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째 날 – 석림에서 대리까지
(2014. 6. 30 : 곤명-석림-대리)
▲ 입구의 석림호 전경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오늘부터 본격적인 운남여행이 시작된다.
그런데 전체 일정 중에서 오늘이 이동거리가 가장 멀다.
이 곤명에서 동남쪽으로 126km 내려가 석림(石林)을 보고, 다시 돌아와 서북쪽으로 400km를 올라가 따리(大理)까지 가야한다.
이동거리가 약 650km이니, 부산에서 서울까지 갔다가 다시 대전까지 내려오는 거리보다도 더 멀다.
몇 시간이 걸릴지는 아예 계산할 필요 없이 하루 종일 버스를 탄다고 마음을 비우자.
하기야 일주일 간 미국 서부관광을 할 때는 하루에 3개 주를 통과하고, 시간 변경선까지 넘어서며 종일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운남 면적이 한반도의 1.7배라니까 미국이든 중국이든 대륙의 스케일은 좁은 나라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사실 상상하기 벅차다.
6시에 기상해서 7시 30분에 출발, 2시간쯤 걸려 석림에 도착했다.
운남 제일의 관광지답게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이 제법 많았고, 매표소를 통과하니 이곳이 곤명시 석림 이족자치현(石林 彝族自治县)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이족 여인들이 그들의 전통의상을 입고 핸드마이크를 들고 가이드도 하고 더러는 사진모델도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귀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들이 쓴 모자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전동차를 타고내리는 복잡한 입구에서 어느 순간 아리따운 이족 처녀를 보고 넋이 나가 손에 카메라가 들려있는데도 찍는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석림을 떠날 때까지 많은 이족 여인들을 보았지만 미모와 기품이 그만큼 출중한 아가씨는 없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은은하게 수놓인 하얀 전통의상에 자줏빛 조끼를 받쳐 입은 그 아가씨가 쓰고 있는 모자 때문인 것 같았다.
칠채화관(七彩花冠)이라지만 지극히 단순한 절제미와 뛰어난 색채감의 조화가 느껴지고,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 들은 ‘아스마 전설’이 오버랩 되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든 모양이다.
모자에 꽂은 삼각형의 뿔장식은 2개가 다 있으면 미혼임을 말하고 하나가 없으면 청혼을 한 남자에게 수락의 의미로 떼어준 것이고, 뿔이 없으면 기혼여성이라도 한다.
그런데 석림 안에서는 관광객도 전통의상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고 있으니 구별하기가 아주 혼동스럽다.
석림 안을 운행하는 전동차는 주로 평상복을 입은 샤니족 여인들이 운전한다고 하는데, 이 또한 구별이 어렵다.
샤니족은 55개의 소수민족에는 속하지 않고 가장 숫적으로 많은 이족의 한 분파 민족이라고 하니 결국 같은 민족이라 혼용되어 쓰이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석림은 2억 7천만 년 전 해양의 융기와 지각변동을 거치면서 형성된 석회암질이 오랜 세월 다시 빗물이나 지하수의 침식을 받아서 신비한 경치를 지표에 드러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르스트 지형이라 한다.
중국 4대 자연경관중의 하나로 꼽히며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선정된 곳인 이 석림은 현재 대석림 • 소석림 • 내고석림 정도만 개발되어 있으며,
이는 전체 석림 면적의 약 20% 정도로 나머지는 미개발 상태로 남아있단다.
그런데 작년까지만 해도 입장권을 사면 세 곳을 다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내고석림은 분리해서 따로 입장권을 사야한다고 하니 중국인의 상술과 배짱이 무섭게 다가온다.
우리가 만난 첫 석림은 입구인 석림호에 발을 담그고 있는 석림이었는데,
멀어서 그런지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모습이 물 위에 펼쳐놓은 병풍 같다.
원래 석림에는 물이 없었는데 주은래(또는 등소평) 수상이 방문하여 산은 있는데 물은 왜 없는가라고 하여 물을 채웠다고 하니, 석림의 호수는 모두 인공호수란 말인가.
호수가 끝나는 지점에 ‘세계자연유산’이란 글씨가 새겨진 광장이 나왔고, 석림안내판 앞에는 ‘山石冠天下, 風情醉國人’(산석은 천하의 으뜸이요, 풍정은 온 국민을 취하게 한다.)란 글씨가 눈길을 끈다.
