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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인간은 참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저 하늘위에 떠있는 별에도 이름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에도 우리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은 참으로 존재의 거울 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그의 존재를 새기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지만 70여년전, 우리의 선조들께서 자신들의 나라와 자신의 이름 석자를 마음껏 쓸 수 없고 붙일 수 없었던 슬픈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름이 없어진 조국에서 독립이란 이름을 믿고 스러져간 뜨거운 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 암살의 이야기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김구의 임시정부와 김원봉의 의열단에 대한 감시가 더욱더 심해지던 1933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의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 분)은 주석 김구의 부탁을 받아, 조선 주둔군 대장 카와구치와 총독부에서 선정한 최고의 친일파 강인국의 암살 계획을 실천할 3명의 투사들을 데리고 가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들은 한국 독립군 출신의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출신인 추상옥(조진웅 분), 폭탄 전문가 황덕삼(최덕문 분)입니다. 서로 각각 무장투쟁의 대부약산 김원봉을 만나기 위해서 상하이에 있는 김원봉을 만나러갑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상하이에서 300불만 주면 누구라도 죽여준다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과 그의 동료인 영감(오달수 분)에게 3000불을 줄테니 그 3인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이후 배를 타고 도착하게 된 경성에서 그들은 아네모네라는 술집에서 독립군들의 연락책과 자금책을 담당하고 있는 마담(김해숙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인국과 카와구치 사령관이 사돈관계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들은 이동 경로를 따라서 그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지만, 일본 경찰에게 전해지는 정보와 제3자의 개입으로 인해 그들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지게 됩니다. 과연 독립운동가 3인은 과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한명인 안옥윤은 인물은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수천여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생애의 대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일명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열사의 생애를 잠깐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월간개벽 9월호에서
(그림 : 남자현 열사)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5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중략)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부토(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참조
또 한 인물을 더 소개하자면 윤희순 의사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의병을 돕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독려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모든 집안이 의병활동에 뛰어들어 활동했던 명문가의 안주인이었습니다.
그녀로 인해 한국 여성독립운동사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의 이야기입니다.
"윤희순 의사는 79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집안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도 독립운동을 했고, 손자분이 얼마 전에 작고한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이었어요. 집안의 4대가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오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입니다. 이 부분을 연구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가 과연 조력자에 불과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단지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으리라는 기존의 추측은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네모네의 마담과 같이 기방과 술집의 기녀와 마담들이 독립 운동가들을 숨겨주거나 연락하고 자금책으로의 역할을 매우 활발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녀들의 독립에의 의지는 남녀의 구분을 따질 필요가 없이 모두가 뜨거운 영웅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광복이 되기 전까지 조선 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천명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 일본을 넘나들며 독립투쟁을 해왔던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의 대의에는 구분이 없음을 일찍이 일러 주셨습니다.
2편 53장 남녀동권 시대를 열어 주심
3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 구별 없이 쓰리라.
4앞세상에는 남녀가 모두 대장부(大丈夫)요, 대장부(大丈婦)이니라.
독립의 순간까지 수천명의 남자현 열사들께서 상제님 말씀대로 대장부(大丈婦)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싸워 왔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림 신흥무관학교 영농교육)
그리고 영화 암살에게는 다양한 무장 독립 단체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단체를 관통하는 뿌리의 지점에 있는 단체가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무장투쟁기지로서 3500여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곳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갖은 역경을 뚫고 1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길러내면서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곳이 배출한 인재들은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독립전쟁에서 기간 요원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조선혁명군·의열단·한국독립군·고려혁명군·한국광복군 등 독립전선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설립이후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주변지역의 가뭄 때문에 경영이 힘든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촌락을 돌며 구걸해나가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해 나간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속사포의 현실적인 대사는 이러한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생기게 된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서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라는 그의 혈서의 내용과 함께 작전이 끝나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적을 향한 응사를 놓은 그의 정신은 신흥무관학교라는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독립군 이야기를 품게 된 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책 때문이다. 나 같은 범인들은 갖지 못한 어떤 위대함이 느껴졌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그들도 평범한 사람이었겠지만 결단이나 행동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걸 영화에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신흥무관학교라는 하나의 시금석이 독립운동가라는 수많은 금맥들을 찾아 그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항일 투쟁이 모이고 모여 결국 광복이라는 시대의 열매로 다가오게 된 것일 것입니다.
다음은 친일파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친하다라는 표현조차도 아깝다고 해서 종일파라고 불리어 지기도 합니다.
