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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한국의 금지곡
금지곡 두곡 믹싱으로 오늘의 주제 금지곡 암시
불꺼진 창 / 조영남
김추자 /거짓말이야
오늘의 주제에 대한 간단한 이바구
금지곡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한다. 최초의 금지곡은 아리랑과 봉선화로서 1933년 5월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조선총독부령으로 '축음기 레코드 취체 규칙'이라는 것이 공포되었고, 이에 의거해 다음달 13일에는 음반 네 장에 대한 최초의 발매금지 처분이 내려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금지 목록 맨 첫머리에 올라 있는 것은 바로 '아리랑'이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으로 채택이 되었고 영화 아리랑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삼천리 동포들의 심금을 울렸고 식민지배의 아픔을 노래한 영화였다. 그러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고 1936년 4월호 '삼천리'에 실린 금지 음반에 관한 기사에는 '아리랑'의 금지 이유가 '치안방해'로 나와 있다. 가사야 별로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은 없지만 당시 시대 민중들의 감정이 치안을 방해할 만한 상황으로까지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아리랑'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민족의 감성이 두려워 '아리랑'이 일제 식민통치에 위협이으로 보앗기 때문에 한국의 금지곡 역사의 첫 장은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시대의 비극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1950년도의 금지곡이라면 남인수의 꼬집흰 풋사랑을 들을 수 있다. 사유는 해방후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이 사랑 노래는 금지가 되기 시작한다. 남북분단의 시작지이자 냉전체제의 아픔을 보여주는 사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인수 - 꼬집힌 풋사랑
33년 금지곡 목록 사진기사
60년대로 접어들어서 금지곡은 박통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70년대 후반까지의 금지곡들의 서막이였다.
박정희정부는 이때부터 건전한 가요로 희망찬 앞날을 설계하자며 건전가요를 많이 부르도록 종용 했다.그리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어려웠던 시절, 아픔의 수많은 밤을 기다림으로 지샜던 민중의 한이 표출되었다고 하며 또 당시 한일회담의 역작용으로 동백아가씨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1960년대 국민 최고의 애창곡이었던 동백아가씨는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됐지만 당시 박통은 금지곡인지 모르고 애창했다고 한다. -_ㅡ ;;
껌씹는 아가씨-김상국 66년 껌을 짝짝 씹는 여자의 모습이 퇴폐적이다라는 이유
키다리 미스터김-이금희 66년 단신인 박통의 심기 불편 어지간희도 키에 대한 박통의 컴플렉스가 있었나 보다. -_ㅡ
여기에 또하나 재미있는 금지곡이 있다. 내일은 해가 뜬다-쟈니리 66년 전인권의 '사노라면'의 원곡. 현실부정등의 이유다.
엄밀희 따지면 쟈니리의 내일은 해가 뜬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구전가요였다. 66년 길옥윤이 작사하고 김문응이 작곡하여 쟈니리에게 전해지지만 난독증을 가지신 박통께서는 가사를 거꾸로 해석하여 현실부정이라는 이유를 갓다되어 금지곡이 된다.
그러나 올래 구전가요로 전파되어온 노래 탓인지 80년대 민주화투쟁의 시대에도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가사" 탓인지 희망을 가진 투쟁의 의미을 부여하며 운동권의 애창곡이 되기도한다.
http://blog.daum.net/m61menegun/18283485 내일은 해가 뜬다-쟈니리 감상
70년대을 접어들면서 68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서 시작한 음반심의는 이제 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으로 정치적 이유로 강화되기 시작된다. 70년대는 정말 하루건너 금지곡이 태어나던 시기라 일일희 거론하기가 난감해서 대충 넘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금지곡의 역사에선 웃지 못 할 사연도 많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거짓말 같던 당시 억압의 시대한 스스로 박통정부는 뜻끔해서 사회 불신조장, 이장희의 ‘그건 너’ 역시도 노래 중간 중간 터지는 이유가 박통을 향한 스스로 양심 찔림에 자기을 나무라는 듯하다 해서 괘심죄 ‘한 잔의 추억’과 송창식의 노래는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고래사냥은 포경수술을 뜻한다 해서 왜 좆대가리 붙잡고 노래하냐라는 이유.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도 한때 금지곡이였다.
아름다운 강산은 아실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모르는 분들은 노래가사가 너무나 건전한데 건전가요가 끼지 못하고 왜 금지곡이 되었는지 아직도 의아해 하는 분들이 게실것이다.
유신정권 당시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청와대와 공화당의 요청(아니 압력)을 거부하고 만든 것이란 비화도 잘 알려져 있다. 신중현은 '중앙'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기식 국민가요'를 작곡하면서 며칠에 거쳐 테마를 확장하고 다듬었는데, 이는 탄탄한 양식미를 갖춘 명곡이란 평가로 화답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중앙의 지시을 거부햇다라는 이유로 괘심하게 여기신 각하의 아랫분들이 과잉충성으로 금지곡이 되버리는 불운으로 세기적 명곡은 87년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햇다.
비단 신중현의 노래 미인도 아름다운 강산처럼 금지곡이 되는 아픈 사연도 있다. 이유는 한번보고 두번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라는 가사가 선정적이라고 한번먹고 두번먹고 머 그런 성적 상상을 동원한 말도 않된 이유에 있다란다 ㅡ.ㅡ
신중현과 더맨 - 아름다운 강산(1972) 원곡으로 들어보자.
http://blog.daum.net/m61menegun/12380376
한국 음악계의 가장 불운한 시대라면 70년대의 한국 음악시장 일것이다. 송창식과 양희은의 아침이슬과 김민기을 비롯한 수많은 포크 음악들 그리고 신중현으로 대변되는 락음악의 쇄퇴기였다.