그 앞에서 가이드의 관람 요령과 집합 시간 등의 설명을 듣고 각자 자유롭게 대석림으로 갔다.
대석림의 관문은 이족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전통의상을 빌려주기도 하고 또 직접 사진모델을 하고 있는 꽤 널찍한 광장이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멀찍이서 사진만 몇 컷 찍고 지나쳤다.
조금 더 들어가니 ‘石林’이라 쓴 큰 바위가 대문처럼 버티고 있고,
양옆의 바위들에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문구들이 그야말로 즐비하다.
예를 들면 ‘磊落萬古’(뇌락만고:만고에 거리낌없는 신선같은 모습) •
‘頂天立地’(정천입지:하늘의 이마에 땅이 서있는 듯한 우뚝한 모습)’ •
‘采雲深處’(채운심처:채운 서린 깊은 산속) •
‘頭角崢嶸’(두각쟁영:높고 가파르게 다투어 솟아있다)’ 같은 말이 해석이 바른지 자신이 없지만,
그들이 느낀 석림의 이미지인 것 같다.
뒤쪽 제일 높아 보이는 곳에 정자가 보여 석림 사이 수많은 갈림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사방이 그야말로 돌숲을 이루고 있는, 좋은 전망을 가진 뷰포인트였다.
‘망봉(望峰)’이란 현판을 단 정자는 좁은 공간에 사람이 많아 얼른 사진만 찍고 다른 방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로는 그야말로 돌 정글 속에 갇혀 해매며 기기묘묘한 형상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특히 바다 속에서 몇 번이나 융기할 때마다의 수면의 흔적이었다는 수평으로 난 금이나 18세기에 찾아온 지진으로 훼손되거나 바위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바위들이 많아 눈이 즐겁다.
자연 재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새로운 풍정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니,
인생만 무상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란 없는가 보다.
대석림을 보고난 우리는 전동차를 타고 대석림 바깥쪽으로 배림로(环林路:Ring Road)를 따라
소석림으로 이동했다.
사진으로 찍어놓은 ‘석림입체안내도’를 보면,
개발되지 않은 만년영지(萬年灵芝), 이자원천(李子园箐), 보초산(步肖山)을 멀리 바라보며 전동차가 한 바퀴 돈 것인데, 중간쯤에서 특히 일망무제의 석림이 아득히 펼쳐져있어 석림의 규모가 대단함을 느낀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석림풍경명승구 분포도’를 보면, 크게 석림풍경구, 내고석림(黑松岩)풍경구, 대첩수(大疊水)풍경구, 장호(長湖)풍경구, 월호(月湖)풍경구, 규산(圭山)국가삼림공원 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중 석림풍경구는 다시 대석림•소석림•만년영지•이자원천•보초산의 다섯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규모가 짐작조차 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하다.
실제로 길을 잃은 서양 관광객 하나가 실종 된지 한 달 만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사진감상법-“카메라 앞의 세 여인”(포즈의 발달사) / 신분조회 결과 : 요정•왕비•공주? ㅋㅋ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소석림을 둘러보았다.
대석림의 거칠고 무질서해 보이던 남성적 이미지에 비해 소석림은 돌들이 오밀조밀 다소곳하게 각각 제자리에 앉아있는, 대저택의 정원 같은 단아한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역시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는데, 마지막 느낌은 너무 공부를 하지 않고 왔다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중국속담이 있지만, 여기는 정말 가이드가 필요한 곳이다. ‘연화봉(蓮花峰)', '검봉지(劍峰池)', 코끼리 바위(象踞石台)', '봉황소시(鳳凰梳翅)', 천균일발(千鈞一髮), '쌍조도식(雙鳥渡食)' ‘극협통인(極狹通人)’ 등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역시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곳의 상징인 ‘아시마 바위’조차도 나중에 사진으로만 보았으니, 완전히 온돈 주고 반 머리 깎은 꼴이다.
특히 ‘아시마 바위’는 사진으로는 찍었지만, 현장에서는 그게 정말 이족(彛族)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이 깃든 아시마의 모습인 줄 몰랐으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 미스 샤니(미모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공동 우승이라지, 아마?)