을사오적으로서 작위를 받은 대표적 5인과 76인의 친일파 들은 한 사람당 현재의 가치로 300억원이 넘는 부동산을 축재하기도 했고(이완용), 심지어 또 다른 친일파의 후손(송병준)의 후손들은 자기 조상의 임지를 찾겠다며 소송을 걸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강인국의 실제 모델인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경우에는 조선경비행기공업사를 설립하여 일제의 전쟁물자 지원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밀정인 ‘그’의 경우에는 젊어서부터 항일 활동을 해왔던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는 이후에 암살에 대한 정보를 일본 헌병에게 넘겨 수많은 암살 활동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는 당시 30년대와 40년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변절 지식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결국 1949년 반민특위가 유야무야 되고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속에서 그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독립이 올지 몰랐다고!’
(그림 : 친일파 박흥식)
그리고 하와이 피스톨이 안옥윤과 이야기 나누었던 살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이것은 친일파로 변절한 아버지를 죽이는 모임을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실제 존재했는지 그 근거를 찾기는 힘듭니다 하지만만. 이완용의 아들로서 1909년 경술 국치이후에 부끄러움에 자결한 이승구, 박제순의 손자로서 광복군에 들어가 활동했던 박승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제의 자작작위를 받았으나 군인으로서 평생 그것을 부끄러워 하며 살았던 이종찬 장군과 같은 사람이 있었음을 통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과오를 자신의 과오인 것처럼 부끄러워하며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암살이란 영화를 보고서 어떤 이는 한인 애국단과 의열단이 테러 단체 즉 범죄 단체였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안에서 그들의 활동이 단순한 테러가 아닌 강력한 정치적 어필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사가 있습니다. 속사포와 약산 김원봉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민간인은 희생당하면 안되겠지요?’
‘안되네, 총알에도 눈이 있다고 생각하자고’
국가도 없고 정부도 없고 군대도 없는 당시의 현실에서 강력한 독립에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했던 정치적 행위였으며 생명을 다 바친 투쟁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안옥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친일파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
저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상에서 언급되는 청산리 대첩의 승리에 대한 복수로 36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간도 참변, 그리고 세손가락을 펴며 자신이 300명이나 되는 조선인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제 강점기가 결코 잊어서는 않되는 시대의 비극이었음을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 간도 참변 자료사진)
4편 116장 장수 해원 공사
4이 다음에 때가 되어 우리가 일을 할 때는 죽었다 말고 혼이라도 애를 써라. 그리하면 네 원을 풀어 주마.” 하시니라.
5이에 장수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드니 다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죽었다 해도 넌들 몸뚱이에 쓸개가 없을 것이냐?
6네 부하들이 다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겨 한을 품지 말아라.” 하시니 장수가 도로 벌떡 드러눕거늘 땅을 다시 다독거려서 덮어 주시니라. (증산도 도전)
우리가 밟고 있는 이 한반도는 수없이 많은 무명지사(無名志士)들에 의해서 지켜진 땅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전장에 내 던진 각오로 이 뜨거운 역사의 땅을 지켜왔습니다. 상제님께서는 그 희생의 정신과 가치를 다독여 주심으로서 그들의 원을 풀어주셨습니다. 이렇게 한민족의 역사는 수십 수백만의 무명(無名)의 독립열사들이 이루어온 무명(武名)으로 인해 다시 광복의 길을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희생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어둠을 불사르는 광명의 총알이었습니다. 혼돈의 시대 속에서 생명의 불꽃으로 새 시대를 연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잊혀져간 이름들이 있습니다. 바로 증산도의 전신인 보천교와 환단고기입니다. 독립투사들이 이 조국을 위해 바친 뜨거운 열혈의 배경에는 우리 참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존재 했던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보천교와 같은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찾는 곳이 있었습니다. 뜨거운 청춘의 열정을 바쳐 선물한 세상의 가치를 과연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살고 있을까요? 언젠가는 보천교 존재와 환단고기의 참역사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영화가 등장하길 기대해봅니다.
P.S 오죽했으면 광복운동의 두 거두 김구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이 보천교가 있는 정읍에 와서 김구선생은 대한민국은 정읍에 신세를 졌다고 하며 독립운동의 커다란 중심지였으며 ,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정부 수립을 주장해야 했던 중요한 곳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보이지 않은 막강한 광복운동의 중심이었던곳 이곳을 해방이후 완전 역사말살로 그 정신이 사라졌던 곳이었을까요 ?
“16년전 임무, 지금 수행합니다”-(안옥윤)
역사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
첫댓글 남자현 열사는 대범하고 기지가 뛰어난 분....집으로 일본군이 들이닥치자 다른 사람들은 당황하여 경황없을 때 가지를 총같이 일본군 등뒤에 대고 꼼짝 못하게 했다는 일화를 보면 비범하다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