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여리고 수6:1~11절 2024.2.18. 주일 오전 예배
* 내 안의 여리고와의 싸움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을 주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하는 일은 싸움입니다. 가나안 땅은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천국이 싸우는 곳인가?'라는 생각입니다. 우린 보통 '천국'이라고 하면 편안하고 즐겁게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사는 것으로 연상합니다. 물론 그러한 천국에 싸움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싸움에 있다고 할 때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제 그들은 놀고먹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싸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싸우며 살아가는 이것이 곧 천국입니다. 어떤 싸움입니까? 언약궤, 즉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었다는 이 정신에 위배된 사고방식과 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에게는 필연코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위배된 사고방식에 합류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는 싸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어린양의 피의 정신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세우기 위한 싸움입니다. 학생들은 오직 성적을 올리기 위한 싸움에 몰두하고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성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의 피 보다는 성적에 매어서 살아갑니다. 직장인 역시 피곤한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교회 안에서도 계속되어집니다. 말은 형제, 자매라고 하고 한 지체라고 하면서도 결국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적으로 만나고 헤어집니다. 희생과 섬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싸움에 하나님이 내편 되어주기를 원합니다. 내 앞에 있는 강한 자를 여리고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편 되어서 저 여리고 같은 존재를 이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니까 하나님은 교회를 안 다니는 저 사람보다는 내 편을 더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 엄청난 착각입니다. 지금 현대교회가 이 착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어둠의 나라는 버리시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나라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목적과 계획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름 받은 성도는 오직 예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예수님의 주되심과 예수님의 피만을 증언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즉 모든 기준이 예수님만을 중심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은 실패로 보는 상황 속에서도 실패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더욱 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우리 속의 여리고를 하나님이 무너뜨림으로서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나에게 이러한 싸움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껏 무엇과 싸우며 살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 피로서 무너지고 서는 나라
천국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나안이 이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천국인데 무슨 싸움이 있는가?'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천국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살아갈 때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심판을 당하고 완성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싸움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천국이 미완성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미완성의 나라이지만 그리스도안이라는 천국은 완성된 나라입니다. 완성된 나라에서 살지만 아직 죄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싸우면서 장차 주어질 죄 없는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적은 여리고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여리고가 구분되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입니까? 유월절이란 의식이 기준입니까? 아니면 할례라는 표가 기준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제사를 드리는 것이 기준입니까? 만약 이러한 것들이 기준이라면 여리고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여리고의 구분은 언약궤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넌 자들입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다시 산자가 되었다는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증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습니다. 즉 죽어야 할 인간이 어린양의 피로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 여리고는 무너져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는 자를 공격하시는 것이지, 혈통을 보고 이스라엘로 구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아닌 자를 공격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로 인해서 자신들이 요단강을 건넌 것을 목격을 했고, 다시 언약궤에 의해서 여리고가 무너짐을 목격을 합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는 광경은 참으로 희한하기 짝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6일 동안 한 바퀴씩 돈 것과 칠 일째 일곱 바퀴 돈 것에 대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 째는 복을 주사 안식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안식할 수 있는 완전한 나라라는 증표가 7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나라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완전한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시겠다는 것이고, 그 나라를 주시겠다는 것을 7일째 일곱 바퀴를 돌 때 여리고가 무너지게 함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7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일곱 바퀴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증표입니다. 6일 동안 여섯 바퀴를 돈 것은 인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인간의 노력을 묵살하고 오직 하나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을 칠일 째 일곱 바퀴를 돌게 함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7이란 숫자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일곱 제사장, 일곱 양각 나팔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더러 안식일을 지켜라고 하셨던 이유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사는 나라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는 새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라는 의미가 안식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주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산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피를 의지하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 피의 능력의 증인 자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돌라고 하실 때 그 앞에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언약궤 뒤를 따릅니다. 언약궤가 그들의 중심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궤가 이스라엘의 중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나라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어린양의 피를 기초로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고자하는 계획입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서 여리고를 도는 이스라엘은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나라를 세우지 않고 오직 어린양의 피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나라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는 마음으로 돌아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속에 내 힘과 내 중심으로 내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나라, 여리고성은 다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한 하나님의 집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정신이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성도인 것입니다.
세상의 싸움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무너져야 할 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만 보여주십시오.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피로 사는 새로운 나라로 우리를 집어 넣으셨다는 것만 보여주십시오. 세상을 향해서 '너희들은 돈 번 것을 좋아하고 좋은 집에 살게 된 것을 복으로 여기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감사하고 그것이 귀할 뿐이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인간의 싸움이 아닌 하나님의 싸움을 하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라보고 살면서 마지막 때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