아시마 이야기는 석림의 바위에 전해지는 여러 전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설화다.
이족 샤니인에게 구전되는 이 장편서사시는 대충 이러하다.
옛날 가난했지만 예쁘고 총명한 아가씨 아시마(阿詩瑪)는 건장하고 용기있는 청년 아헤이(阿黑)와 사랑을 하였다.
족장의 아들이 아시마를 사모하여 청혼을 하였지만 아시마는 정해둔 사람이 있다고 거절을 하였다.
어느 날 아헤이가 양떼를 몰고 멀리 나갔을 때 족장이 다시 아시마를 설득하였으나 역시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헤이가 달려와서 아시마를 구출하여 함께 강을 건널 때 족장이 둑을 터뜨려 아헤이는 아시마를 놓치게 되고 결국 이 호숫가에서 바위로 변한 아시마를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석림은 아시마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하고, 그 후 아시마는 아가씨들을 부르는 총칭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오늘날 ‘一詩, 一影, 一歌, 一節’로 통칭되는, 즉 이족 샤니인들의 서사시 '아시마', 중국 최초의 총천연색 스트레오 영화 '아시마', 샤니가곡(撒尼歌曲) '먼곳에서 온 손님은 남아 주세요(遠方的客人 請您留下來)',
석림 횃불 축제인 '석림화파절(石林火把節)'이 되어,
한 소수민족을 넘어 운남문화를 대표하며 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석림 입구의 석림원미식성(石林苑美食城)이란 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여 걸판지게 식사를 하고 나오니 도로 건너편에도 잘 생긴 석림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있다면 석림의 다른 풍경구를 둘러보기로 하고 버스에 오르니 시간은 12시 20분이었다.
곤명으로 돌아오는 창밖 풍경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기름진 황토의 밭들과 산 위의 열대성 나무였다.
이름도 모르는 그 나무는 전봇대 같은 긴 줄기가 하늘로 뻗어 끝부분에만 가지와 잎을 달고 있는 모습이 마치 키 큰 싱거운 사람들이 모여서서 낄낄거리며 무슨 작당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누가 하늘금을 단조롭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설치해놓은 작품 같아 자꾸 눈길이 갔다.
정체구간인 곤명 시를 벗어나 대리로 가는 곤서고속공로(昆瑞高速公路)를 5시간 남짓 가는 동안 우기로 접어드는 운남의 날씨를 만끽했다.
스콜성 소나기를 3번 만났고, 고도가 높아지면서 자외선도 강해져 휴게소에 내렸을 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햇살이 강하게 내려쬐였고, 운남다운 눈부신 구름이 자주 나타나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날씨였다.
특히 산악지역을 통과할 때 내린 빗줄기는 위력이 대단하여 짙은 안개 속에 순식간에 불어난 붉은 황토물이 도로를 덮쳐 차를 쩔쩔 매게 만들었다.
이 악조건 속에서도 중화권 여가수의 노래들과 여행길잡이 정대장의 세련된 DJ 솜씨, 특히 등려군의 감미로운 노래와 자잘한 에피소드가 오래도록 버스 안에 긴 여운을 남겼다.
이처럼, 대중음악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은 문화의 핵심부에서 삶의 품격을 고양시키고, 지금은 여행의 품격을 훈훈하게 이끌어올리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에 취하면서도 사이사이 산간마을의 이국적 풍경이 생각 외로 깨끗하고 집들이 남루해 보이지 않아 자꾸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계속 고도를 높여가는 산악지대인 줄만 알았는데, 이정표에 하장(下庄)이 나타나자 산들이 멀리 뒤로 물러서고 산 위로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눈부시게 빛났다.
드넓은 고원에는 끝없이 펼쳐진 담배밭의 초록 물결이 싱그럽고, 그 너머 집들은 군데군데 낮게 모여앉아 평화로운 전원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또 하나 사회주의 국가의 장점 같아 보이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의 검차 시스템이 감동적이다.