여기 또 하나 70년대 음악시장의 금지곡 사건중 최대 사건이라면 대마초 사건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대마초를 피다 아부지한테 걸려 열라게 맞는데 이때 모든 부모님들의 생각"우리아들은 착한데 친구들이 못되서..."란 생각이 박통을 지배.. 지만씨와 친했던 가수들을 무더기로 대마혐의로 활동금지를 시키는 보복성 성격에 당시의 음악시장은 정말 초토화 되버리고 만다.
이때 연예인들은 강제로 고문해서 대마초 혐의를 억지로 씌워 전부 감옥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마약에 대한 개념조차 미약했던 시대 해외 뮤지션이나 히피들이 신중현씨에게 선물로 주고간 대마초 덕에 그는 졸지에 대마초 대부가 되버리는 헤프닝도 있다.
당시 잘나가던 슈퍼스타들이 어느 순간 대마혐에 연류되어 출연금지 음악들의 방송 금지가 되버리고 졸지에 들을 음악들이 사라져버리는 불운한 시대였다. 그로인해 트로트만이 살아남는 시장에서 포크와 락음악들의 초토화는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였다.
여기에 또 재미있는 금지곡은 한대수의 물좀 주소다. 이 노래가 중앙정보부의 '물고문'을 비꼰 것으로 소문나면서 그의 모든 노래가 금지곡이 됐는데 '모두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라고 노래한 <행복의 나라>는 '그렇다면 지금 불행하다는 말이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버렸다.
http://blog.daum.net/m61menegun/18283519
물좀주소 - 한대수
당시 가장 많이 노출된 대표적인 금지곡 가수들을 열거하면 김민기, 신중현, 송창식, 이장희, 김추자, 남인수, 이미자 등을 들 수 있겠다. 어두운 시대를 헤쳐 나간 눈부신 별들의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영광보다는 고독과 감시가 뒤따랐다. 비극도 있고 우스꽝스런 코미디도 있었다. 한마디로 무소불위의 권력의 힘이 어떻게 왜곡되어 나타나는 지 잘보여주는 것이 바로 70년대의 금지곡들이다.
이제 80년대을 접어들어 금지곡은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확대되어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의 삼입곡도 그 희생물이 되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길종 감독의 명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 <바보들의 행진>과 주제곡 고래사냥의 부활이였다. 그리고, 이 개떡 같은 세상에 스스로 '바보'라 부른 이 영화는 1983년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으로 다시 이어지고, 1984년 직계 자손인 고래사냥을 낳았다.
자 여기에 확실한 반격은 시작된다. '1981'년에 열린 제 5회 대학가요제에서 광주에서 죽어간 전사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대상을 차지해버린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그노래는 정오차의 바윗돌이다. 이 사연이 알려진후 바로 정오차의 바윗돌은 금지곡이 되버린다.
http://blog.daum.net/m61menegun/18283547
정오차 바윗돌
정오차의 바윗돌의 공세이후 가요계에 또다른 공세가 움트기 시작한다. 1976년 분단된 조국현실과 분단을 역이용하여 공안정국으로 몰아가던 서슬퍼런 박통시기에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전남 광주 조선대교수이자 시인이였던 문병란 시인에 의해 직녀에게라는 제목의 시로 첫 시작을 하게된다.
그러나 박통의 죽음 이후 찾아온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 이후 검거망을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윤한봉의 청탁에 의해 문병란 교수와 광주전남 지역에서 같이 활동하던 작곡가 김형성씨가 통일염원의 노래로 작곡을 하였고 이 노래는 미주와 유럽등지에서 해외동포에 의해 불리워지게 되었다.
문병란 교수는 84년 제 3세계 예술제가 열리는 서독 베를린에 들렀다가 거기서 뜻있는 해외동포로부터 악보와 육성으로 부른 테잎을 입수하게 되었고, 보다 더 많은 이들이 불리워질 수 있도록 당시 문 교수의 제자중 한명이였던 연예인 오창규에게 전해지게 된다. 다시 오창규는 지역 가수 박문옥에게 전해져서 새롭게 탄생되게 된다.
그동안의 가곡풍의 비대중적 멜로디을 벗어나고 대중적인 멜로디로 거듭나게 되었다. 가사 또한 문병란 시인의 원작시에 가까우나 대폭 간략화되어 당시 바위섬으로 한참 줏가을 올리던 김원중에 의해 앨범으로 취입이 되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다
또다른 금지곡이 나오는데 한일 우호라는 정치적 이유로 일본의 눈치을 보며 지레 겁먹고 금지곡을 시킨곡이 있다. 바로 전국민의 애창가요이자 애국심 함양의 노래 독도는 우리땅역시 금지곡으로 묶여야 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83년 7월부터 11월까지 4개월 동안 금지곡으로 정해졌다. 82년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 독도 표기 문제에 대한 시정 조치 통보(83년 6월)와 83년 8월 12차 한·일 정기 각료 회담을 위한 반일 감정의 악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80년대 후반 금지곡중 무엇보다도 빛나는 부활의 곡이 있었으니 가장 아름답게 부활한 곡은 누가 뭐라 해도 김민기의 ‘아침이슬’이다.
71년 만들어져 양희은을 통해 알려졌지만 72년 김민기가 서울대 신입생들에게 데모 노래인 ‘해방가’를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어 그가 만든 대다수의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족쇄를 차게 된다.
하지만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고, 민주화 상징의 노래로 시위장에서 사랑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바로 민주주의을 염원하는 뜨거운 심장들과 함께 하면서.....
http://blog.daum.net/m61menegun/18283586
김민기 버젼 아침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