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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 9개국 탐방
날짜:2011년 9월 7일 수요일~18일 일요일 11박 12일
여행국: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마케도니아,알바니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2011년 9월 7일 인천공항, 카타르공항,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 인천공항 출발
여행은 7일부터지만 미팅은 9월 6일 밤10시다. 카타르항공 QR883 밤 12시 50분 도하행 비행기로 여행을 시작한다. J8창구에서 가방을 부치고 111게이트로 이동했다. 별관으로 모노레일을 타고 갔다. 보딩은 밤 12시~12시 20분까지다. 도하까지는 9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차는 -6시간이다. 밤을 날아서 간다. 도하에서 다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행을 환승해야 하는데 가방은 루마니아 부카레스트까지 한번에 수송된다. 도하에는 새벽 4시 50분 도착 예정이다. 도하에서 부케레스트행은 오전 8시 25분 카타르항공 QR943이다. 카타르항공은 2,4,2 좌석제다. 우리 부부는 39A, 39B로 창가 좌석이다. 의자 뒤에 모니터가 있다. 5-Star카타르항공은 역시 쾌적하고, 특히 착륙시 소음이 좋고 안정적이었다. 비행기 동체길이가 길고 날개가 크다. 여행 첫날이 좀 힘든 일정이다. 그러나 발칸반도는 미지의 순수한 땅이기에 보람되고 기쁜 여정이다.
* 카타르 도하공항에서 루마니아행 환승
기내식 2회 제공받으며 자면서 왔다. 아시아 대륙을 밤새 날아왔다. 루마니아로 가기 위해 도하공항에서 환승한다. QR943이며 현지시각으로 오전 8시 25분 비행기다. 도하는 새벽 4시 25분 정시에 도착했다. 현지 온도는 33도다. 밖은 덥고, 공항 안은 시원하다. 2~3시간 여유가 있어서 휴식했다. 탑승 게이트는 3번이다. 도하공항 2층 휴게실도 상당히 넓고 좋다. 부카레스트행 오전 8시 25분 비행기 보딩은 7시 40분이다. 지금 시각 5시 30분, 새벽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1층에는 면세점이 있다. 도하 가격표에서 4.5로 나누면 유로화 가격이다. 45라면 10유로의 가격인 셈이다. 결코 싸지 않은 물가다. 2층 로비에는 하얀 천의 옷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른 이슬람교의 직원이 있다. 카타르는 사막 국가다. 사막에 건설한 나라다. 여기는 카타르 도하공항이다. 사막에서 보는 일출이 장관이다. 사막에 세운 건물들도 비경이다. 산도, 풀도 없는 망망한 사막이다. 승객을 실어 나르는 버스가 연달아 다닌다. 분주한 공항의 아침 풍경이다. 온통 카타르항공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다. 우리의 비행기는 정시보다 1시간 지연하여 이륙했다.
* 카타르 도하에서 루마니아 부케레스트 가는 항로
카타르 도하에서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로 가는 항로는 끝없는 사막이다. 중동의 사막 지대가 창밖에 전개된다. 풀 한포기 없는 건조한 풍경, 우리나라라면 푸른 나무가 가득일 텐데, 나의 조국은 축복의 땅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사막으로 이루어진 산도 진풍경이다. 가끔은 물이 고인 호수 부근에 민가 마을도 보인다. 사막인데도 반듯반듯 구분지어 놓았다. 염전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티그리스강이 비행기 모니터에 나오고 강줄기가 창밖 지상에서도 보인다.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인 중국의 황하강, 인도의 갠지스 강, 이집트의 나일 강,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그 중에서 1개의 강을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큰 감동이다.
비행기는 흑해로 들어선다. 아까와는 다르게 푸른 산자락과 구름이 흑해를 둘러싸고 있다. 흑해는 이스탄불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하며 본 바다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리도 보았었다. 모니터 지도에 내가 여행한 암스테르담, 헬싱키, 리스본, 카사블랑카, 등이 나온다. 흑해만 넘어가면 바로 루마니아다. 지금 타고 가는 QR943 카타르항공은 3,3 좌석제로 우리 부부는 30E, 30F로 맨 뒤의 창가 좌석이다. 그래서 5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지상을 다 관찰할 수 있었다. 한국시간 새벽 4시경, 현지시간 오전 10시경 기내식이 나왔다. 치킨, 감자튀김, 계란야채말이, 치킨소세지, 빵, 쨈, 요쿠르트, 과일, 주스 등 좁은 식판에 골고루 한가득이다.
집에서 2011년 9월 6일 화요일 오후 7시 30분에 나왔는데 지금 한국시간으로 2011년 9월 7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이다. 24시간 동안 비행기 탑승과 환승 대기시간으로, 거의 하루를 상공에서 머물고 있다. 루마니아 부케레스트까지는 아직도 1시간은 날아가야 한다. 유럽 전역을 여행할 때, 날아간 영토는 시베리아 상공이었는데 이번 발칸반도 여행은 기막힌 비경의 사막지대를 날아간다. 이런 여정의 힘이 나를 세계로, 세계로 이끌고 있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항 도착
도하에서 장애인 운동선수들의 탑승으로 휠체어까지 싣느라 1시간 늦게 이륙했는데 부카레스트에는 거의 정시에 착륙했다. 현지시각으로 오후 2시경이다. 청명한 날씨다. 루마니아 영토는 반듯한 경작지가 많았다. 나무숲도 많았다. 산이 없는 평야였다. 부카레스트 공항은 아담하다. 버스에 승차하니 온도가 29도라고 뜬다. 현재시각 오후 2시 50분이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항 주변 풍경
여기는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다. 부카레스트에 있는 이곳 공항의 정식 명칭은 오토페니OPTOPENI 공항이다. 우리를 배웅 나온 버스는 불가리아 차이고, 운전기사도 불가리아인이다. 한국 교포 가이드는 1998년에 루마니아에 와서 14년째 거주하고 있단다. 때 묻지 않은 땅이라고 입 소문을 타고 흘러, 좋은 여행지로 꼽히며 찾아오는 관광지란다. 루마니아에는 나무가 많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공항 주변에도 푸른 나무들이 많다. 소박한 건물들도 보인다. 발칸반도의 먼 나라에 왔다는 것에 대하여 가슴 벅찬 순간이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가는 길
아름다운 길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부카레스트 시내에 다다르자 속도를 내지 못한다. EU 가입 후 차량 증가로 도로주행이 복잡해져서 그렇다. 부카레스트는 기쁨이 넘쳐나는 곳, 기쁨이 샘솟는 곳이란 뜻이다. 녹지대 공원이 많다. 목축지대 시절에 목동 이름이 부크레스크였는데 그것에서 유래하여 지금의 부카레스트가 되었다. 카롤1세 때 프랑스 파리의 도시 형태를 본떠 방사형 진입 도시로 발전시켰다. 프랑스 지방과 유사한 지역 이름도 많다. 주변 국가가 모두 슬라브계 민족인데 루마니아인은 라틴계 민족이다. 국명인 루마니아România도 로마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혈질이어서 예술인, 음악가, 조각가 등이 많다. 세계 100대 화가도 많다.
루마니아에는 3가지 유명한 것이 있는데 체조요정 코마네치, 드라큘라, 독재자 차우세스쿠다. 부카레스트는 1977년 대지진과 차우세스쿠 독재자의 도시 개혁으로 자연 파괴,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현재는 아름다운 자연이 많이 손실되었다.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많은 도로의 건설로 유명한 건물도 많이 없앴다. 유럽의 모든 동구 공산권이 무혈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이루었는데 루마니아는 유혈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이루었다. 차우세스쿠가 헬리콥터로 도망간 곳이 혁명광장이다. 지금 그 혁명광장으로 가고 있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혁명광장
혁명광장은 부카레스트의 도심 대로변에 있다. 광장 주변에는 루마니아 초대 왕 카롤1세 동상, 국립중앙도서관, 비밀회의경찰청사, 구 공산당본부, 그리고 건너편에는 왕궁, 왕궁 성당인 정교회 등이 있다. 하얀 색상의 25m 높이 혁명승리 기념비가 오롯하다. 피 흘린 혁명용사들의 조각상도 있고 1400명의 희생자 명단도 새겨져 있다. 체조요정 코마네치를 중앙으로 루마니아의 유명한 축구, 정구 선수 세 사람의 사진도 걸려 있다. 구 공산당 본부 건물 문 3개가 있는 국기 위, 저 발코니에서 차우세스쿠는 연설했다는데 사람은 간 곳 없어도 여전히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저 높은 건물 옥상에서 헬리콥터로 도주했다.
차우세스쿠는 1918년 출생하여 1967년부터 공산당 서기장으로 24년간 온갖 독재를 행해온 독재자다. 시민들의 감시가 있어 왔는데 반정부 데모의 발단은, 헝가리 접경지역인 타미쇼아라의 라슬로 목사가 그의 만행을 헝가리에 보고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독재자는 그것을 무시하고 단속 명령만 내리고는 이란을 방문했다. 돌아와서는 그런 소요를 무마하려고 공산당 노동자 최소 인원만 남기고 10만명의 관제집회를 동원했다. 혁명광장 구 공산당 본부 앞, 바로 이곳이다. 1989년 12월 21일, 총 집결 시키고 공산당 건물 2층 발코니에서 혁명을 연설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차우세스쿠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자 건물 옥상에서 비밀경찰이 총을 발포했다.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피를 본 시민들은 민주화에 동참하여 반정부데모로 폭동을 일으켰으며 차우세스쿠 독재자는 물러나라고 외쳐댔다. 독재자는 옥상에서 헬기를 불러 부인 엘레나와 보좌관 1명을 태우고 도주했다. 의형으로 여겨오던 김일성이 있는 북한으로 날아가려고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부카레스트에서 35Km쯤 떨어진 지방을 날아갈 때, 정부에서는 조종사에게 교신으로 귀환하라고, 멈추지 않으면 발포한다고 명령했다. 고속도로에 착륙해서는 조종사와 보좌관마저도 헬기 운전을 끄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두고 도주해버렸다. 지나가던 농부의 신고로 차우세스쿠는 붙잡혔다. 결국 군부에서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70Km 떨어진 곳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의 변호사도 용서할 수 없다며 변호를 포기하고, 정규군 군인들도 그의 독재에 폭발적으로 반항하며 서로 그 독재자를 총살하는 군인이 되겠다고 나섰다. 차우세스쿠 부부는 1989년 12월 25일 오후 5시 30분에 160여발의 총살을 맞아 벌집 형상으로 처참하게 사형 당했다. 국립묘지에도 못 가고 시민공원 묘지에 그들 부부의 무덤이 있다. 죽어서도 부부는 50m 떨어진 반대 방향에 묻혀 있다. 차우세스쿠 부인을 차우세스쿠2세의 독재자로 세우려 음모해서 그의 부인도 미워하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에서는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묻으면 죽어서도 못 만난다는 말이 있어서다. 북한 김일성 체제를 모방하려고 했다. 루마니아의 유혈혁명 장소였던 이곳, 루마니아 민주주의 초석이었던 이곳, 바라보기조차 두렵고 소슬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위가 처연하다. 정녕 민주화의 바람은 루마니아를 평온하게 이끌고 있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차우세스쿠 궁전
부카레스트 도심을 달리던 버스의 창에 전면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덩이의 건물이 보였다.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아 직감으로 차우세스 궁전임을 알게 해준다. 지금의 모습은 1984년부터 1989년까지 5년간 건축했다. 700명의 기술자가 24시간 동안 논스톱으로, 20만명의 인력으로 2조원을 들여 세운 국방건물 궁전이다. 동서남북으로 동일한 모습이 특징인데 지상으로도 84m, 지하로도 84m, 지상 건물 높이만큼 지하에도 건축했다. 70%만 건설되었고, 지금도 지하 건설 중이다. 방이 3000개나 된다. 전 세계에서 미국에 있는 펜타곤 건물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김일성을 만나고 지은 건물이다. 김일성과는 총 9회 만났는데 의형제를 맺었다. 차우세스쿠 부부가 북한을 방문 했을 때, 그의 부인 엘레나가 김일성 주석궁 큰 건물을 보고 그보다 더 크게 세계적인 규모로 짓자고 하여 지은 건물이 차우세스쿠 궁전이다. 지진이 잦은 루마니아에서 이곳은 지반이 가장 튼튼한 곳이다. 궁전 자리는 부카레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유럽의 ‘작은 파리’라고 불릴 만큼 부유하며 고풍스런 건물이 많은 곳이었는데, 차우세스쿠는 여기 있던 성당 외 모든 건물을 밀어내라고 명령하고 궁전을 건축했다. 그로 인해 당시 부카레스트 도시의 1/3이 허물어진 것이다.
궁전 앞에는 큰 광장과 샹드리제 모방 거리까지 만들어 놓았다. 광장에서 마이클젝슨의 공연도 열렸단다. 웅장한 건물은 웬만큼 떨어진 거리인데도 사진기에 다 담아지지 않는다. 한참을 걸어간 샹드리제 모방 거리에서나 전경이 겨우 담겼다. 독재와 잘못 이끌어준 아내로 인하여 패망한 정치로 낙인 찍히며 비참하게 죽어간 한 사람의 슬픈 역사 현장이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챠우세스쿠 궁전 앞 샹드리제 모방 거리
궁전에서 조금 걸어가니 길게 뻗은 도로가 있다. 울창한 나무가 하늘 높이 솟구치고 중앙 분리대에는 분수가 솟구친다. 루마니아주 41개를 상징하는 41개의 분수대다. 상당히 넓은 폭의 큰 도로다. 프랑스의 샹드리제 거리를 모방하여 건설한 도로다. 최대 번화가다. 백화점, 주상복합건물, 부카레스트 대학 건물 등 양 옆으로 즐비하다. 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다. 모두 차우세스쿠가 건설했다.뒤로는 오후 4시를 가리키는 시계탑과 함께 차우세스쿠 궁전이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다. 인도에는 자전거 전용도로 표식까지 그려놓아 질서정연하다. 도로변 공원에 루마니아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나와 휴식하는 모습이 정겹다. 도로의 맨끝에는 아주 우람한 분수가 힘차게 분무한다.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비경의 거리다.
*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 시가지
부카레스트에는 전차, 버스, 지하철 3가지 교통시설이 있다. 도로에 전차가 많이 다닌다. 공군위령자탑 꼭대기에 십자모양의 사람 동상이 높이 세워져 있다. 모스크바 대학을 모방한 건물이 있는데 현재는 루마니아 프레스 건물이다. 가로수가 보리수다. 도심 공원이 크고 많다. 세계1차대전 승전기념으로 세운 개선문이 오롯하고 그 곁에는 아주 큰 공원을 조성했다. 광장도 많다. 루마니아의 수도이며 ‘작은 파리’라고 불리는 부카레스트는 승리의 광장에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도로들이 마치 파리 개선문에서 뻗어나가는 거리를 연상시킨다. 속담에 ‘서두르면 망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루마니아 국민성은 낙천적이고 게으르단다. 학창시절 책에서 배운 공산국가 루마니아, 그러나 굶주리고 헐벗은 모습의 도시는 결코 아니다.
* 브라쇼브로 이동하며 본 루마니아 들녘
부카레스트에서 브라쇼브로 이동한다. 부카레스트에서 브라쇼브까지 버스로 2시간 30분 소요된다. 오늘 그곳에서 유숙할 것이다. 소문과는 다른 루마니아라고 한다. 집시가 없고 깨끗하다. 자본주의지만 사회주의 잔재로 박물관 등 관람시 철저하게 시간제로 퇴근한다. 발칸은 아직 관광개발이 안 되어 있다. 루마니아는 영어로 ‘로무니아’인데 ‘로마 사람들의 언어와 풍습을 지닌 토지’란 뜻이다. 로마가 2차 침공으로 서기 105년 겨울에 언 다뉴브강을 건너서 쳐들어왔다. 그 당시 왕은 자결했다. 그때부터 다치아Dacia 왕국과 로마인이 합병했다.
루마니아는 유럽 중간 면적의 크기로 유럽에서 7번째 큰 나라다. 인구는 2천 7백만명이다. 이웃 나라 불가리아는 9백만명이다. 카르파티아 산맥, 구릉, 평원으로 형성된 지형이다. 2700m의 산이 있다. 부카레스트에서 1시간까지는 산이 없다. 나무 숲, 지평선의 나라다. 유럽 젖줄이며 9개국을 거치는 도나우강이 루마니아를 마지막으로 거치며 흑해로 흘러간다. 원유가 동유럽 최대 산유국이다. 또한 아름다운 산과 강, 평원의 소유국이다. 지금 유전지대를 지나고 있다. 들녘에 커다란 송유관 등 유전시설이 세워져 있다. 지하자원까지 축복 받은 나라다. 로마도 금생산을 위해 침공했다. 2007년에 EU에 가입했다. 그때부터 독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와 함께 영어를 사용한다. 87%가 루마니아 정교회 교인이다. GNP 8천불, 평균 월급이 450유로다. 27개 EU 가입국 중 경제 수준은 뒤에서 2번째, 물가는 앞에서 5번째로 어려운 경제상황이다. 차우세스쿠 시절부터 경제 정치로 물가가 비싸다. 모두 수입해서 사용한다. 고기와 빵만 싸다. 물가 상승 우려로 EU의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레이 화폐를 쓴다. 1레이는 4유로의 가격이다.
루마니아 땅은 한반도의 1.1배다. 북위 43도 위치인데 한국과 날씨는 유사하다. 여름 6시간, 겨울 7시간 시차다. 여름에는 43도까지 기록의 고온이다. 5월에 반팔을 입는다. 습도가 없어서 고온을 견딘다. 10월이면 눈이 내리고 겨울에는 영하 25도까지 최저기온을 기록한다. 1995년 대우조선, 대우전자가 최초로 진입했고 지금은 삼성까지 들어와 있다. 200명의 교민이 사는데 80%는 상사주재원이다. 순수 교민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중 하나가 가이드 가족이란다.
끝없는 옥수수 밭이 이어지던 들녘이다. 루마니아의 1/3이 평야다. 식용, 동물사료용으로 옥수수, 밀, 해바라기를 다량 재배한다. 원래 1차산업국으로 농업이 주업이었다가 차우세스쿠 시대에는 2차산업국으로 공업을 발전시키다가 그의 처형 후 다시 1차농업국이 되었다. 대기업농은 500ha 소유로 약 150만평의 농사를 짓는다. 그런 광활한 평야지대가 끝나고 우람한 산녘에 접어들자 갑자기 비가 온다. 무서울 만큼 세차게 온다. 산중 철로도 곁에 가까이 보인다. 철로변에는 목재가 쌓여 있다. 산자락의 민가와 화물열차도 있다. 평원과 산맥의 절경을 동시에 보는 루마니아 여정이다.
* 루마니아 휴게소
산 깊은 마을의 아름다운 휴게소에 정차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버스는 2시간 30분마다 휴식을 취해야 하는 교통규칙이 있다. 가이드는 화장실을 학교라고 지칭하며 잘 다녀오라고 하여 우리는 웃었다. 그러나 휴게소 건물이 참으로 아름다워 학교라 해도 손색이 없다. 색상도 곱고, 꽃 화분이 건물마다 걸려 있다. 화단에도 고운 꽃들이 가득하다. 앞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우람한 산이 있어 더욱 비경이다. 깊은 심호흡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이국의 정취를 체감했다.
* 루마니아 산중 도로
루마니아는 2007년 이전만 해도 특수지역이었던 곳이다. 그 이후부터 관광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럽 외곽의 발칸반도 국가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곳이다. 버스는 루마니아의 알프스인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길로 접어든다. 아슬한 산길을 넘어가는 운전이다. 운무가 저 아래 산계곡을 휘감으며 뽀얗게 피어오른다. 부카레스트 와곽에서 보았던 그리도 드넓은 평원은 먼 이야기처럼 아련하고 지금은 깊은 산중 도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발칸국가에서는 특히 여권 분실을 조심해야 한다. 서유럽 소매치기가 발칸에 많이 들어와 있다. 알바니아에서 여권을 분실하면 그리스까지 가야하고, 마케도니아에서 여권을 분실하면 헝가리까지 가야한다. 또한 발칸은 하루에 사계절이 들어 있다. 그래서 매일 포근한 잠바와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 시간약속, 여권주의, 필수품준비를 당부한다.
* 루마니아 산정 십자가
산을 넘어가자 산길 도로변 나무아래에 과일 장수가 수박을 수북이 쌓아 놓고, 다른 과일과 함께 좌판을 벌이고 있다. 산자락 아래 아담한 마을이 있고 산정 높은 곳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1차대전 때 승전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종교심을 키우려고 세웠다. 브라쇼브 시내에 접어들자 공원에는 시민들이 한가로이 휴식하고 있다. 여기는 산악지대로 해발 600m의 고지마을이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2~3m가 쌓인다. 좋은 묘지는 시내에 있다. 묘지에 대하여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다. 사망시에는 부조금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결혼시에는 많이 받는다. 빈부 격차가 극심하다. 10%의 부유층이 있는데 그들에게 자가용 자랑은 부자가 아니다. 개인 헬리콥터 소유자가 부자 축에 든다. 마당에서 헬리콥터를 탑승한다. 500억 소유자도 있다. 1989년 국가소유였던 땅을 모두 과거에 개인 소유 문서가 있을시 다 돌려 주었다. 남은 땅만 국유지다. 나무 벌목 사업자가 신흥 부자다. 브라쇼브 시가지에도 나무가 많다. 아름다운 풍경의 산중 도시다.
* 루마니아 브라쇼브 호텔 투숙
브라쇼브에 온 것은 인근 지역에 있는 브란 지방의 드라큘라성을 가기 위해서다. 내일은 모닝콜 6시 30분, 7시 조식, 8시 출발이다. 로비는 유럽식으로 0층이다. 로비층을 G로 표시하기도 한다. 1층이 한국의 2층이다. 이곳 호텔에서 로비층은 PR로 표시되어 있다. 석식은 세팅 메뉴로 세르비아식 볶음밥이다. 감자, 돼지고기, 과일 등이 나와서 맛있게 먹었다. 우리 부부의 방은 306호다. 발칸반도의 국가는 모두 전압이 220V이며 한국의 전기코드와 동일하여 좋다. 산 아래 붉은 지붕의 집들이 동화 속 풍경처럼 아름답고 달이 하늘에서 더욱 고운 풍경을 자아낸다. 먼 나라, 발칸반도 여행의 첫날밤이다.
2011년 9월 8일 목요일 루마니아 드라큐라성, 팔레슈성
* 루마니아 브라쇼브 호텔 출발
호텔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방에서 보아도 그렇고 밖에 나가서 보아도 산을 둘러싸인 마을이 아담하고 예쁘다. 고운 색상이 집들의 푸른 산과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산바람이 불고 날씨가 쌀쌀하다. 어제의 낮 기온과는 일교차가 크다. 이제 드라큘라성이라고 불리는 브란 성으로 간다.
* 루마니아 드라큘라 성 가는 길
드라큘라 성은 브라쇼브에서 남서쪽으로 32km 떨어진 브란 마을의 산꼭대기에 있다. 브라쇼브 시가지를 지나간다. 도심 곳곳에 잘 가꾸어 놓은 화단이 화사한 비경을 선사한다. 건물들로 웅장하며 유럽풍의 육중한 양식이다. 아침 출근시간이라서 차와 사람이 많이 보인다. 브라쇼브는 루마니아 5대 도시 중 하나다. 공업도시로 만년필을 최초로 만든 곳이다. 루마니아는 인구 40만명을 넘는 도시가 없다. 기초응용학, 의술 쪽으로 기술이 높은 나라다. 신장결석 방출의료 최초국, 당뇨병 논문 최초 보고국이다. 항공기술자, 과학자가 많고 중화학공업이 발달했다. 또 대농업국으로 보통 500ha씩 소유하고 있으며 농지정리가 잘 되어 있어 기계로 농사짓는다. 가축으로는 말이 농사짓고 소는 우유만 생산한다.
산간지방은 목축업을 한다. 목초지가 많다. 지금 지나는 곳이 산간지방으로 목초지대다. 들녘에 동물이 보이고 목초를 쌓아 놓은 농가도 보인다. 동물 우리를 둘러쳐 놓은 곳도 있다. 푸른 초지가 광활하다. 루마니아는 1948년 북한과 수교를 맺었다. 한국보다 먼저 북한을 알았다. 남한을 잘 모른다. 남한과는 1990년에 수교를 맺었다. 대우 자동차가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시골 마을을 지나 좁은 도로를 따라 드라큘라 성이 있는 브란 지방에 도착했다.
*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성
카르파티아 산맥의 북쪽 지방 브란에 있다. 작은 호수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중세마을이다. 드라큘라 성도 본명은 브란 성이다. 브란 성은 루마니아 남부 왈라키아 지역과 중북부 트란실바니아를 잇는 교통 요충지 브란 통과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했다. 1377년에 착공해서 1382년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꾸준히 증개축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 드라큘라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루마니아 제1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박물관에 드라큘라 영주가 사용하던 고문 도구를 비롯하여,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물건들을 진열하고 관람객에게 내부를 공개한다. 드라큘라는 아일랜드의 작가 스토커가 1897년에 발표한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 Dracula’ 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 소설은 책뿐만 아니라 연극으로,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신화적 괴기 소설이다.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한 고성에 혼자 사는 드라큘라 백작이 있었는데 영국인 하커가 이 성을 방문하여 백작이 낮에는 관 속에서 자고 저녁이면 관에서 나와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흡혈귀에 피를 빨려 죽은 피해자 역시 흡혈귀가 된다는 무서운 이야기다. 이 드라큘라 성을 이해하려면 시대적 배경과 그 당시의 사회에 대하여 알아야겠기에 네이트의 지식창에 올려진 자료를 참고했다.
드라큘라는 뱀파이어류 소설 주인공의 원조다.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저술하던 19세기 후반은 교통수단이 발전하여 귀족과 갑부들이 세계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특히 당시 최강대국이던 영국인들은 세계의 다양한 풍물에 대한 관심이 한참 고조되고 있던 때라 외국의 괴담을 주제로 한 괴기 소설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스토커는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 당시 유행하던 흡혈귀(뱀파이어) 전설과 악명 높은 악마의 자식인 블라드 드라큘라 쩨뻬쉬 공작의 명성을 적당히 조합하여 뱀파이어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를 집필한 것이다. 이 소설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유사 작품이 만들어져 '흡혈귀(뱀파이어) 문학'이라는 장르를 형성하기에 이르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스토커가 저술한 드라큘라의 모델인 블라드 쩨뻬쉬는 1431년에 태어나 1476년에 죽은 루마니아의 장군이자 작가다. 당시 루마니아가 위치한 발칸반도는 오스만 트루크의 이슬람 세력과 그리스도교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쩨뻬쉬는 불가리아의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있던 루마니아의 옛 왕국 중 하나인 발라히아 왕국의 도시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 트란실바니아는 트루크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을 트루크 즉 터키에서 볼모로 지내게 된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몸값을 지불하여 다시 발라히아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헝가리 제국 군대가 쳐들어와서 다시 쩨뻬쉬는 헝가리로 몰모로 잡혀 간다. 1456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온 쩨뻬쉬는 왕위 계승자로 인정을 받은 다음 왈라키아 지방을 다스리는 공작, 왈라키아 공으로 추대된다. 그 당시 루마니아는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몰도바의 세 지방으로 구분되었다.
그는 왕위, 왈라키아 공에 오른 후 군사를 조련하여 터어키와 헝가리를 상대로 용감하게 전쟁을 했다. 특히 1461년에는 트루크의 술탄에 대한 공납을 거부하여 이듬해 메메트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군대를 이끌고 게릴라전법으로 저항하여 나라를 지켜냈다. 볼모 생활 중 적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 가득히 담고 있던 쩨뻬쉬는 트루크와의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포로들을 길 위에 나란히 눕혀 놓고 가시가 박힌 큰 바퀴를 사람 몸 위로 지나가게 하거나, 기다란 창으로 항문을 깊게 찔러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상태 그대로 길가에 세워 두어서 창이 포로의 몸무게로 인해 점점 파고들어 결국 입으로 나오게 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인 쩨뻬쉬는 루마니아어로 '가시,' 또는 '꼬챙이'를 이르는 말로 바로 이 잔인한 처형법에서 기원했다. 포로들이 창에 꿰어져서 길 양쪽에 줄줄이 세워져 있는 장면을 본 트루크군이 그 잔인함에 질려서 왈라키아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한편 그는 내정에도 힘을 쏟아서 귀족들의 횡포를 누르고 당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독일인 상인의 특권을 제한하여 민생 안정 및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는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훌륭한 정치를 편 성군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독일계, 혹은 게르만계 상인들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자 그들을 역시 꼬챙이로 찔러서 대량 처형하고 그들을 비호하던 400여명이 넘는 독일계 카톨릭 사제들을 산채로 태워 죽였기 때문에 서유럽에는 그가 잔인한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쩨뻬쉬가 드라큘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쩨뻬쉬의 아버지인 블라드 드라큘은 헝가리의 지그문트2세로부터 용Dracul이라는 칭호를 받아 이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불가리아어에서는 명사 뒤에 소유형 어미 a 를 붙이면 '~의 아들'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쩨뻬쉬를 '드라큘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드라큘라Dracila'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 가문은 용의 그림이 들어간 문장을 사용하였는데 불가리아 말로 용은 'dragon' 이라고도 하지만 'dracul' 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dracul에는 용 이외에 '악마'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드라큘라는 불가리아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독일인 상인들의 착취와 트루크의 침입으로부터 구해준 '용의 자식'으로, 트루크인들과 독일인들에게는 자기 민족을 잔인하게 죽인 '악마의 자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한편 쩨뻬쉬는 트루크가 내세운 다른 왈라키아공, 대립공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현재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루마니아 남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데아르제쥬시에 소재한 브란성은 실제로 블라드 쩨뻬쉬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다만 이 성이 바위 위에 세워졌고 옛날부터 트란실바니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곳으로 악명을 얻었던 데다가 루마니아 정부의 드라큘라 관광지 개발 계획과 맞물리면서 드라큘라 성으로 소문이 난 것이다. 한편 아직도 루마니아 남부 포에나리성 인근의 아레프 마을에서는 1년에 두차례씩 블라드 쩨뻬쉬를 위한 축제를 벌인다.
