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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광 동양잉크 사장과 장남 영배씨 부자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회사연구소에서 잉크 테스트를 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평택=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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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와 잉크를 양 축으로 한 인쇄술은 국가 문화산업의 중추이자 근간을 이룬다. 우리나라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란 현존하는 세계 최고(751년 · 신라 경덕왕 10년)의 목판 인쇄본을 갖고 있는 등 높은 인쇄기술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잉크산업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뒷걸음질쳤다. 국내 잉크회사들이 대부분 일본기업이 철수한 이후 탄생한 것도 이런 배경과 연관이 크다.
올해로 창립 61주년을 맞는 동양잉크는 대한잉크와 함께 국내 잉크업계를 대표하는 장수기업.인쇄용 잉크인 오프셋잉크와 수성잉크 분야에서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인 동시에 아시아시장에서는 일본 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고(故) 최수학 회장은 1948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동양잉크의 전신인 동양인쇄잉크공업사를 차렸다. 일제시대 때 공고를 졸업한 후 철도청에 근무했던 고인은 해방 후 철공소로 직장을 옮겼고,창업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철공소에 일본 기업이 철수한 후 남기고 간 인쇄잉크 제작기계가 들어온 것.당시에는 잉크회사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이 수중에 들어온 기계를 밑천 삼아 회사를 차릴 때였다.
잉크제조 기술은 고사하고 잉크회사 근무 경험조차 없던 고인은 "사업하면서 기술은 배우면 되겠지…"하는 심정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일본 회사가 쓰다 남은 재료를 구입,단순 가공해 잉크를 파는 수준에 그쳤다. 잉크 제조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도 병행했다. 잉크 제조회사들을 찾아다니며 '기술동냥'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자들이 선뜻 기술을 전수해 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모두 어깨너머 익힌 기술들이어서 배울 만한 것도 많지 않았다.
한단계 높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고인은 일본의 전문서적들을 파고들었다. 수시로 일본 잉크 제조회사를 방문하는가 하면 전문가를 수소문해 찾아가 기술지도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기술을 축적한 동양잉크는 틈새시장을 파고들면서 입지를 다져갔다. 회사는 별다른 '성장통'을 겪지는 않았지만 인쇄소에 소량 납품하는 업종 특성상 성장은 더뎠다.
동양잉크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등 변화를 시도한 것은 고인의 장남인 최대광 대표(55)가 1976년 입사하면서부터였다. 최 대표는 엄밀하게 동양잉크의 2.5세대 경영자이다. 그는 1989년부터 회사 경영을 맡아온 사촌형 최청운 회장에 이어 지난 10월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최 대표는 "충분히 보고 배운 후에야 회사를 맡으라는 게 선친의 유지였다"고 말했다.
최 대표가 입사할 때만 해도 회사의 유일한 대졸자였지만 특별 대우 없이 혹독한 경영수업을 치러야 했다. 그는 입사 후 부산 대전 등 전국 판매영업소를 모두 거친 후 1985년에야 본사로 발령받았다. 기획실을 차린 최 대표는 회사 원자재 구매를 겸직하면서 전산화 작업은 물론 현대적 경영기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실험실을 연구소로 승격시키고,우수인력 채용을 적극 건의했다. 인쇄트러블을 없애고,인쇄 적성에 맞는 잉크를 개발하기 위해 과감한 시설투자도 줄기차게 요구하기도 했다.
해외시장 개척에 착수한 것도 최 대표다. 그는 "당시 잉크산업이 소규모 다품종의 군소시장이어서 회사가 성장하려면 해외시장을 뚫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최 대표는 해외에 있는 지인 등을 네트워크 삼아 태국 홍콩 등지로 직원 한 명만 데리고 월 1회 이상 해외 출장을 갔다. 카탈로그는 물론 제품 샘플조차 없었지만 잠재수요자를 맨투맨으로 만나 영업을 한 것.최 대표는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지만 여러 차례 접촉하니 먹혀들었다"고 회상했다. 수십년간 일본 업체가 독식해온 아시아 잉크시장이 새로운 경쟁업체의 출현을 반겼던 상황도 도움이 됐다. 이 같은 노력 덕택에 현재 동양잉크가 수출하는 국가는 41개국에 달한다.
