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정전 60년과 나의 소망
순천보훈지청 보상과장
임 동 신
동족에게 피맺힌 원한을 안기고,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어정쩡하게 전쟁을 중지한 휴전협정, 그렇게 흘려보낸 세월이 올해로 60년을 맞이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한반도 판문점에서 열린 제159차 정전회담 본회의에서 국제연합군측 수석대표 ‘윌리엄 K.해리슨’과 공산군측 수석대표 ‘남일’이 정전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국제연합군총사령관 미국 육군대령 ‘마크 W.클라크’, 조선인민군총사령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가 후방사령부에서 각각 서명함으로써 3년 1개월간의 한국전쟁은 중지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정전협정서의 서명자에 없는 것은 물론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 . . 이하 생략」으로 표기된 정전협정문 표지를 봐도 대한민국은 없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그 때를 통일의 기회로 보고, 정전협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래서 정전회담 초기에는 한국측 대표도 회의에 참석했으나 우리의 의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최종회담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협정서에 대한민국이 없는 것이다.
현재 정전협정은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다. 1993년 유엔군측 수석대표로 한국군장성이 임명되자 북한은 이를 이유로 1994년 군사정전위원회 북한측 관계자들을 철수 시키고, 이어서 중국측 관계자들도 철수시키도록 하여 군사정전위원회를 무력화시켰으며, 비슷한 시기에 중립국감시위원회 북한측 초청국인 체코와 폴란드 대표단을 차례로 철수시킴으로서 중립국감시위원회도 무력화 시켰다. 또한 북한은 1996년 4월에 DMZ무효화선언과 함께 판문점에서 무장병력을 투입하여 무력시위까지 감행하였는데 이와 같이 정전협정을 단계적으로 사문화시킴으로써 정전협정은 유명무실하게 된 것이다.
또한 북한이 근년에 일으킨 연평도 폭격, 천안함 폭침, 연평해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 장거리 로켓 발사에 이어 유엔의 제재결의에 대해 비핵화 포기선언을 하고 핵실험을 공공연히 시사하였다. 북한이 핵개발과 무력도발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으나 딱히 재발방지를 위한 직접적인 제재방법이 없다는 것도 정전협정서의 현실이다.
그래서 평화협정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199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북한과 미, 중 4자회담을 가진 적이 있으나 북한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미국과 북한임을 주장하며 대한민국을 제외한 평화협정을 고집하여 1999년 6차 회담을 끝으로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평화협정을 맺는다 해도 무력도발에 대한 제재방안이나 재발방지를 위한 기능이 없다면 지금의 정전협정과 다를 바 없어 이 또한 유명무실할 것이다.
북한이 고집하는 대한민국을 제외한 평화협정이란 한반도의 평화를 논의하면서 당사국인 대한민국을 제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평화협정 운운하면서도 무력도발을 일삼는 그들의 속내는 한반도의 평화보다는 평화협정 후 ‘유엔사 해체- 미군철수-남한 무력 침략’이라는 뻔한 의도일 것이다.
정전 60년,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볼 때 두 세대가 지나간 긴 세월이다. 북한은 정전 60주년을 맞이하여 앞으로는 무력도발을 중지하고 1974년 ‘7․4남북공동성명’,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의 ‘6․15공동선언’ 등 그동안 남북간에 합의한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여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고, 국제연합 회원국으로서 국제평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초등학교 때 ‘우리의 소원은 토~옹일 . . . ’하면서 가슴 벅찼던 기억이 난다. 이 노래도 들어본지 꽤 오래되었다. 다음 세대에는 이 노래가 용도폐기되고 한반도의 평화 속에서 8천만 국민이 하나 되어 세계평화와 공영에 이바지하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내 생전에 육로를 통해서 백두산 정상에 한번 오르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