드라큘라 성이 있는 마을은 아름다웠다. 입구에 예쁜 기념품 상가가 즐비하고 높은 곳에 오롯이 서 있는 성이 비경이다. 입장권을 사서 관리하는 노인에게 주고 들어갔다. 조금 언덕진 길을 걸어서 올라가니 십자가 돌비가 세워져 있다. 서은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내부로 들어서니 백작이 살았던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드나들던 빙그르 돌아가는 좁은 계단과 벽면의 출구, 우물 등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꽃 화분을 장식하여 조금은 두려움을 덜어주기도 한다. 송곳니 두 개로 피를 빨아 먹는다고 알려진 무서운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드라큘라가 싫어하는 것 3가지는 마늘, 십자가, 햇볕이다. 한 마디로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 전쟁영웅 백작으로 지옥에서 온 용의 아들이며 왈라카이 공국의 영주였던 아버지를 처형한 배반자를 모두 항문에 말뚝을 막아 죽이는 말뚝처형 살인자로 변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기초로 탄생된 소설이다.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인 블라드 공작이 유폐되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이 성은 15세기에는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 왕자의 소유가 되었다. 체페슈 왕자는 영국 소설가 브람 스토커에 영감을 줘 소설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백작으로 탄생했다. 왈라키아 공국의 영토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까지 미쳤고, 전 유럽 대륙의 교회에선 드라큘라를 칭송하는 성가들이 불려지기도 했다. 루마니아 공산권 시절에는 정부 소유였으나, 1920년 브라쇼브 주민들이 루마니아 마지막 왕의 조카 폰 합스부르크의 할머니인 마리아 여왕에게 성을 기증했다. 폰 합스부르크씨는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냈고 아주 따스한 추억들이 있다고 했다. 조부가 주인이었으며 왕비 마리아의 여름 별장이다. 드라큘라 성은 현재 개인 명의로, 시가 900억원이다. 드라큘라 성을 관람하고 1시간 정도 이동하여 시나이아의 팔레슈 성에 간다. 팔레슈성은 루마니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그리고는 중식 후 다시 부카레스트를 경유하여 불가리아로 간다. 루마니아에서 꼭 보고 싶었는 드라큘라 성을 다 관람하고, 다시 평온한 호수와 울창한 숲의 언덕길을 내려오며 루마니아인들의 사고처럼 드라큘라는 무서운 자가 아니라고 가슴 속에 다시 저장하였다.
* 루마니아 시나이아로 이동
팔레슈성이 있는 산간지방 시나이아로 간다. 드라큘라 성에서 시나이아까지는 75km다. 들녘에 목초지가 많다. 소떼, 양떼, 목부도 평화롭게 보인다. 미개발로 경관이 좋다. 마을 입구에는 공동묘지도 있다. 붉은 기와지붕의 마을이 아름답다. 도시가스관이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다. 산을 넘어 간다. 산세도 목조 건물의 예쁜 집들도 스위스와 유사하다. 벌목한 나무가 도로변에 쌓여 있다. 카르파티아의 진주라 불리는 루마니아 최고의 산악 휴양도시 시나이아에 도착했다. 자연 속 아기자기한 중세 도시로 시가지 전체가 아주 고풍스럽다.
* 루마니아 펠레슈 성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갔다. 이곳일까 하고 본 건물은 카페로, 카페조차도 성처럼 지어놓았다. 아직 보이진 않지만 예사롭지 않은 성이라는 예감이 든다. 길목에는 여인들이 과일을 팔기도 한다. 우람한 나무들 향취에 심호흡하며 걷고 있을 때,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르는 우아한 자태의 펠레슈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위가 카르파티아 산맥 능선으로 싸여 있어 푸른빛이 스며 들며 고요한 비경이다.
시나이아의 펠레슈 성은 루마니아 국보1호로 사계절 관광객이 많다. 카르파티아 산맥 봉우리와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주변 돌길이 운치를 더해준다. 카롤1세가 1875에서 1883년까지 나무로 지은 루마니아 왕실의 여름별궁으로 외경과 내경 모두 장관이다. 정교한 장식을 새긴 나무로 만든 건물 외관은 물론 건물 내부와 정원, 주변경관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독일 르네상스 양식의 진수이며, 이탈리아와 영국의 르네상스 양식과 로코코, 터키식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양식까지 대규모 건축물이다. 카롤1세는 이곳을 만들 때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것들을 사용하였으며, 전기로 천정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장치, 유럽 최초의 난방시스템 장치,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책장으로 위장된 비밀의 문 등 놀라운 내경이다. 170개의 방이 있으며, 도자기, 금은 접시, 크리스털 샹들리에, 멋진 조각들, 그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가구들까지 모두 호화롭다. 당시 유럽의 가장 중요한 2000여개의 그림들이 붙어 있는데,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를 비롯하여 10명의 유럽 작가들에 의해 그린 것이다.
내부 관람을 마치고 외경을 둘러보았다. 어마어마한 비경이다. 드넓은 정원에 수많은 조각상들과 나무, 꽃들이 성을 더욱 빛내고 있다. 펠레슈 성은 아득한 높이로 고고한 여인처럼 하늘 향해 오롯이 서 있다.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아 돌아서지지 않는, 오랜 기억 속에 남을 명소다.
* 루마니아 시나이아 시가지
펠레슈 성을 관람하고 다시 산길을 걸어 나왔다. 도로변에 가스관이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신기하다. 이곳 시나이아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휴식하며 시가지를 구경하기도 했다. 해발 2천 미터의 산악지대, 카르파티아 산맥이 둘러쳐진 산자락 아래 집들이 동화 속 궁전처럼 곱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귀족 저택이 많은 귀족 휴양지다. 건물에는 꽃 화분을 층마다 걸어두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시나이아는 인구 3천명으로 루마니아 기차가 오는 도시다. 부카레스트까지는 1시간 30분 걸린다. 시나이아를 떠나며 도심을 지날 때, 나무와 꽃들의 아름다운 도시임을 더욱 깊이 새겨주었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수도 가는 길
다시 부카레스트로 간다. 불가리아로 가는데 부카레스트를 거쳐 가는 것이다. 또한 루마니아 교포 남자 가이드는 부카레스트에서 헤어진다. 아쉬움으로 루마니아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코마네치는 14세의 체조요정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유치원 때부터 체조했다.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았다. 점수판을 9.99까지만 나오도록 만들어 놓아서 코마네치는 0.00으로 처리되어 전광판에 나왔다. 코치가 가서 따지자 죄송하다며 지금까지 체조 만점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명했단다. 세계 최초로 체조 만점자다. 학제는 초,중,고,대가 4,4,4,3년으로 초등과 중등과정을 마쳐야 졸업장이 나온다. 고등까지 의무교육이고 졸엄 후 취업이 가능하다. 월급 60%가 세금이다. 개인이 50%, 회사가30% 낸다. 학비, 진료비 무료다. 의약분업이 잘 되어 있다. 여성 진출 높은데 정교회 국가라서 위상은 남자보다 낮다. 농업에는 정부가 세금을 부담하며 지원해준다. 프랑스식 복지가 잘 되어있다. 부과세가 24%다. 정치인 월금이 4천에서 7천 유로다. 정년은 만 65세로 자신이 부은 만큼 연금이 나온다. 몇백 유로, 몇천 유로까지 나온다. 선호하는 직업은 회계사, 변호사다. 안정된 직업의 교사나, 의사는 월급이 적은 편이다.
산악지대에서 평야지대로 진입하자 목장, 옥수수밭, 광활한 목초지가 장관이다. 목가적인 소박하고 정겨운 나라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휴게소
도로변 강물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한다. 우리가 달려온 길이 뽀얗다. 휴게소에서 내리면 그것도 큰 여정으로 여기고, 나는 내가 밟고 선 땅을 소중히 생각한다. 여행은 명소만은 보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 나무 한 그루, 심지어 도로까지도 그 나라의 한 단면을 보는 것이다. 부케레스트가 가까워진 것 같다. 주변에 상가와 민가가 보인다. 다음 휴게소 불가리아 국경선 부근이다. 여기서 2시간 소요된다. 여기서부터는 평야지대다.
*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시가지
부카레스트 시가지를 관통하여 불가리아로 간다. 부카레스트에 들어서자 분수, 1차 대전 승전기념공원, 혁명광장 등 지난번에 본 시가지 풍경들이 이어진다. 도나우강의 지류인 딤보비차강이 시내를 흐른다. 1459년에 루마니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 왕이 요새를 만들었고, 그 후 왈라키아 지방의 군사,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으며 17세기부터는 루마니아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국내와 국제 교통의 최대 중심지다. 루마니아는 지하자원이 많다. 불가리아까지는 4시간 걸린다. 국경선 넘을 때 40분에서 1시간 소요된다.
*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경지대
해바라기 밭이 많다. 울창한 숲의 국경 마을이다. 여자 동상이 높게 서 있다. 현재시각 오후 4시 20분, 불가리아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국경지대 마을인데도 고요하다. 보통 시골 풍경과 다를 것이 없다. 국가와 국가 사이 이어지는 마디가 이리 쉬울까. 유럽 여행 중 항상 부러운 대목이다.
* 루마니아에서 불가리아 가는 국경선
국경선 진입 도로가 EU통합 후 도로가 개선되었다. 편도 3차선이다. 언제나 국경선을 넘을 때는 긴장된다. 유럽은 절차가 간편하여서 쉽지만 관리 건물과 직원들의 경계가 삼엄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학창시절 공산국가로 배우며 멀게만 느껴졌던 두 나라의 국경선에 머물고 있다. 지금은 지구촌의 한 나라에 왔다는 매끄러운 상념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개 한 마리가 평화로이 국경선을 넘나든다.
*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국경다리
루마니아에서 국경선을 넘으면 불가리아로 들어가는 다뉴브강 다리를 넘어야 된다. 다리세를 내고 통과한다. 넓은 다뉴브강이 전개된다. 좌우 풍경과 다리가 아름답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불가리아 영토다. BULGARIA라고, 영어로 씌어져 있다. 직원이 버스에 올라와서 여권을 거두어 갔다.
* 불가리아 입국
제일 먼저 대형 EU국기가 펄럭인다. 2007년 EU가입국이다. 불가리아 국기도 펄럭인다. 사무실과 경찰차도 보인다. 이제 불가리아에 온 것이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버스는 다음 여행지로 떠났다. 울창한 숲을 지나자 불가리아 들녘이 나온다. 루마니아와 다를 것은 없는데 느낌이 새롭다. 불가리아는 북쪽으로 루마니아, 남쪽으로 그리스와 터키, 서쪽으로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흑해Black Sea가 넘실거린다. 불가리아는 동북쪽으로 러시아, 서북쪽으로 폴란드, 남서쪽으로 마케도니아, 서쪽으로 세르비아 등 2억7000만 명이 사용하는 슬라브어의 모태인 키릴문자를 855년에 창제한 문화선진국이다. 세계 단일 언어다. 러시아에서 갖다 사용한 것이다. 국경 도시에 들어선다. 고층 아파트와 주택이 많다. 도심에는 차도 많고 공중에 걸린 전차선이 이색 풍경이다. 불가리아와 한국이 수교를 맺은 지는 21년 밖에 안 되었지만 많은 교류가 있다.
* 불가리아 휴게소
푸른 잔디가 곱다. 도심의 도로변 휴게소인데 잘 가꾸어 놓았다. 주변 시가지 풍경도 잘 보인다. 불가리의 고층 아파트가 오롯하다. 타워식 건물로 베란다 창문 구조가 원형으로 돌출된 것이 시선을 끈다. 저층 아파트도 곁에 있다. 공터의 풀들도 낯선 나라의 것이기에 예사롭지 않다. 장수의 나라, 동서양을 느낄 수 있는 불가리아는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던 나라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조용하게 혁명이 일어났고, 현 정부도 공산당 시절 간부로 있었던 사람이 대부분이다. 정통 스탈린 추종 국가이며 러시아가 쓰는 키릴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조용하고 멋스러움이 넘치는 불가리아, 유럽에서 동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해는 서산으로 향하고 이제 우리는 서둘러 벨리코투르노보로 가야 한다.
*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가는 길
여기서 벨리코투르노보까지는 1시간 30분 소요된다. 내일은 성을 오르기 때문에 많이 걷는단다. 소피아에서도 2시간을 걸어야 하는 도보여행이란다. 불가리아는 루마니아보다 허술한 느낌이 든다. 시가지에 높이 솟구친 타워가 있다. 도시를 지나자 광활한 평야다. 대부분 옥수수밭과 초지다. 농촌 마을에는 마차를 타고 다니는 농부가 있다. 발칸에는 집시가 많다. 호텔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여권과 호텔 명함, 그리 20유로 정도를 갖고 나가고, 만일 길을 잃으면 타 호텔에 가서 택시를 불러 달라 하여 들어오란다. 이곳 집시는 가방 지퍼를 열고 손을 넣어 도둑질 한단다. 그것도 직업이라며 당당하단다. 집시에게 아파트 분양권을 주어도 1개월 살고는 나와서 다시 다리 밑으로 간단다. 산길로 접어들자 하얀 낮달이 절경이다. 벨리코투르노보에 가까워지며 깎아지른 절벽의 산이 평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호텔 도착
불가리아 제2왕국의 수도였으며 불가리아의 아테네로 불리우는 벨리코투르노보에 도착했다. 6만 5천명이 사는 도시로 옛 수도였다. 호텔 로비가 넓다. 엘리베이터에서 로비층을 n으로 표시했다. u자를 엎어 놓은 형상이다. 식당은 0층이다. 나라마다, 호텔마다 조금씩 달라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익혀 두어야 한다. 내일은 모닝콜 6시, 조식 7시, 출발 8시다. 우리 부부의 방은 561호다. 창밖의 언덕 마을 야경이 아름답다.
2011년 9월 9일 금요일 불가리아
*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호텔 출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산책했다. 계곡의 다리를 건너가니 첨탑과 함께 말을 타고 치솟는 장군들의 동상이 있다. 아센 형제 동상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서 벨리코투르노보를 중심으로 아센 형제가 봉기하여 승리하여서 제2불가리아제국을 탄생시켰는데 그때가 1185년, 그후 800주년 기념으로 1985년에 아센 형제의 동상에 이곳에 세웠다. 언덕 마을이 비경이다. 숲과 물이 장관이다. 호텔도 상당히 크다. 계곡에 긴 기둥을 세워 지은 모습이 예술이다. 복도의 전등불이 자동센서로 사람이 지나가면 자동으로 켜진다. 불가리아는 요쿠르트가 유명한 나라여서 조식 뷔페에도 유제품이 많다. 식사를 마치고 불가리아 교포 남자 가이드를 만났다.
벨리코투르노보Veliko Turnovo의 옛 이름은 투르노보다. 1393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왕국은 멸망하였으나, 이후 5세기에 걸쳐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500년간 오스만 터키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1989년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40여 년간 러시아 통치를 받다 보니 수수께끼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1867년에는 오스만에 저항하는 무장봉기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반파시즘 운동의 최대 거점이었다. 주변에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져 식육, 제당, 통조림, 우유가공, 포도주 제조 등의 식품공업이 활발하다. 벨리코투르노보는 인구 6만여 명의 역사적인 도시다. 오늘 온도는 12도에서 32도, 온도 차이가 크다.
*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차르베츠 언덕
벨리코투르노보는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가리아의 대표 관광지다. 1396년까지 불가리아의 수도였다. 12세기 불가리아 왕국의 성채다. 오스만이 침공했어도 차르베츠 성은 3개월을 견뎠다. 그 성을 다 부수고 오스만이 500년을 지배했다. 현재 불가리아의 13%가 터키인이다. 정당 중에서 터키당도 있다. 터키에 대한 미운 마음은 없으나 세르비아는 미워한다. 불가리아 왕국의 성채였던 차르베츠 언덕은 왕의 언덕이라고도 불리며 많은 황제들이 머물렀던 성이다. 자연 절벽이 천혜의 요새다. 성 입구에는 차르베츠 성 문장이 새겨진 방패에 앞발을 얹고 있는 사자상이 떡 버티고 있다. 언덕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빙둘러 성채가 서서 천혜의 요새를 더 요새답게 한다. 올라가면서 내려다보이는 언덕 성벽과 시가지가 절경이다.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뾰족한 성당 등 중세시대 불가리아 왕국의 찬란한 면모를 본다.
*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차르베츠 언덕 성모승천교회
차르베츠 성 정상에 다다르자 성모승천교회가 성당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성당 내부에는 불가리아 왕국의 옛 영화를 그린 작품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아기 안고 승천하는 성모 등 성화도 많다. 외경도 아름답고 내경도 아름다운 성당이다.
*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옛 고성터
차르베르 언덕 성당에서 나와 뒤편으로 걸어가니 옛 고성터가 있다. 13세기 궁전을 방어했던 중세의 성채 벨리코투르노보 성의 흔적이다. 성은 허물어 졌어도 형상은 그대로 보존하여 고스란히 전시되고 있다. 황제 22명이 머물렀던 벨리코투르노보 성이며 현재는 복원 중에 있다. 산정 높은 곳에서 많은 왕들이 거주하던 흔적을 보며 소슬한 세월을 읇는다. 지배를 당하며 높은 고지로 왕의 거처를 마련했던 것 같다. 그것이 오늘날에 큰 유적이 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그날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차르베츠 언덕 하산길
올라가던 때와는 또 다른 풍경들이 들어온다. 성당의 종이 고즈넉하게 자라하고 있다. 어둠이 내리면 차르베츠 성에서는 레이저 쇼가 펼쳐진다는 조명등이 있다. 차르베츠 성에서 중요시하는 야경이다. Sound and light라고 이름 붙여진 이 쇼는 색색깔 레이저가 뿜어지면서 종소리와 구슬픈 불가리아 민속음악이 뒤섞인다. 붉은 열매가 한가득 나무에 매달려 불가리아의 가을을 수놓는다.
* 불가리아 벨리코투르노보 정통공예방 거리
공예 상가들을 걸으며 관광하는 곳이다. 차르샤 거리다. 차르샤는 이곳 말로 시장을 뜻한다. 좁은 골목에 고풍스런 상가가 늘어서 있고 옛 생활용품들을 그대로 재현하여 전시해 두었다. 한국 방송 프로에도 나왔다는 가게도 있다. 여러 가지 정통공예 기념품을 판다. 종류도 다양하다. 아주 긴 거리다. 가게 주인들도 친절해서 어떤 상가든 들어가서 구경만 해도 환영이다.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같은 거리다. 다 구경하고 벨리코투르노보를 떠나 장미의 도시 카잔락으로 이동한다.
* 불가리아 카잔락 가는 길
장미의 카잔락으로 간다. 1시간 30분 소요된다. 불가리아는 터키 유목민 이주와 발칸의 슬라브인이 합해서 형성된 국가다. 발칸 산맥을 넘고 있다. 소피아까지 이어진다. 불가리아 물가가 2자리수로 뛴다. 평균 월급 400유로 중에서 세금 45% 내고 실수입이다. GNP 8천불, 한국과 동일한 시기에 시작한 IMF를 계속 겪고 있다. 불가리아는 북쪽으로는 다뉴브강을 경계로 루마니아, 남쪽은 그리스 및 터키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크다. 발칸 산맥 중심을 계속 넘고 있다. 잠시 내리막, 다시 오르막 산중 산정도로를 버스가 달린다.
* 불가리아 러시아 정교회
벨리코투르노보에서 카잔락으로 가는 도중에 들렀다. 예정에는 없었던 코스다. 카잔락에서 장미를 보는 것인데, 지금은 계절이 초가을로 장미가 다 져서 카잔락은 잠시 들르는 것으로 하고 대신 발칸 산맥의 산중에 세운 시프카 마을의 러시아 정교회에 온 것이다. 터키로부터 해방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의 기념 성당이다. 불가리아는 러시아 도움 없이 승전은 불가하다. 특정지역 산정에 지었다. 붉은색, 노랑색 등 색상이 화려하다. 지나는 행인 눈에 띄게 하려고 그렇게 지었다. 체코 건축가가 건축했다. 1885년~1902년까지 17년간 지었다. 54m 높이의 종탑도 있다. 1902년 2월 28일에 오픈한 성당이다. 지붕 돔이 17개로 큰 것은 20톤 무게다. 상층은 도금이다. 34개 대리석에 러시아인 도움자의 이름을 새겼다. 러시아 전사자가 깔린 모래를 명예의 모래라 하는데 그 모래로 17개의 석관을 지하에 안치했다. 국가문화 기념물로 선포했다. 첨탑 끝 2개의 카렐리아식 십자가, 또는 러시아식 십자가는 예수 제자 2명을 상장한다. 1명은 천국, 1명은 지옥으로 간다는 뜻으로 러시아 정교에만 있다.
산 깊은 곳의 성당은 러시아에서 보았던 성당들과 아주 유사했다. 푸른 나무 숲 사이로 영롱한 색상들이 성스럽고 찬란하다. 내려오면서 저 멀리 우리가 넘어온 발칸 산맥이 보인다. 산 아래 마을의 붉은 기와지붕이 곱다. 우람한 산과 나무와 들녘, 저 풍경이 비경이어서 여러 배경사진으로도 사용한다. 잠시 들렀지만 마음의 휴식을 취한 고요한 교회다. 시프카 마을은 소박하고 아담하다. 집 앞 화단에 기른 포도나무 열매가 싱그럽다. 마을 입구에는 공동묘지도 있고, 산 사이로 정교회가 살짝 비치는 모습이 평화롭다.
* 불가리아 발칸 산맥
시프카 마을에서 카잔락으로 가는 길도 끝없이 산이 이어진다. 벨리코투르노보에서부터 함께 달리는 발칸 산맥이다. 불가리아가 발칸반도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사계절이 있고, 산과 계곡이 많은 나라다. 짙푸른 흑해의 바다와 발칸반도 최대 산맥인 발칸산맥 등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고 있고 역사 유적지도 많아 관광산업이 발전하기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 외침으로 한이 서린 나라이기도 하다. 애절한 애국의 노래도 있다. 불가리아의 자연 경관이 참으로 아름답다. 끝없는 평원의 들녘에는 옥수수가 출렁거리고, 목초지에는 소와 양떼, 목부가 평화로운 풍경을 선사하고, 지금은 겹겹이 즐비하게 늘어선 우람한 산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시리도록 짙푸른 빛이 계곡에 서리고 그 밑에는 평온한 품사위의 들녘이 누워 있다. 해바라기가 가을을 맞이하여 노랗게 여물고 있다. 이런 장면이야말로 세계 여행에서 보는 멋진 풍경이며, 나를 자꾸 세계로, 세계로 이끄는 요소 중 하나다.
* 불가리아 장미 도시 카잔락
벨리코투르노보에서 시프카 마을을 거치면서 발칸 산맥을 넘어왔다. 장미 도시, 카잔락이다. 장미 오일 세계 최고 생산지다. 100% 원액으로 물이 아니고 찐득찐득하다. 카잔락에서 장미를 재배한 역사는 300년에 이른다. 해가 뜨면 향기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해뜨기 전 새벽에 꽃을 딴다. 장미오일 1g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장미가 무려 3000송이나 필요하다니 얼마나 많은 재배 면적인지 상상케 하는 매목이다. 비누도 세계 80%매출이다. 장미 산업박물관도 있다 장미밭을 가꾸는 농기구와 바구니에서부터 장미를 증류하는 기기 등이 전시돼 있다. 60년 전에 사용했던 증류기기 뚜껑에는 아직도 진한 장미향이 풍겨 나온다. 장미는 5월~6월에만 꽃이 핀다. 매년 6월 장미 축제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지금은 9월, 장미 축제는 볼 수 없어서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도심 공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에 늦게 피어오른 장미가 있어서 몇 송이이나마 카잔락의 장미를 보았다. 시가지도 아름답다.
*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가는 길
카잔락에서 4시간 소요된다. 국도 반, 고속도로 반이다. 불가리아 인구는 750만 명이다. 10년 전만해도 800만 명이었는데 계속 감소 추이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다. 결혼기가 늦다. 살아보고 결혼다. 학제는 1~12년제인데 1~5년은 초등, 6~12는 중등이다. 13~16은 고등이다. 외고 체제가 있는데 상위 1%가 가는 학교다. 1년 학비가 3천 유로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화려하다. 부모의 마지막 지원으로 300~400유로, 즉 한달 월급을 다 주고 빌린 렌트카로 논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내쫓는다. 자립과 독립시킨다. 대학은 1학기가 12만원이다. 1년 24만원이다. 집시는 40만 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젊은 집시들이 아기 출산을 많이 한다. 아기를 앞세워 구걸하기 위함이다. 인도 사람 모습이다. 자기들 언어가 따로 있다. 교육 전무로 대물림이다. 3D 직업에 겨우 취업하기도 한다. 아기 재우려고 술을 먹이기도 한다. 투표권이 없다. 소피아에는 집시 군락이 있다. 우범지대로 무섭다. 양배추 농사는 집시들의 일터다. 검은 양파, 마늘이 불가리아 주산물이다. 포도와 철광석도 있다. 조금 있으면 남부쪽은 산이 없고 평원이다. 평원 끝에 산맥이 절경이다. 해바라기, 양배추 밭이 많다. KBS1 걸어서 세계 속으로 프로에서 불가리아가 방영되었다. 대사관에 등록된 불가리아 한인은 180명이다. 50%가 선교사다. 지방에서 90명이 선교한다. 30%는 주재원 가족이다. 나머지 90명 30명이다. 모임 때 70명 정도가 참석한다. 젊은이들은 월급이 많은 서유럽 쪽으로 돈벌이 하러 나간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인구는 130만명이다. 소피아로 천도하며 불가리아 3차 왕국을 건국했다. 러시아와 터키 전쟁으로 터키도 독립했다. 1997년 이전 투자국이 한국이 1위다. 대우가 불가리아에 자동차를 비롯하여 많다.
* 불가리아 소피아 휴게소
카잔락에서 소피아 가는 중에 들렀다. 불가리아의 드넓은 평원과 멀리 앉은 산 풍경이 아름답다. 민가의 기와지붕이 모두 붉은 색으로 나무 사이로 곱다. 흑해 주변 국가, 불가리아에서는 대우 자동차로 인해 한국 위상이 높아졌단다. 불가리아 유산균은 러시아 박사가 생명 연장 연구 논문에서 발표되었다. 불가리아 장수 마을의 유산균을 발견했다. 학명이 불카루쿠스다. 매일 먹으면 150세까지 산다고 했는데 자신은 71세에 사망했단다. 그 당시 유럽 평균 수명이 47세였으니 오래 산 셈이다. 불가리아인들은 개사랑이 크다. 그래서 유기견에게도 밥을 준다. 개고기 안 먹는다. 베트남인이 베란다에서 개 가죽을 말리다가 쫓겨난 적이 있단다. 유기견 큰 개들이 거리를 활보하여 2007년에 안락사 시켰다. 남한과 수교는 1990년, 북한과 수교는 1945년이다. 불가리아 집시들이 많아서 소매치기도 많아 주의하란다. 평원의 휴게소를 떠나 소피아로 달린다.
* 불가리아 소피아 도착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시가지에 들어서자 벌써 웅장한 느낌이 든다. 도로에는 전차선 철로가 있고 그 위로 전차와 자동차들이 함께 질주한다. 인구 120만 명, 자동차 100만대인 도시로 교통이 복잡하다. 시내 곳곳에는 이슬람 사원과 그리스 정교 사원이 서 있고 과거 공산주의 체제를 상기시키는 9월 9일 광장, 레닌 광장 등이 있다. 터키, 세르비아 등과 철도로 연결되는 국제 교통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도심 곳곳에서 다양한 건축물들이 시선을 끈다. 궁전 옆에는 정교회 성당이, 이슬람교 예배당인 모스크 옆에는 가톨릭 성당이 나란히 서 있다. 809∼1018년 불가리아 제1왕국, 1194∼1386년 비잔틴, 14세기 말부터는 투르크의 지배, 1877년 러시아와 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에 점령, 이듬해 불가리아에게 넘어가 1879년 이곳이 수도가 되었다. 소피아는비토샤 산 계곡에 위치하여 공원과 녹지가 많은 도시이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로 유적과 돌로 포장된 도로가 많아 역사의 향취가 절로 스며든다.
* 불가리아 소피아 온천수
소피아 도심에 온천수 받는 곳이 있다. 시민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받아간다. 김이 나는 따뜻한 물이 벽면 꼭지에서 계속 나온다. 여러 개의 시설을 마련해 두었다. 장수의 나라에서 천연 온천수를 받아먹는 것도 이색체험이다. 예쁜 건물 온천장도 있다. 온천장 건너편에는 모스크가 있다. 불가리아에는 터키인들이 많아 이슬람 교인이 13%다. 국교를 바꾸기 위해 세웠다. 2개의 모스크 중 이곳에서만 예배를 본다. 온천장 건물도, 모스크도 아름답다.
* 불가리아 소피아 세인트 페트카 지하교회
소피아에 남아 있는 14세기의 중세교회 중 하나로 불가리아 정교회다. 터키 지배하에 있을 때 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세운 지하교회다. 이슬람 지배 당시에는 교회 건축을 허용은 했으나 땅 위로 솟는 높이를 1m로 제한해서 이렇게 땅을 파서 반 지하의 교회를 지은 것이다. 교회 문 입구에 성인 페트카 사진과 이름 새겨져 있다. 내부에는 예수탄생과 못 박힘, 재림 상징 등의 프레스코화 그림이 있다. 터키의 제약에 거부하고 페트카 성인의 뼈를 묻어 세운 불가리아인들의 지하교회는 완전 지하는 아니고 주변 건물보다 조금 낮은 돌벽의 조그만 건물로 애잔하다.
* 불가리아 소피아 레닌광장
과거 공산주의 시절, 러시아의 혁명가인 레닌의 거대한 동상이 있던 소피아의 중심 광장이다. 레닌 동상이 있었는데 현재는 지혜의 여신 소피아의 동상이 높이 세워져 있다. 오른손엔 월계관, 왼손에 부엉이가 있는데 신화에서 여신은 부엉이를 좋아했고, 부엉이는 어둠에서도 사물을 잘 볼 수 있는 총명한 새다. 민주화가 되면서부터 공산주의를 싫어하며 이 광장도 네델리야 광장으로 바꿔 부른다. 네델리야는 일요일이란 뜻이다. 옛날부터 소피아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주요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주변에는 역사적 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통령 집무실, 구 공산당본부 의원회관, 백화점, 호텔 등이 접하여 있어 광장을 더욱 빛낸다.
