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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할 것이 있는 죽음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 중세 천태불교를 전공한 박연주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재작년 박사과정을 모두 마치고 잠시 미국과 일본에서 일하다가 작년에 귀국했습니다. 김호성 선생님의 권유로 올 가을 들어 일본불교사 독서회를 시작해서 댓글로는 짤막하게 인사드렸습니다만, 이렇게 정식으로 글로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네요. 저도 일본 불교에 관해서 더 알리고 싶고, 관심있는 분들과 토론거리를 공유하기도 하고 싶었습니다만. 쑥스럽기도 하고 아직 제 공부에 대해서도 많이 부족함을 느끼는 터여서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밤 갑자기 이곳에 뭔가 써야겠다, 쓰고싶다라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아무것이나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쓰고 싶었고 책 하나를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 개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달 초에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85세셨는데요, 백세시대라해도 남들이 보기엔 돌아가실 법한 연세에, 옛날 같았으면 그저 늙어서 수명이 다한 것이라고 여길만큼, 심하거나 오랜 고통없이 심장마비로 가셨으니 (물론 오랜 세월 당뇨셨고 심장마비도 결국은 그 지병의 끝이었으나) 충격적인 죽음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충격과 슬픔이란 비할 데없이 극심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이후로 줄곧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저를 수시로 사로잡았습니다. 또 한편 아버지가 제발 편하신 곳에,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 계셨으면, 또 그럴 것임을 어떻게든 확신할 방법이 있었으면 하고 필사적으로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달았을때, 경이롭다고 할까요, 스스로 적잖이 놀라고 신기했습니다.
저는 평소 제 자신이 ‘종교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에 대해 연구할 뿐, 불교신자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특정한 신앙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러라도 신앙으로서의 종교와 항상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전 제 나름으로는 꽤 오랜 시간 종교에 대해, ‘종교적인 것’에 대해 공부해왔습니다. 불교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토착신앙들, 세계의 원시신앙들, 신화/설화, 종교적 상징체계와 도상, 의례, 심지어 비록 피상적인 수준이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도, 대식가가 끝없이 음식을 탐하듯 파고들었지요. 그것들을 과연 다 소화했는지에 대해서는…음, 회의적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종교에 관한 한 꽤 많이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 이번에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여지껏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종교심’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과 같은 셈이죠.
이것은 제가 종교를 공부하면서 신앙을 가지지 않은 것이 그 이유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여전히 특정한 종교를 믿느냐의 여부는 그 종교에 대한 온전한 학문적 이해와 관계없습니다. 제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은 바로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다양한 종교행위—의식, 의례를 비롯한 그 모든 신앙의 증명과 현현—의 밑바탕에 자리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희망, 소원 같은 것으로, 저는 지금 그것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기고백, 자기비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이렇게 저의 그 불완전한 이해를 뚜렷이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일년전 서평을 쓴 바 있는 한 권의 책 때문입니다.
작년에 저는 일본 난잔대학의 종교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하는 국제학술지인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utides』 의 (44/2, 2017) 신간 서평 코너에 『Right Thoughts at the Last Moment: Buddhism and Deathbed Practices in Early Medieval Japa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6)이라는 책을 소개하고 평을 실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프린스턴대학 종교학과의 교수이자 영미권 일본불교 연구의 권위자인 Jacqeuline I. Stone의 최근 저서로서, 10세기 말부터 14세기 초까지의 다양한 문헌들—불교문헌, 승려들의 전기, 의례집, 설화, 조정관료들의 일기, 서한 등등—에 기록된 정토신앙적 임종의례에 관한 연구입니다. 여기서 제가 ‘정토종’이라 하지 않고 ‘정토신앙적’이라고 한 이유는 이러한 임종의례를 위시하여 아미타신앙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정토종의 교학이나 수행, 의례 등이 일본 중세 천태불교의 전통 속에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임종의례의 발전의 서막은 천태 승려 겐신의 『往生要集』라는, 정토불교사상의 관점에서 보살행과 구원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한 저술과, 일본 천태의 본산인 히에잔(比叡山)에서 활동한 ‘二十五三昧会"라는 종교결사의 결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임종시 正念을 유지하는 것으로 사후 아미타 여래의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임종의례를 발전시키고 이를 널리 유포했습니다.
