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의 문자명왕 시대 기록 분석을 해보았습니다만, 아직 더 공부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자료 조사를 더 해보니 앞서 쓴 분석에 추가할 것도 있고, 공부를 더 깊이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환단고기를 제대로 분석해보고 싶다는 것은 욕심을 늘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내 실력이 그것을 할 만큼 되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종교 철학 분야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없이는 결코 환단고기를 제대로 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좀 다르겠지요.
고구려 전공자로서 환단고기 고구려 본기에서 나오는 고구려의 대외문제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검토를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명 고증, 가계도, 일화 등에 대한 상세한 분야는 일단 뒤로 미룹시다. 그것을 고증한다는 것은 보다 깊은 문헌학적 분석이 필요하니까요. 또 지금은 그렇게 여유잡고 분석할 시간이 없으니까요.
다만 대외문제에 있어서는 정황 증거나 다른 문헌으로 어느 정도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조금씩 연습삼아 분석은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서 검토해야 할 몇가지 부분을 정리해보지요.
1. 광개토대왕의 일본 진출 문제
2. 문자명왕의 대륙 동해안 장악 문제
3. 온달이 배찰산과 갈석산에서 싸우고 유림진 동쪽을 모두 평정한 문제
4. 을지문덕의 태원 및 유주 지역 출격 문제 (탁성, 창평, 조양, 상곡 등의 지배 문제)
5. 영양왕 9년 연태조의 등주 토벌 문제(산동 지역 지배 여부)
6. 연개소문이 하북 일대를 진격하고, 이세민에게 산서, 하북,산동, 강좌를 할양받은 문제
7. 태조대왕의 요서 10성 문제 (북경 인근 지배 문제)
8.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한다는 문제 (일명 대마도 지배 문제)
정리를 해보니 대체로 중원측 세력과의 다툼이 아주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쉬운 것은 환단고기에서 왜 북방 유목제국과 고구려와의 전쟁을 다루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환단고기에 대해서 가장 큰 의문을 갖는 부분은 사실 이 분야입니다. 당연히 흉노, 선비, 거란, 실위, 지두우, 해, 유연, 돌궐, 설연타, 철륵 과의 관계가 나와야 함에도 아쉽게도 환단고기는 침묵입니다. 나는 이것이 결코 우연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환단고기 편찬자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의 한계 때문입니다. 즉 편찬자 본래부터 내려오는 고구려측 고유 자료를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백일사의 편집시기는 이맥이 활동하던 1520년(편수관으로 뽑인 시점)이후입니다. 그 때 이맥 역시 이러 저런 책을 보았는데, 이때에도 고구려측 고유 자료가 제대로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태백일사는 이유립이나 계연수가 썼건, 이맥이 썼던 간에 어쨌든 그 편찬연대는 1520년이 결코 넘지 못합니다. 삼국사기(1145년)에 비해 약 400년이나 뒤진 책입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고구려측의 원본 자료가 없는 대신, 발해, 신라, 고려 등에서 다시 만든 책을 다시 이맥이 보고 적었다고 할 때에 그들의 관심은 입증 가능한 자료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그 당시 자신들이 알고 싶어하는 역사상 위주로 쓰여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한-중, 한-일 관계에만 치우친 대외기사가 쓰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고구려본기는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1차 사료로는 사용할 수 없는 사서임에는 분명합니다.
내가 누차 이야기하지만 쓸데없는 진위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말 조금보데서 이 책이 가짜다, 아니다 진짜다. 이런 논쟁은 정말 한심한 것입니다. 그 보다는 먼저 하나 하나 따져보고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고 정말 나중에 자료가 충분히 쌓여서 결론을 낼 정도가 되면 그때가서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위에 고구려의 대외문제 8가지를 적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일본관계 2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 당장 연구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현재 관심이 그쪽으로 전혀 가 있지 않기 때문에 몇 년 후에나 일본관련 책을 보고 다시 검증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 6개중 1개는 대충 풀어보았고, 나머지 5개 가운데 고구려 전기에 해당되는 태조대왕의 요서 10성 문제는 삼국사기에도 그대로 적혀 있기는 한데, 이를 제외하면 전부 고구려 후기의 문제가 됩니다. 고구려 전기의 문제는 지금 내가 당분간 접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도 우선은 제외하겠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문제는 4가지가 남습니다. 이들 문제는 577년부터 645년까지 불과 70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이 시기는 내가 연개소문 연구가 끝난 지금부터 연구해야 될 고-수 전쟁 문제와 너무나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하나 하나 검토해야 겠습니다.