* 불가리아 소피아 성네델리야 정교회
소피아 쉐라톤 호텔 앞에 있는 불가리아 정교회다. 거대한 돔의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 1856년에서 1963년까지 지었다. 소피아 도심에서 우람하고 큰 돔 지붕의 건물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입구의 아치형 문도 예술적이면서도 엄숙함이 서려있다. 나무에 들러 싸여 더욱 육중한 자태다. 이 교회 안에서 1925년 높은 관료의 장례행사가 있었는데 공산주의 반역자들이 왕을 암살하려고 폭격하여 120명이 사망했다. 왕의 암살은 미수로 그쳤다. 현재는 복원된 모습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아주 귀한 장면을 보았다. 불가리아의 장례식 행사로 한 할머니가 사망한 남편을 종교의식으로 하늘나라에 보내는 순간이다. 케익과 간단한 음식을 나누어주는데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주었다. 간단한 영어로 고인을 위해 기도한다고 전했다. 교회 앞에는 꽃가게가 있다. 가까운 거리에 쉐라톤 호텔이 있다. 그곳 화장실이 깨끗하여 잠시 들렀다. 원래는 대우 자동차 소유였는데 2002년에 2천 2백만 달러에 그리스인에게 매각했다. 현 시가는 15억 달러로 약 2조원이다. 한때는 한국인의 소유였다는 쉐라톤 호텔, 그래서 정감이 서린다.
* 불가리아 소피아 번화가
네델리야 정교회 앞에 있는 소피아 번화가 거리로 한국의 명동 거리와 같은 곳이다. 공중에는 전차선이 걸려 있고, 도로에는 차들이, 인도에는 사람들이 많다. 인도의 보도블록이 로마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고대 유적의 블록이다. 하얀 법원 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사자 동상이 서 있다. 삼성 건물도 있다. 복잡한 거리여서 불가리아 경찰이 나와 단속한다. 여자 경찰도 있다. 이 거리는 어느 곳을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 성게오르기 교회
소피아의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다. 영어로는 성조지 교회다. 395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동로마 제국에 의해 세워진 교회다. 5세기부터 예배를 시작했다. 오랜 역사의 흔적을 느끼게 해준다. 로마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다가 16세기에는 터키인들이 이슬람 사원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한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것이 특징으로 건축 당시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교회를 지을 때는 성인의 뼈가 필요한데 이 교회에는 게오르기의 뼈가 들어갔다. 성인은 사후 시신이 썩지 않고 오래가야 된다. 그때 뼈를 사용한다. 곁에는 대통령궁이 있다. 로마 지배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소피아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하려고 훌륭한 건축물을 많이 지었는데 그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의 건축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내부의 프레스코화도 유명하다.
* 불가리아 소피아 세르디카 유적지
레닌 광장 맞은편 발칸 쉐라톤 호텔 안뜰에 있는 로마 시대의 유적지다. 성 게오르기 교회와 함께 도심에서 보는 이색적인 고대 유적 풍경이다. 이곳 유적지에 있던 건물은 이교도의 사원이나 목욕탕으로 추정된다. 다 허물어져 터전만 남아있다. 시람들은 휴식으로 가장자리에 걸터앉기도 한다.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 소피아는 구석구석에서 오래된 유물들이 많다. 지하철 공사 도중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지하철역 벽면 귀퉁이에 유적을 그대로 보존해 두었다. 호텔을 짓다가 발굴된 유적을 장식용으로 사용한 곳도 있다. 세르디카는 비잔틴 시대의 소피아 지명이다. 세르디카는 기원전 7세기경 세르디 부족이 살면서 탄생한 이름이다. 14세기 이후 그리스어로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로 바꾸었다. 3세기경 로마는 세르디카 지역에 강한 성벽들을 건립했다. 현재는 세르디카의 동문에 해당하는 성벽과 2개의 탑이 보존되고 있다. 이것은 지하도를 건너가면서 구경했다. 전철역 지하도에는 당시의 모습 보여주는 성곽의 모형과 발굴작업의 기록사진 등을 고스란히 전시해 두었다. 세르디카 고대도시의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현대 건물 아래에 많이 남아있다.
* 불가리아 소피아 대통령 궁
성 게오르기 교회를 보고, 세르디카 유적지를 본 후 아치형의 건물 문을 통과했는데 이곳이 대통령 궁이란다. 대통령 집무실로 한국의 청와대와 같은 곳이다. 근위병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는 것 빼고는 다른 건물과 다를 것이 없다. 별다른 경계나 수색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근위병은 방문객과 사진을 함께 찍도록 허락한다. 시간을 잘 맞추면 대통령궁 앞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도 있다. 공산주의 잔재가 다 증발된 민주화의 꽃을 보는 훈훈한 현장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 벼룩시장
소피아 시내 곳곳에는 동양의 매력이 담긴 거리와 시장이 있다. 주점과 작은 상점들에서는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알렉산드르 넵스키 사원 앞의 이곳 벼룩시장도 규모가 작고 노변상인이라는 점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인사동 옛 유물을 파는 한 블록의 거리 표정이다. 공산주의와 나치시대에 사용하던 물품들로 칼, 훈장, 메달, 배지 등도 전시해 놓고 판다. 바라만 봐도 소슬한데, 더러는 유물로 보관하려고 사 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불가리아에서는 머리를 끄덕이면 No, 가로 저으면 Yes란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어서 상인과 잘 소통해야 한다. 울창한 나무가 운치를 더해 주는 고풍스런 벼룩시장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
터키 지배시 19세기 후반 불가리아 독립에 큰 도움을 준 러시아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교회 사원으로, 러시아와 투르크 전쟁에서 죽은 러시아 병사들 전몰자 20만 명의 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위령교회다. 이름도 러시아 영웅 이름과 같다. 1882년~1912년에 건립된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러시아에서 금 20만 톤을 보내서 돔 지붕을 도금했다. 햇빛을 받으면 황금빛을 뿜어대는 돔이 12개로 가장 큰 것은 12톤이다. 반경 3Km까지 들린다. 십자가가 불가리아식, 러시아식 2가지가 있다. 교회 정면의 벽에는 막대기 2개인 러시아식 십자가, 교회 돔 지붕 꼭대기와 아치형 정문 위에는 막대기 1개인 불가리아식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불가리아와 러시아의 아름다운 조화다. 내부의 프레스코 벽화와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는 규모가 대단하다. 우리 부부가 들어갔을 때는 2층에서 성가대의 합창소리가 울려 퍼져서 더욱 거룩한 분위기였다. 나이 지긋한 여자 성도가 1층에서 관람객들을 단속하고 있다. 7천 명을 동시 수용하여 예배 가능하다. 8천 명~1만 명 수용 예배 성당은 베오그라드에 건축 중이다. 벨리코투르노보에 세우려 했는데 그 당시 인구가 2만 명 밖에 안 되어서 이곳 소피아에 세웠다. 소피아의 상징 건물이며 대표 명소로 발칸 최대 성당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 호텔 투숙
우리가 유숙할 엑스포 호텔 곁의 돛단배 모양으로 푸른빛을 발하는 건물이 우람하다. 석양을 받아 더욱 고운 빛을 발한다. 호텔에는 온천장이 있는데 유료다. 이곳 사람들은 의사 처방전을 받아 자기 몸에 맞는 물로 3~6개월 정도 질병 치료용 온천을 한다. 아까 보았던 고운 온천장 건물이 현재는 건설 중인데 오픈하면 이런 온천장이 된다. 내일은 6시 모닝콜, 6시 30분 조식, 7시 40분 출발이다. 세르비아 국경선까지 1시간 30분 소요되며 시내까지는 4시간 30분 걸린다. 내일 버스 승차 시간이 6시간이다. 중식 후 시내 관광한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오늘 걸은 것만큼 걷는다. 3시간 도보 투어다. 그리고 다시 3시간 버스 이동하여 호텔 투숙할 예정이다. 버스를 타는 것도, 도보 투어도 내게는 모두 행복하고 아름다운 여정이다.
2011년 9월 10일 토요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 불가리아 소피아 호텔 출발
새벽 일찍 일어났다. 호텔 주변을 돌아보고 싶어서다. 항상 세계여행 중에는 호텔 주변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차츰 밝아오고 범상치 않은 건물들이 일어선다. 멀리 아름다운 산자락도 일어선다. 이곳 인종은 슬라브계와 아시아계가 합해져 있다. 산세, 수종, 피부색 등 한국과도 닮은 것이 많다. 호텔 룸에서 바라본 소피아 시가지의 풍경이 곱다.
* 불가리아 소피아 시가지의 아침 풍경
소피아 시가지의 아침은 분주하다. 자동차도, 버스 정류장의 사람들도 출근 준비로 바삐 움직인다. 공중의 줄을 타고 달리는 전차도 지나간다. 어제 소피아에 들어올 때 사람들로 가득하던 공원의 광장이 고요하다. 네프스키 성인이 처형당한 곳에 세운 기념비도 있다. 아파트와 상가, 학교 건물도 보인다. 도로 위에는 공중의 전차선이 널려 있다. 이제 불가리아 소피아를 떠나 세르비아로 간다.
* 세르비아 가는 길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국경선까지는 1시간 30분 걸린다. 여기도 해바라기 밭이 많다. 옥수수와 해바라기, 참으로 많이 보아온 풍경이다. 밭을 불태운 모습도 있다. 불가리아의 기름진 농토가 전개된다. 농작물이 아닌 광활한 초지의 들녘 중간에 높은 나무들이 서 있다. 시원한 이색풍경이다.
*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국경 마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국경 마을의 농장에는 말이 한가로이 풍을 뜯고 있다. 동화 같은 풍경이다. 유럽 여행에서 항상 부러운 정경이다. 두 나라의 경계 구역인데도 고요하고 평화롭다.
* 불가리아에서 세르비아 가는 국경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국경 지역에 도착했다. 지금 시각 오전 9시다. 여권을 준비해야 한다. 불가리아의 출국 도장을 받기 위해 내렸다. 사무소에서 각자 한 사람씩 줄을 서서 출국신고를 했다. 조금은 삼엄한 분위기다. 다시 조금 앞으로 진입하여 세르비아에 입국 신고를 받고 세르비아로 들어섰다.
* 세르비아 휴게소
시골의 한적한 휴게소다. 분수와 바퀴 전시가 아름답다. 한국과 유사한 산 풍경이어서 정겹다. 산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다. 여기서 40분은 산길 국도다. 다음은 고속도로다.
* 세르비아 들녘
올리브 나무가 지천이다. 오늘 우리가 유숙할 호텔 주변에도 그렇단다. 성경의 감람나무다. 민가 주변에는 옥수수와 함께 양배추도 많이 재배한다. 비닐하우스도 있다. 올리브 나무, 사과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도 많다. 협곡 터널의 굴속을 여러 개 지난다. 가을빛 단풍 산, 바위산이 아름답다. 산길을 지나자 베오그라드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베오그라드까지 2/3 온 지점이다. 2시간 정도 가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린다. 이곳에서 버스 사용료는 1Km당 1.5유를 지불한다. 새 버스는 2유로를 지불한다. 1일로 계산하지 않고 보통 400~600Km 주행으로 계산한단다. 베오그라드와 스코프예 중간 도시인 니쉬를 지나간다. 오늘 저녁 유숙할 곳이다. 깊은 산자락 아래 푸른 나무와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장관이다. 여기서 베오그라드까지는 200Km로 2시간 소요되어 오후 1시경 도착 예정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휴게소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다. 멀리 첩첩이 둘러싸인 산과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전개된다. 발칸의 상징처럼 다가오던 드넓은 옥수수밭이 광활하게 목전에 있다. 화장실이 무료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하얀 아기 고양이를 안고 자동차를 탄다. 휴게소 풍경이 아름답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도착
발칸 9개국 발칸, 슬로베니아에서 루마니아까지 14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사실은 그때가 자유와 평등으로 평화로웠다고도 한단다. 오스만을 남으로 밀어내고 세르비아가 지배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는 1차대전 후 통합했다. 최근까지 유고연방국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해체된 이후 1991년 슬로베니아부터 발칸국 각자 독립을 시작하며 유고슬라비아가 8개 나라로 분열 해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티토에 의해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되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그가 사망한 뒤, 유고는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어 각 공화국에서 차례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고, 1989년 공산 정권들의 도미노 붕괴를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발칸은 끈임 없는 분쟁과 분쟁이 이어져 왔다. 1999년 미국과 세르비아 교전이 있었다.
발칸은 봄, 가을이 없다. 4월이면 30도다. 올리브 나무가 많이 보인다. 베오그라드 톨게이트에 진입했다. 백색 도시란 뜻의 베오그라드가 곧 보이기 시작한다. 베오그라드에서 베오는 하얀, 그라드는 도시란 뜻이다. 창밖의 베오그라드 초입은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다. 시차가 불가리아보다는 -1시간, 한국과는 -7시간이다. 현지시각 오후 1시, 한국시각으로는 오후 8시다. 베오그라드에는 교민이 15~20명 정도 산다. 소수 인원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은 구시가지, 다리 건너서는 신시가지다. 중국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도심의 나무 숲 공원이 장관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시가지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 수도이며, 구 유고연방의 수도였다. 발칸반도의 도시들은 내전으로 폐허를 연상하지만 고풍스러움과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환경이 남아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시가지는 보수해서 깨끗해졌지만 아직도 전쟁으로 망가지거나 탄흔 그대로인 건물도 있다. 국민들이 우울했는데 작년부터 좀 밝아졌단다. 6국가와 2개 자치구였던 유고연방이 현재는 서로 섞여서 나누어져 있다. 세르비아 인구는 750만 명이다. 코소보까지 합하면 950만 명이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지다. 2008년에는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코소보는 대부분의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베오그라드는 200만명으로 유럽에서는 큰 도시다. 출퇴근시에는 교통이 복잡하다. 교통규칙을 안 지킨다. 다뉴브강과 사바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베오그라드는 크로아티아어로 하얀 마을이라는 뜻이다. 동로마 제국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인들이 흰 벽돌로 성벽을 둘러쌓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수많은 기업들이 들어와 있으며 문화의 중심지로도 발전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잔해가 남아있는 듯하지만, 도시는 조형예술을 고려한 건축물 등이 발전하는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베오그라드에는 중국인 5천명, 일본인 300명, 한국인 50명 정도가 산다. 그래서 이곳에서 동양인을 보면 묻는 순서가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이렇다. 중국인을 싫어하고 한국인과 일본인을 좋아한다. 한국인이라 하면 남한? 북한? 이렇게 꼭 묻는단다. 세르비아 가이드는 이곳에서 부르는 이름이 세르비아 말로 좋은 날이란 뜻의 도비드단이란다. 인정 많고 다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나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는 전쟁의 상처 딛고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나토 공습 파괴현장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전쟁의 아픈 상처가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아마 유럽에서 이 도시만큼 외세 침략과 내전으로 가슴 시린 상처를 많이 가진 곳도 드물다. 기원전 4세기 켈트족이 이곳에 작은 도시를 세운 뒤 로마인들이 베오그라드를 정복했다. 여기서부터 작은 강가의 도시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에 간섭을 받으며 서로 물고 물리는 혈전을 거듭해 왔다. 12세기경 주변의 국가들 사이에서 지배권을 다투었을 정도로 교통과 군사적 요지인 베오그라드는 역사적 환경에 따라 지배권에 따라 늘 지배권이 바뀌면서 안정된 역사를 누려보지 못했다. 내전 말기에는 결국 나토가 개입하여 세르비아 폭격, 경제 제재 등을 동원하였고, 3년 반에 걸친 민족분쟁 내전은 그 막을 내렸다. 세르비아 내전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다움 지식창에서 도움을 받았다.
세르비아의 대통령이었던 밀로세비치는 1941년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 근처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그가 젊었을 때 자살하였다. 우등생이었던 밀로세비치는 대학을 졸업 후 유고 공산당 조직원이다가 1986년 세르비아 공산당 당수가 됐다. 그가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 코소보였다. 1988년 집회에서 세르비아는 코소보 탈환을 위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연설하며 세르비아계가 살고 있는 모든 옛 유고지역을 통합한 대 세르비아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유고연방은 소련에 맞서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이끌던 지도자 티토가 80년에 사망한 후,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유고연방은 인종이 다른 6개의 연방이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종족분쟁을 막고 있던 위대한 티토는 자신이 죽은 후 유고연방이 갈라질 것을 우려해 민족문제를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그중 하나는 코소보에 상당한 자치권을 주는 것이었다. 밀로세비치는 바로 그런 취약점을 건드렸다. 당시 코소보는 알바니아인들이 다수였다. 세르비아인들이 소수민족으로 설움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밀로세비치는 바로 이러한 민족감정을 부추겼고 그 덕분으로 1989년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밀로세비치로 인한 유고연방 안의 민족주의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영향을 줘서 얼마 후 유고연방은 민족별로 몇 개 나라로 분리 독립했다. 밀로세비치의 유고연방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코소보만 남았다.
이것이 모두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1991년과 1995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 5년 동안 밀로세비치는 국내에서는 독재 강화, 국외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했다. 밀로세비치의 이런 행위는 1995년 보스니아 정부가 세르비아인을 청소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이른바 세르비아 내전이다. 세르비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991년 미국에서 평화회담이 열렸다. 이때 밀로세비치는 자신의 '대 세르비아' 정책을 양보하는 듯 보이며, 경제재건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따내는 정치적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1996년과 1997년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 국내에서 반대세력의 대규모 시위에 직면했다. 그때 코소보에서 문제가 생겼다. 밀로세비치는 알바니아계가 다수인 코소보의 자치권을 1989년 박탈했었다. 그러나 170만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1998년부터 아예 코소보의 독립을 요구했다. 독립을 요구하는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세르비아 경찰과 군의 잔인한 인종청소가 시작됐다. 1998년 2월, 코소보를 순찰하던 세르비아 경찰 4명이 알바니아 민병대에 살해되면서 급기야 전쟁으로 치달았다. 1998년 3월 초 알바니아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사태발생 3개월 사이 세르비아는 코소보 무장반군 소탕작전을 전개해 200여명의 주민을 살해했다. 5월에는 수십 명의 알바니아계 반군들을 사살했다. 수십만의 알바니아인 피난민이 세르비아 국경을 넘어 자신의 땅으로 넘어올 것을 염려한 서유럽과 러시아는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과 세르비아 정부 간의 잠정 평화협정을 급히 주선했다. 평화회담은 1999년 2월 프랑에서 열렸는데 밀로세비치는 참석하지도 않았고, 발표된 합의문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유고에 대한 나토와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밀로세비치의 미국 등 서방에 대한 기만전술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나토를 교묘히 조롱하여 사태는 종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고, 한국시간 1999년 3월 25일 오전 4시 나토는 전폭기를 동원하여 코소보 평화안을 거부한 유고연방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였다. 78일간 계속된 이 공습으로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주로 떨어진 폭탄은 유고의 방송사, CNN의 위성방송 장비를 부수고, 오폭으로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도 부쉈다. 유고 공습에 대해서는 나토와 밀로세비치 둘 다 오판을 했었다는 평가가 있다. 자신의 집도 폭격 당한 밀로세비치는 나토의 공습은 나토 내부의 분열을 일으킬 것이고, 특히 러시아는 자신의 편에 설 것으로 예상했다. 나토와 미국은 또 나름대로 폭격을 시작하면, 밀로세비치가 꼬리를 내리고 항복할 것으로 판단했다. 결과는 둘 다 틀렸다. 78일 간의 폭격 후, 코소보에는 유엔 감시단과 나토의 평화유지군이 들어갔다. 폭격 기간 동안 피난을 갔던 85만의 알바니아인들은 돌아왔고, 보복을 두려워한 20만의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떠났다.
1999년 밀로세비치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르비아에서 시작됐다. 밀로세비치의 유고연방에 마지막 남은 지지자였던 몬테네그로도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름만 연방일 뿐 사실상 독립국가가 됐다. 2000년 10월 밀로세비치는 대통령선거에서 패했다. 밀로세비치는 유엔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특별히 마련한 전범재판소에 기소되었으며 국제전범재판소에서 밀로세비치가 구 유고연방에서 90년대 발생한 전쟁의 배후라고 했다.
베오그라드 도심 대로변에 나토 공습 파괴현장이 있다. 허물어진 건물이 그대로 서 있다. 나토 공습 때 오폭으로 파괴된 중국 대사관 건물이다. 버스가 지나가면서 차창 밖으로 보았다. 전쟁은 이런 것이라고, 아픈 상처를 교훈으로 전시해 둔 것 같다. 참으로 처참한 그날의 전흔이다. 시가지의 다른 건물들은 처연하다. 시청, 공화국 광장 주변의 아름다운 건물들, 유럽풍의 주상복합 상가, 붉은 전차 등이 도시를 곱게 이끌고 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스카다리아 거리
베오그라드 시내 도보 관광은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걸어서 오른 소로의 돌길 스카다리아 거리는 19세기 세르비아 예술인의 활동무대이자 보헤미안의 거리다. 온통 꽃과 나무로 장식되어 있는 돌변에는 낭만이 흐르는 카페가 즐비하다. ‘세 개의 모자 카페’라는 독특한 이름의 카페도 있다. 모자를 쓴 예술인 세 사람이 즐겨 찾던 카페로 그중 하나는 보헤미안 시인의 모자다. 모자를 쓴 시인의 동상과 시인의 집이 있다. 이곳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공화국 광장
베오그라드 구시가지의 도심, 공화국 광장 중앙에는 코네즈 미하일로 왕의 기마상이 우람하게 서 있다. 코네즈 미하일로 왕은 1867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로부터 세르비아를 해방시키고, 수도를 베오그라드로 옮긴 세르비아의 영웅이다. 광장 주변에는 아름다운 건물들도 많다. 기마상 왼편에는 한국인도 활동하는 베오그라드 국립 오페라 극장, 오른편에는 오랜 역사를 증언하는 듯한 중세풍 세르비아 박물관이 있다. 1945년 유고연방 공화국제를 선포하면서 그 기념으로 붙여진 이름의 이 광장은 시민들 만남의 장소다. 꽃 화단과 함께 평화로운 정경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코네즈 미하일로 왕의 거리
베오그라드의 중심지로 가장 큰 번화가다. 미하일로 왕의 이름을 따서 지은 보행자 전용 거리다. 공화국 광장에서부터 칼레메그단 요새까지 이어지는 미하일로 왕의 거리에는 노천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하다. 21세기 세르비아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거리다. 한국의 명동 거리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많이 파괴됐던 거리를 복원하여 동유럽 특유의 낭만이 서린 거리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는 그래도 처참했던 전쟁을 딛고 행복한 표정이다. 이곳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여행을 간다. 시원한 분수도 솟구친다. 이 거리만 화려할 뿐 도시를 벗어나 외곽에 나가면 달구지도 있다. 각종 행사가 열리는 거리로, 우리가 갔을 때는 소 동상을 곱게 장식하여 거리 중앙에 세워 두어 더욱 아름다웠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사보르나 정교회
미하일로 거리가 끝나고 조금 걸어가니 하늘 높이 솟은 십자가 첨탑의 교회가 보인다. 언뜻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가까이 다가가니 정원에서는 결혼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슬라반 행사로 음료를 나누어주는 행사가 있다. 섬기는 성인이 같은 자들의 모임이다. 1841년에 지어진 세르비아의 민족종교와 접목된 독창적 정교회다. 성당 내부에는 성화로 가득 차 있다. 정교회는 서서 예배 본다. 미하일로 정교회라고도 부른다. 카톨릭교와 이슬람교의 합성 건물이다. 정원에 미하일 왕 무덤과 세르비아어 창시자 무덤, 교육자의 무덤이 있다. 세르비아 왕가의 교회여서 교주의 집이며 박물관으로 왕가와 교회 수장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교회 앞에 독특한 상호의 카페가 있다. 원래 이름은 ‘사보르나 정교회 앞 카페’였는데 교회에서 이름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아직까지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어떻게 이름을 지으면 좋겠냐고 했는데 교회로부터 답변이 없자 임시로 ‘?’표만 걸어 두었다 그런데 그 특이한 이름으로 더 유명해져서 현재까지도 의문부호 ‘?’만상호로 걸려 있다. 교회와 마주 선 고풍스런 카페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칼레메그단 공원
사보르나 정교회에서 칼레메그단 요새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아 걸어서 갔다. 가을빛 거리 정취가 참으로 아름답다. 숲과 가로수 나무들이 길을 이끈다. 한참을 걸어서 칼레메그단 요새에 거의 다달았을 때 그 주변은 완전히 울창한 숲의 공원 있다.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인 이곳 칼레메그단 공원은 사바강과 다뉴브강이 합류하는 곳의 제방 위에 있는 공원이다. 산책로 주변에 유명한 정치가, 운동가, 전쟁관련 등의 조각상을 많이 세워 놓았다. 동물원, 전쟁기념관, 승리의 탑 등이 있으며 시민들이 즐겨 찾는 훌륭한 휴식처이다. 길가에는 상인들이 기념 물건들을 판다. 예술적 낭만의 거리이며 베오그라드 역사의 흔적을 전시한 공원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전투의 언덕
생각의 언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다뉴브강과 만나는 곳으로 베오그라드의 모태인 곳이다. 공원 입구 흉상을 보며 조금 걸어가니 꽃과 나무의 고운 화단에 가슴은 앞으로, 두 손은 뒤로 뻗은 우람한 여인의 조각상이 돌탑 위에 높이 세워져 있다. 프랑스에 대한 감사의 비석이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시 오스트리아, 독일과 전쟁에서 이 나라에 군사와 물자의 큰 도움을 준 나라다. 1차대전 후 프랑스 여인들이 세르비아 전쟁고아들을 돌봐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건립되었다. 뒷부분에는 '1914~1918년 사이 프랑스가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프랑스를 사랑합니다'라는 글과 여인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꽃과 나무단장이 우아하고 예술적이다. 예전에는 요새였으나 지금은 요새 주변이 모두 시민들의 휴식공간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투의 언덕은 베오그라드 시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산책 코스인 칼레메그단 공원에 있는 오롯한 한 부분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 요새
전쟁의 언덕에서 성문을 따라 들어가니 성벽으로 견고하게 쌓여진 성채가 있다. 사바강과 도나우강의 합류지점인 높이 125.5m 지대의 바위산 위에 세워진 성채다. 칼레메그단 요새는 4세기경 세운 고대 요새다. 베오그라드의 군사적 요지로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전투 준비하던 장소였다. 칼레메그단의 의미는 언덕이란 뜻의 칼레kale와 전쟁이란 뜻의 메그단megdan의 터키어다. 동로마 시절에 축성된 로마의 요새였으나, 현재는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공원으로 사용한다. 19세기 초 두 차례 대오스만 항전(1804~1813년, 1815~1818년)에서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비극의 현장이어서 세르비아의 민족적 자존심이 서린 성지로 여긴다.
베오그라드 이름도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쌓을 때 돌의 색깔이 흰색beli이어서 멀리서 하얗게 보였기 때문에, 도시를 의미하는 grad를 합해 '흰색도시Belgrad'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베오그라드는 하얀 성채란 뜻의 도시로 이 요새 내에서 마을이 형성되고 이 요새를 중심으로 발전된 곳이기 때문에 이 칼레메그단은 베오그라드의 모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재건축을 하면서 복원한 성은 붉은 벽돌색이다. 그래서 지금은 하얀 도시라는 이름이 사실은 어울리지 않는다. 성채 안 전쟁기념관에는 고대와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전쟁에 관한, 로마시대부터 터키, 오스트리아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전시되어 있다. 초등학생들이 입장하려고 길게 줄 서 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 요새 군사 박물관
칼레메그단 요새로 들어가는 성벽 문 쪽으로 갔다. 시계탑을 지나가면 두 번째 문이 나오며, 그 문을 빠져나오면 성벽과 성벽 사이에 제1,2차 세계대전 때 쓰였던 대포를 비롯해서 4만여 점의 각종 무기와 총기들을 전시하고 있는 야외 군사박물관이 있다. 제1,2차 대전에 사용한 무기다. 야외 군사박물관은 성 주위에 탱크와 대포 등 많은 전쟁무기와 감옥을 전시하여 숱한 전쟁을 치른 민족의 전쟁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다뉴브강과 사바강의 합류점
군사 박물관을 보고 또 하나의 성문을 나서자 강변에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비둘기를 든 남자의 동상이 높이 솟아 있다.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자의 탑이다. 전쟁을 의미하는 칼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들고 있는 이 승리자의 탑은 베오그라드의 상징이다. 앞면을 보여주지 않고 돌아서 있는 나신의 이 동상은 시내 중심가에 있었는데 벌거벗은 남자의 심벌이 너무 적나라하여 보수층의 반대로 이곳에 옮겨져 사람이 잘 볼 수 없는 강 쪽을 바라보도록 세우게 되었단다.
주변은 아름다운 두 개의 강과 드넓은 평원의 비경이 전개된다. 숲으로 둘러싸인 두 강 줄기가 합류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강이 도나우강, 왼쪽으로 흐르는 강이 사바강인데 두 강이 이곳에서 하나로 합해져 흐르고 있다. 아래로는 강변 산책로 있고, 강 건너에는 숲 물결 사이로 베오그라드 신시가지가 보인다. 그 시가지 중심에 우뚝 솟은 유리 건물이 구공산당 본부였었는데 나토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던 것을 수리하여 현재는 상사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유구한 역사의 볼거리들이 다 파괴되었지만 사바강과 도나우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높이 솟아 있는 베오그라드 성채가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버티고 서 있다. 연구소 건물과 칼레메그단 요새 축소판상도 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사바 정교회
성인 사바를 기리기 위해, 사바의 뼈로 지은 초대 정교회다. 사바는 13세기 초 세르비아 왕국의 성직자다. 벨리코투르노보에서 사망하여 그곳 수도원에 묻혔다가 터키가 정복하자 그의 유해를 파 내버렸다. 네만야Nemanya 왕조의 왕자였는데 종교 관심이 커서 성직자가 되었다. 아버지를 개종한 세르비아 정교회의 창시자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베오그라드 어디에서나 다 보인다. 193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공산당 시절에는 중단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건설 중이다. 의자가 없는 정교회의 내부는 건설 중으로 철조물이 얽혀 있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계속 짓고 있다. 완공되면 12000명 동시수용 가능한 세계 최대 정교회가 될 거란다. 동서 90m, 남북m로 외형으로도 큰 교회다. 초록색 돔 지붕과 금빛 십자가, 하얀 교회 건물이 넓은 폭으로 베오그라드의 어머니처럼 앉아있다. 교회 앞에서는 분수가 솟구친다.
