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동경 시내까지는 1시간 이상을 달려야 한다.
13시 33분에 찍은 사진. 비가 흩뿌리는 날씨, 아니나 다를까 몇가지 일정이 생략된다.
동경대와 산시로 연못, 신주쿠에 있는 동경도청(都廳), 나로서는 적잖이 김이 빠진다.
급한 대로 점심을 먹고, 그런데 마수걸이가 묘지다, 그것도 공동묘지.
이번 기행의 주인공이요 일본 근대문학의 개척자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의 묘다.
나쓰메는 성이고, 이름 소세키(漱石)의 한글발음은 이상하지만 뜻은 풍아(風雅)하다.
중국고전의 ‘枕流漱石’에서 따왔다는데,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를 한다는….
일반인의 묘석들. ‘元田家之墓’,‘中村家之墓’…. 아무개 아무개 집안묘지.
소세키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 집안이 분골을 합장한다는 얘기다.
죽어서도 정답게 지내려고.
그리고 무덤이 양택(陽宅)에서 뚝 떨어져 행사 때마다 원정을 가다시피 하는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시내 곳곳에 음택(陰宅)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옆에서 식당을 차려놓고 희희낙락하고 있으니.
골목길이 아늑해 보인다. 내려서 휘적휘적 걷고만 싶다.
중국집에선 짜장 냄새도 날 것 같은데. 여행이란 게 뭐 별것인가.
그냥 걷고 보고 느끼고, 게다가 먹고 마시고 그런 것이 아닐까.
소세키산방기념관 입구. 비가 그쳐 다행이다.
우리 일행인갑다, 색조의 앙상블도 그만이군!
산방(山房)이란 우리의 '서재'란 개념이란다.
들어서려니 좀 켕기는 데가 있다. 예습을 별로 못해온 것이다.
옛날에 들은 얘기로, 일본인들은 외국 나갈 때 일 년 전부터 공부를 한다던데.
간단한 인터넷 검색 외엔 준비한 것이 없으니….
소세키 신주쿠(新宿)구립공원.
산방기념관 건물에 약간의 야외 공간을 보태서 공원이라 이름하고 구청에서 관리한다.
모든 게 깔끔하고 운영이 여유로운 것 같다.
소세키의 처녀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말하자면 일본 근대문학의 신호탄인 셈이다.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의 위선을 고발했다는데,
명치38년(1905년)에 초판본 상권이 발간됐다면, 노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 아닌가.
작품명을 일별해보면, 도련님, 풀베개, 피안이 지날 때까지, 마음, 산시로(三四郞, 삼룡이?) 등등.
하여튼 덴노이카 반자이(天皇陛下萬歲, 천황폐하만세)를 외치는 체질은 아니었는가 보다.
뒤뜰이 넉넉하다. 나그네가 막간의 휴식을 취하기에는 안성맞춤이랄까.
안내판은 옛날 이 자리에 있었던 소세키 건물의 기초를 설명하고 있다.
고양이의 무덤이라고 돌을 몇 개 얹어놓았는데, 난 무심해져서 지나치고 만다.
기념관에 들어서서도 마음만 바쁘다. 짧은 일어 실력으론 자료들의 제목 정도를 읽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고. 그것도 금방 까먹고 마는 것을….
나쓰메 선생님, 대구에 가서 더 공부하겠습니다. 하여튼 이곳 산방에서는 사진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산방을 나서며 아담한 단독주택 옆을 지난다.
자꾸 들여다 보고 싶은 것은 무슨 심리인가. 개 견(犬)자가 두 개나 눈에 띈다.
일행 몇 사람이 같이 지나다가 짧은 탄성을 낸다. 조심하라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아니겠는가.
언뜻 두 가지가 연상된다.
고베 지진 때 일본인들이 지구촌으로부터 받은 명예로운 타이틀, ‘인간정신의 진보’.
최근에는 러시아 월드컵에서 일본의 선수와 관중이 보인 청소 매너.
유명한 츠타야(蔦屋)서점이라는데, 빌딩서점이다.
2층부터 6층까지. 츠타(蔦)는 담쟁이란 뜻인데 뭔가 고풍스런 울림을 준다.
이곳이 신주쿠 본점이라니 동경에만도 여럿 있는 모양이다.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곳이라나.
브런치에 스타벅스에, 그밖에도 오만가지 잡동사니가 섞여있는 공간.
좁은 계단으로 오르락 내리락, 나의 아날로그 머리로는 정신만 시끄럽다.