버스가 휴게소로 들어서서는 손님을 먼저 내려주는 게 아니라 바로 검차소로 진입하고, 검차원이 차 밑으로 들어가 차를 꼼꼼이 체크하고 서류를 작성하여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그저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드문드문 중국여행을 해 보면, 올 때마다 새로운 중국의 힘을 한두 개씩 느끼는데, 이번에는 세월호 사고 직후라서 그런지 차량정비를 법으로 강제하는 모습과 꾀부리지 않고 원칙을 준수하는 성실한 표정이 참으로 좋아 보인다.
오후 7시경에 대리고성에 도착하여 남문 부근의 4성급 호텔 윤택원(潤澤圓 酒店)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부근의 백족이 경영하는 ‘백족반장(白族飯莊)’에서 백족음식으로 저녁을 먹고는
대리고성을 거닐었다.
운남 북부 여행에서 고성은 매우 비중이 큰 코스인데,
이곳은 우리가 둘러볼 4곳 중에서 첫 번째로 만난 고성이다.
고성의 남문은 화려한 조명 아래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아치형 문 위에는 활달한 필체의 ‘大理’가, 고개를 젖혀드니 화려한 2층 누각에는 ‘文獻名邦’ 네 글자가 걸려있다. 문헌명방이라! 그렇지.
이 말은 대리를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며, 대리가 운남의 역사 문화의 발상지라는 말이기도 하다.
대리는 약 4000년 전에 이미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였고, 한 초기 무제 때 한(汉) 왕조의 관할 지역이었고, 당(唐) 시기엔 남조국(南国大诏)이라 불렀고, 성당에서 송나라 때까지는 대리국의 도읍지로 300여년 번영을 누렸다.
1252년 몽고족인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가 험한 창산을 넘어와 대리국을 멸망시켰고, 그 후 운남성으로 불리며 성도를 쿤밍으로 정했다.
그래서 고성 안에는 ‘中华六朝名都 千年國際陸港’(중국의 6조에 걸친 이름난 고을, 천년 역사를 지닌 육지속의 국제적 무역항), ‘8~12世紀 東南亚 第一大古都’(8~12세기 동남아 최고의 대고도) 같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우리에게는 원명(元明) 교체기인 고려말에 문신이었던 척약재 김구용(1338~1384)이 사신으로 요동을 통과하다 체포되어 이곳 대리로 유배되어 오다 영녕현(永寧縣)에서 병으로 객사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지 않은가.
시가와 문장에 뛰어나,
목은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했다.
기우는 국운과 강대국의 횡포 앞에서 느낀 절망감이 얼마나 처절했을까.
그의 몇 안 되는 시 중, ‘범급(帆急)’을 읽으면 우리의 운남여행이 전혀 새로운 감회로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
帆急山如走(범급산여주) : 산이 달려가는 듯 배가 빠르고
舟行岸自移(주행안자이) : 배가 빨리 지나가니 언덕이 옮아간다.
異鄕頻問俗(이향빈문속) : 타향이라 풍속을 자주 묻고
佳處强題詩(가처강제시) :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억지로라도 시를 짓는다.
吳楚千年地(오초천년지) : 오나라와 촉나라의 천년 땅
江湖五月時(강호오월시) : 강과 호수는 오월의 계절이로다.
莫嫌無一物(막혐무일물) : 볼거리 하나 없다 싫어 말아라
風月也相隨(풍월야상수) : 풍월이야 항상 서로 따르는 법이라네.
고성 안은 잘 다듬어진 길과 오래된 기와집들이 보기 좋게 낡아있고,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야경을 즐기기 적당하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차를 파는 가게와 소수민족들이 직접 짠 옷감가게 그리고 은이나 대리석으로 된 상품을 취급하는 상점들이었다.
또 길거리화가가 자주 눈에 띄고, 그들 앞에는 늘 손님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화가 중에 여성은 한 명도 보지 못했고 또 손님 중에 남성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여성손님 대부분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태연히 앉아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 오히려 보기 좋았지만,
그림들은 대체로 신통치 않았다.
양인가(洋人街)의 세련된 풍경에 젖어들다, 물이 폭포처럼 넘쳐흐르는 카페거리를 따라 들어가 보니 조명이 현란한 술집 밀집지역이 나타났다.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너무 어둡고 야해서 술집 안을 엿보기도 했지만, 옆에 찰싹 붙어있는 짝꿍 때문인지 호객 행위도 없고 이제 이런 호기는 좀 무서워해야 할 나이인 것 같아 돌아섰다.
