그 책 대신 첫 CD로 저를 말하고 싶습니다.”
힙합 아티스트 DJ 쿨(DJ Kool)이 피쳐링한 이 앨범에는 ‘Mr. Perfect’커트 헤닉에 대한 추모곡인 ‘My Perfect Friend’도 담겨있다. 그가 이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바로 “왜 랩이냐”는 것이었다. (사족 : 타이틀과 제목이 같은‘Be a Man’라는 곡은 호건을 향한 곡이라고...)
“왜냐고요? 저는 노래를 못하니까요!(웃음) 만약 제가 노래를 부른다면 그건 아마 개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 목소리가 좀 그렇잖아요. 비록 제가 세계 최고의 랩퍼는 아니지만 제 레슬링 팬들과 힙합을 사랑하는 또 다른 팬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통 랩퍼가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랜디 새비지가 레슬러로서 늘 해왔던 일이다. 정통도 아니고, 스타로서 기대주에 올랐던 인물은 아니지만, 그는 늘 팬들을 놀라게 하고 열광하게 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새로이 선택한 분야에서 그것을 이어가고자 한다.
광란의 마초(Macho Madness)는 살아있다.
첫댓글 개인적으로 무지 좋아했죠. 이름이 멋있어서...ㅋㅋ 글구 결정적으로 '슈퍼스타'에서 개목걸이가 멋있죠~
오~~~~~예!
저의 훼이버릿 플레이어.... 호건, 워리어 등과 라이벌리를 형성했던 그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는... 고인이된 엘리자베스에게 링에서 청혼하던 모습.. 메가 파워스(?) 시절.. 레슬매니아에서 워리어에게 참패하던 모습 등.. 아 그립다.
엘리자베스.........
오오오오오오 이예에아~
극강의 호흡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