여긴 아예 반쯤 누워서 책을 보는 곳, 나 같으면 잠만 올 것 같다.
창밖의 전망도 있고 해서 특히 여성들에겐 좋은 포토존인 듯.
이곳은 시간당 기본요금이 540엔, 만만찮은 금액이다.
근래 하도 책을 안 읽으니까 이런 걸 만들었다는 가이드의 설명.
하긴 책을 안 읽으면 일본도 없지 않을까 싶다.
서점에서 길바닥으로 하강, 해방된 느낌이다. 걷다 보니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전부 먹자판이다. 5층에 도루코 요리 빠묵카레?
터키(Turkey)의 일본 발음은 도루코가 될 수밖에 없고,
빠묵카레라면 그 옛날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연애한 온천지방 이름인데?
그리고 뭣 눈에 뭣만 보인다고, 7층에 기원이 있구나!
만약 자유여행이었다면 나는 무조건 7층에서 한일전을 벌렸을 것이다.
아서라, 칠십 셋을 산 공자님은 ‘칠십에 종심소욕뷸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 했거늘….
저녁 먹으러 가는 길. 일본은 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많단다.
덕분에 거리 구경은 자동으로 하게 되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신호가 바뀌자 밀물처럼 흐르는 인파….
드디어 첫 날 만찬에 등장하는 샤브샤브.
소고기과 돼지고기라는데 침침한 불빛 아래 구분을 못하겠다. 세상을 헛살았나.
육수 그릇은 세수대야만한데 판이 너무 소박하다. 찌개다시가 영 없네, 불쑥 혼잣말을 하다가 만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첫사랑은 잊지 못하는 법, 까마득한 옛날 충청도 수안보에서 먹은 꿩 샤브샤브를 잊을 수 없다.
각설하고 샤브샤브의 어원. 원래 태국에서 몽골로 전해졌다가
1952년 일본 오사카의 한 요리점에서 ‘샤브샤브’란 일본어가 등장하게 되었단다.
‘한국 전통’의 이름을 단 안동소주와 한복도 몽골이 지배하던 시절 넘어온 것이라는
권위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세상은 돌고 돈다는 얘긴가.
마침 대구문협의 핵심멤버들과 앉게 된 자리, 무척 행복한 저녁을 먹은 셈이다.
♣ ‘찌개다시’는 찌개와는 상관없는 순수 일본어로,
‘입매로 내놓는 간단한 안주’란 뜻의 ‘쯔끼다시(突出)’의 변음이라 하니 나부터 쓰지 말아야겠다.
밥만 잘 먹으면 뭘 하나. ‘빵만으론 살 수 없다’는 말을 이럴 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곳은 도쿄도 남쪽의 시나가와구(品川區),
촌놈 잠시 밖을 혼자 나가보니 비도 오고 겁도 나고, 마땅한 장소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한 문인들이 아닌가.
어찌어찌 3성급인 호텔방에서 조촐한 행사가 열린다.
고국에서 가져온 발렌타인 한 병이 좌중을 압도하는 가운데 일본소주(燒酎) 한 팩은 어째 초라하다.
현지 조달한 삿포로 맥주가 그런대로 구색을 맞추는데, 안주가 좀 부실하네.
마른안주와 과자부스러기가 전부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안주가 얼마나 많겠는가.
나로서는 역대급 호강이 받쳤다.
그나저나 소동파(蘇東坡)의 배반낭자(杯盤狼藉)로다. 술잔과 소반이 어지러이 널려있으니….
자정쯤 방에 들어왔나.
TV를 켜니 프랑스와 우루과이의 월드컵 8강전이 한창인데, 화면은 후반전 2분 43초를 표시하고 있다.
새벽 3시부터는 브라질과 벨기에의 8강전. 둘 다 보면 잠을 제대로 자기는 글렀다.
어쩔 것인가. 술의 힘이 작용한다.
싱글룸을 신청하게 된 것도 박카스의 신이 인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축구가 다 끝난 후 새벽 4시 53분에 찍은 사진.
새벽이 아니라 아침이다. 시나가와 프린스호텔의 북창이 완전히 밝았다.
그래도 눈을 좀 붙여야 하나.그러면 아침밥은? 또 선택을 해야 한다.
아깝지만 호텔 조식은 거르고 한두 시간쯤 잠을 자고,
이렇게 동경의 첫날밤은 절대 자유 속에 제법 빡빡한 일정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