이미 정토사상 자체가 죽음에 관한 일본인의 인식에 일대 혁신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다면, 임종의례의 성행과 그 근저에 자리한 믿음은 실제로 죽음을 둘러싼 일본의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아버렸습니다. 동아시아의 샤머니즘적 토착신앙에서도 발견되듯, 일본의 전통적인 카미신앙(흔히 ‘神道’라고 통칭합니다만, 종교로서의 신도는 사실 근대이후 태동한 것이죠)에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꽤나 부정적입니다. 삶의 대척점에 있는 죽음은 모든 아름다운 것, 깨끗한 것, 길한 것들의 정반대되는 것을 표상합니다. 일본어로 ‘케가레(汚れ),’ 직역하면 더러움이지만, 우리나라의 무속에서 흔히 쓰는 용어인 ‘부정탐(부정타다)’의 의미에 대응시켜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아무튼 죽음은 이러한 케가레의 대표적인 것이었을 정도로 아주 흉한 일의 대명사였죠. 그것은 물론 아무도,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카미신앙에서는 사후에 어떻게 될지라든가, 사후세계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나쁜 것이고 죽은자에 대해선 그저 울어야만 할 슬픈 것이며, 죽은자에 접촉하거나 그 접촉한 자조차도 응당 피해야만 할 ‘부정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인의 오랜 인식을 바꾼 것이 정토신앙입니다. 임종의례가 대변하는 정토신앙에서 죽음은 더 이상 불길한 흉사이지 않습니다. 잘하면 죽은 후 고통이 없고 이생보다 훨씬 나은 아미타의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도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이 생깁니다. 이제는 죽음에도 뭔가 기대할만한 것이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변화는, 이제 생전의 지위나 친족관계 등과 상관없이, 철저히 개인적인 ‘공덕’에 의해서 죽음과 죽음 이후가 논의됩니다. 그리고 이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관계에도 새로운 관념—즉, 생판 남에게도 공덕을 돌림으로써 연이 맺어지는—을 가져오게 되죠.
그러나 물론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공덕을 쌓아야지만 왕생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또다른 불안이 야기됩니다. 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쌓아야 왕생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보통의 사람들로서도 가능한 얘기인가. 더구나 당대 일본의 지배계층을 이뤘던 무사들의 경우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공덕은 커녕 사람 죽이는 일을 밥먹듯 하며 악업을 짓는 이들—물론 ‘직업상' 어쩔 수 없다지만—에겐 진정 구원이란 없는 것인가. 이러한 불안이야말로 일본 임종의례의 발전을 부추긴 동력이 되었습니다. 임종의례의 핵심은 죽기 직전 우리의 본래적으로 자성청정한 마음의 바른 상태, 즉 정념을 회복하고 유지함으로써 아미타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죽어가는 사람이 고통 속에서 정념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승려나 수행자들이 옆에서 여러 의식을 행하며 정념을 유지하도록 돕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이의 복잡한 사정이나 상황에 따라서 임종의례의 의식과 절차도 좀더 편의적으로 변하거나 추가적인 과정들도 생기게 됩니다. 가령 사고로 급작스럽게 죽는 경우나 무사가 전장에 나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의례를 해둔다거나 전쟁터에서 죽기 직전 간소하게 치룬다거나 하는 것이죠.
이러한 필사적인 노력들은 단지 죽어가는 사람 당사자의 희망만을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들, 즉 죽어가는 이의 가족이나 지인, 제자들에게도 고인의 왕생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고인에 대한 애정때문이기도 했지만, 특히 노승이 죽는 경우 그의 왕생여부는 그 계파나 혈맥의 권위와 정통성, 명예에 직결된 중대한 문제가 되었던 거죠. 따라서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죽어가는 이가 왕생할 것이고 죽은이가 왕생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한 갖가지 ‘싸인’들을 찾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고심합니다. 임종 때에 나타나는 여러 상서로운 징후들—신묘한 구름이나 임종시 고인의 얼굴에 나타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향기 등등—속에서, 혹은 죽은 이가 떠난 후 가족, 친지나 제자들이 꿈에서 죽은이의 왕생을 보았다든지 하는 갖가지의 환상적 징조들을 찾아내고 고안함으로써 왕생을 확신하려 하고 고인의 죽음이 귀감이 되는, 훌륭한 죽음이었음을 증명하려 노력합니다. 이런 노력들은 모두 저자가 장르를 불문하고 조사한 중세의 다양한 문헌들 속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흔적들 속에서 우리는 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인간조건의 불완전성, 불합리성에 대한 두려움, 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불합리한 것에 어떻게든 논리와 질서를 세워보려는 인간의 욕망이 깊숙히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제 서평 속에서도 지적한 것이고 작년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에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놓친 것—놓쳤다기 보다는 그 때까지 미처 체득하지 못한, 제 마음에 와닿지 않은 것이라고 해두죠—은 그 종교심의 기층을 이루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가피하게, 저절로 희구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단순히 ‘욕망’이라고 칭하기에는 모독이라고 느껴질만큼, 너무도 절실하고 절대적인 인간 본연의 마음이기에 그토록 온갖 수단과 절차와 격식을 동원해서라도 표현하고 싶은 것이고, 그 마음을 어떤 절대적 존재에게 인정받고 조금이나마 안심을 얻으려는 행위를 하는 것이겠죠. 아마도 많은 분들께는 이런 얘기가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시겠지만, 저는 몰랐습니다. ‘알아도 몰랐다’는 표현이 아마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인간이란 정말 한심한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책에서 저자가 들춰낸 죽음을 둘러싼 그 모든 의식, 의례, 상징, ‘증명’의 노력들이 정말 구차해 보였습니다. 더구나 오히려 임종시의 정념과 극락왕생에의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을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귀감이 되는 죽음’을 갈구한다면서 오히려 죽음을 속된 말로 ‘찌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은근 비웃는 심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전부터도 각종 ‘종교적’ 의례들을 필요이상으로 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허례허식적인 측면이 강한 것으로 바라보던 저였기도 하구요. 게다가 현재의 한국 사회를 살면서 이러한 ‘허례허식’의 폐해와 부작용을 적잖이 목격하게 되는 상황에서 (대표적으로 ‘제사’의 부작용이 있죠^^;) 전반적으로 의례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는 않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이런 허례허식조차 그 뒤에는 인간의 절실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것이 인간 본연의 종교심을 이루며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표현되고 ‘현현’하기를 강력히 요청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로선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서야 비로소 똑바로 바라보게 된 인간의 진실이죠. 참 부끄럽습니다.