▲ 오늘 찍은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뿌연 백열등, 과일의 부드러운 색, 여인의 실루엣 그리고 고성의 밤)
밤이라서 대리고성의 규모는 짐작되지 않고 또 종일 차를 타 피곤하기도 하여
중간쯤인 오화루(五華樓)에서 발길을 돌려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목마다 난전으로 펼쳐놓은 과일가게가 많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두세 걸음 눈을 감고 순간적으로 온 신경을 후각에 집중시켜 보았다.
집 떠나 멀리 와 있다는 느낌과 잘 익은 과일향이 흐르는, 어두운 초여름 밤의 남국 정취가 더욱 감미롭다. (♣)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스린에서 각자대로 사진 찍느라 바빠서 찍다보면 찾고를 반복했습니다.
환림로(석림 둘레길)을 따라 전동차로 이동하다 보니 주마간산격으로 거시적으로만 보니 아시마바윈지 뭔지도 모르고
좌우간 공부 많이 했습니다. 아! 그리고 집사람 안부인데 사모님도 안녕하시냐고 하네요. 그럼 후속편도 고대하며.
가이드보다 더 자세히 알고 계시군요.
운남의 지리에서 부터 역사 풍습 등 모든면에 박식하시네요.
찬찬이 읽어보니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다시한번 그냥 지나친 곳을 되새겨 돌이켜 봅니다.
그런데 저는 소석림쪽은 못 봤는데, 언제 저렇게 찍으셨는지....?
송월산님! 그간 잘 지내셨죠?
반갑습니다
캬! 좋은 여행하셨습니다. 가시기 전, 제 카페에 들려 석림편을 읽고 가셨더라면
'온 돈 주고 반 머리 깎은 꼴'이 안 되셨을 텐데 그랬습니다. 즐감했습니다.
빛고을 방랑자님, 그러게 말입니다. 석림속을 해메며 완전히 끈 떨어진 고아신세가 되었습니다.
랑즈푸성님, 늘 밝은 사모님 덕분에 더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사모님, 잘 지내시죠?
송월산님, 전동차 안 타셨습니까, 소석림에 내렸는데. 실은 봐도 까막눈이라 사진도 포인트를 못잡아 분위기가 안 나는군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실패한 것이 석림 같습니다. 다음에 가실 분들은 윗분 충고처럼 공부 좀 하고 갈 것을 강추!!!
사진솜씨가 어설픈 유병언이의 작품보다 훠~얼~씬 훌륭하군요 ㅎㅎㅎ
석림의 경치도 좋지만 사모님의 미모땜에 한층 더 풍경이 살아난것 같습니다
1편을 읽으면서 몽석님이 어떤분일까 궁금했는데 2편에서 얼굴을 보여주셨군요.ㅎㅎ
제가 올해 잘한 일은 남편을 졸라 이번 여행에 동참한 일인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완전히 여행이 정리가 됩니다.
빨리 3편이 읽고 싶네요.ㅎㅎ
재미있게 잘보고 있습니다.
애니님, 부군께서도 건강하시죠? 1년에 한번쯤은 바깥나들이 계속 조르시기 바랍니다. ㅎㅎㅎ
박선생님, 과찬이 지나치십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참, 사모님 건강은 좀 나아졌습니까?
소암님, 고맙습니다.
길거리 초상화 스케치 하는 친구 엉망입니다. 절대로 그리지 마세요 . 초상화 전시품을 보닌까 그럴싸하여 물어 보았죠 담배 한대 피는 소요 시간안에 50위엔에 스케치 한다 하더군요 그래서 흥정하여 앉아 제초상화를 담배 한대 피면서 그렸는데 완전 제모습과는 다른 사람을 그려 놓았더군요 담배 한대 피는 시간에 50위엔 담배연기와 함께 날라 갔습니다.
올 4월말에 다녀왔는데 아주 설명을 잘 해주셨네요
송담님,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길거리화가 앞에 앉아있는 남성은 아지 본적이 없었는데, 송담님이 계셨군요. 담배맛이 쎴겠네요. ㅎㅎ.
늘사랑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