이 주변은 항상 교통이 붐비는 곳이다. 세르비아의 교육제도는 8.4학제로 고교까지 무상이다. 대학제도는 1학기 등록금이 1천 유로, 150만원 정도다. 진학은 수능과 내신이 없이 수월하다.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목만 2~4과목 시험 치른다. 진학은 쉽지만 졸업은 어렵다. 4년에 졸업하면 수재다. 보통 5~9년만에 졸업하다. 논문이 어려워서 정신과 진료자 많단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 못한다. 취직해도 초급이 250유로다. 시내 근무자 평균 월급이 350유로다. 취업 후 결혼해도 집 못 구하여 3대가 함께 거주하기도 한다. 집세가 월150유로다. 젊은이들은 서유럽 진출이 꿈이다. 하지만 임산부 의료가 무상이다. 집세도 안 드는 사람도 있다. 공산시절 받은 집이기 때문이다. 이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떠날 시간이다. 발칸의 역사와 현실을 참 많이 배우고 간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출발
오후 5시 고운 도시를 떠난다. GNP 8천불인 세르비아다. 2010년엔 7500불이었다. 가난하지만 거리 표정은 밝은 편이다. 도심을 벗어나 구시가지 붉은 기와지붕 물결을 보며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작별한다. 마케도니아 스코프예로 가는 길인데 오늘은 가는 도중에 있는 세르비아의 도시 니쉬에서 유숙한다. 해바라기 밭, 옥수수밭, 사과나무 과수원 등 평화로운 정경이 광활한 들녘을 채우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발칸의 청명한 하늘이 여정을 축복하고 있다.
* 세르비아 휴게소
푸른 하늘에 석양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그림자를 길게 늘인다. 파란 잔디밭이 아름다운 휴게소다. 민들레꽃 홀씨가 우리나라와 동일하여 정겹다. 휴게소 주변에는 나무와 옥수수밭이 많다. 여기서 니쉬NIS 호텔까지는 1시간 30분 소요된다.
* 세르비아 니쉬 도착
휴게소를 떠나 니쉬로 달리는 들녘에는 여문 옥수수밭의 노란 잎이 황금물결이다. 먹기도 하고 가축의 사료로도 사용하는 발칸의 큰 농작물이다. 산길로 접어들자 하늘에는 낮달이 곱게 떠 있다. 해는 져서 점점 어두워지고 산줄기와 평원에 발칸의 일몰이 장관이다. 니쉬는 인구 30만명의 세르비아 도시다.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나고 자란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담배산업이 발달된 도시다. 내일은 모닝콜 5시, 조식 6시30분, 출발 7시 30분이다. 세르비아 니쉬에서 마케도니아 국경선 통과까지 3시간 소요된다. 그래서 내일 아침은 좀 서둘러야 한다. 내일은 또 오늘의 2배 도보여행이다. 발칸은 관광개발시설이 아직 미비해서 그렇다. 하지만 좁은 도로를 따라 걸으며 발칸을 가슴에 심는 일은 발칸 여정의 큰 매력이다.
2011년 9월 11일 일요일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 세르비아 니쉬 호텔 출발
고운 언덕 마을의 호텔이다. 참으로 예쁜 마을이다.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비경이다. 호텔 위에 정교회를 장식해 두었다. 호텔 밖으로 나가 마을을 산책하는데 집 앞에 난로용 장작을 쌓아 놓았다. 새벽 고양이가 그 곁을 지나간다. 영회에서나 볼 수 있는 고풍스런 낭만의 풍경이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가는 길
이곳 세르비아 니쉬에서 3시간을 가면 마케도나아 국경선이다. 30분은 고속도로를 달린다. 마케도니아 스코프예에서 오전 11시 30분에 마케드니아 교민 가이드를 미팅한다. 그때까지 테레사 수녀 수도원 기념관을 관람할 것이다. 여전히 들녘은 옥수수밭이 장관이다. 올리브 나무도 많다. 더러는 채소 농사도 짓는다. 발칸의 들녘은 나라마다 조금은 다르지만 옥수수밭과 같은 아주 비슷한 풍경이 대부분이다.
* 세르비아에서 마케도니아 가는 국경선
직원이 올라와서 여권을 거두어간다. 국경선의 개가 정차선 차도 옆에 앉아 있다. 두 나라를 오가는 차량을 검사라도 하려는 걸까. 그런데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세르비아 출국장을 통과하고, 마케도니아 입국장을 통과하는데 톨게이트 2개 거치듯 쉽게 넘는다. 이럴 때면 네 조국의 가슴 아픈 국경선이 떠올라 소슬하다.
* 마케도니아 입국
마케도니아 입국을 환영한다는 문구의 안내문이 국경선 철제 지붕에 걸려 있다. 그곳을 통과하여 마케도니아에 들어왔다. 깨끗한 도로와 고운 집들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끈다. 저 멀리 산자락 능선이 들녘을 보듬고, 너른 들녘 곳곳에 붉은 기와지붕의 민가와 우뚝 선 나무들이 한 폭의 수채화다. 알렉산더대왕의 고향으로 알려진 발칸반도의 마케도니아, 첫인상이 참 좋다.
* 마케도니아 휴게소
조금 달려가서 휴게소에 들렀다. 이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다. 중년 남자 몇 명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한국인 일행을 보고는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다. 발칸에는 한국인이 별로 살지 않아서 만나기가 어렵다.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궁금하듯이 그들도 우리에 대하여 매우 궁금한 것이다.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프예 도착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의 옛 영토다. 발칸반도의 중부로 즉 그리스, 불가리, 마케도니아의 3국에 걸친 지역이다. 마케도니아 인구는 200만명, 국토도 한반도의 10분의 1, 경상도 땅 정도에 불과하다. 유고연방으로부터 겨우 독립한 국가다. EU에 가입 하려고 했는데 그리스가 반대하여 무산 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1991년 유고연방 해체로 독립하며 국가 명칭을 ‘마케도니아’로 정하자 그리스의 특정 지역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 나라는 1995년 ‘옛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잠정적 국호로 유엔에 가입했다. 스코프예는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바르다르강 상류에 있고, 중부유럽과 아테네를 잇는 중요한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로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이다. 마케도니아 인구의 1/4이상, 60만명이 이곳 스코프예에 거주한다. 스코프예는 1963년 대지진으로 어수선한 도시였다.
마케도니아에 입국할 때부터 멀리 우람한 산풍경이 장엄하더니 그 산줄기가 스코프예 도심까지 이어진다. 마케도니아는 보통 해발 600~700m 고지의 영토다. 스코프예는 해발 300m에 위치해 있다. 도시에 들어서자 산정십자가가 오롯하다. 2000년 해발 1천 미터의 보드노 산정에 세운 밀레니엄 기념 동상으로, 당시 개신교계 대통령이 세운 철조물 십자가다. 알렉산더의 고향으로 유명한 땅 마케도니아, 스코프예는 수도인데도 애잔한 시골 정취가 서려 있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마더 테레사 기념관
기념관 입구에 마더 테레사의 기도하는 동상이 서 있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8월 26일 마케도니아 스코프예에서 알바니아계 부모 사이에 태어난 알바니아 사람이다. 헐벗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세계 최빈국 알바니아에게는 그녀가 희망의 등불이었을 것이다. 1929년 인도에 도착한 후 2년 후에 수녀로서 첫 서원을 하고 테레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테레사 수녀는 1948년 콜카타에서 빈민 구제를 위한 사랑의 선교단을 창설하고 1997년 선종 때까지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의 구호 활동에 헌신했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약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으로 콜카타의 성녀로 불린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케도니아는 60%가 정교회, 30%가 이슬람교인 나라다. 그래서 천주교인 마더 테레사는 안 알려졌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돌보다 간 여인은 사후 성녀 칭호 받았다. 그녀의 탄생지에 세운 기념관은 노벨 평화상 수상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아담한 3층 건물이다. 1층에는 교황과 함께 찍은 바티칸 시국의 사진이 걸려 있고, 2층 박물관에는 일생 동안 활동하던 그녀의 모습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3층은 그녀의 사진이 걸린 기도실이다. 자취로나마 위대한 삶을 살다간 한 여인의 향기를 체감할 수 있는 오롯한 공간이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시가지
마더 테레사 기념관을 다 관람한 후 마케도니아 한국 교포 가이드를 만났다. 이 나라에는 한국 교민이 한 가족뿐으로 아내와 자녀 등 6명이 전부다. 지금 만난 교민 남자는 선교사이며 한인 회장이다. 바쁜 일정으로 좀 늦게 나온 것이다. 마케도니아는 한국과 수교 안 된 나라다. 우리나라는 쿠바, 시리아, 마케도니아 3국이 미수교국이다. 남한 1/4크기, 대구 크기의 도시다. 정비 진행으로 어수선한 도시다. 불가리아 점령에서, 오스만 투르크 지배, 그 후 세르비아 지배, 그리스와의 분쟁 등 많은 지배로 슬픈 역사의 국가다. 1차대전 후 유고연방에 흡수되었다. 스코프예는 산과 나무가 우람하여 상큼한 시가지다. 도로변에 예쁜 꽃까지 발칸의 낭만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자동차가 많지 않은 도심이다. 2011년에 건설한 바르다르 강 다리 양쪽 끝에 사자상이 우뚝 서 있다.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넘어온 것이다. 우체국 건물이 독특하다. 건물 높은 곳에 붉은 바탕에 금빛 태양을 그린 마케도니아 국기가 걸려 있다. 중세 유럽풍의 건물이 종종 보인다. 도심 시가지를 걸어서 마케도니아 광장으로 갔다.
* 마케도니아 광장
마케도니아 신시가지 광장에 들어서자 칼을 든 기마상이 하늘 높이 치솟는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쪼갤 듯한 포효다. 마케도니아가 고향인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년)의 동상이다. 높은 받침대 아래에는 분수가 장엄한 물살로 솟구친다.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분무하는 물줄기 사이에서 받침대를 에워싸고 있다. 분수의 가장자리는 사자상이 지킨다. 흰색의 사무엘 동상도 있다. 1991년 9월 8일 독립기념의 날짜에 맞춰 금년 2011년 9월 8일 이곳 광장에 알렉산더 대왕의 청동 동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마케도니아의 큰 자긍심이 담긴 광장으로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 동상의 길이는 받침 부분을 포함해 총 22m 높이다. 무게가 30t이며 받침대 높이만도 14.9m다. 제작 비용은 1천300만달로 138억원 상당이다. 이웃 나라 그리스는 이 동상의 건립에 심하게 반대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조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감정싸움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가 현재 그리스 북부 지역과 마케도니아로 분할돼 있는 것에서 부터다.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민족인 슬라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는 자신들의 역사라고 여긴다. 반면 마케도니아는 자신들이 옛 왕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들의 국가 상징으로 여긴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1991년부터 마찰을 빚고 있다. 당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국명을 마케도니아로 제정하자 그리스 북부 지역의 명칭과 같다며 반대했고 통상금지도 했다. 하지만, 두 국가는 16년이 지난 현재도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으며 마케도니아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그리스가 1995년 협정을 위반했다며 제소까지 했다. 그리스가 2005년 마케도니아의 EU 후보국 지정에 반발하고 2008년 마케도니아의 나토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반대한 때문이다.
알렉산더 동상 건립에 대한 마케도니아 내부의 비판도 있다.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크다. 실업률이 31%에 달하는데 동상 건립에 거액을 쓸 여유가 없다는 이유다. 동상 건립이 그리스와의 타협 여지를 줄이고 유럽으로 향하는 마케도니아의 움직임을 퇴보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자유 시장, 정치 투쟁, 독립 등의 문제에 시달리는 마케도니아 정부가 이런 정체성 확립 정책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마케도니아의 총리는 스코프예의 공항과 고속도로, 경기장 등에도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 광장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고 보는 것은 분명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큰 역사의 획을 하나 그어 주는 일이다. 광장 주변은 고층 건물과 여러 동상들, 바르다르 강의 스톤 브릿지 등으로 아름답다.
* 마케도니아 터키식 돌다리 스톤 브릿지
바르다르 강 위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해 주는 다리다. 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재건설한 터키식 돌다리 스톤 브릿지다. 이 나라에서 부르는 이름이 까멘로스뜨인데 돌다리란 뜻이다. 아치형으로 아름답다. 이 다리는 고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처음 만들었고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보수하여, 1555년의 대지진과 1944년의 테러사건 등 여러 위험한 상황을 잘 견뎌온 스코프예의 상징물이다. 65만 명의 사상자를 낸 1963년 대지진 때에도 이 다리와 보드노 산의 칼레성만이 온전했다. 강변에는 마케도니아 애국자들 동상 4명이 서 있다.
마케도니아 시내의 기념비적인 이 돌다리를 건너면 현대적인 스코프예 신시가지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유적이 남아 있는 구시가지로 간다. 다리를 건너가자 키릴 문자 창시자 성키릴과 성메토디우스 형제와 키릴문자 창제에 공헌한 제자 2명의 동상이 있다. 마케도니아는 키릴의 고향이다. 키릴 문자는 슬라브권의 종교전파를 위해서 만들었다.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모두 키릴 문자의 뿌리는 동일하다. 조금씩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다. 유사한 언어로 발칸은 다 통합이 가능하다. 발칸 전쟁 후 마케도니아 지도가 만들어졌다. 다리 건너에서 신시가지를 바라보니 마케도니아 광장 전경이 보이고 알레산더 대왕의 동상이 더욱 위용을 드러낸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구시가지
마케도니아 구시가지는 옛 향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다. 가죽 제품 상가가 많다. 즐비한 상가들이 아기자기하여 풍경이 곱다. 집시도 노변에서 앉아 있다. 영화도 촬영하던 거리다. 말을 탄 중세의 용사가 뛰어 나올 것 같은 고풍스런 풍경이다.
* 마케도니아 터키식 목욕탕
발칸반도 최대의 터키탕인 다우트 파샤 목욕탕이다. 마케도니아 광장에서 터키식 돌다리 스톤 브릿지를 건너 구시가지를 조금 걸어서 온 곳이다. 부자나 귀부인이 이용하던 목욕탕이다. 이곳은 그 당시 번화가였다. 이 건물은 미술대학으로 사용했고 현재는 국립 미술관 갤러리다. 검은색의 여러 개 돔 지붕이 독특하다. 외형상으로도 건물이 단단해 보인다.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이었던 곳의 지붕에는 아직도 증기가 나가도록 만들어 놓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돌을 갈아 만든 욕탕 기물과 벽을 타고 도는 물의 관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다른 방으로 가니 그림을 많이 걸러 두었다. 목욕탕 입구 벽면에도 그림이 걸려 있다. 세월은 흘렀어도 지배의 흔적은 남아 있는 유적지다.
* 마케도니아 동방 시장
발칸에서 가장 큰 도매시장이며 유럽 시장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옛날시장이다. 구시가지 고전의 골목을 따라 간 곳에서 드넓은 자락에 온갖 물건을 품고 앉은 동방 시장을 만났다. 터키의 그랜드 바자르 시장과 비슷한데, 이곳은 지붕도 없고 막아놓은 곳도 없이 오픈 된 공간이다. 이곳도 세계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 시장이다. 무엇을 사기 위해서라기보다 마케도니아의 정취를 느끼고자함도 있을 것이다. 물건의 질은 약간 떨어지나 값은 상당히 싼 것 같았다. 나도 손자의 장난감으로 자동차를 3개 샀다. 의류, 완구, 과일, 생활용품 등 즐비한 상가에 진열된 물건들을 눈으로 보는 것도 즐거웠다.
* 마케도니아 칼레성
동방 시장에서 걸어서 갔다. 가는 길의 보도블록이 고전적이다. 긴 성곽이 보인다. 둔덕 앞의 성문은 닫혀 있다. 성곽 앞의 뜨락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긴 역사를 말해준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칼레메그단 요새와 같은 곳이다. 불가리아 전성기는 11~12세기고, 세르비아 전성기는 13~14세기였는데 칼레성은 6세기에 성문법으로 유명한 마케도니아 출생의 유스티아누스 로마 황제가 축성했고, 1350년 두시안 왕조 때의 돌로 재건한 성이다. 이 성벽은 로마, 비잔틴, 오스만을 잘 견뎌왔다. 우리나라 남산처럼 스코프예 시가지에 있다. 높은 보드노 산자락의 해발 250m에 축조한 성이다. 보드노 산은 Mt. Water로 1962년 대홍수가 났을 때 바르다르강이 범람했는데 그 강물 구비의 높이가 이 지역에 선 산과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칼레는 요새란 뜻이다.
마케도니아는 아이 생산을 안 하려고 한다. 먹고 살기 어려워서다. 알바니아인들이 들어와 알바나아화 되어가고 있다.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가 여기서 돌싸움했다. 2002년 폭동이 일어났다. 알바니아 실업율 60%, 마케도니아 실업율 45%이다. 코소보도 알바니아화 되어 간다. 삼성기업이 들어오려고 하는데 그러면 한국과 수교를 맺어야 된다. 자동 분수의 분무로 목마른 나무와 잔디밭에 물을 준다. 파란 하늘과 칼레성이 아름다운 조화다. 이제 마케도니아 스코프예를 떠날 시간이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출발
마케도니아, 이름에서도 갚은 역사의 향기를 발하는 이름이다. 그 수도 스코프예 시가지를 다시 거치며 떠날 준비를 한다. 모스크 첨탑이 나무 사이로 높이 솟구쳐 있다. 아까 걸어서 건넜던 바르다르 강의 스톤 브릿지가 보이는 강다리를 건너간다. 스코프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순간마다 참으로 소중하다. 내가 낯선 나라의 땅을 밟고 서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여행의 큰 의미를 부여한다. 언제 또 이곳에 오겠는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머무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소중한 세계 여행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엮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다. 사진으로, 글로, 시로 열심히 저장하여 두었다가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내기도 하고 먼 훗날 기력이 쇠잔해졌을 때 그런 소장 자료를 보며 나는 행복하리라. 오후 2시 30분경 오흐리드로 출발했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가는 길
오흐리드까지 2시간 30분 소요된다. 스코프예 시내를 벗어나자 보드노 큰 산이 들녘에 더욱 오롯하다. 마을의 붉은 지붕과 함께 여전히 옥수수밭이 출렁인다. 이제 옥수수밭이 안 보이면 이상할 것 같은 발칸의 정경이 뇌리에 박혀졌다. 이곳에는 노란 유채꽃과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파란 옥수수 잎사귀가 한폭의 수채화로 전개된다. 산을 두개 넘는데 아름다운 길이다. 도로는 점점 산으로 접어들고 있다. 아름다운 산녘이다. 민가가 보이는 도로변에 경찰차가 멈춰 있다. 토마토가 주렁주렁 매달리고 옥수수가 총총한 밭에서 일하는 농부도 있다. 다시 또 높은 고지의 산길을 오른다. 마케도니아의 우람한 산길을 오토바이가 질주하기도 한다. 다시 아담한 산마을 농토에는 노랗고 빨간 파프리카가 보이고 그 곁 비닐하우스 속에서도 파프리카를 재배하고 있다. 고지 농가의 모습이 아름답다. 마케도니아는 현대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나라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휴게소
휴게소 주변에 포도밭이 많다. 키 작은 포도나무가 여기저기 줄지어 서 있다. 달려왔고, 또 달려가야 할 산길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우람한 산은 계속 따라오고 산마을이 곱다. 점점 해는 서녘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이곳은 추석이 없다. 내 조국 한국은 내일이 추석이다. 오늘밤은 오흐리드에서 잔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도착
오흐리드에 가까이 오자 산정에 사무엘성이 보인다. 산정 성곽이 둥글게 자리하여 아직도 역사를 전시한다. 오흐리드는 해발 700m 고지의 도시다. 1986년 요새와 더불어 마케도니아의 유일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도시다. 역사와 자연의 복합 문화유산 도시다. 선사시대부터 거주해 왔다. 인구는 8만 명이다. BC 148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드리아해와 에게해의 관문 역할을 하는 군사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9~10세에는 키릴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기독교어를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종교 구심점 지역이었다. 오스만이 물러가며 마케도니아가 부상했다. 오흐리드 타운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역의 하나고 깨끗하고 아담한 도시다. 7-19세기에 걸쳐 고대 슬라브족의 수도원과 800여개의 비잔틴풍 성상이 있다. 소박하고 잘 정비된 거리에는 오래된 시장과 중세 수도원, 성당, 상가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오흐리드 도심을 걸어서 호수 쪽으로 갔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성클레멘스 동상
오흐리드 도심을 걸어가서 만난 끝 부분 호수변에 큰 동상이 있다. 성 클레멘스의 동상이다. 성 클레멘스는 키릴문자를 만든 성키릴과 성메토디우스 형제의 수제자 중 하나다. 최초의 슬라브계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했고 슬라브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집필했다. 성 나움과 함께 그리스어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마케도니아를 종교 구심점 지역으로 만든 성인이다. 동상의 크기만으로도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귀족마을 거리
마케도니아는 이름에서부터 오랜 역사의 향기가 풍긴다. 여기는 후기 비잔틴양식으로 유명한 호반의 도시,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귀족마을 거리다. 마케도니아는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나라다. 미지의 땅 발칸반도, 낯설고 오래된 풍경이 걸음을 부르는 거리다. 1991년 옛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정교와 이슬람교 등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한 나라다. 좁다란 골목 바닥의 돌이 닳아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마을 입구 초입에서부터 오랜 역사를 전시한다. 집들이 위로 올라가며 커진다. 그것은 도로나 집을 망가트리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1층에 자리한 그 터전 위에 2, 3층의 평수만 늘려서 넓은 집으로 개조하여 산다. 외벽의 돌, 지붕, 창문 장식이 아주 고풍스럽다. 불편해도 감수하고 지켜나가는 문화유산이다. 집과 집 사이 작은 틈새로 오흐리드 호수가 보인다. 계속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귀족마을 거리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성소피아 대성당
오흐드리는 발칸의 성지다. 키릴 형제의 활동으로 그렇다. 정교회 성당, 교회가 365개나 있다. 구시가지 귀족마을 거리를 따라 성소피아 대성당에 갔다. 성소피아 교회는 11세기 초 불가리아 점령시대에 세워진 성당으로 마케도니아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의 큰 정교회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정통 정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교리를 집대성한 교회다. 오흐리드는 3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으며, 10세기 무렵 제1차 불가리아제국 황제의 보호 아래 그리스도교 성당과 수도원들이 잇달아 건설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려 질 만큼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역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시대에는 모스크로 사용하기 위해 벽면의 11~14세기 프레스코화를 석회로 덧칠하였다. 1951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예수의 승천과 성모자좌상이 복원되었다. 벽돌과 붉은 지붕의 성당 마당에는 파란 잔디가 곱다. 개 한 마리가 서성이는 모습이 처연하다. 바로 위에는 카페와 아름다운 마을이 아기자기한 풍경이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변 마을 풍경
마케도니아의 보석이라 불릴 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난 오흐리드 호수 주변 마을은 나무와 꽃으로 더욱 아름답다. 탄탄한 건물 벽면에 어촌 도구를 걸어둔 집도 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른 하객들이 언덕을 내려온다. 우리와 마주치며 서로에게 이방인으로 낯설지만 함께 바라보며 훈훈한 눈웃음을 선사했다.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깊은 추억으로 저장될 것이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로마시대 극장터
오래된 문화 유적지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다. 로마시대의 유적지를 비롯해 정교회 사원, 최초로 설립된 슬라브 대학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호수변 언덕길을 다리가 아플 만큼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로마시대 극장터가 나온다. 원형 돌 계단식 좌석을 가진 넓은 광장으로 로마시대에 만든 야외 극장터다. 그 당시 인구가 1만 5천 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오흐리드는 도심 인구 6만 명, 전체 인구는 8만 명이다. 맨 위 돌계단에 앉아서 잠시 고대 로마의 한 사람이 되어 무언으로 흐르는 야외 원형 극장의 숨결을 흡입해 본다. 아래쪽에 설치된 무대가 있고 빙 둘러쳐진 벽면은 형상만 간직한 채 허물어진 곳이 많다. 아래 부분의 돌은 그 당시의 진짜 돌이고 위 부분은 복원한 것이다. 다듬지 않은 고풍스런 모습이 옛 향수를 자아낸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성클레멘스 성당
포도와 토마토를 정원에 기르는 아름다운 집 앞을 지나간다. 발코니에 고운 꽃 화분을 장식한 동화 속 같은 집을 지나간다. 성당 건너편 산정 요새 아래 언덕진 마을은 우람한 나무와 요정이 사는 듯한 아기자기한 집들로 절창이다. 성 클레멘스 성당은 1295년에 지었고, 1950년대에 발견되었다. 아까 호수변에 그의 동상을 보았다. 그리스 십자모양 평면 위에 작은 돌과 벽돌로 지은 건축물로 성모 마리아를 위해 세워진 교회다. 오흐리드의 수호자로 여겨진 성클레멘스의 유해를 안치하고 있어 성클레멘스 교회로 불린다. 클레멘스는 893년에 최초의 슬라브대학을 설립했으며, 슬라브 문학 작품들을 집필했고 그리스어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교회 안에는 중세시대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보수하는 모습이 보인다. 근처 언덕 꼭대기에는 터키의 모스크이자 여관인 4각형 건물도 있다. 이 건물은 9세기에 이 도시 최초의 슬라브인 주교였던 클레멘스와 관계가 있던 사람의 수도원이 있던 터에 세워졌다. 언뜻 보면 성당에 속한 건물로 보인다. 성클레멘스 성당은 우뚝 높은 지대에 있어서 푸른 하늘이 감싸고 있어 더욱 성스럽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요새의 잔해
오흐리드 구시가지는 언덕진 바위산 위에 있는데 바위에 해당하는 흐리드hrid에서 이 도시 오흐리드Ohrid가 이름 지어졌다. 바위산 정상에는 10세기말에서 11세기초에 축성한 요새의 잔해가 남아 있다. 당시 이 도시는 불가리아 차르의 수도였다. 트샤르 사무엘이라고 명명된 이 오흐리드성은 10세기경 수도사였던 트샤르 사무엘에 의해 축조되었다. 둘레가 3Km, 성벽 높이 16m, 10여 개의 망루가 있다. 오흐리드를 지켜주는 성채로 각광을 받았으나 현재는 요새의 잔해로 남아 있다. 성클레멘스 성당 건너편 산언덕 위에 성채가 길게 늘어서 있고 망루에 마케도니아 국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요새에 석양이 내린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변 마을 비경
오흐리드 호수변 마을은 아름답다. 집집마다 화단에, 또는 정원에 포도나 토마토 등을 재배한다.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 풍경이 발칸의 서정으로 향기롭다. 로마시대 극장터를 지나 오흐리드 호수를 바라보며 조망하는 풍경은 더욱 비경이다. 아름다운 호수와 호수변 언덕의 붉은 기와지붕이 절창이다. 길가에 주차한 조그만 자가용이 시선을 끈다. 고운 꽃으로 장식한 집도 있고, 난로용 장작을 쌓아 놓은 집도 있다. 석양을 받으며 중세의 향수를 자아내고 있다. 우람한 산이 감싸 안은 호수에는 배도 떠 있고, 눈길을 두는 곳마다 수려한 명화로 뜬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성요한 카네오 성당
오흐리드 구시가지 언덕길을 한참을 걸어서 만난 성당이다. 성요한 카네오kaneo 성당은 호수 위 산정에 오롯하다. 아름다운 꽃들이 이방인의 걸음을 화사하게 인도한다. 카네오 마을 언덕의 이 교회는 오스만 제국 이전 13세기에 성경 요한복음의 요한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는데 요한에게 바쳐진 성당이란 뜻이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시에는 교회 내부의 프레스코화들을 회칠하여 이슬람사원으로 사용했다. 그 후 오스만 투르크가 물러가자 1964년 회칠을 제거하고 프레스코화들을 다시 복원하여 교회의 모습 되찾았다. 현재 교회의 내부는 나무 성화 등이 추가되어 더욱 좋아졌다. 주황색 벽돌로 단단하게 앉은 교회는 오흐리드 호수를 바라보며 절벽 위에 아슬하게 서 있다. 영화 ‘비포 더 레인’에도 나온 교회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웅장하고 거룩함을 느끼게 한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
성요한 카네오 교회에서 호수 쪽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곳에서부터 오흐리드 호수의 아름다운 숨결을 느끼며 수변로를 걸었다. 어찌 이것이 호수일까. 바다라고 표현함이 옳은 정경이다. 아득한 길이와 광대한 폭의 호수다. 호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나무판도 설치해 놓아서 그곳을 걸어 들어가니 코발트빛 물이 한가득인 호수의 낭만은 대단하다. 여객선과 어선이 한가로이 떠 있고 서녘의 산 그림자에 호수는 더욱 짙푸른 빛을 발한다.