세계 잉크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현지 생산기지 구축을 통해 원가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2008년 중국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시에 있는 현지 잉크공장을 인수했다. 국내외 공장을 합친 동양잉크의 지난해 매출액은 757억원.해외사업 비중이 60%에 달하는 글로벌 잉크회사로 발돋움한 것이다. 중국 지난공장은 현재 국내 기업의 대표적인 해외진출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인수 3개월 만에 흑자전환한 데다,월 300t의 현지 생산잉크 전량이 현지판매상을 통해 100% 소화되고 있어서다.
그간 큰 위기 없이 순항해온 동양잉크는 시장환경의 변화로 위기를 맞고 있다. 온라인시대를 맞아 오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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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잉크 ●3代 최영배 씨
"잉크산업을 오프라인 인쇄산업으로만 보면 사양산업이지만,색채산업과 연계하면 앞으로 큰 비즈니스 기회가 생길 것으로 생각됩니다. "
지난해 12월 사원으로 입사한 최영배씨(27)는 향후 3세 경영인으로서 동양잉크의 미래 사업 방향을 이같이 제시했다.
최씨는 어떤 사업을 말하느냐는 질문에 "아직 색채 비즈니스의 개념을 정확히 제시할 단계는 아니다"며 "친환경과 동양잉크의 색채기술을 잘 접목시킬 경우 첨단분야에서도 다양한 수익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잉크시장의 축소에 대비한 현실적인 대안책도 제시했다. 그는 "새로운 수종사업 발굴도 중요하지만,당장에는 줄어드는 잉크수요 공백을 메우려면 해외시장 점유율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양잉크가 2008년 중국 지난 잉크공장을 인수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다. 동양잉크는 앞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제2,제3의 해외 생산기지를 만들 방침이다. 최씨는 이어 "기존 잉크사업과 유사한 연관사업에 진출하는 등 사업다각화도 도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회사 내 신사업 부서인 전자재료사업본부 소속으로 PCB(인쇄회로기판)와 전자소재에 쓰이는 특수잉크 개발 업무에 관여하고 있다. 최씨는 이어 "할아버지와 부친은 잉크사업만 했지만,전혀 연관이 없는 새로운 사업의 진출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고 귀띔했다. 내년 중국 공장으로 파견이 예정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부친으로부터 가업승계에 대한 책임감을 끊임없이 주입받으며 커왔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단 한번의 고민도 없이 동양잉크에 들어왔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방학이면 아르바이트 생으로 회사 실습을 하는 것은 가업승계 준비작업으로 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전통이다. 하지만 경영환경이 바뀌면서 입사 후 경영수업 방식은 부친 때와는 달라졌다. 부친은 전국 판매영업소를 돌며 현장실습을 한 반면 최씨는 1년여간 국내에서 근무한 뒤 중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그는 동양잉크가 후발주자이면서 가장 영세한 업체로 출발했지만,현재 국내 대표적인 잉크 제조회사로 성장한 비결로 할아버지와 부친의 투철한 기업가 정신과 기술력을 꼽았다. 그는 "회사 사시이기도 한 공수(攻守)겸비의 자세로 할아버지와 부친이 피땀 흘려 일군 회사를 더 탄탄하게 성장시켜 가업승계의 전통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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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고,출판산업의 미래도 전자책시대를 앞두고 점차 어두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 대표가 주저없이 현 시점을 창사 후 최대 위기로 꼽는 게 그래서다.
그는 "인쇄시장과 함께 잉크산업이 동반고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신사업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대표는 홍익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장남 최영배씨를 곧바로 경영일선으로 끌어온 것도 이 같은 위기감이 작용했다.
최씨는 과거 아버지가 창업주로부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던 방식을 그대로 밟고 있다. 최씨는 지난공장으로 2년간의 파견근무가 예정돼 있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시장에서 동양잉크의 미래를 찾는 동시에 글로벌 사업감각을 익히라는 사명이 부여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