여기서는 이 책에 대해서 이것으로 말을 줄입니다만 (제가 쓴 서평 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nirc.nanzan-u.ac.jp/nfile/4638), 사실 오늘 제가 이야기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저자인 Stone교수가 다각적인 관점에서 조명하는 중세 일본의 임종의례에는 수많은 연구거리가 담겨있습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 임종의례를 위시한 일본정토신앙의 의례와 수행, 교학적 개념들이 일본의 천태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그것은 전복이기도 하고 비판적 계승이기도 했습니다—그 발전과정이나, 천태에서부터 있었던 교학적 긴장이나 모순이 어떤 식으로 지속되며 한편 그 해결을 위한 현실적 모색을 하게 되는지를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자의 학문적 업적이 중세 천태 본각사상 연구에서 출발하였고 (Stone의 첫 단독 저서인 『Original Enlightenment and the Transformation of Medieval Japanese Buddhism』 (University of Hawai’i Press,1999)은 영미학계에서 본각연구에 있어서는 아직도 최고의 권위를 지닙니다), 저자가 차츰 니치렌이나 정토불교로 관심사를 옮겨가면서도 본각사상을 비롯한 천태의 교학이 이러한 소위 ‘신불교’의 교관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 계승되었는지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기에 이 책에서도 이러한 교학사적 논의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습니다. 또한 신란처럼 임종의례의 허례허식성과 아미타신앙의 근본정신에서 멀어지는 것을 비판하는 입장의 등장과 다시금 변화한 죽음의 ‘이상’과 문화, 그리고 임종의례의 쇠퇴 등의 역사적 변천 부분도 책의 마지막 장에 잘 논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자의 이번 연구의 최대강점은 임종의례를 둘러싼 당시의 사회적 관습들, 의례에 직간접으로 연관된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과 그 사회적 성격 등을 분석함으로써 하나의 종교의례로부터 음미할 수 있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의미를 훌륭히 조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단 일본의 불교 뿐 아니라 역사, 사회, 문화 등에 관심있는 분들께, 그리고 일본이나 불교를 떠나 ‘인간’을 알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적극 추천합니다. 아마존에서 직구로 구매하실 수 있고, 전자책인 kindle 버전으로도 나와있습니다 (앗, 마치 제가 책장사 같네요^^).
제가 이 카페에 쓰는 첫 글에서부터 이렇게 무겁고 감정적인 주제로 인사드리게 되어 죄송하기도 하고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글을 씀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제 마음을 표현하는 하나의 제의를 행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부족한 글,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적당한 길이의 좀 더 ‘가벼운’ 글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삼가 아버님의 극락왕생을 축원드립니다~()
길고도 매끄러운 글 잘읽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떠나시며 큰 가르침을 남기신듯 합니다.
공덕, 너무 익숙해서 잊고 살지요
감사합니다~()
삼가 아버님의 명복을 빌면서_()_
잘 읽었습니다.
제사祭辭 잘 읽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서래나무아미타불 독서회에 초대합니다. .().
위로의 말씀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무아미타불..
선생님의 글을 토시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었습니다.
읽다보니 만나고 싶은 분이란 생각이 드네요.^^
반갑게 뵐 날이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저도 같은 것을 느꼈는데 아직 선생님의 단계까지는 못간 듯합니다.
저는 사상이나 철학적인 내용을 좋아해서, 책도 그런 쪽만 탐독했는데, 이러다가 점점 현실불교와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던 차에 에드먼드 리치의 “실천종교”의 내용에 자극받아, 의례나 미술사, 인류학적 연구 같은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근데 글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알고 싶을 때, 결혼식이나 결혼반지 같은 것을 탐구하는 게 적절할까?’ 불교의 의례나 미술을 뭔가 부차적인 것으로 떼어놓고 생각한 것이죠.
근데 저도 며칠 전에 슬픈 일이 닥쳤는데, 뭔가 기복 행위나 의례 같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또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금세 다시 무뎌졌는지, 과연 제가 수능기도 같은 기복 불교를 아무런 사상적 조작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네요... 어찌됐든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글 감사드립니다. 추천해주신 책 기회되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특히 제가 본각사상에 관심이 많아 밑에 얘기해주신 책은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송동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