휴양도시 오흐리드는 마케도니아를 대표하는 여행지다. 200만년 전 생성된 오흐리드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다. 마케도니아의 남서쪽 끝에 있으며, 발칸에서 가장 깊고 큰 호수다. 수심 280m, 동서 30Km, 남북 120Km의 바다처럼 거대한 자연구조 호수다. 1980년 오흐리드 지방의 역사건축물, 성채 요새의 잔해 등과 함께 오흐리드 호수에 살고 있는 희귀한 수생동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호수 면적은 약 350제곱킬로미터고 1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호수다. 송어, 장어, 잡어 등의 많은 어종이 살고 있어 호수 주변 마을은 어업하며 산다. 정기 여객선이 마을을 왕래한다. 진주 가공업도 발달했다. 포도재배 농가도 많다. 오흐리드 호수의 3분의 1은 알바니아에 속해 있고, 2/3만 마케도니아 소유다. 해발 695m의 산으로 둘러싸여 호수는 안온한 느낌이 들면서도 장엄하다. 거인이 하늘에서 던진 꽃이 호수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잘 가꾸어진 숲과 울창한 나무 사이로 야외 노천카페가 있다. 휘휘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 커피 한잔을 마주하고 호수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거나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평화롭다. 해수욕장처럼 하얀 비치 의자와 파라솔을 구비해 놓아 이곳 사람들은 수영을 하며 호수와 함께 호흡한다. 저녁 무렵인데도 날씨가 덥고, 또 구시가지 마을을 많이 걸어서 열이 난 몸이라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호수는 매우 맑아서 물속 바닥의 돌멩이와 물고기들의 유영하는 모습까지 훤히 보인다. 오흐리드의 이토록 청정한 호수에 발목이라도 담가보자고 옷을 걷어 올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무릎까지 담그며 오흐리드 호수가 품어주는 환희에 이국의 낭만은 가슴 깊이 배어든다. 바위산 언덕 마을을 돌며 아버지 닮은 장대한 형상을 바라보고, 바로 곁에 내려와 물을 보듬으며 어머니 같은 모성의 드넓은 품속을 체험하고, 이 찬란한 호수를 어찌 두고 갈까. 나의 고향은 대천 바다, 물을 보고 자란 유년의 회억이 지금 이 순간 한없이 출렁인다. 뜨거운 감성을 자아내는 잊을 수 없는 오흐리드 호수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 광장
오흐리드 호수는 시내와 접한 곳에 드넓은 광장을 이루고 있다. 마케도니아 국기가 높이 휘날린다. 잘 조성된 잔디와 꽃 화단이 호수와 함께 비경이다. 마케도니아를 성지로 이끈 성클레멘스 동상이 높이 서서 오가는 사람들의 평안을 지켜주는 듯하다. 즐비한 노천카페와 벤치에 앉아 모두가 흥겹다. 이방인도 시민들도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호수의 물은 광장 아주 가까이에서 출렁이고, 항구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다. 해는 지고 석양에 젖어드는 호수는 꿈꾸는 낭만이다. 떠나야 할 시간인데 자꾸 뒤돌아보며 걸음을 늦추곤 한다. 이곳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수많은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저녁 산책을 하고 있다. 광장의 길을 따라 숲길을 지나 오늘밤 유숙할 호텔로 왔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변 호텔 투숙
호텔은 오흐리드 호수 바로 곁에 있다. 그런데 방의 위치에 따라 전망이 다르다 하여 여행객 각자에게 룸키를 집도록 했다. 나의 남편은 다른 이들이 다 집어가고 난 후 마지막 남은 카드 하나를 집었는데 302호였다. 방에 들어와 보니, 호수가 눈앞에 전개되는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전망이 전율로 다가온다. 캄캄한 호수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올라 수면 위에 황홀한 빛을 드리운다. 내일이 추석이다. 나는 두 손을 모아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두 아들과 손자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 부부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허락한 가족 모두에게 고마워서 눈시울이 젖는다. 그리고 우리 부부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사는 날까지 건강하기를, 더 많이 사랑하며 살기를, 그래서 세계 여행을 더 잘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한가위 보름달에게 비원의 기도를 올렸다. 오흐리드 호수변 호텔의 밤은 그 어느 숙소에서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2011년 9월 12일 월요일 알바니아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텔 주변 풍경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수가 보이는 창가 식당에서 조식을 하고 지난 밤 어둠에서도 그토록 아름다웠던 호숫가로 나갔다. 새벽 여명에 눈뜨는 오흐리드의 광활한 호수는 어제 본 모습과는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왜 이곳이 마케도니아의 최고 휴양지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산녘에는 고운 집들이 아침 산공기에 젖어 영롱하고, 촉촉한 호수는 벅찬 환희로 자꾸 가슴속에 파고든다. 허락된다면 더 머물고 싶은 여행지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출발
휴양 도시 오흐리드를 떠나 알바니아로 간다. 50분 정도 가면 국경이다. 오늘은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로, 또 몬테네그로까지 3개국을 간다.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 수도 티라너까지는 255Km다. 그 다음 알바니아에서 몬테네그로까지는 4시간 소요된다. 소박한 도시 오흐리드 시가지를 벗어나자 발칸의 옥수수밭은 또 이어진다. 산과 들,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다.
*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 가는 국경선
발칸반도의 국경선을 참 많이도 넘는다. 신비로운 감정에서 이제는 처연할 만도 한데 여전히 긴장해야 하는 고요한 영역이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넘기 쉬운 경계선일지 모르나 한반도에서 온 우리는 부러우면서도 두려운 경계선이다. 운전기사가 여권을 모두 거두어 간다. 마케도니아 출국수속이 끝나면 다시 알바니아 입국수속을 한다. 알바니아 입국수속은 버스 트렁크의 가방까지 체크한다. 국경선에서는 내리는 것도 안 된다. 다 마칠 때까지 버스 안에서 기다려야 한다.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줄 서 있다.
* 알바니아 입국
알바니아에 들어왔다. 산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산녘에, 들녘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국경 마을이다. 동쪽으로 마케도니아, 서쪽으로 이탈리아, 남쪽으로 그리스, 북쪽으로 세르비아 코소보가 접해 있다. 코소보는 세르비아 왕국이 세워진 성지였으나 터키제국에게 점령된 이후 알바니아인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민족, 종교적으로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간의 갈등이 발생한 지역이다.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대세르비아의 건설이라는 명분하에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였고, 이에 코소보내 알바니아인들은 1992년 독립을 선포하였지만, 보스니아 사태로 인해 무산되었다. 1996년 알바니아의 지원하에 코소보 해방군KLA이 결성되었고 보스니아 사태가 진정의 기미를 보이자, 세르비아는 코소보 해방군에 대한 소탕작전을 감행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세르비아에 대해 즉각적으로 코소보에 대한 만행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사태가 평화적으로 종결되지 않는다면 군사개입을 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신유고연방은 코소보문제를 국내문제로 간주하고 국제사회의 개입을 거부하였다. 한편 러시아와 중국은 코소보 사태에 대한 해결을 국제연합UN이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나토의 군사개입을 반대하였다. 1999년 3월 유엔의 의결 없이 나토가 창설 이후 처음으로 공습을 감행하였고, 6월 유고정부가 코소보 평화안을 수용하면서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사태가 종결된 후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대한 역 테러가 자행되기도 했다.
알바니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철저한 폐쇄 정치로 유럽 최빈국이 되어 버렸다. 독재 시절 군비 증강에만 신경을 쓰면서 만들어 놓은 70만여 개의 벙커가 산 곳곳에 흉물스럽게 흩어져 있다. 국경선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산 위에서 무덤처럼 둥근 시멘트 뚜껑을 엎어 놓은 소슬한 벙커가 보였다. 발칸의 이런 저런 신기한 모습을 보는 여정이다.
* 알바니아 들녘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한 크기의 면적 국가다. 농업국이며 올리브 재배를 많이 하는데 수동으로 딴다. 유럽은 기계로 딴다. 석탄, 석유, 시멘트 화학, 목재가공업도 하는 나라다. 도로변에 올리브 나무가 있고, 밭에는 옥수수를 베어 묶어놓은 더미가 군데군데 많이 있다. 높은 산자락 아래 광활한 농토다. 옛날 우리나라의 농촌 풍경과 유사하여 향수에 젖는다. 광활한 농토에 옥수수가 한가득인 농촌 마을도 있다. 알바니아는 감자, 옥수수가 주식이다.
한 여인이 차가 다니는 도로 곁으로 소를 끌고 간다. 여자는 조기 결혼하고, 남자는 늦게 결혼하는 풍습이다. 여자는 18세 무렵 시집간다. 남자는 외국에 나가 돈을 벌어 와서 늦게 결혼한다. 호수가 있는 마을을 지나 깊은 산길 도로에 접어든다. 철도가 차도와 나란히 만나기도 한다. 산녘의 좁은 농토에도 옥수수대를 베어 놓은 더미가 있다. 알뜰한 농촌 풍경이다. 산과 산을 잇는 높은 다리도 있다. 산악국가로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 강을 따라 작은 도시를 지나간다. 알바니아의 산과 들, 농촌과 도시 골고루 보는 행복한 여행길이다.
* 알바니아 휴게소
휴게소 주변에 큰 올리브나무가 많다. 이곳이 지중해성 기후라서 올리브나무가 많은 것이다. 자손 대대로 생산하는 나무다. 심은 지 15년에서 30년 후에 수확한다. 100년 된 나무에서도 올리브열매를 딴다. 나무는 가구로 만든다. HOTEL이라는 영문 간판이 인상적이다. TIRANER 45Km라는 문구도 있다. 70%가 비포장도로 30%만 포장도로다. 수도 티라너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작년에는 50%가 비포장도로였다. 발칸 여행에서 도로는 알바니아가 제일 나쁘다. 자꾸 발전하는 모습이지만 아직도 여행하기엔 불편한 국가다. 버스가 완전 저속으로 운행해야 하는 발칸의 한 영역이다.
* 알바니아의 빈집과 미완성 건축물
알바니아에는 빈집이 많다. 실제로 도로변에서 종종 보인다. 외국으로 돈벌이 나가서 그렇다. 빈집 위에는 사람이나 동물 형상의 물체를 세워둔 모습도 있다. 미완성 건축물이 많다. 골조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이 보인다. 돈을 벌어올 때마다 건축하기 때문이다. 알바니아는 유럽 최빈국이며, 세계 최빈국이다. 가난으로 여자 아이들은 13세만 되면 조혼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이곳 아이들의 꿈은 빨리 어른이 되어서 그리스나 마케도니아로 밀입국해 돈을 버는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 가축 배설물이 거리에 뒹굴고, 아이들은 고철을 줍는다. 아프리카가 아닌 유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동유럽 발칸반도의 작은 나라 알바니아는 중세에 정지되어 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알바니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유럽연합 27개국 평균의 29%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코소보에 이어 둘째로 가난해 유럽의 소말리아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웃 나라 마케도니아와는 확연히 다른 현상들이 육안으로도 보인다.
* 알바니아 노변 과일가게
버스가 멈추는 곳은 아닌데 대로변 과일 가게가 있어서 잠시 정차했다. 젊은 남자 상인이 길 양편으로 많다. 수박, 참외, 사과, 포도, 대추 등 한가득 진열해 놓았다. 한국의 과일과 유사하다. 거리에 소, 말, 마차가 다닌다. 들판에도 소가 많다. 한국 60년대 모습이다. 배 과수원도 있다. 지붕 위에 오리 조각상 2마리를 높이 앉혀 놓았다. 이것은 이 지역의 풍습이다. 프랑스인들은 와인을 마시며 예술 이야기, 영국인들은 위스키를 마시며 과거 영화로웠던 시절 이야기, 독일인들은 맥주를 마시며 철학 이야기, 미국인들은 맥주를 마시며 연애담 이야기, 한국인들은 소주를 마시며 축구 이야기란다. 알바니아는 남자 세상이다. 여자가 일 하고 자녀 양육, 살림까지 다 한다. 남자는 논다. 주로 길에 모여서 수정치 이야기로 수다시간을 보낸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너Tirane로 달린다. 티라너까지 여기서 1시간 30분 소요된다. 아드리아 해변의 숲과 푸른 물로 깨끗한 휴양지도 있다. 포장도로에서 다시 비포장도로 진입하여 덜컹거다가 포장도로로 들어섰다. 속도가 빠르다. 알바니아의 낙후된 길을 체험하는 것도 세계여행에서 오래 기억될 하나의 큰 추억이 될 것이다.
* 알바니아 수도 티라너 시가지
알바니아 티라너 수도는 아드리아 해에서 동쪽으로 27㎞ 떨어진 곳에서 이심 강을 끼고 있다. 지중해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티라너에는 알바니아 인구 360만 명 중 40만 명이 산다. 티라너에 한인 선교사 가족 50명이 거주한다. 비옥한 평원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 도시는 17세기 초 투르크의 장군에 의해 세워졌다. 이곳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 모스크, 목욕탕, 빵집 등을 건설했다.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기도 했다. 1920년 알바니아 의회에서 수도로 채택되었다. 국왕 조그 1세는 1928~1939 통치기간 중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을 고용하여 이 도시를 재설계하도록 했다. 1951년 수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가 준공되었고, 오늘날에는 알바니아의 최대도시이자 주요 공업 중심지로 꼽히고 있다.
티라너 시가지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공사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도로 바로 곁에서 위험하게 일하는 노인도 있다. 허술한 건물 옆 도로에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왕래하기도 한다. 알바니아가 세계 최빈국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바라보는 눈이 조금 애처롭다. 문명에 낙후되고 닫힌 듯하지만, 강점기와 동란을 거치며 어려웠던 내 조국 대한민국이 현재는 드높은 위상의 국가가 된 것을 본다면 알바니아도 언젠가는 잘 사는 국가가 되지 않을까싶다. 열심히 사는 시가지 풍경이다.
* 알바니아 티라너 스탄더르베그 광장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너 도시의 중심부인 있는 광장이라 하여 잘 가꾸어진 공간이려니 했는데 온통 공사로 뒤집어 놓아 먼지와 철조물로 허술하다. 이 광장은 시위 많이 하는 곳이다. 주변에 정부, 국방부, 외교부 등 관청이 많아서다. 근처에 티라너 국립대학교도 있다. 시위를 못 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광장을 파헤쳐 놓기도 한다는 말에 소슬했다. 알바니아는 인구가 360만 명인데 그리스인이 100만 명이다. 문화궁전 등 소련 영향 건물이 많다. 러시아, 로마, 이스라엘 등 오스만 영향 받으며 티라너가 수도로 되었다. 11~12세기 발칸 전쟁시에는 세르비아 지배를 받았다. 여러나라 모습이 있는 티라너다.
스탄더르베그는 15세기 인물로 터키의 장군이다. 이 지역 출신으로 오스만 제국의 전쟁 영웅이다. 1968년 이곳 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스탄더르베그가의 붉은 색 독수리 문장 깃발이 기마상 곁에서 펄럭인다. 위대한 인물이어서 그렇게 해 놓은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에 연속해서 점령당했던 알바니아는 1946년 1월 11일 티라너에서 공산인민공화국임을 선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티라너는 소련과 중국의 원조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다.
스탄더르베그 광장은 티라너의 도심인데도 거리 노점상 많다. 모스크 첨탑과 시계탑이 오롯하여 그윽한 풍경이다. 문화건물, 대학교이며 도서관 건물 등 우아한 건물도 많은데, 거리에는 초라한 행상인도 많다. 로또, 옷, 과일 야채 등 젊은이들 상인이 많다 교통도 복잡하다. 국가 부도 사태가 났던 나라다. 범죄조직이 많다. 돌이 나뒹구는 시멘트 바닥의 좁은 도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 알바니아 티라너 모스크
스틴더르베그 광장에 들어섰을 때 모스크 첨탑이 오롯하게 솟구친 모습이 보인다. 에테헴베이 모스크 사원이다. 티라너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이다. 이슬람교인 70%, 알바니아 정교회인 20%, 기독교인 10%다. 슬랍어와 그리스어가 합성된 알바니아어를 사용한다. 이 사원의 옆에는 소련이 건설한 문화관이 있고 바로 곁에는 시계탑이 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낮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은 서서 또는 무릎 꿇고, 어떤 사람은 머리를 벽에 대고 기도. 양탄자를 깔아 놓은 바닥에서 나름대로의 종교의식으로 신과 내통하는 모습이 엄숙하다.
* 알바니아 티라너 시계탑
스탄더르베그 광장의 사원 모스크 곁에 있다. 이곳은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지역이다. 주변에는 아름다운 조형의 건축물도 많다. 시계탑 또한 높고 예술적인 조형으로 세워 광장을 빛내고 있다. 어수선한 도심이지만 알바니아 시민들의 걸음이 분주한 곳이다. 무질서한 가운데 노점 행상인도 많다. 저 정갈한 시계처럼 알바니아의 모든 행정도 좀 더 발전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 알바니아 티라너 호텔 중식
스탄더르베그 광장 바로 곁에 있는 티라너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곳은 별천지다. 내부도 깨끗하고 현지식 음식도 좋다. 음료와 물을 넉넉하게 테이블에 준비해 두어서 목마름을 식혀 주었다. 우리가 시킨 음료지만 남으면 어려운 아이에게 준다고 했다. 종업원들이 친절하게 정성껏 음식을 제공해 준다. 호텔 밖에는 야자수가 장관이다. 교통도 복잡하여 조심해야 한다. 사람과 차들이 많이 통행하는 곳이다. 호텔 문에서 보면 스탄더르베그 광장과 모스크, 시계탑이 다 보인다.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한 알바니아 하늘이다. 오늘 알바니아 한낮 온도는 40도, 상당히 덥다. 이제 발칸의 다음 여행국가 몬테네그로로 가야할 시간이다.
* 알바니아 티라너 출발
알바니아 수도 티라너를 떠나 몬테네그로 부드바로 이동한다. 4시간 소요된다. 마케도니아 남자와 알바니아 여자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보며 간다. 이슬람 여인은 비이슬람 남자와 결혼 불가다. 그래서 고통 받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다가, 놓칠 수 없는 알바니아 들녘을 보다가, 이렇게 보내는 시간도 모두 행복한 여정이다. 들판에 소, 양떼가 많다. 당나귀 마차도 보인다. 건조한 산이다, 산에는 전쟁 때 사용하던 벙커가 둥그렇게 놓여 있다. 농촌 목장에는 옥수수밭, 초지 등이 전개되고 평화롭다. 가이드는 알바니아를 발칸의 여행지로 넣어야 하는지, 빼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묻는다. 더러는 보잘 것 없는 이런 알바니아를 왜 데리고 왔냐고 하는 사람이 있단다. 그래서 이번 여행객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대답했다. 여행은 꼭 명소만 보는 것은 아니라고. 아무리 가난하고 허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와 다른 환경의 나라에 와서 그 나라의 땅도 밟아 보고, 문화를 접하는 것도 큰 여행이라고. 내게는 그랬다. 알바니아,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발칸 여행에서 빼어서는 안 되는 천진한 나라다.
*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국경 지대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두 나라가 강다리를 경계로 놓여 있다.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가 함께 소유하는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처럼, 여기 스카다르강과 호수도 1/3은 알바니아, 2/3는 몬테네그로 소유다. 전에는 나무다리 1개로 싸웠는데 최근에 다리를 건설했다. 드넓은 스카다르강 위 우람한 다리를 건넜다. 반은 철제 다리다. 여기는 국경지대다. 들에도 차도에도 마차가 다닌다. 전형적인 알바니아의 풍물이다. 2층 집의 1층은 비어두고 2층에서만 거주한다. 비닐하우스에서는 토마토를 재배한다. 수박밭이 보이고 노변에는 수박을 파는 상인도 있다. 조용한 학교 건물도 보인다. 스카다르강 다리를 건넜어도 땅은 알바니아다.
* 알바니아에서 몬테네그로 가는 국경선
국경 사무소 건물이 우람하다. 국경선 앞에는 자동차가 멈춰 서서 수속을 밟고 있다.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여자는 홀로 서서 국경 사무국 직원에게서 수속 절차를 밟고 있다. 우리는 여권을 버스기사가 모두 거두어 가지고 가서 수속을 밟았다. 국경선에서 뒤로는 알바니아, 앞으로는 몬테네그로다. 얼마 후 국경선을 통과했다. 이리도 쉽게 넘는 국경선인 것을. 자동차도, 개인도, 단체 이방인 여행객도. 발칸에서도 유럽 여행처럼 부드러운 국경선 통과에 그저 부러움이 크다.
* 몬테네그로 진입
국경선을 통과하자 우람한 석회암산이 보인다. 여기는 몬테네그로 땅이다. 우리의 발칸 유로 버스는 12일간 총 5000Km를 주행한다. 하루에 500Km 정도 운행하고 있는 중이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 말로 검은 산이란 뜻이다. 어두운 산지가 많아서다. 마을 앞거리에 젊은 남자가 소를 몰고 간다. 들판에 공동묘지도 있다. 발칸의 가을빛 나무들이 곱다. 도로변 큰 무화과가 있다. 산 곳곳에 올리브 나무도 있고, 벌판에는 양떼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는다. 수박 밭에는 수박이 뒹군다. 발칸의 수박은 여행 중 많이 보아 왔고, 식사에서도 많이 먹었던 과일이다. 모양도 맛도 우리나라의 수박과 비슷하다. 석류나무가 길가에 있고 열매가 빨갛게 매달렸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울창한 나무 숲속 농촌마을에서 소와 닭 등 가축을 방목하는 목가적인 풍경이 아름답다. 웃통 벗은 주인 남자의 모습도 함께 평화롭다.
몬테네그로는 200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연방국에서 독립했다. 발칸 남서부, 세르비아 코소보 접경 지역이다. 290Km 아드리아 해안선 국가다. 가장 아름다운 곳은 코토르 해변이다. 내일 그곳에 간다. 휴양지다. 스카다르 호수변 제타 평원으로 그래서 비옥한 토양이다. 석회암 산이 많다. 험한 산줄기 따라 협곡이 비경이다. 강물이 빨라서 레포츠를 즐긴다. 낚시 장소도 있다. 작지만 고운 나라다. 지금 비포장 산길 도로다. 1시간 정도 불편하게 가야 한다. 그 후부터는 길도 좋고 비경이다. 60~70세 인구로 주로 관광업으로 산다. GNP 12000~13000불이고, 발칸반도 국가 중에서 개방으로 최근 빠른 성장을 하는 나라다. 60%가 몬테네그로인이다. 70%가 정교회, 20%가 이슬람, 10%가 로마 정교회다.
몬테네그로 인구는 62만 명이고 수도 인구는 16만 명이다. 6세기에 세르비아인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것이 14세기~15세기에는 로마로부터 독립국으로 세르비아와 견줄 만큼 역사가 발전했다.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러시아 등 외세를 도입했다. 세르비아의 유입으로 한때 유고연방국이기도 했다. 신유고가 해체되고 독립했지만 갈등은 잔재해 있다. 태국 총재 탁신도 여기 피신해 왔다. 몬테네그로 시민권을 보유해서다. 구속을 요청 했으나 시민권 보유자로 응하지 않았다. 올리브 나무가 산에 지천이다. 무화과나무, 석류나무도 지천으로 많다. 길가에 무화과와 석류나무들이 많고 열매도 주렁주렁 매달렸다. 버스는 점점 산길로 접어들고, 산과 산 사이 바다가 보이고, 석양은 구름을 가르고 찬란한 빛을 분무한다. 아드리아해의 비경이다. 이것이 발칸이라고 말하듯 신비로운 풍경이 자꾸 전개 된다.
* 몬테네그로 아드리아해 비경
이제부터 발칸의 아픈 내전 역사는 끝이다. 아드리아해 쪽 산길 도로, 한국의 강원도 울진 마을과 같은 곳을 지난다. 아드리아해와 그 주변이 비경이다. 지금은 해가 아드리아 바다로 내려앉는 일몰이 비경이다. 해변 산마을의 집들이 하얗게 모여 있다. 이곳 해변은 모래 대신 자갈이 많다. 올리브나무가 흐드러지게 많은 산길을 달린다. 그러다가 다시 아드리아 해변의 도로를 타고 아직도 지지 않은 태양이 바다 위에 찬란한 빛을 분무한다. 이 길을 계속 따라 호텔까지 간다. 해발 1800m급의 석회암산이 장관이다. 산과 바다의 절창, 관광업이 주업인 나라다.
* 몬테네그로 베니스 풍의 거리
한 동안 아드리아해의 비경을 보며 석회암산을 넘어왔다. 저녁 햇살이 촉촉하게 스며들어 발칸의 낭만에 젖을 때 작은 도시에 들어왔다. 고운 건물들이 있고 분홍, 하양 색의 유두화 꽃 거리 시가지다. 로마 영향을 받아서 아름다운 베니스 풍의 거리다. 여기서 30분만 가면 오늘 유숙할 호텔이다.
* 몬테네그로 아드리아 해변의 소나무 숲 해수욕장
작은 도시를 벗어나자 한 늙은 남자가 수영복 차림으로 걷는다. 이상하다 했더니 아드리아 해변에 소나무들이 줄지어 있고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아드리아 해변의 소나무 숲 해수욕장이다. 몬테네그로는 해안가 길이가 총 294km, 해수욕장이 117개로 약 73km를 차지한다. 그 중 하나의 소나무 숲 해수욕장을 지나가고 있다. 자동차도 많이 주차해 있다. 해가 지는 저녁인데도 사람들은 고운 모습으로 짙푸른 바다의 낭만을 즐긴다.
* 몬테네그로 아드리아해 스테판 섬
아드리아해에는 무인섬과 유인섬이 있다. 아드리아 해변을 달릴 때 섬이 종종 보인다. 그런데 스테판Sveti Stephen 섬은 해변의 육지와 다리를 놓았다. 밀물 때면 섬이 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육지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 15세기 모습이 남아있는 어촌이었으나 1950년대에 남은 주민을 내보내고 호화로운 휴양지로 바꾸었다. 길거리, 벽, 지붕, 건물의 정면 등은 대부분 그대로 보존하였고, 내부만 현대적으로 고쳤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메릴린 먼로, 소피아 로렌 등 여러 유명인이 찾는 휴양지였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하며 잠시 쇠퇴하다가, 오늘날은 호화 호텔과 리조트 단지를 조성하였다. 스테판 섬의 붉은 지붕 집들은 모두 호텔이다. 버스가 잠시 멈추어서 자세히 조망했다. 아드리아해 바다에 뜬 그 풍광이 비경이다.
* 몬테네그로 부드바 호텔 도착
몬테네그로의 도시, 부드바 호텔에 도착했다. 한국과 시차는 -8시간이다. 어두워지는 저녁이다. 호텔이 건물이 위쪽에도 있어서 일부는 그곳으로 갔다. 방에 짐을 풀고 호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아주 큰 호텔이며 음식 메뉴도 훌륭하다. 맛있는 음식과 풍성한 과일로 지친 피로를 풀었다. 내일은 6시 모닝콜, 7시 조식, 8시 출발이다. 내일도 많이 걷는다. 코토르 1시간, 드브르부니크 3시간, 4시간 도보 관광이다. 편한 복장을 입으란다. 코토르와 드브르부니크는 더운 도시다. 햇볕이 많아서다. 유럽인 여행자가 많이 오는 곳이다. 물가도 저렴하다. 여기는 슬랍어 국가다. 키릴 문자 국가가 아니다. 발칸 여정의 아름다운 호텔, 행복하고 편안한 밤이다.
2011년 9월 13일 화요일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부드바 아드리아 해변
아드리아 해변에 위치한 호텔이어서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섰다. 산 위에 추석 한가위 보름달이 하얗게 새벽하늘을 빛낸다. 부드바는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몬테네그로의 도시로 2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 중 하나다. 몬테네그로에 사람들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세기다. 로마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불가리아제국, 베네치아공화국, 세르비아왕국, 오스만투르크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등의 통치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에 편입되었다. 1946년 구유고슬라비아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이었다가, 1992년 유고가 해체되며 세르비아와 신유고연방을 결성했으나, 2006년 6월 5일 신유고연방으로부터 온전하게 독립한 나라다.
바다로 가는 길에는 호텔이 많다. 휴양지라서 그렇다. 아드리아 바다가 보인다. 가슴 벅찬 순간이다. 지도에서나 마주하던 지중해 아드리아해를 두 눈에 담고 있다. 해무 서린 바닷가에는 붉은 파라솔과 하얀 비치 의자가 환상으로 잘 배치되어 있다. 모래가 있어야 할 해변에는 작은 몽돌이 깔려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바다다. 해가 떠오르려 붉은 빛을 드리운다. 여명의 바다, 야자수 흐드러진 해변 길, 우람한 나무들, 모두 아름다운 정경이다. 호텔로 돌아올 때, 올리브나무에 올리브가 새파랗게 달려 있다. 깊은 연륜의 골목에는 유두화가 화사하게 아침을 연다. 잊지 못할 몬테네그로 부드바 아드리아 해변이다.
* 몬테네그로 부드바 호텔 출발
오늘은 몬테네그로에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까지 간다. 아름다운 바다 아드리아해를 만나고 바다에 떨어진 보석과도 같은 도시 부드바Budva의 타라 호텔을 떠난다. 발칸의 아드리아 해변 휴양 도시 부드바는 아담하지만 건물 하나하나가 육중하다. 커다란 산이 아버지처럼, 포근한 바다가 어머니처럼 감싸고 있는 떠나기 아쉬운 도시다. 발칸반도 중서부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몬테네그로는 숨은 보석이라고 불린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지만 남한의 7분의 1에 불과한 국토에 산림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다시 올 수 있다면 오랜 시간 머물며 산과 바다가 공으로 주는 고요한 향기 속에 영혼을 적시고 싶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가는 길
휴양도시 부드바를 떠나 코토르로 간다. 부드바 시가지는 큰 산 아래 자리하여 지나는 길마다 아름답다. 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아드리아해의 비경은 어제에 이어 여전하다. 산길을 돌아가자 우람한 석회암 산과 아드리아 해변의 도시 코토르가 보인다. 몬테네그로Montenegro의 숨겨진 보물의 도시 코토르Kotor다. 몬테네그로의 작은 해안 마을 코토르가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세르비아왕국 지배 시절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자리매김하면서 부터다. 세르비아왕국에서 생산된 풍부한 광물이 코토르를 통해 수출되면서 거대 자금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직공들의 길드가 생겨나고 선원들이 주체로 하는 다양한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런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예술과 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침 햇살이 바다를 적시고 밝아오는 발칸의 도시는 명화로 뜬다. 도로변에는 그렇게도 많이 보았던, 우리나라에서는 귀한 무화과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커다란 키로 서 있다. 바다와 산, 그리고 숲이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아드리아해 최남단의 도시 코토르에 도착했다. 코토르에 들어서자 큰 나무가 짙푸른 숲을 이루고, 멀리 우람한 산이 도시를 품고 있다. 시가지의 건물이 육중한 중세풍이다. 마을 뒤로 육중한 산들이 검은 빛으로 겹겹이 줄지어 있다. 몬테네그로Montenegro는 검은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붓한 피요르드 해안 바다에는 크루즈선박과 어선 등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코토르Kotor는 넓은 만, 좁은 수로, 정교한 항구 도시다. 이태리어로는 까따르만이다. 코토르는 몬테네그로 코토르 연안에 펼쳐진 중세 도시다. 중세 때는 종교 순례지여서 그땐 명성이 높은 도시였다. 350년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다가 15세기 오스만 침입,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1945년에 몬테네그로에 편입 되었다. 이 주변국들은 코토르를 두고 각축전을 벌렸다. 몬테네그로의 보물이며 천혜의 요새도시다. 조금은 낯설지만 발칸반도의 숨은 여행지다. 코토르의 인구는 2만5천 명이다. 1967년 지진으로 70%가 파괴 되었다. 1979년 지진으로 50%가 또 파괴 되었다. 현재는 다시 복원한 모습이다. 베네치아 스타일의 도시다. 야자수 해변의 길을 따라 성벽 앞으로 갔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고대 성벽
코토르에 버스가 주차하고 내렸을 때, 높은 성벽이 물과 만나고 있다. 성벽 너머로 구시가지 돔지붕의 성당이 보인다.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부터 있던 요새를 따라 9세기부터 쌓기 시작한 고대 성벽 코토르 성곽은 18세기에 복원한 것으로 높은 가치의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산 위 요새까지 총 길이가 4.5Km, 성벽의 높이가 20m로 코토르를 지키기 위해 세운 고대 성벽이다. 이 성벽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수많은 전쟁을 치른 코토르의 상징이다. 코토르는 몬테네그로에서 잘 보존된 중세 도시이자 1979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다.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회백색 천혜의 요새 도시다.