1. 온달이 배찰산과 갈석산에서 싸우고 유림진 동쪽을 모두 평정한 문제
2. 영양왕 9년 연태조의 등주 토벌 문제(산동 지역 지배 여부)
3. 을지문덕의 태원 및 유주 지역 출격 문제 (탁성, 창평, 조양, 상곡 등의 진출 문제)
4. 연개소문이 하북 일대를 진격하고, 이세민에게 산서, 하북,산동, 강좌를 할양받은 문제
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주몽의 기풍을 닮았는데 연호를 대덕이라 고치고 나라를 다스림과 가르침이 아주 밝았다.
대덕 18년 병신에 평강상호태열제가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러 가서 추격 끝에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쳐부수니 유림진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유림은 지금의 산서 경계이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요.
이 기록에 주목하는 이유는 삼국사기 온달열전에 다음 기록 때문입니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 寵榮尤渥, 威權日盛.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공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 후주는 곧 북주입니다.*****
온달이 출세를 하게된 두번째 계기인(첫번째는 낙랑언덕에서 사냥대회에서 활을 잘 쏘아 와의 눈에 들어옴) 후주와의 전투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적은 기록만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달이 과연 어디에서 전투를 했는지 조차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평원왕 시기에 고구려가 어디까지 진격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온달 열전의 자료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환단고기가 이러한 공백을 메워 줄 기사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온달이 북주와 싸웠던 기록을 단순히 배산들이라고 했는데, 배산은 어디인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갈석산과 배찰산이라고 명시했고, 더 나아가 이 전투의 결과로 고구려가 유림관 동쪽을 모두 차지했다는 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만리장성 이북의 요서 일대를 모두 고구려가 이때 차지했다는 말이 됩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이 점에 착안하여 환단고기를 다시 한번 봅시다.
먼저 삼국사기의 전승에 대해서 말을 해 보지요.
온달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몇사람의 언급이 있어 왔지만, 온달의 신분관계를 분석과 온달의 신라 정벌과 관련 지역의 전승 분석에 치우쳐 있을 뿐, 온달이 후주와 전쟁을 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고구려사의 권위자인 노태돈 또한 그의 책에서 북주와 고구려는 북주가 577년 북제를 멸함에 따라 국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577년 고구려에서 북주에 사신을 파견한 것도 그에 대한 고구려측의 대응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이 무렵 고구려와 북주는 한차례 무력분쟁을 치루었다고 했고, 그 근거는 온달전에 있다는 정도로 간단하게 언급만을 했을 뿐, 자세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구려사 연구. 439p)
북한의 손영종은 그의 책에서 고구려와 북주의 전쟁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원인을 북제의 영주자사 고보녕이 북주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자, 북주가 이를 정벌하기 위해서 공격해오는 과정에서 고구려가 고보녕을 도왔거나, 혹은 북주가 고구려 관할 지역까지 공격해오자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배산의 위치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으며, 다만 온달전에 전해지고, 중국측 기록에 없는 것은 북주군이 크게 패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을 뿐입니다.
실제로 고보녕세력은 583년 수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북주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했음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손영종은 북주가 공격해온 요동은 난하 이동으로 보았으며, 고보녕은 북제왕실의 일족으로 고구려와 관계가 좋았다고 보았습니다. 또 577년 고구려가 북주에 사신을 간 것은 본시 북제로 갔던 것이 북제가 그해 정월에 망함에 따라 그냥 남아서 북주와의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곧 북주와의 전쟁상태에 들어갔으므로 더 이상의 외교무역관계는 없었다고 했습니다.(고구려사 2. pp136-137)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배산 싸움에 대해서 위치나 전쟁의 의의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다만 전투 양상을 요동평야에서 기병으로 적을 무찌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존의 연구를 보면 대체로 고구려와 북주와의 전쟁은 577년 정월(북제의 멸망)에서 578년 6월(북주의 무제가 이때 사망) 시점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러한 연구 부진의 원인은 중국 사서에 후주와 고구려간의 전쟁 기록이 전무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양국의 전쟁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삼국사기가 고구려측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중국사서를 많이 인용했다고는 하지만, 전래의 사료가 남아 있었을 경우에는 그것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즉 고구려와 후주와의 전쟁 기록은 고구려측 사료로서 오히려 그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른 자료로서 후주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일만한 상황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온달열전보다 자세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통해 과연 전쟁터가 어디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중문대사전에서 배찰산을 찾아보면 “배찰산은 산의 이름인데, 열하(熱河) 경붕현(經棚縣) 경내에 있다. 배찰은 몽고어 계통어로 신의 뜻이란 말이다.”