구시가지 안으로 통하는 코토르 항구 앞, 서쪽 바다의 성문은 16세기에 지어졌다. 이곳 육중한 성문으로 성 안 구시가지에 들어갔다. 문에는 본래 베네치아와 오스트리아풍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2차 대전 당시 모두 파괴되었다. 중앙 광장에는 시계탑이 있다.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몬테네그로다. 아름다운 노천카페와 중세의 건물들이 시간을 거꾸로 돌린 느낌이다. 성안에는 여러 개의 교회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트리폰 대성당, 니콜라스 성당, 성 루카 성당 등이 있다. 로마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작은 항구마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는 탓에 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몬테네그로 사람들은 아름다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웬만한 대포로는 뚫기 어려운 두께의 성벽을 척박한 산 중턱에 쌓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 소중한 유물이 현재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성트리폰 성당
높은 성벽의 아치형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트리폰 성당은 2개의 종탑이 우뚝 솟은 건물이다. 왼쪽 탑에는 809, 오른쪽 시계탑에는 2009라는 숫자가 씌여 있다. 809년~2009년까지 지었다는 뜻이다. 성트리폰 대성당은 코토르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코토르의 수호성인이었던 순교자 성트리폰은 3세기 때 인물인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 809년부터 짓기 시작한 성당이다. 이스탄불에서 그의 유해를 가져와 이곳에 두었다. 1166년에서야 11지금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지금 모습은 2009년에 증축된 모습이다. 제단은 14세기 때 만들었다.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인 성트리폰 성당은 1667년과 1979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2009년 재건되었다. 화재로 인해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여러 차례 개축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면서 로마양식, 바로크, 고딕양식 등의 다양한 문화가 접목되었다. 카톨릭 교회인데 내부는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어 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 되었을 때 그 경계선상에 놓여 있던 코토르는 양쪽의 각 문화가 융합하여 발달했기 때문이다. 2층은 박물관이다. 베네치아 350년 통치기간 중 사용했던 물품이 있다. 전시된 유품은 대부분 코토르 귀족 가문에서 받은 것들이다. 높은 종탑을 올려다보노라면 성당 뒤편의 석회암산이 오롯하다. 꾸미지 않은 회색 건물이지만 아름다운 양식의 탄탄한 성당이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카라파나 우물
구시가지는 돌다 보면 기이한 것들이 많다. 견고한 성벽이 이어지면서 중세 도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잔틴시대부터 쌓기 시작한 성벽 안쪽으로는 도시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인 12~15세기 무렵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구시가지 중앙에는 17세기에 만들었다는 펌프식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고 하니 대단하다. 카라파나 우물은 잡지 기사에 나간 명소로 유명해졌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우물일까, 싶을 만큼 외형이 아름답다. 철조물로 이루어져 있고, 상당히 과학적으로 발달된 조형의 우물 구조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루카 정교회 성당
구시가 북쪽 루카 광장에 있는 정교회 성당이다. 12세기에 지은 카톨릭 성당인데 17세기 이후부터는 동방 정교회로 바뀌어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같이 사용한 특이한 교회다. 지진에도 끄떡없이 잘 견디어 온 성당이다. 르네상스와 로마네스크, 바로크 등 다양한 스타일로 지어진 건축물은 규모가 크진 않지만 아름답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 루카 성당은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교회다. 눈으로 보아도 전혀 꾸밈이 없는 고풍스런 모습이다. 루카 광장 주변에는 14세기에 지은 귀족들의 비잔틴 저택도 있다. 각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건물과 화려한 외관 그리고 장식품들이 시선을 끈다. 구시가지 중심의 그루구린 저택, 코토르 유명 가문의 보카 저택,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난 피마 저택 등이 유명하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니콜라스 정교회
니콜라스 정교회 성당은 루카 광장의 한편에 있는 세르비아 정교회다. 19세기에 지어졌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20세기에 네오 비잔틴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원래는 러시아 니콜라스 정교회 건물인데 세르비아 정교회 건물이 되었다. 고딕식 종탑 2개가 아름답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식 합성 건축 성당이다. 검은 색 비잔틴 둥근 지붕이 오롯하다. 베네치아 문장으로 네잎 크로바 형상의 휘장이 걸려 있다. 모양 주변은 좁은 골목길이다. 루카 정교회 성당 곁에 있다. 지붕에 세운 십자가가 2개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본 것과 같은 모양이다. 루카 정교회 성당보다는 현대적인 건물이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르네상스식 건축물
코토르 구시가지 성 안에는 아름다운 구조의 건물들이 많다. 특히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베란다를 돌출시켜 꽃 화분을 놓은 풍경이 아름답다. 이런 건물은 곳곳에서 보인다. 문에 코토르를 구한 인물들을 부조상으로 붙여 놓은 곳도 있다. 터키로부터 구원한 한 여인의 일생을 새긴 것이다. 코토르 구시가지는 그야말로 중세의 체험을 하는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요새와 해자
광장 주변의 명소를 다 본 후 남문 쪽으로 가서 코토르 요새와 해자垓字 즉 성 밖으로 둘러 파 놓은 연못를 보았다. 남문은 11세기~12세기에 축성한 것이다. 높은 산 아래 성곽을 쌓아 요새를 만들고, 성곽 아래에 물을 채운 해자를 만들어 코로르를 지켜온 흔적이 있다. 성벽은 험하고 높은 바위산인 로브첸산 밑에 세워져 있다. 로브첸 산 중턱 가파른 암석 지형 위에 늘어서 있는 성벽들은 성 요한 요새로 중세 시대 세워진 것이며 코토르를 지켜온 역사의 유적지다. 코토르는 자연 지형과 인간의 노력으로 만든 천혜의 요새다. 낮은 도시 주변은 해자로 둘러쳐져 있고 앞에는 바다가 있어 적에 대한 방어의 천연 요새로 훌륭한 곳이다. 1657년 오스만 투르크가 코토르를 점령하기 위해 2달 동안 이곳에서 진을 치고 버티다가 성벽이 워낙 견고하여 물러갔다. 베네치이 공국,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으며 수많은 전쟁을 치러온 아픈 족적이다. 여행객의 눈에는 아름답고 고풍스런 정경이지만 몬테네그로 코로르의 사람들에게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슬픔이 배인 곳이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성벽 안 구시가지
코토르 구시가지 안의 주요 명소를 가이드와 함께 관람하고 40분 간 자유시간을 주어 구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코토르 구시가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도시다. 돌로 깔린 좁은 골목은 미로처럼 막힘없이 연결되어 있다. 옛날에는 이런 골목길들이 적군의 침략이 있을 때 성 밖으로 나가는 통로여서 쉽게 나갈 수 있도록 이어서 만들었다. 우리 부부도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헤매면서 처음엔 당황했지만 결국은 원하는 장소로 이동이 가능했다. 골목마다 촘촘하게 돌로 지어진, 오랜 세월의 향취가 배인 건물들도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코토르의 중세 건축물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들의 전통생활 방식을 볼 수 있다. 1979년 몬테네그로 해안 지역에 발생한 지진으로 50%의 구시가지가 파괴되었으나 복원하여 현재 2천 명이 거주한다.
문화적으로 풍족한 중세 도시다. 기원전 로마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아온 코토르는 중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유네스코는 이 성안에 있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현대가 공존하고 있는 구시가지 전체를 1979년에 세계문화유산 도시로 지정했다. 몬테네그로의 코토르 구시가지는 과거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아 베네치아의 거리와 골목의 모습이 많이 닮았다. 그야말로 이곳 코토르 구시가지는 12세기 거리에서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다. 성 밖의 신시가지는 대부분 코토르 시민의 거주지로 구성되어 있다. 몬테네그로의 화폐는 유로다. 상점에서 유로를 받기 때문에 편리하다. 그래서 나도 독특한 디자인의 머플러를 두 며느리와 내 것으로 3개 샀다. 고성 내부의 미로처럼 연결된 좁은 길들을 이리저리 거닐다 보면 방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성벽 길을 타고 올라가는 산길도 있다. 코토르 성벽, 궁전, 요새, 정원 등 많은 것을 보았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구시가지 시계탑
바다 쪽으로 난 성벽 서문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서면 광장 정면으로 높은 시계탑이 바로 보인다. 코토르 구시가지 넓은 중앙광장에 1602년에 만든 시계탑이 아직도 서 있다. 광장 주변에는 중세풍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야외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많아 고운 풍경이다. .이곳은 무기 광장이기도 하다. 시계탑 지하는 무기 창고다. 구시청사로 무기고였는데 현재는 레스토랑이다. 현시청사는 성트리폰 성당 곁에 있고 깃발이 2개 걸려 있다. 이 시계탑은 약속의 장소로 이용된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모여서 다시 바다 쪽의 성문으로 나왔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피요르드 해안
코토르는 크게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뉜다. 서쪽에는 코토르 연안이 펼쳐지고, 동쪽에는 절벽이 마을의 경계를 이룬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복잡한 해안선 때문에 코토르의 아드리아해는 바다가 아닌 호수처럼 보인다. 발칸의 베네치아, 코토르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유럽 최남단 피요르드 지형이다. 산곡에서 물이 흘러 피요르드처럼 형성 되었다. 동유럽 최고의 피요르드가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하천 계곡 도시다. 아드리아 해와 검은 산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몬테네그로 코토르는 아드리아해의 보석이다. 몬테네그로는
293㎞에 이르는 아드리아 해안을 품고 있다.
영국 시인 바이런은 몬테네그로의 절경을 `땅과 물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조우'라고 노래했다. 아드리아 해안 중에서도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코토르 연안 깊숙이에 자리한 아름다운 항구도시 코토르는 몬테네그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도시다. 몬테네그로는 문자 그대로 검은빛negro을 띠는 산monte을 표현한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몬테네그로에 들어서면 한국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검은 빛을 띠는 특이한 나무가 많다. 바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검은색 산의 형색이다. 지상의 낙원을 보려거든 코토르로 가라는 유럽인의 말이 있다. 동감하는 대목이다. 코토르 피요르드 해안을 따라 크로아티아로 간다. 코토르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했다. 코토르에서 크로아티아까지는 2시간 30분 걸린다. 지나는 곳마다 절경이다. 해변을 따라 산자락에 자리한 붉은 지붕 마을이 비경을 더해준다.
* 몬테네그로 아드리아해 섬으로 뜬 성당
아드리아해에 비경으로 뜬 섬이다. 섬은 두 개인데 왼쪽은 자연섬, 오른쪽은 인공섬이다. 남자들이 돌 던져서 지은 성당이다. 오른쪽 인공섬 테라스톤 성당은 반석 위의 성모성이다. 왼쪽의 자연섬 생조지 성당은 자연의 성이다. 왼쪽 자연섬은 나무가 많고, 붉은 지붕의 고풍스런 성당이 있다. 그 건너 오른쪽 인공섬은 긴 터에 돔 지붕의 현대식 성당이 있다. 이 두 개의 섬은 바다 가운데 자리하여 대비를 이루며 아드리아해의 명소다. 버스가 섬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길가에 주차하여, 산길에서 잠시 내려 두 섬을 자세히 보았다. 계속해서 아드리아해 연안 길로 달린다.
* 몬테네그로 휴게소
울울창창하다는 표현은 지금 이곳에 아주 적절한 문구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고 온통 나무숲이다. 이 지역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많다. 승천하는 영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공동묘지에 많이 있다. 키 크고 뾰족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무더기로 보일 때는 공동묘지가 있다. 짙푸르고 높은 산의 중턱 곳곳에는 동유럽 특유의 붉은 기와지붕 집들이 꽃처럼 앉아 있다. 주유소도 붉은 장식으로 주변의 녹색 풍경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발칸의 청정한 공기를 공으로 흡입하며 행복한 여정이다.
* 몬테네그로에서 크로아티아 가는 국경선
국경지대를 지나 몬테네그로를 출국한다. 보드라운 발칸의 국경선이다. 그저 고속도로 톨게이트 하나 지나듯이 통과한다. 아주 간단한 절차로만 통과한다. 커다란 산과 높은 키의 사이프러스나무가 출국을 배웅하는 듯하다. 몬테네그로에서 크로아티아로 입국하기 위해 자동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국경선 사무국 직원이 직접 버스에 올라와서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다. 발칸은 임시 여권으로는 여행 불가다. 모든 세계여행이 그렇지만 발칸에서는 더욱 여권을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버스 안에서 기다리며 울창한 숲의 국경선을 보는 것도 행복하다.
* 크로아티아 입국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 해변국이다. 1780Km의 해안선을 소유한 국가로 인기 있는 휴양지다. 섬까지 합하면 5790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섬이 800여개로 많다. 그중 유인섬은 70여개다. 크로아티아 면적은 한반도의 1/4 크기다. 인구는 500만 명이다. 수도 자그레브에는 100만 명이 산다. 해변은 모래보다 돌이 많다. 지중해성 기후다. 인구 구성은 크로아티아인이 78%, 세르비아인이 12%다. 종교는 카톨릭이 75%, 세르비아 정교회가 11%다. 언어는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한다. 관광 국가라서 영어도 잘 통한다. 1, 2, 3차 산업이 골고루 발달되었고, 관광업을 하는 사람이 많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많다. 매년 1천만 명의 관광객이 온다. GNP는 1만불~2만 5천불인데 평균 1만 2천불이다. 관광지라서 물가는 비싸다. 한국과 수교를 맺은 국가다. 1992년 UN에 가입했다. 현재는 전쟁에서 완전히 회복했다. 두브로브니크에 가면 1991년 폭격 당한 거리를 볼 수 있다. 아드리아해의 비경을 선사하는 해안도로를 따라 아드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달린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도착
아드리아해 바다와 우람한 산 능선을 타고 아름다운 도시 두브로브니크DUBROVNIK가 정숙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산에 기대어 앉은 꽃물결이다. 해안가에 펼쳐지는 두브로브니크 고성의 예술적 아름다움이 대단하다. 돌출된 바위 지형에 두브로브니크 도시가 생겨난 것은 7세기의 일이었다. 두브로브니크는 떡갈나무란 뜻이다.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해 크루크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두브로브니크 인구는 약 6만명이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축구를 했는데 진 팀은 이긴 팀의 버스를 파괴한 적이 있단다. 그래서 호텔에서는 그 당시 한국 관광객이 타고 온 버스에 KOREA라는 글씨를 써서 붙이라고 했단다. 구시가지는 1300년부터 형성되었다. 같은 색 톤의 거리다. 지진이 2차례 난 이후로 동일한 건축을 해서 그렇다. 매년 100만 명 이상 관광객이 찾는 도시다. 두브로브니크 시가지에 들어서자 석회암산 아래 지중해의 푸른 나무가 평화롭고 나무 사이로 구시가지 입구의 높은 고성이 보인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는 벌써 중세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해준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곽 조망
두브로브니크 성 안 원래는 7천 명 거주였는데 지진 후 나가서 현재는 1800명이 거주한다. 짙푸른 바다에 접하여 높이 25m, 둘레 2Km에 달하는 흰 성벽이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두께는 최대 육지쪽으로 6m, 바다쪽으로 3m다. 견고한 성벽으로 아드리아 해안과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2Km 성곽 중 2/3는 바다, 1/3은 육지다. 한바퀴 도는데 50분 소요된다. 난공불락의 요새다. 부유했던 흔적이 있다. 우리는 서쪽 문인 필레 게이트Pile gate로 진입한다. 3개의 문 중에서 2번째 문이다. 이 다리를 들고 열쇠를 왕이 가지면 아무도 못 들어온다. 지도를 들고 있는 성 블라이트 수호성인 조각상이 성곽 높은 곳에 있다. 전쟁 등의 역사적 격정을 거치고 때론 여러 나라들과 타협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크로아티아에서 유일하게 내내 값진 독립을 유지했던 지역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두브로브니크DUBROVNIK 구시가지 관광 및 자유 시간을 합하여 약 3시간 30분 소요된다. 8세기부터 16세기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던 성벽은 두브로브니크의 보호막이 되어 오랜 시간 지켜왔다. 성 주변에는 16개의 방어탑이 건설되었으며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성벽 위에 오르면 한편으로는 붉은 지붕으로 채색된 구시가지가 다른 한편으로는 아드리아해가 끝없이 펼쳐진다. 성벽에 오르는 입구는 모두 3개로 필레 문Pile gate, 플로체 문, 구항구에 있는 스베티 이반 요새 쪽에 있다. 성벽 전체를 도는데 약 2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오늘 오후 4시 10분까지 버스에 승차하면 된다. 이곳에서 중식을 하고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와 아드리아 해변까지 눈과 발로 체험하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사비오르 교회
두브로브니크 성의 서쪽 입구인 필레 문Pile gate을 들어서자 일직선으로 뻗은 플라차PLACA 메인 거리가 전개된다. 그 거리를 중심으로 구시가지에는 중세풍의 건물들이 양편으로 길게 가득 들어서 있어 장관이다. 문의 좌측으로는 성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성벽 아래 플라차 거리의 왼쪽으로 성사비오르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520년 지진이 났을 때 생존자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건축했다. 2차례의 대지진에도 파괴되지 않아 감사기념으로 16세기에 만들어진 교회다. 정면 외관이 르네상스 스타일로 아름다우며 오랜 연륜을 그대로 간직한 고풍스런 건물이다. 성사비오르 교회 앞에는 오노플리안 분수가 있다. 이곳이 두브로브니크 성 구시가지 여행의 시작점이며 약속의 만남 장소이기도 하여서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프란체스코 수도원
성사비오르 교회 맞은편에는 오노플리안 분수가 있고, 성사비오르 교회 오른쪽에 웅장한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다. 1317년에 지었다. 수도원 입구의 문 위쪽 외벽에 피에타 상 조각상이 있다. 청빈하고 영원 구원을 위한 수도원이다. 학교, 병원, 종교 3가지 역할을 했다. 특징은 가장 오래된 약국이 성당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에게 1391년 문을 열었다. 현재도 실제로 약을 판매한다.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래된 약국이다. 세계 최초로 일반인에게 개방한 약국이라는 데에서 의미가 크다. 원래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계율에는 수도원 안에 약국을 둘 것을 명시하고 있다. 약국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고, 약국 안에는 낡은 처방전, 그 당시의 조제기구, 약품 등을 그대로 남겨 한쪽 면에 전시하고 있다. 많은 고문서도 보관하고 있다. 14세기에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교회다. 17세기 크로아티아를 휩쓴 대지진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화려한 장식은 볼 수 없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회랑이 있다. 회랑 오른쪽에는 오래된 약국이, 왼쪽은 종교 박물관이 있다. 수도원 안쪽에는 수도사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플라차 거리 초입에서 만나는 건물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플라차 거리
오랜 역사를 대변하듯 하얀 대리석이 깔려있는 플라차 거리PLACA가 힘차게 뻗어 있다. 플라차 거리는 서쪽의 필레 게이트에서 동쪽의 플로체 게이트까지 이어지는 구시가지의 중심거리로 대리석으로 된 바닥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매끄럽게 닳았다. 플라차 거리는 오노플리안 분수 앞 필레 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성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루자 광장의 시계탑까지 이르는 300m의 중심대로다. 원래는 7세기 도시의 수로 역할을 했던 곳으로 바닷물이 흐르는 운하였으나 성을 쌓으며 성채도시가 된 이후 바다를 메워 길을 만들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바닥은 반질반질하게 닳아 대리석처럼 보인다. 현재의 모습은 1667년 대지진 후에 돌로 조성한 길이다.
플라차 대로변의 건물은 모양, 높이, 톤, 구조, 내부가 모두 동일하다. 상가, 사무실, 주거용으로 3층 주상복합건물이다. 1층은 르네상스, 2층은 고딕, 3층은 르네상스 복합건축양식이다. 1층은 상인들 집합장소, 2,3층은 상인들 숙소였다. 현재는 역사박물관이다. 1516년 상업센터로 출입국역할 건물과 조폐국도 있었다. 17세기부터는 문화센터로 지식인들 학술회 장소다. 17세기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는 화려했던 거리가, 복원 이후에는 화재발생에 대비해 석재와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거리에는 각종 상점들과 노천카페가 가득 들어서 있고,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노천카페에 앉아 투명하고 강렬한 태양을 한가득 받고 있다.
플라차 거리의 끝 지점에는 지금은 과학 아카데미로 사용되는 스폰자 궁과 16세기에 세워진 시계탑, 두브로브니크의 정신적 요람인 성 블라이스 성당이 있다. PLACA를 중심으로 많은 골목이 있고 골목마다 상점과 식당들이 있어 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고고한 중세의 옛 흔적들이 현대인을 반기는 정겨운 명소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시계탑
플라차 거리의 맨 끝 루자 광장 시청사 건물에 우뚝 서 있다. 곁에는 스폰자 궁전이 있다. 1445년에 세운 오리지널 시계탑이었으나 파괴되어 1929년에 다시 만든 것이다. 해시계로 시간의 표시는 숫자 대신 타오르는 태양 광선의 곡선 12개가 시계를 상징하고 있다. 그 아래에 나타나는 XII와 45숫자는 12시 45분을 뜻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낮 12시 50분으로 XII와 50숫자가 나타났다. 숫자는 5분 단위로 바뀐다. 이 시계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다녀간 것을 기념하여 만들었다. 현재의 시계탑은 1929년에 재건된 것이다. 시계탑 맨 꼭대기는 종탑이 있고 중간 부분에 해 모양이 그려져 있다. 종탑이 있는 이 시계탑의 높이는 35m, 종의 무게는 2톤이다. 아름다운 조형의 건축물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블라이스 성당
성블라이스는 두브로브니크 도시의 주교였으며 이 도시를 지킨 수호성인이다. 베네치아인이 침입했을 때 이 도시를 구한 사람이다. 10세기 순교자다. 이 성당은 도시의 수호신인 성블라이스를 기리기 위하여 1368년에 건립한 성당이다. 루자 광장의 성 블라이스 성당St. Blaise's Church은 1369년 화재와 1667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처음에 세운 건물 양식은 로마네스크였으나, 베네치아의 건축가 마리노 그로펠리가 1706년에 착공하여 1717년에 베니스에 있는 성당을 모방하여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하였다.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사랑 받는 성당이다. 18세기 1715년에 지진으로 무너지자 그 당시 물건들이 모두 불 탔는데 성인의 은동상만 타지 않았다. 과거의 유물은 불과 몇 개 밖에 안 되는데 그때 당시 모습을 전시해 놓았다. 성인의 팔, 다리를 보관하고 있다.
매년 2월 3일은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2월3일 휴일에 성인의 동상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성인의 축일 날인 이날은 블라이스의 팔, 다리를 판매도 한다. 성인의 머리와 목구멍으로부터 꺼낸 약간의 뼈와 오른손과 왼손을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옛날과 똑 같은 방법으로 사지가 분리된 성인을 들고 다닌다. 수 백년이 지나오는 동안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이 성 블라이스의 몸을 분리해서 가지고 다니는 무서운 행위는 고대 그리이스에서 신의 사지를 절단하는 의식을 모방한 미신이다. 일종의 거리 공연 카니발로 신의 영험함이 내게로 온다는 뜻이다. 성인을 축복하는 행위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 성당 입구 문 위 지붕에 그의 조각상이 높이 세워져 있다. 왼손에 지진 이전의 두브로브니크 시가지 모형을 들고 있는 성 블라이스 조각상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청사
플라차 거리가 끝나는 곳의 광장에 시계탑이 오롯이 솟구쳐 오른 건물이다. 왼쪽에는 아치형 회랑이 있는 스폰자 궁전이 있다. 시계탑 곁에는 항구로 나가는 성의 동문 플로체 게이트Ploce Gate가 있다. 성문 밖으로 나가면 아드리아해의 선착장이 나온다. 건너편에는 성 블라이스 성당이 있다. 시계탑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구시청사다. 구 시청사 건물 옆에는 동상이 있는데, 두브로브니크의 목사였으며 크로아티아 극작가였던 마린 드르작 목사가 앉아 있는 좌상이다.
시계탑 앞 광장 중앙에는 국기게양대가 있는데 평화와 독립을 상징하는 롤랑의 기둥이다. 1418년에 만든 롤랑의 기둥에는 중세시대 프랑스의 유명한 기사였던 롤랑의 조각상이 있다. 롤랑이 들고 있는 검은 칼은 프랑스 카를 대제가 하사한 것이다. 카를 대제가 이슬람의 사라센 세력이 지배하던 스페인을 정복한 후 778년 평화협정을 맺고 철군을 했는데 후미에 남아있던 적군의 추격으로 롤랑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프랑코 왕국의 왕 카를 대제의 조카이자 용감한 장군이었다. 롤랑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신의를 버리지 않는 중세 기사로 후대 봉건기사의 모범 표상이 되었다. 구시청사 주변에는 노천카페와 함께 중세의 중후한 건물들이 많아 고전적 낭만의 향기가 아주 진하게 흐른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렉터 궁전
렉터 궁전은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의 혼합 양식으로 단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수도원으로 사용하던 궁이다. 두브로브니크의 통치자였던 수도원장을 위한 건물로, 수도원장의 사무실, 개인 공간, 접견실, 등이 있다. 목사가 성직을 수임하기 전에 가족과 떨어져 한 달간 홀로 생활하는데 사용되었던 곳이다. 국가의 중요한 업무가 있을 때만 성을 떠날 수 있고, 항상 성내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 당시는 수도원장이 통치자였다. 현재는 박물관이다. 동전, 집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1천년 전 인물의 반신상이 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기증한 유명 인물이다. 화가들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렉터 궁전은 15세기 나폴리의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 화려한 외형과 실내장식 없이 소박한 외관이 특징이다. 1463년 폭격을 맞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지진으로 건물이 붕괴되기도 했다. 다시 복구하여 두브로브니크 시정부 등의 의회에서 공식적인 행사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치형 문이 종려나무 형상이고, 기둥의 조각들이 우아하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폰자궁
스폰자궁Palaca Sponza은 플라차 거리 끝, 시계탑 광장 왼쪽, 렉터 궁전 맞은편에 있다. 우아한 아케이드가 있는 주랑과 긴 고딕 양식의 창문이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1516년에 지은 이 건물의 1층 아치형 회랑은 르네상스 양식의 기둥 6개가 있고, 2층은 고딕양식의 창문이 있으며 3층은 르네상스 양식의 창문으로 여러 가지 건축양식이 혼합된 아름다운 석조건물이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로 꼽히는 스폰자 궁은 후기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가 지은 궁전이다. 이름은 궁전이지만 왕이 살던 곳이 아니라 세관, 재무국, 은행 등 경제 활동을 담당하던 곳이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으로 들어오는 전 세계 무역 상인들의 출입국으로 이곳에서 상품거래를 하고 관세를 거두던 상업의 중심지였다. 1667년 대지진 발생 때에도 지진을 잘 견뎌낸 건물로 원형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 중 하나다. 1층에는 크로아티아 내전의 참상을 보여주는 영상실과 사진,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의 개막식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16세기에는 지식인들이 모여 여러 분야를 논하는 문화센터, 과학 아카데미로 사용되기도 했고, 현재는 고문서와 역사적 기록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국립기록보관소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두브로브니크 대성당Stolna Crkva은 이탈리아 건축학자 버팔리니가 설계했다. 12세기에 영국의 리차드 왕이 처음으로 세운 건물로, 1667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현재의 바로크 양식의 모습은 1713년에 이태리인에 의해 바로크양식으로 재건되었다. 3번 건축했는데 7세기 비잔틴양식, 12세기 로마네스크양식, 17세기 바로크양식이다. 금으로 만든 팔과 다리를 보관하고 있다. 라파엘로 그림 마돈나와 마리아상도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성블라이스의 유물 등 많은 보물이 있는 곳이다. 조각상과 그림이 많다. 대성당 안 의자에 앉아서 여행의 족적으로 크로아티아의 종교에 젖어 보기도 했다. 성당 건물은 밖에서 보아도 대단하다. 지붕에도 석상이 세워져 있고 벽면에도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다. 중세의 향수로 거무스름한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오징어 먹물 요리
아드리아해의 보석이며, 지구상의 낙원이라 불리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에서 오징어 먹물 요리를 중식으로 먹었다. 두브로브니크는 유럽문화와 예술의 상징 도시이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도시다. 성을 나와 항구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먹었다. 밥을 오징어 먹물로 비벼 나오는 메뉴다. 그 위에 토마토 케찹을 뿌려 먹는다. 어찌 보면 까만 밥이 이상하기도 하지만 스페인 여행 중에 먹었던 기억도 있고 바다 향기가 배인 밥알이 입맛을 돋군다. 구시가지를 구경하며 많이 걸어서 더욱 맛있게 먹었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올드 항구
올드 항구는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이나 크루즈가 정박하며, 수많은 요트가 떠 있다. 코발트빛의 아름답고 따뜻한 해변에는 부호들의 요트가 가득할 만큼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는 도시다. 두브로브니크 바다는 해초가 없기 때문에 더욱 투명한 빛깔을 띤다. 모래밭이 아닌 바위가 들어선 해변이라 집들과 건물이 바다와 바로 접해 있다. 유명인들의 별장도 많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이곳 해안도시는 7세기에 도시가 만들어져 라구사Ragusa 공화국이 되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유일하게 경쟁했던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바다 해양산업으로 문명화가 이루어진 도시다. 두브로브니크의 붉은 깃발은 모든 출항선박의 돛대 위에서 휘날렸다. 이 배들은 항상 풍성한 포획물을 싣고 귀항하였다. 9세기부터는 발칸과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지로 부를 축적했으며, 11∼13세기에는 금과 은의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15∼16세기에는 무역의 전성기였고 엄격한 사회 계급 체계를 유지하며 유럽에서 처음으로 노예 매매제를 폐지하는 등 높은 의식을 가진 도시였다. 오늘 내가 선 이곳 올드 항구는 그 옛날 영화롭던 시절을 재현하듯 아주 평화롭고 아름답다. 파란 하늘과 태양, 푸른 바닷물이 환상이다. 다듬지 않은 두브로브니크의 고성과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석회암산 아래 절창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해 유람선
아드리아해에 접한 올드 항구에서 유람선을 탔다. 바다 위에서 두브로브니크성을 조망하며 로크룸 섬Lokrum Island을 한바퀴 도는 코스다. 산정 요새의 성채 전경이 눈 앞에 서 있다. 탱탱한 하늘과 푸른 물빛, 해변의 붉은 집들, 호텔 건물이 비경을 더해준다. 바다로 돌출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성곽이 뚜렷하게 연출된다. 배 뒤의 하얀 물결이 푸른 바닷물 위에서 뒹굴며 멋진 낭만을 연출한다. 아드리아 바다 가운데 로크 섬 바위에는 발가벗은 사람들이 있다. 나체의 남녀들이 움직이기에 손을 흔들었더니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한다. 발가벗은 자유가 바위에 고스란히 널려 있다. 영혼과 육체를 코발트빛 바다에 온전히 맡기고 있다. 이곳 로크 섬에서는 나신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홀로 자가용 요트에 승선하여 바다를 즐기는 남자도 있다. 배의 바닥면에 유리로 된 곳이 있어서 그곳을 통해 바다 속도 보았다
두브로브니크는 번영 속에서 형성된 도시다. 크로아티아의 과학을 비롯, 모든 분야의 학문과 예술이 이 작은 도시에서 번영하여, 아드리아 해상에 빛났다. 이곳의 학자들은 세계 여러 나라로 가서 이 지역의 높은 학문수준과 유럽 문화를 전파하였다. 십자군 전쟁 뒤에는 베네치아 군주 아래 있다가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유람선이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우리가 넘어온 산길이 보이는데 가파르고 아득하다. 해변가 곳곳에서 남녀노소 한데 모여 수영하며 햇살을 받는 유럽 발칸의 풍경이 곱다. 석회암산에 종려나무가 짙푸르게 솟구친다. 바닷물은 투명하여서 물고기들의 유영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랜 기억으로 내 가슴을 뜨겁게 적시며 각인될 아드리아해 유람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아드리아해 유람을 마치고 다시 두브로브니크 성안 구시가지를 걸으며 아까 보았던 렉터궁전, 스폰자궁,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시계탑, 플라차 거리, 프란체스코 수도원, 오노플리안 분수 등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는 강한 방위벽으로 둘러 쌓여있고 관공서와 광장, 좁은 중세거리의 주택들은 로마와 고딕시대 스타일을 띄고 있다. 어느 골목을 가도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상가들이 길손을 반긴다. 이곳이 크로아티아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말이 실감난다. 달마시안 해변의 지상 낙원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의 높은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매년 7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여름 축제가 열리는데 각종 행사와 이벤트로 풍요롭다. 1667년 큰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다시 옛날의 번영을 누렸다. 1999년부터 도시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성채, 왕궁, 수도원, 교회 등 역사적인 기념물 가운데 가장 크게 손상된 건물들이 복원되었고 옛 명성을 되찾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 플라차 거리는 하얀 대리석으로 광채가 난다. 세련된 유럽거리의 축소판으로 걸어도 걸러도 지루하지 않다. 오늘 하루의 값진 시간을 다 엮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는 중세의 발칸 보물을 공으로 보여준 고맙고 소중한 도시였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오노플리안 분수
오노플리안 분수는 1448년 새로운 수도사업 완공 기념으로 이탈리아의 건축가 ‘오노프리오 드 라 카바Onofrio de la Cava’의 이름을 따서 만든 우물이다. 깨끗한 물이 졸졸 흐르는 샘은 기술적으로 영원한 기념물이 되었으며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심볼이었다. 총 16개의 물구멍이 있고 흐르는 물은 식수로 사용한다. 12km떨어진 곳에 있는 샘에서 좋은 물을 끌어다가 이곳에 공급했다. 섬세한 조각이 있고 처음엔 아주 화려한 모습이었다. 둥근 분수의 물구멍들은 각계각층 사람 얼굴 조각의 입 속으로 연결되어 있다. 거리의 악사도 분수 아래에 앉아 흥겨운 가락을 선사한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약속의 장소다. 우리 일행도 자유로운 시간을 마치고 이 분수에서 만나기로 했다. 해가 저물어 오노플리안 분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발칸의 구시가지 그 옛날의 물은 아니어도, 세계에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조각상 얼굴 사이로 흐르는 오노플리안 분수의 물을 받아먹고 물병에 받기도 한다. 모두 흐뭇한 표정이다. 지친 여정에서 촉촉한 낭만을 선사하는 명소다.
*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이동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성 앞에는 세계 곳곳에서 온 여행객을 위한 버스가 많이 주차해 있다. 크로아티아의 수도는 자그레브다. 하지만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수도인 자그레브보다 달마티아 해안에 자리한 두브로브니크가 더 유명하다. 자동차도 많아 교통이 혼잡하다. 이제 두브로브니크 도시를 떠난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보스니아 사라예보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아름다운 아드리아해 다리가 산과 산을 잇고 있다. 그 다리를 건너서 국경 마을로 가고 있다. 아드리아 해변을 따라 계속 산길로 간다. 산길로 아름답지만 아드리아해의 해안 도시는 어느 곳에서든 비경이다. 가끔씩 아드리아해에 섬도 보인다. 고즈넉한 섬들이 햇살이 내려 빛나는 바다 위에서 정숙한 자태로 앉아 있다. 나무가 울창한 산이 마을을 감싸는 정경은 아주 평화롭다.
* 보스니아 국경선 통과
여권 검색을 하지 않는다. 국경선 사무국 직원들이 제복을 입고 밖에 나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일부가 보스니아 소유로 되어 있다. 크로아티아 사이에 약간 들어온 보스니아 영토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소유의 바다를 팔라고 해도 보스니아에서 팔지 않는다. 버스는 쉽게 국경선을 넘어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왔다. 여기는 보스니아 영토다.
* 보스니아 휴게소
크로아티아에서 국경선을 넘어 보스니아로 왔는데 여전히 아드리아 해변 길이 이어지고 비경을 선사한다. 휴게소도 아드리아해가 보이는 바로 곁에 있다. 보스니아의 아드리아 해협 석양이 아름답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더러는 지하의 수퍼마켓에 들르고, 우리 부부는 보스니아 마을과 거리, 가게 풍경까지 둘러보았다. 아드리아 바다를 향해 형성된 마을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붉은 지붕의 집들이 곱다. 명소만 보는 것이 여행은 아니라고, 나는 늘 생각하여서 세계여행 중에는 지나는 곳마다 깊은 관심으로 살펴보곤 한다. 돌 하나에도, 풀 한포기에도, 집모양, 거리 풍경 등 모두가 소중한 여행의 자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국경선까지는 40분 소요된다. 이번은 진짜 국경선을 넘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가는 국경선은 1.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간이 국경선, 2.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 3.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진짜 국경선, 이렇게 국경선을 넘는다. 지금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가고 있다. 국경선에 대한 이색 체험이다.
*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국경선 통과
이곳 국경선 사무국에서도 여권 검색을 하지 않는다. 쉽게 국경선을 통과했다. 여기는 크로아티아 땅이다. 저 멀리 높은 산이 보이고 광활하게 전개되는 들녘 기름진 농토 사이로 물길이 보인다. 농사짓는 마을이 있다. 무화과와 석류농장이 있다. 아드리아해의 일몰이 비경이다. 해변마을 풍경 또한 비경이다. 석회암산 높은 산정의 길을 돌고 돌며 간다. 다시 들녘이 보일 때는 푸른 농장의 무화과와 석류나무들이 한가득 풍요로운 발칸의 풍경이다. 산에서 들녘으로, 다시 산길로, 다시 들길로 아름다운 여정이다.
* 크로아티아 국경마을
크로아티아의 국경마을을 지난다.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에 묘하게 파고든 보스니아의 작은 영토가 있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넘나들고 있다. 보스니아였다가, 다시 크로아티아였다가, 조금 혼란스럽지만 이 두 나라의 국경지대를 살펴보는 여행이 흥미롭다. 마을 사이로 네레트바강이 넓게 흐르고 있다. 높은 산과 함께 평화로운 정경이다.
*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국경선 통과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넘어온 국경선에 양국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버스 터미널 같은 느낌이 드는 국경선 사무국이다. 버스가 터미널에 정차하듯 우리 일행을 태운 발칸 버스가 국경선 사무국 앞에 주차하고 있다. 한국은 2007년부터 발칸여행이 시작되었다. 국경선 사무국 직원이 여권 검색하러 올라왔다가 ‘코리안?’하고 묻더니 여권을 거두지 않고 그냥 통과시킨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연방국가다. 보스니아 수도는 사라예보, 헤르체고비나 수도는 모스타르다. 오늘 유숙할 우리의 숙소 근처가 모스타르다. 내일 사라예보로 이동하여 관광한다. 보스니아의 일몰이 아름답다. 산불 난 장면이 보인다. 여기는 보스니아 땅이다.
* 보스니아 호텔 도착
우리 오늘 호텔은 네레트바 강변이다. 오후 7시경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의 발칸 버스 기사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우리 일행의 가방을 모두 챙겨서 내려주는 모습이 정겹다. 불가리아 사람으로 버스 운전기사 경력 10년이란다. 불가리아에서는 그의 5살 어린 아들이 나오기도 했었다. 이번이 마지막 운행이라 한다. 우리를 태워다 주는 마지막 독일 뮌헨에서, 다시 그의 집이 있는 불가리아 소피아까지만 운전하고 다른 직업을 찾아 운전기사를 그만 둔다는 것이다. 소피아에서 친구와 사업을 한단다. 그 이유가 아들이 아빠를 매일 보고 싶다고 해서, 아빠와 매일 함께 살길 원해서라는 말에 가슴에 뜨거운 전율이 흘렀다. 발칸을 비롯한 유럽 여행의 버스 기사는 한번 나오면 오래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텔 주변은 나무로 울창하다. 나무 사이로 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우리 부부의 방은 308호다. 짐을 풀고 나와 호텔 1층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날씨가 많이 덥다. 저녁인데도 32도다. 낮에는 40도까지 오른단다. 내일은 6시 모닝콜, 6시 50분 조식, 7시 30분 출발이다. 모기가 있을지 모르니 방문을 닫고 자라고 한다. 주변이 아름다워서 산책도 하라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산책하기로 하고 편안한 잠을 잤다.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보스니아
* 보스니아 호텔 출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네레트바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걷기도 했다. 어제 본 산불이 오늘 아침에도 보인다. 오늘도 높은 산자락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새벽 여명이 강물을 곱게 적신다. 호텔의 뒤편인데 정원에 큰 나무가 많다. 호텔 식당은 네레트바강이 보이는 곳에 있다. 호텔 앞쪽 우리의 버스를 주차한 곳에 정교회 성당이 보인다. 보스니아 모글리에 아담한 도시의 호텔을 출발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가는 길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로 간다. 네레트바 강줄기를 따라서 간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의 메주고리예는 성모발현지로 조사 중이다. 성지 순례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호텔에서 나와 시가지를 벗어나자 들녘은 여전히 발칸의 상징처럼 다가오는 옥수수 재배지가 나온다. 네레트바 강변에는 비닐하우스도 있다. 산불 연기가 높은 산 위로 까맣게 오른다. 강변의 나무들이 울창하다. 강변 마을은 대부분 포도밭 농가다. 줄지어 들어선 포도나무들이 장관이다. 사라예보까지 네레트바강 협곡 따라서 간다. 발칸의 석회암 고산과 강 풍경이 비경이다. 산불 흔적이 보인다. 발칸의 산에서 종종 일어나는 산불이다. 사라예보까지 2시간 30분 정도 남았다. 1시간 뒤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한다. 한국시간과 시차는 -8시간이다. 도로는 잘 발달되어 있어서 버스가 잘 달린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도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도시를 지나고 있다. 인구 10만 명으로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큰 도시다. 모스타르는 사라예보를 관광한 후에 다시 들를 것이다. 크로아티아에서 발사한 총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집 담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대로 있는 곳도 있고 또는 부수어진 곳도 있다. 발칸의 잔인한 아픔이다. 이곳은 이슬람교 집단 거주지 지역이다. 석회암 우람한 산 아래 마을에 아주 큰 공동묘지가 있다. 산정 십자가가 오롯하다. 주유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한국의 삼성SAMSUNG 광고 안내간판이 건물 위에 있다. 발칸, 이 먼 곳에서 내 조국의 기업광고를 만나다니 참으로 반갑다. 길가에 세워둔 허름한 자동차가 2대 있다. 앞 번호판이 없는 차로 보아 버려진 것이 아닐까 싶다. 먼지도 많이 쌓였다. 모두 보스니아의 내전 아픔으로 다가온다.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변에 전면이 탄흔 자국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자꾸 보인다. 허물어진 건물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돈이 없어서 고치지 못하여 그러기도 하고, 전쟁에 대한 교육용 전시로 일부러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예쁜 교회가 있어 마음을 평화롭게 하기도 한다. 마을의 공동묘지가 아주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 마을의 희생자들 무덤으로 소슬하다.
* 보스니아 네레트바 협곡
석회암 산이 계속 이어지고 산정에는 자작한 나무들만 바위틈에 있다. 산 아래로 강줄기가 보인다. 네레트바강이다. 지금 보이는 곳은 네레트바 협곡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1600~2300m의 고산들이 줄지어 장관이다. 에메랄드빛 물빛이 비경이다. 터널이 많다. 석회암산 고산이 계속 이어지며 비경을 아낌없이 선사한다. 산자락 아래 네레트바 강에 민물 양식장도 있다. 나무와 물빛이 동일하게 푸른빛이다. 산악기차가 맞은편 길로 지나간다. 산에서 산으로 건너가는 다리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점점 강폭 좁아진다. 댐을 건설 중이다. 댐이 있다. 비스듬히 줄을 긋는 주름진 산이다. 저 산들의 형상으로 보아 한때는 이곳이 육지였다는 것이다. 보스니아 아름다운 산악 협곡 길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여정이다. 푸르게, 푸르게 저장되어 결코 낡아지지 않을 풍경들이다.
* 보스니아 협곡 휴게소
네레트바 길고 긴 강과 협곡은 많은 것을 선사한다. 산과 강은 지친 여정의 객들에게 비경을 선사하고, 짙푸른 품자락에 휴게소를 세워 때 묻지 않은 발칸 천연의 영토를 밟아보는 체험까지 허락하였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산중에 양고기를 굽는 집이 있다. 이곳의 특식이라 하여 더러는 사 먹는 사람도 있다. 아래로는 협곡이 절벽을 이루고 강변에는 고운 마을이 있다. 어느 곳을 보아도 산과 강과 울창한 나무들이 잘 어우러진 절경이다.
* 보스니아의 긴 네레트바강
크로아티아에서 넘어와 보스니아 국경마을에서부터 만난 네레트바Neretva강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보스니아 남부를 흐르는 전체길이 약 218㎞의 긴 강이다. 헤르체고비나의 디나르 알프스산에서 발원하여 아드리아해로 흘러 들어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파르티잔 부대가 이 강을 건너 독일군의 작전을 무력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강의 야블라니차 근처의 댐에는 큰 수력발전소가 있으며, 강 상류는 계곡과 협곡을 이루고 하류는 평야지대로 면화와 포도주 등이 생산된다. 여전히 따라오는 물빛은 에메랄드빛 비경이다. 신의 손길로 풀어놓은 천상의 절대적인 물빛이다. 뒹굴고 싶은 욕망을 분출시키는 물 위 옥빛 융단이다. 이곳은 산이 아주 우람하고 짙푸르다. 깊은 뚝심의 강과 함께 절창을 이룬다. 길고 긴 강은 마을에서 동그랗게 아물어지고 있다. 협곡이 끝나고 마을이 나온다. 강변에는 아담한 집들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다. 정원에는 발칸 특산의 석류나무가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다. 산마을 도로변에 약국이 있는데 간판이 보스니아 언어로 되어 있다. 여기는 발칸의 보스니아, 이제 곧 그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도착
양쪽에 산이 있는 온화한 도시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감상하며 온 발칸의 시다. 산등성이 붉은 집들이 곱다. 사라예보에는 한인 교포가 6명만 거주한다. 오늘 우리의 가이드는 그 한인 6명 중 부인이 나온다. 남편은 선교사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의 성지다. 보스니아 인구는 450만 명이다. 그 중 사라예보에 40만 명이 거주한다. 사라예보 시내에 전차가 많이 왕래 한다. 공중에 전선이 많이 있고 도로에 철선이 있다. 도로 중앙의 가로수 지역이 넓고 도로는 편도 2차선이다. 시내 진입 교통이 체증으로 복잡하다. 건너편에 호텔 사라예보HOTEL SARAJEVO라는 영문 표기 상호의 호텔이 보인다. 바로 그 앞 도로를 따라 놀이공원으로 소풍 가는 초등생들의 행렬이 지나간다.
점점 도심 가까이로 들어가자 차량이 많아지고 차량 번호판이 여러 가지다. BH는 보스니아, SL은 슬로베니아 차량이다. EU가입국 표식으로는 파란 바탕에 별 그림이 있다. BH만 있는 것은 나중에 EU가입하면 별을 그리려고 한 것이다. 경찰이 교통지도를 한다. 잔인한 파괴 현장이 보이기도 한다. 사라예보 시가지 한편에는 고층 APT가 오롯하여 평화롭다. 도심의 밀라츠카강 강폭이 좁다. 유럽지역의 강수량이 줄어들고 있다. 세련된 블루 빌딩이 아름다운 조형이다. 노란색 홀리데이인 호텔이 유일하게 폭격 받지 않은 건물이다. 기자단 유숙으로 그렇게 보호해 줬던 것이다. 합의하에 폭격하지 않았다. 청색 빌딩은 국회건물이다. 밀라츠카강에 비가 안 와서 물이 더럽다. 고기는 많다.
한인 여자 가이드 남편은 NGO란다. 한인이 없어서 남편이 영사관 활동도 한단다. 오늘도 남편이 나와야 하는데 바쁜 일정으로 그의 부인이 대신 나온 것이다. 발칸에서는 한국인을 만나기 어럽다. 정착하여 사는 사람도 거의 없고, 여행객도 아직까지는 거의 없다. 정말로 발칸 여행 중에 한국인을 만난 것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식당 한군데에서 몇 명을 만난 것이 전부다. 교포 여인은 아주 친절하고 성실하게 보스니아에 대하여 설명해준다. 그의 가족은 3남 1녀의 자녀와 함께 모두 6식구란다.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이며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 시가지를 2시간 도보로 여행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구시청사
보스니아 내전 때 폭격 맞은 구시청사 건물로 보수 중이다. 밀라츠카강 다리를 건너와서 보았다. 1894년 건축되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통지 중에는 사라예보 시청사였다. 1949년부터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국립도서관이었다. 1992년 8월 25일 내전으로 건물의 90%가 파괴되었다. 이때 도서관의 책 200만권을 잃었다. 이런 아픔을 딛고 그대로 모양을 복원해서 국립도서관으로 건립하고 있다. 처음에 시작한 건축가가 정신이상 되었다. 그만큼 건물 복원에 어려움이 있던 것이다. 또 다른 건축가가 이어서 일하고 있다. 건축가가 바뀌면서 원래의 모양과 약간의 변형미기 생겼다. 지금 미완의 모습인데도 아주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인데 다 복원되면 대단한 건물이 될 것 같다. 저 쪽에서 파괴되었던 그 당시의 집을 밀라츠카강 건너 구시청사 맞은편에 복원해 놓은 것도 있다. INAT KUCA라는 글씨가 하얀 벽면에 붙어 있고 앞에는 나무 창살의 예쁜 집에 꽃을 매달았다. 평화를 읊조리는 듯한 울림의 집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라틴 다리
라틴 다리는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비극의 역사현장이다. 황제다리라고도 부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이 발생했던 역사적인 다리다. 왕자가 오픈카로 이 다리를 달릴 때 세르비아 비밀 결사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살해가 되었고, 이 때문에 1차 대전이 시작된 곳이다. 사라예보는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있지만, 당시에는 1908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보스니아주의 중심도시였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가브리엘로 포린칩이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50세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43세의 그의 부인 소피아를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 부분에서 암살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게 된 것이다.
이 암살사건은 남 슬라브 민족의 통일을 부르짖고, 황태자를 그 장애물로 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적 비밀결사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폐결핵으로 사형선고 받은 자들을 모은 검은 조직에게 손을 써서 수류탄을 차에 던지도록 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수행원들은 기차에서 내려 차를 탄 후 두 명의 결사대원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거사를 실행할 수 없었다. 군중들 속엔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섞여 있어서 수류탄을 던진다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처음에는 수류탄이 왕자가 탄 차의 측면에서 터져 페르디난트는 몸을 피해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와 함께 타고 있던 수행원 몇 명만 부상당했다. 페르디난트 왕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시청의 영접 행사를 치르고 몇몇 수행원의 사상자 병원에 가려고 멈출 때 다시 총살당하여 죽었다. 첫 발은 황태자의 부인 소피아 대공비의 복부에 명중하여 당시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두번째 총탄은 황태자의 심장 근처에 명중했고 그는 쓰러진 자신의 부인을 향해 소피아, 이 말 한마디를 하고는 결혼 14주년 기념일에 쓰러져 즉사했다. 차가 라틴 다리 근처를 지나는 순간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건물 안에서 거리로 나와 자동권총을 꺼내 두 발을 발사했던 것이다. 19살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이며 결핵환자였던 가브리엘로 포린칩이란 청년이 쏜 총이다. 라틴 다리 부근 한 건물 벽면에 그 운명의 장소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 사건 장면과 범행자 사진과 함께 대리석에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암살 사건에 세르비아 정부가 관련되었다고 하여 즉각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몇 주 만에 유럽의 모든 강대국들이 참전하게 되었다. 바로 1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1914 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으며 바로 다음날부터 베오그라드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참전하자 이에 맞서 독일이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이를 따랐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했다. 다음날 영국도 이 시끄러운 싸움에 끼어들었다. 다른 나라들도 속속 참전을 선언했으며 1917 년에는 미국까지 개입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기타 오토만 제국 국가들이 한편이었고,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루마니아, 벨기에, 그리스, 포르투갈, 몬테네그로, 리베리아, 산마리노, 사이암, 중국, 일본, 미국, 쿠바, 파나마, 과테말라, 브라질, 니카라구아,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하이티 등의 국가들이 한 편이었다. 1차 대전은 현대 역사상 두 번째로 값비싼 대가를 치룬 대규모 유혈 참극이다. 적어도 1천만 명 이상이 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비록 암살 사건이 없었더라도 전쟁이 발발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방문 일자를 6월 28일이 아닌 다른 날짜로 잡았더라면 오늘날의 역사가 상당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후문이 있다.
라틴 다리가 놓인 밀라츠카 강변 무슬림 마을에는 15세기 황제모스크가 있다. 안에는 터키식목욕탕도 있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눈 감은 양 처연하게 서 있다. 밀라츠카강에는 13개의 다리가 있는데 라틴 다리도 그 중 하나다. 슬픔 가득 배인 라틴 다리을 건너서 갔다. 다리 아래 강물도 강변의 건물들 그림자만 보듬고는 말없이 흐르고 있다. 역사적 비극은 언제나 큰 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묵언으로 말해주고 있다. 나라마다 서로 상처 주지 말고 평화공존을 유지하는 세계가 되길 염원한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시가지
라틴 다리를 건너 시내 안쪽으로 들어가니 유럽풍의 육중한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주상복합건물로 외형이 아름답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다. 도로의 폭이 좁아서 도보로 관광을 하고 있다. 전쟁 전의 사라예보는 모스크와 아름다운 전경을 가진 터키식 바자르가 있는 도시였다. 도시의 강가는 1914년 페르디난트 왕자가 삶을 마치던 그날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다. 70년이 지난 후 사라예보가 다시 1984년 동계 올림픽의 개최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00년 동안 사라예보는 이슬람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터키인과 유대인과 또 다른 이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했지만, 관용의 전통은 세르비아인의 대포에 의해서 파편 속에 부서졌다. 최근의 전쟁 동안 1만명의 사람이 죽었고, 5천명이 부상당했다. 3년의 잔인한 공격에도 사라예보는 다시 안정 상태다. 트램이 움직이고 많은 카페와 호텔들이 다시 문을 열고, 여행객들이 조금씩 도시를 채우기 시작했다. 최초의 방문객들은 인류의 종말과도 같은 전쟁의 그 엄청난 폐해를 보여주는 장소를 최초로 보고자 하는 전쟁그룹들이었다. 사라예보는 다시 찬란한 대도시로 태어나고 있다. 언제 슬픈 내전이 있었느냐는 듯이 평온한 시가지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무역상인들 상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도심에 16세기 무역상인들 여관자리가 폐허로 무너져 있다. 곁에는 현대의 건축물이 도시를 빛내고 있는데, 이곳은 벽돌이 허물어진 형상을 그대로 두어 흉물스럽다. 상인들이 상가는 복원했다. 18세기에는 8만명의 인구로 무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화려했던 시절의 표상처럼 오롯이 남겨진 흔적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정교회
이 정교회는 터키 술탄과 러시아의 기부금으로 지은 건물이다. 그 당시 터키와는 배척 관계였다. 1868년에 화합의 상징으로 지었다. 교회 안에서는 서서예배 본다. 이곳은 양력 1월 7일이 크리스마스다. 그 이후부터 새해맞이를 한다. 크림색 고운 건물이 아득하게 높다. 교회 앞에는 한국의 종묘공원격의 공원이 있다. 꽃과 나무들이 아름답다. 조각상 조형물도 있다. 시민들이 곳곳에 많이 모여 휴식을 취한다. 노벨 문학상 받은 시인의 동상이 흉상으로 세워져 있다. 가까운 곳에 노찬카페도 있다. 정교회 주변은 참으로 다양한 것들로 채워진 아름다운 공간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로마 카톨릭 대성당
사라예보 구시가지에 있는 로마 카톨릭 대성당은 사라예보 기독교의 상징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네오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의 건축 요소를 사용하였다. 1884년부터 1889년까지 지었다.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수용인원이 1200명이다. 두브로브니크의 주교가 그 시작을 선포하였다. 가톨릭이 국교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보스니아를 지배하는 정신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양쪽으로 하늘 높이 솟아있는 2개의 탑과 아치형의 입구에 조각 장식이 성스럽고 예술적이다. 내부에 들어가니 정면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 보스니아 내전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다. 사라예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성당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가즈하스레브베이 모스크
가즈하스레브베이 모스크에서 가즈하스레브베이는 인명이다. 청빈하고 기부를 많이 하여 사랑받은 사람이다. 발칸의 10대 모스크 중 하나다. 사라예보 구시가지 길목에 있는 이 사원은 이슬람교도들의 안식처다. 사라예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건축물로 1521에서 1541년까지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가즈하스레브베이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 돔 지붕이 웅장하다. 안에는 발을 씻는 곳, 샘, 초등학교, 기도실 등이 있다. 예배와 기도를 위해 많은 무슬림들이 찾고 있는 신앙의 중심지다. 입구의 아치형 문과 이슬람교의 문양이 아름답다. 건물도 크고 우람한데 큰 나무가 있어 더욱 숙연한 분위기의 사원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구시가지
사라예보 구시가지는 16세기의 구역으로 붉은 도로다.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19세기의 구역은 신도로다. 이곳 16세기의 구역 구시가지 거리에는 무슬림 전통상가가 도로 양쪽으로 줄 지어 늘어서 있다. 길이 끝나는 곳까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바슈카지르아 광장까지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만든 구시가지 거리가 전개된다. 이슬람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전통 가옥이 한국의 전통 가옥 지붕과 유사하다. 동양적인 향수가 배어 있다. 이슬람 생활과 문화의 중심인 모스크가 있고, 직인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 레스토랑, 카페들이 즐비하다. 상가에는 온갖 물건이 다 있다. 그래도 이곳은 발칸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물건 값이 싼 편이다. 좋은 물건을 잘 고르면 아주 저렴한 값으로 살 수 있다. 나도 두 아들의 선물로 가죽 벨트 2개를 샀다. 상가 골목은 길고, 진열된 물건들이 아름다워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다. 고풍스런 구시가지 거리는 사라예보의 고운 낭만에 젖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무슬림 전통상가
무슬림의 전통상가였던 곳에 가 보았다. 그들이 물건을 두었던 곳, 사무실, 숙소 등이 있다. 복도가 상당히 넓다. 복도 게시판의 게시물 속에 1992년 3월 1일 보스니아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티토왕 사진이 있다. 그의 아들이 무슬림왕이었다. 사라예보 구시가지에서 이런 저런 역사 유적을 보며 많이 걸었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바슈카르지아 광장
바슈카르지아는 중앙 시장이라는 뜻으로 오스만 투르크 색채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터키인들의 거리다. 바닥이 자갈로 덮혀 있다. 모스크와 각종 상점,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사라예보 관광의 중심지다. 세빌리는 1891년 만들어진 약수 샘으로 바슈카르지아 광장의 중앙에 위치하며, 예전에 나오던 암반수인데 지금도 식수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 세빌리는 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약속 장소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40분까지 모이기로 하고 다시 자유 시간을 갖었다. 사라예보 엽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구시가의 상징 광장이다. 광장 중앙 큰 나무 아래 비둘기가 한가득 모여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이슬람 모스크mosque 사원과 재래시장이 있다. 유럽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사라예보의 한 영역이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갈길은 터키의 향수를 전시하고 있다. 바로 광장 앞의 도로에는 전차와 차들이 분주하게 왕래한다. 과거와 현대가 접목된 고운 풍경이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케밥 중식
바슈카르지아 광장의 한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케밥 중식을 했다. 케밥은 터키 여행 중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다. 오늘 이곳에서는 음식도 좋지만 커피잔 참으로 곱다. 쟁반에 이슬람 양식의 문양이 새겨진 커피잔 세트와 함께 커피를 가져온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정취가 배어 있다. 이것으로 사라예보에서의 여정이 마무리 된다. 아쉬움으로 바슈카르지아 광장을 돌아보며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기억 속에 담았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출발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떠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로 간다. 바슈카르지아 광장에서 버스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도로에 박힌 전차의 두 줄 철선이 낯선 풍경이다. 시내 외곽의 강과 다리가 아름답다. 버스를 타고 꺼지지 않는 불 전몰자 위령 장소 곁을 지났다. 보스니아의 최근에 세운 큰 백화점 앞도 지났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이곳은 초등과정은 9학년, 고등과정은 3년 학제다. 1학년~5학년까지는 한 선생님이 같은 아이들을 가르친다. 3년은 중등과정이다. 보스니아 내전의 중심지였던 사라예보는 1984년 1984년 동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세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1992년~1995년에 걸쳐 계속된 참혹한 내전으로 다시 세계에 알려졌다. 유럽 문화 속에 이슬람 문화가 깊이 숨 쉬는 사라예보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사라예보 거리의 동쪽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구시가지가 있고, 서쪽으로는 합스부르크 시대에 만들어진 신시가지가 있다. 좀 더 서쪽으로 가면 공산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거리 풍경이 있다. 내전의 상처로 아직도 곳곳에는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조금씩 상처를 지워나가며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는 나라다. 말로만 들어오던 사라예보에 와서 실제로 목격하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간다.