열하는 지금은 요녕성과 내몽고자치주 지역입니다. 경붕현의 위치는 역시 중문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열하성의 현명인데, 임서현 서쪽으로 흥안령산맥과 음산산맥이 교차하는 곳에 있으며, 그 서쪽의 성은 요하 상류원인 횡하(서남목륜하) 북안에 임박해있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배찰산은 지금의 임서(林西) 옆에 있는 황강량(黃岡梁)으로 해발 2029미터의 산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곳의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내몽고 초원 또는 사막지대에서 대흥안령을 넘어 유목민에게 적합한 초지가 많은 초목지대로 진입하는 길목이며, 고구려 문명권으로 진입하는 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곳에서 고구려와 북주가 전쟁을 벌였다면 그것은 거란 지배를 놓고 벌인 양국간의 전투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록의 사실성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다음 세가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1. 요동의 범주 - 북주가 요동으로 공격해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2. 배산의 위치 - 배찰산이 아닌 배산이 별도로 존재했는지 여부
3. 577년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정황 증거
그런데 이 가운데 배산이란 곳은 현재로서는 특별한 기록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중문대사전 등에 없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지명인 듯합니다. 물론 삼국사기에도 딱 한번 등장하는 단어일 뿐이지요.
그럼 요동의 범주는 어떤가. 요동은 수나라가 요서군을 설치한 이후에는 요하 동쪽이란 구체적인 범주가 정해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대체로 요서와 요동 양쪽을 모두 지칭하는 광의의 요동이란 말이 더 많이 쓰였다는 김한규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요서북부 지역이라고 할 배찰산 일대도 고구려의 입장에서 요동을 공격해왔다고 보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조금 어색한 점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갈석산의 경우는 현재의 갈석산, 즉 요녕성과 하북성의 경계지점에 있는 갈석산으로 보는데 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갈석산에 진나라 장성 유적지가 출토되었고, 수, 당 시기에 갈석산은 이곳 외에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환단고기에서도 갈석산의 위치는 이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 임유관을 산서 경계라고 한 만큼, 갈석산에서 임유관, 배찰산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 전쟁터였다는 것인데, 냉정히 말해서 이것은 상황 증거로 볼 때 좀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갈석산과 배찰산의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고, 고구려군이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웠다고 보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배찰산의 위치가 내몽고 지역이라고 할 때 관심은 도리어 고구려와 돌궐과의 전투에서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구려는 570년대에 돌궐군과 거란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요. 돌궐의 이계찰대가 이끄는 군대를 고구려가 격멸시켰고, 이로 인해 고구려의 거란에 대한 지배권은 매우 강성해집니다. 돌궐이 들어서기 전에 6세기초에 고구려는 유연과 함께 대흥안령 산맥 서쪽에 위치한 지두우를 분할하기도 합니다.
그런만큼 고구려가 배찰산 지역까지 진출했던 것은 큰 무리는 없습니다. 배찰산 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홍산 일대에는 고구려의 전방기지가 있었고, 당과의 전투도 그것에서 벌어지곤 합니다.
(이 부분은 간략하게만 설명하지요. 이 부분은 아주 깊이 논증할 수 있고 자료도 충분합니다.)
정확증거로는 충분히 고구려가 진출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고구려가 과연 배찰산까지 왕이 직접 출동하여 적을 막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평원왕이 거란족과 해족의 거주지를 넘어 그곳까지 직접 간다는 것은 여러가지 검토해야 할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고구려의 거란 지배력 문제, 임금이 꼭 거기까지 출격해야만 할 필요성이 얼마나 되는지 문제 등등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서 문자명왕의 대륙 동해안 진출보다는 훨씬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갈석산과 배찰산의 거리 문제로 볼 때 여전히 의심이 남으며, 따라서 배산이 곧 배찰산이고 그 위치가 내몽고 임서지역으로 보는 것은 주저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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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배찰산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비정할 수 있다면 새로운 분석이 가능하겠지요. 환단고기의 자료를 통해서 그래도 얻을 수 있는 힌트라면 고구려와 북주의 전쟁은 단지 요서지방 남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북부 즉 거란지배 문제로 인해 야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라는 것 일 것입니다. 이 점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아주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재성, [동몽고사 연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거란족에 대한 4-7세기 거란족 문제에 대해서 이해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해족에 대한 것도 포함됩니다. 거주지 문제에 대해서도 연구자 정리도 이 책에 나와있습니다. 이재성 님은 거란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만큼, 이 분의 논문을 검색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첫댓글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평원왕 시에 거란족과 해족의 거주지가 어딘지? 그 근거기록이 있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재성, [동몽고사 연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거란족에 대한 4-7세기 거란족 문제에 대해서 이해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해족에 대한 것도 포함됩니다. 거주지 문제에 대해서도 연구자 정리도 이 책에 나와있습니다. 이재성 님은 거란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만큼, 이 분의 논문을 검색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