* 보스니아 내전에 대하여
보스니아는 30% 이상이 무슬림이다. 그외 카톨릭, 정교회 이 3가지 종교가 공존한다. 무슬림 여자는 타종교와 결혼 금지다. 무슬림 남자는 한가정내에서는 타종교 여자와 결혼이 가능하다.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계는 반대했다. 크로아티아와 무슬림이 한 팀이 되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1993년부터 싸움을 시작했다.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두 나라가 보스니아를 나누어 영토를 분할하려고 했다. 모스타르를 크로아티아가 차지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모스타르의 무슬림계와 크로아티아계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1995년 1국 2체제 즉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된 것이다. 대통령도 3년 체제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2년 3월 회교도가 중심을 이룬 보스니아 이슬람 정부와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보스니아 내 약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에 돌입하였다. 내전 초기 유고연방군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 영토의 약 70%를 장악하였다. 이에 UN은 신유고 연방에 대한 제제 조치를 통해 신유고 연방으로부터의 휴전은 이끌어냈지만,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채 소위 인종청소라 불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1992년 8월 UN국제연합이 군사개입을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는 등 내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12월 회교 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세르비아계 공화국의 1국가 2체제로 연방을 구성한다는 데이턴 평화협상을 기초로 보스니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보스니아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가는 다리 모스타르 다리가 1993년 이 다리를 놓고 양편에서 폭격한 곳이다. 여기서 모스타르까지 버스로 1시간 소요된다. 우리는 모스타르를 여행을 마친 후 크로아티아로 간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가는 길
네레트바 협곡에서 잠시 정차하여 아름다운 비경을 감상했다. 푸른 물과 석회암 주름진 산, 무화과나무, 강다리, 산길도로가 기막힌 풍경을 선사한다. 한때는 육지였을 주름진 산의 흔적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저 평화로운 협곡 끝에 있는 모스타르에서 강의 서쪽과 동쪽에서 팽팽한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무슬림, 카톨릭 모두 매장문화다. 봉분이 없는 무덤을 쓴다. 흰색 팻말은 무슬림 공동묘지, 회색 십자가는 카톨릭 공동묘지다. 양옆에 무슬림과 카톨릭 묘지가 나란히 있다. 두 종교가 그렇게 싸우고도 죽어서는 사이좋게 이웃으로 붙어 있다. 종교로 인한 잔인한 발칸 내전들이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사망한 자들의 수많은 봉분이 애처롭다. 오늘 기온이 40로 매우 덥다. 도로 공사로 잠시 모든 차들이 산길에 정차 중이다. 웃통 벗은 남자가 운전석에서 나와 도로를 활보한다. 그러다가 앞차가 움직이자 쏜살같이 달려 자기의 차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계속 강과 협곡의 산길을 따라 모스타르로 가고 있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석회암산
모스타르에 들어서자 석회암산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슬픈 땅인데 산은 왜 저리도 까칠할까. 육중한 석회암산 아래 붉은 지붕의 마을이 곱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Hercegovina의 역사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하나로 북부 보스니아 지방과 남부 헤르체고비나 지방으로 이루어졌으며, 로마와 투르크의 지배에 이어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가 1992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곳 시민들은 과거 보스니아 내전문제, 종교문제, 민족문제 등에 아직도 아주 예민하다. 아픈 역사를 지닌 영토에 온 것이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시가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시가지는 처연하다. 그래도 복구하여 도로와 건물들이 잘 정돈되어 있는 편이다. 가끔씩 총탄 흔적이 고인 건물을 만나기도 하지만 평온하다. 도심에 공동묘지도 있다. 폐허에서 일어서기가 쉽진 않아서 시내의 분위기는 숙연한 느낌이다. 헐벗은 집시여인이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가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구걸한다. 깨끗한 상가를 만나면 참으로 반갑다. 빛이 보이는 길이다. 속히 회복하여 잘 사는 나라가 되길 빈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구시가지
신시가지가 끝나고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국에서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대표하는 이슬람 풍의 중세도시다. 바닥이 돌로 이루어졌고 길가에는 상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온통 이슬람 문화가 배인 물건들이다. 어쩜 여기가 터키가 아닌가 싶을 만큼 터키식 물품들이다. 화사한 색상의 물건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도 물가는 사라예보처럼 싼 편이다. 모스타르 다리 주변에 형성된 이 구시가지 상가는 모스타르 다리를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또 많은 사람들이 기념물건을 산다. 나도 남편의 모자와 손자의 목각 피리를 샀다. 오밀조밀 좁은 골목, 모스타르 구시가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여정이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다리
이 도시는 모스타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보스니아 내전 중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간에 엄청난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모스타르 다리는 터키식 돌다리다. 모스타르 다리 ‘STARI most’를 경계로 서쪽에는 크로아티아계가, 동쪽에는 무슬림계가 대치하여 총격전을 벌렸다. 크로아티아가 강동쪽의 무슬림을 공격하여 수백명이 사망했다. 1993년 크로아티아군의 공습으로 의해 완전 파괴되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두 대통령이 1991년 만나 통합회의를 했는데 무슬림이 반대하여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에메랄드 빛의 네레트바 강 위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아치형의 보행자 전용 모스타르 다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원래보다 4m 낮은 27.5m로 복원했다. 이태리와 터키 건축가가 2004년 유네스코와 세계 각국의 지원으로 재건했다. 복구 과정은 강바닥에 떨어진 큰 돌들을 건저 내어 원래 그 다리 모습으로 재현하였던 것이다. 이런 다리가 20개인데 12개만 복원하고 8개는 완전 소멸되었다. 스타리 모스트는 사라예보보다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를 이어주는 평화의 상징물이 되었다. 다리에 적힌 ‘Don't forget 93’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모스타르 다리는 모스타르의 상징이자 보스니아 내 민족간 화해의 징표다. 보스니아 내전의 아픔을 간직한 채, 발칸 평화의 상징 다리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아름다운 다리 하나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돌다리는 비스듬한 계단식이다. 아치형 아름다운 다리 바로 아래는 네레트바 강이 옥빛으로 처연히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아픈 공간을 걸어 지나며 다리가 주는 교훈을 새긴다. 주변에는 구시가지 거리가 있고 상가가 많다. 우리 일행도 관광을 마치고 이곳에서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갖었다. 모스타르 다리와 구시가지 관광 후 스플릿으로 이동한다. 모스타르에서 크로아티아 스플릿으로 가는데 국경 통과까지 4시간 소요된다. 밤 9시경 호텔에 도착할 예정이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도심의 무화과나무
모스타르 다리를 건너자 좁은 골목길이 이어지고 네레트바 강변 언덕진 길에 무화과나무가 많다. 아주 크고 열매도 달렸다. 발칸 여행 중 노변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자연 무화과나무를 많이도 보았는데,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이 무화과나무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내 유년시절 우리 집 뒤 화단에 있던 아주 커다랗단 그 무화과나무를 연상케 한다. 그때, 속알이 빨갛게 익으면 따 먹던 기억, 가끔은 혀가 따갑던 기억, 초등학교 때 하교 후 뒤뜰로 달려가 따 먹던 기억, 지금은 세월에 무너져 사라진 그 무화과나무가 눈앞에 선 듯한 착각으로 나는 행복하여서 만져보고 살펴보고 참 행복한 순간이다. 이곳 보스니아 전쟁으로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어찌 견뎠을까. 아주 담담하게 서 있는 무화과나무가 대견스럽다. 한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변에도, 멋진 돌집 카페에도, 곳곳에 평화를 머금고 처연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총탄자국 건물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도심에 총탄자국 건물들이 많다. 고층 아파트의 외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낮은 건물에도 총탄자국이 많다. 어떤 건물은 허물어진 채 살점을 드러내놓고 있다. 바라보는 시선조차 가슴이 섬뜩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교차점에 위치하며 종교와 민족갈등의 교차로다. 이곳은 동서양의 분쟁이 시작된 이래로 기독교와 무슬림, 그리스 정교로 인한 가장 큰 분쟁의 중심이 되었던 지역이다. 잠시 동안이지만 다문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1992년 독립을 위한 투표가 있은 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연방군과 세르비아 군을 통하여 이런 사회를 무너뜨렸다. 이슬람계 슬라브 민족과 그리스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안 인들은 서로 분리되도록 하였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나라의 모든 경제기반이 무너지고 경제는 추락했으며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생겼다. 저 흉측스런 총탄자국의 건물들을 왜 보수하지 않을까 의아심이 들지만, 이곳 경제의 어려움과 또 전쟁이 없는 평화상징의 강한 외침으로 바라보면 해답이 나온다. 아직 상처들이 치유되진 않았지만 사라예보, 모스타르를 중심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라다. 저 아픈 모습을 공유하며 지구상에서 그 어떤 전쟁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담아간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출발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대표하는 이슬람풍의 중세도시 모스타르, 내전으로 아픈 도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모스타르를 출발한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도로변에 곱게 핀 유두화가 아름다운 이별을 고한다. 산은 왜 이리도 건조한 석회암산인가. 같이 슬퍼하면 아픔이 덜어진다고 커다란 덩이로 서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상흔의 건물들을, 총탄자국의 건물들을 보듬고 있는 걸까. 붉은 기와지붕의 주택들 발칸의 고운 빛으로 다가오고, 자동차들 거리를 채우고, 잘 가꾸어 놓은 거리의 나무들 평화롭다. 빨리 회복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다음 여정은 크로아티아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크로아티아 스플릿 가는 길
여기서 50분만 가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경이다. 무슬림이사는 부자 동네를 지나고 있다. 산정에 성채가 있다. 그 바로 아래 산자락에는 크고 하얀 십자가가 있다. 모스크 첨탑이 솟구쳐 오른다. 회백색 주택들이 산줄기를 채우고 있다. 탄탄한 풍경이다. 들녘에는 비닐하우스도 있고, 그 안에는 노랗고 빨간 파프리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주변은 풀밭인데 잘 가꾸어 놓은 농토 한자락이 아름답다.
*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 가는 국경선
어제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넘어올 때 지났던 곳이다. 어느 시골 버스 정류장 같은 느낌의 국경 사무소에는 ‘CARINSKI TERMINAL DOLJANI’라는 간판이 쓰여 있다. 건물 위에는 좌측으로 보스니아 국기가, 우측으로 크로아티아 국기가 걸려 있다. 해질녘 통과하는 국경선이 참으로 부드럽다.
* 크로아티아 입국
여기는 크로아티아 땅이다. 30분쯤 내륙을 질주한다. 아드리아 해변로다. ‘발칸’은 19세기 시용하던 말인데, 터키말로 ‘산맥’이란 뜻이다. 발칸산맥은 도나우강 남쪽 2400~2700mm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지중해성 기후다. 아드리아해도 지중해의 일부다. 아드리아 해변의 산은 하얀 점점이 산으로 장관이다. 두 아들을 기를 떄 읽어주었던 동화 ‘101마리의 개’에서 나오는 하얀 점박이 달마시안 개를 닮은 형상이다. 달마시안은 동화에서 유래한 말인데 토착견으로 점박이 개, 집시가 데리고 온 개, 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늘에서 보았을 때 산에 하얗게 점점이 된 모습에서 지어진 이름이기도 하다. 달마시안은 ‘달만해’, 이태리어로 부르는 ‘아드리아해’, 이런 연유로 달마시안 개가 유래된 것이다. 평원의 들녘에는 감귤 과수원이 있다. 또 다시 이어지는 아드리아 해변의 산은 석회암산이고, 메마른 산에 힘겹게 자라는 푸른 나무가 송송 박혀 오히려 그것이 달마시안 하얀 점박이 개로 비경을 선사한다.
여기서 스플릿까지는 126Km인데 도로가 개통되어 2시간이면 간다. 굴을 통과하는 산길이라서 2시간 소요된다. 잠시 보이는 아드리아해가 아름답다. 크로아티아는 국립공원이 9개인 나라다. 지금 지나고 있는 아드리아 해변의 우람한 산 풍경만으로도 왜 크로아티아에 국립공원이 많은지 알게 한다. 남한의 1/3인 나라다. 인구는 500만 명이다. 수도 자브레이크에 100만 명이 거주한다. 도로변의 집 앞 밭에 케일이 자란다. 드넓은 들녘은 귤 재배지다. 산 노을이 해가 져도 늦게까지 남아 있다.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우리 버스기사 ‘조오지’는 어찌 저리도 발칸의 길을 잘 알까. 대단한 운전 실력이다. ㄷ자로 꺾어지는 산길도 잘 운전하여 나간다. 발칸의 터널이 많은 고속도로다. 산 너머 아드리아해의 일몰이 비경이다. 크로아티아로 진입하는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호텔 도착
어두운 발칸의 길을 따라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아담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정원 야외 테이블에서 석식으로 포도주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내일은 석회암 돌산의 도시 이곳 스플리트에서 궁전관광을 1시간 정도 한다. 중식은 플리트비체입구 도착해서 하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3시간 정도 관광한다. 숲속이라 서늘하여 긴 옷을 준비해야 한다. 내일은 6시 모닝콜, 7시 조식, 7시50분 출발이다. 피곤한 여정을 곤한 잠으로 잠재우며 발칸 여행의 하루를 잘 마무리 했다.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크로아티아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호텔 출발
스플리트는 아드리아 해변의 항구도시다.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책했다.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길을 따라 바다로 나갔다. 아침 바다는 고요하다.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해변의 사이플러스 나무가 높이 솟구쳐 있어 비경을 선사다. 마을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많다. 호텔 정원의 분꽃이 어릴 적 보았던 내 고향의 화단을 연상케 한다. 길가의 무화과나무와 석류나무가 이국적으로 반긴다. 호텔을 떠나 스플리트 시가지로 향했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시가지
스플리트는 이태리말로 스팔리타라는 초봄에 피는 꽃 이름이다. 1974년 유네스코지정 도시다. 도심에 40만 명인구가 살고 외곽까지는 50만 명이 산다. 아드리아 해변 해발 178m의 마리안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가장 해가 잘 내리쬐는 곳이다. 스플리트 시내로 가는데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 산 아래로 고운 마을이 있다. 자연적 천혜 조건으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왼쪽이 유적지가 발견됐다는 지역이다. 더러 유적이 보인다. 7세기 그리스와 로마의 몰락으로 고향을 잃은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420년부터 1797년까지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람들의 정복을 받았고, 1918년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잠깐 동안은 프랑스 사람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도시 곳곳의 유적들이 유네스코 지정의 인류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시내 잔디 공원에는 아침부터 물주는 기계가 분무한다. 시내 곳곳에는 조각품이 많다. 2차대전시 폭격 당했던 도시다. 2~3년 전만 해도 피해 그대로였는데 현재는 많이 복원한 상태다. 문화, 교육도시로 대학도 있다. 무역도시로 경제 핵심 도시다. 크로아티아의 행정복합, 문화도시 기능을 한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는 정치도시 기능을 한다. 오늘은 달마시안의 황홀한 꽃의 도시로 유명한 이곳 스플리트를 여행한다. 달마티아주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고풍스런 도시 스플리트다. 그 중에서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로마 유적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스플리트의 보석 같은 곳 디오클레시안 궁전을 본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궁전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가 건설한 궁전이다.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로마 유적의 하나이며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로마 유적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뛰어나고 위엄 있는 궁전이다. 또한 아드리아해 연안 최대의 로마 유적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유고연방에서 독립하려는 크로아티아 내전 때도 타 지역은 피해가 컸는데 이곳만 피해 안 받아 온전하게 유적이 보호되었다. 두브로브니크에는 1800명~2000명이 사는데 디오클레시안궁 안 200여개 건물에는 3천명이 거주하는 큰 규모다. 궁 안에는 카페와 기념가게 등이 있다.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졌던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의 은퇴 후 화려한 로마를 벗어나 노년을 편안하게 쉬며, 그의 고향인 이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거대하고 웅장한 별궁 궁전이다. BC295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부터 305년까지 10년 동안 이 디오클레시안 궁전을 건축했다. 동서 185m, 남북 215m, 담장 20m의 규모로 지어진 궁전이다.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왕위를 자발적으로 물려준 뒤, 305부터 그가 죽던 316년까지 이곳에서 11년간 머물렀다. 이 궁전에서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다. 그 후 계속해서 러시아 황제들이 사용했다. 디오클레시안 궁전에는 황제의 거처, 열주광장, 주피터궁전, 디오클레시아누스의 묘, 스핑크스, 대성당, 종탑 등이 있다. 로마시대의 웅장한 디오클레시안 궁전과 중세시대에 개축된 대성당과 종탑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다. 모두 이태리산 석회암 대리석으로 지었다. 주황색은 이집트와 그리스 대리석이다. 야자나무 조각은 그리스 코린트식 조각이다.
지금은 작은 궁전에 불과하지만 4세기에 5000여 명의 사람들이 성곽 안에서 살았다고 하니 그 당시 얼마나 큰 궁전인지 짐작케 한다. 이 성벽에는 16개의 탑과 4개의 문이 있는데 북문은 황금의 문으로 군인이 거주했다. 남문은 청동의 문으로 황제 자신의 문이었다. 동은 은의 문으로 신전문, 서는 철의 문으로 보급문이었다. 수로는 남문의 아드리아해로 이어진다. 지하궁전을 통해 들어가는 남문으로 들어가서 많이 걸으며 많은 것을 보았다. 아직도 단단한 중세의 건물들과 중세의 문화를 고스란히 보듬고 있는 역사 공간이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궁전 성도미니우스 성당
성도미니우스 성당은 최대의 로마 유적 디오클레시안 궁전에 있는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스플리트 초대 주교 도미니우스의 관이 모셔져있는 성당이다.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13~14세기에 추가로 건축된 60m 높이의 종탑이 있다. 궁전에 들어섰을 때 우람한 종탑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183개의 계단을 올라 종탑 전망대에 이르면 궁전과 스플리트의 아름다운 구시가지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아드리아해가 비경이다. 스플리트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종탑 아래로 수천 년 전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로마 유적과 빨간 지붕들이 한 폭의 명화로 전개된다. 고운 색상의 꽃으로 장식된 집도 있다. 다시 궁전의 구시가지를 지나 성당 앞으로 와서 자세히 보았다. 원래 궁전의 중앙광장 중심에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영묘가 있던 곳을 개조한 대성당은 신비스러운 느낌의 아름다운 조각과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디오클레시안 황제로부터 죽임을 당한 도미니우스를 위해 영묘를 개조하여 이 성당을 세웠다. 성당 외벽에 복원 조감도가 걸려 있다. 대성을 받들고 있는 코린트식 기둥과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아치형 문과 위로 솟구친 종탑이 장엄하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궁전 황제알현 방
아드리아 해변과 접한 궁전의 남문으로 들어서면 구시가지 카페 곁에 음악당이 있다. 카페도 낭만이고 아름다운데 음악당에서 노래를 부른다. 원래는 궁전의 황제를 알현하던 도입문의 방이다.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남자 중창단이 둥글게 모여 노래를 선사한다. 천장은 둥글게 열려 있어 하늘이 보인다. 벽돌로 지어진 둥근 방은 고전의 모형 그대로다. 노래를 부르며 여행객과 함께 사진도 찍어준다. 역사와 현대의 만남처럼 조화롭고 아름답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궁전 열주광장
열주의 광장은 16개의 둥근 기둥들이 늘어선 가로 35m, 세로 13m의 회의장소다. 석회암 기둥이 줄지어 서 있다. 도미니우스 성당 바로 앞에 있다. 황제시절 행사나 회의를 하던 장소다. 광장 앞에 있는 적돌 기둥 4개는 진짜고, 흰색 기둥 2개 보수한 것이다. 이곳은 관광객들의 휴식 장소이기도 하다. 중세의 향기가 사위를 적시는 공간이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주피터 신전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가장 힘이 센 주피터라고 불렀다. 그래서 황제가 자신을 주피터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신전을 만들고 신을 섬기던 곳이다. 황제의 영묘가 있던 도미니우스 대성당 앞쪽에 있다. 주피터 신전의 스핑크스는 신전을 장식하기 위해 5세기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주피터 신전은 후에 기독교인들에 의해 세례당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노예 출신의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는 병사에서 황제까지 오른 인물인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303년 그리스도교 탄압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여 3천명의 기독교인을 고문하고 죽인 악명 높은 황제이기도 하다. 신전 앞에는 유료라는 문구와 함께 돈을 받는 사람이 앉아 있다. 오랜 세월을 건너온 건물인데 아름다운 무늬의 조각이 그대로 있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궁전 좁은 길
서문으로 가는 가장 작은 골목길이다. 가장 작은 길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나 좀 내보내줘’라는 의미를 지니며 서문과 연결되어 있다. 대리석 바닥의 좁은 길은 벽돌 건물의 거친 벽면이 양 옆으로 있어 한 사람씩 지나가야 된다. 그 옛날 어떻게 이런 좁은 길을 내어 건물을 지었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궁전 나로드니 광장
철의 문인 서문의 바깥 쪽에 있는 광장으로 아담하다. 바닥이 하얀 대리석이다. 나로드니 광장은 14세기에 지어졌고 15세기부터 발달된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 15세기의 구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건물은 고딕 양식으로 아직도 중세의 향기가 배어 있다. 지금은 박물관이다. 이곳 광장 주변에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많다. 노천카페와 상가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궁전 구시가지
궁전 안과 주변의 고풍스런 건물들에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성 안의 노천카페는 그윽한 중세의 향수를 자아낸다. 지금은 허물어졌지만 15세기 템플도 그대로 있다. 바다로 향한 남문을 비롯해 사방으로 4개의 문을 가진 사각형의 성곽도시인 구시가지는 초기에 디오클레시안 궁전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7세기경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침략으로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해 오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로마 황제들이 거주했던 이 궁전이 7세기경 지진으로 파괴되자 일반인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여 지금의 구시가지를 이룬 것이다. 전쟁과 지진을 치르면서 궁이 변형된 것이다. 주위에는 점점 건물들이 들어섰고, 스플리트라는 지명도 이때 붙여졌다.
성곽 안에는 좁은 골목길, 작은 대리석호텔, 노천카페, 레스토랑 등 편의시설이 있고, 아침이면 구시가지 동문 앞 작은 광장에서 아드리아해에서 잡은 생선들을 파는 시장이 열린다. 크로아티아에서 17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시대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구시가지다. 궁전 지하 창고였던 곳에 기념품 가게가 많다. 스플리트는 가죽제품이 유명하다. 여러 가지 기념 소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중세의 거리에서 현세의 사람이 소통하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디오클레시안 궁전 그레고리우스닌 청동상
그레고리우스닌은 10세기 크로아티아 출신의 대주교였는데 크로아티아인들이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투쟁했던 사람이다. 크로아티아 조각가가 1929년에 만든 작품이다. 북문 바로 밖 공원으로 조성된 곳에 있다. 주변에 큰 나무들이 울창하여 동상을 평화롭게 보듬고 있다. 거대한 그레고리우스닌 주교의 청동상은 오른손에 성경을 들고 높이 서 있다. 동상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전설이 있어 사람들은 그의 발가락을 만진다. 사람들에게 허락하며 내민 청동 발가락이 닳아서 빛이 난다. 동상 바로 앞에는 황금문인 북문이 있어 그곳을 통하여 궁전 안으로 들어왔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마리안 해안
디오클레시안 궁전에서 청동의 문인 남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니 아드리아해 마리안 해안과 마리안 언덕이 절경이다. 해안의 풍경과 함께 10여 년에 걸쳐 완성된 긴 성벽이 대단히 아름답다. 아름다운 지중해 도시 스플리트는 20만 명 인구다.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태양이 강한 도시 중 하나여서 다양한 식물이 이곳에서 서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아열대 나무들이 거리 곳곳에 많다. 항구도시로 발전하며 철도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진 도시다. 산업화와 함께 인구가 증가하면서 급속도로 도시개방이 이루어져 현재는 달마티아의 경제, 산업,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크루즈 대형선박, 요트, 등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무역과 관광 도시로 베네치아와 아테네 이스탄불을 왕래하는 선박들이다. 이탈리아나 아드리아해 연안의 여러 섬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탱탱한 청빛 하늘과 단단한 바다가 경계선을 구분 짓지 못할 만큼 맞닿아 있어 눈부신 광경이다. 이것이 아드리아해의 살점이라고, 이것이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 스플리트의 얼굴이 라고, 가슴 절절한 포효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마리안 해안 리바 거리
리바 거리는 마리안 해안을 따라 이어진 도로다. 궁전 남문 앞 200m의 바닷가 산책로다.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고,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다. 마리안 해안을 보며 디오클레시안 궁전 성곽을 보며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마리안 해안에 접하여 10여 년에 걸쳐 완성된 디오클레시안 성벽이 있어 거리는 더욱 아름답다. 궁전 성벽 아래 많은 상가들 줄지어 서 있다. 하얀 천막 포장이 일렬로 늘어서 있어 상큼한 비경이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출발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 스플리트를 출발한다. 도심 거리를 지난다. 푸른 나무가 큰 키로 도시를 감싸고, 그 사이로 고층 아파트와 상가 건물들이 평화롭다. 도심 거리에는 자동차도 많다. 이제 다음 여행지인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로 간다.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달마시안의 황홀한 꽃 도시
스플리트는 달마시아 해안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달마시안 산은 모두 하얀 석회암산이다. 그런 산에 키 작은 초록 나무가 군데군데 바위암석에 붙어 겨우 살고 있다. 멀리서 보면, 특히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룩무늬의 개를 연상케 한다. 스플리트는 영화 ‘101마리의 달마시안’에 나오는 그 점박이 개의 고장인 곳이다. 그래서 그런 달마시안 개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화도 탄생하고, 영화로도 작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퍼진 것이다. 나도 두 아들을 기를 때 이런 연유를 모른 채 하얀 점박이 개 그림의 동화 ‘101마리의 개’를 함께 읽었다. 지금도 달리고 있는 도로의 저 아래에서 ‘달마시안의 황홀의 꽃’이라 불리우는 크로아티아 중부도시 스플리트는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가는 길
여기서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까지는 4시간 소요된다. 아드리아해와 석회암산으로 둘러싸인 붉은 꽃물결 스플리트 시가지가 저 멀리서 작별을 고한다. 아드리아 해협이 산길 옆에서 이어지며 산곡을 돌기도 하고 큰 품사위로 드러나기도 한다. 풍력 발전계도 있다. 풍력계 1대에 3천~5천 가구의 전기를 공급한다. 산을 둘러싸인 호수 같은 바다에 요트가 그림처럼 떠 있다. 코발트빛 물빛이 장관이다. 크로아티아에는 9개 국립공원이 있는데 지금 지나는 이곳도 그 중 1개의 국립공원이다. 울창한 나무와 푸른 물이 비경을 선사한다.
* 크로아티아 휴게소
발칸의 긴 산맥을 따라, 아드리아의 긴 바다를 보며 산과 바다를 달려온 휴게소다. 끝없이 확 트인 광활한 영토다. 인디언과 카우보이 영화 촬영지라는 아득한 산이 저 멀리 뿌옇게 보인다. 유럽 여행 중 종종 보는 길가의 사망자 표식 자리가 휴게소 도로변에서 발견된다. 돌과 십자가로 떠난 사람의 명복을 빌고 있다. 대개는 교통사고 사망자다. 죽은 날짜까지 아래에 적어 놓았다. 커다란 개를 자가용 뒤 트렁크에 태우는 부부도 있다. 동물을 사랑하는 유럽인의 상징으로 보인다. 이런 생활상을 보는 것도 여행에서 얻는 기쁨이다.
*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들
국립공원이 9개나 된다는 크로아티아, 달려도 달려도 계속 이어지는 석회암산이 비경이다. 아주 높은 준령의 산봉우리도 있다. 지금 창밖에 전개되는 우람한 산풍경도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중 하나다. 달마시안 개를 연상하는 점점이 하얀색 무늬가 산마다 광범위하게 이어지고 있다. 산 깊숙이 들어온 호수가 아드리아해 같은데 호수다. 호수가 산 너머 아드리아해와 연결되어 있다. 아주 큰 호수가 석회암산과 함께 장관이다. 크로아티아의 천혜자연을 보고 있다. 석회암산 사이로 생명의 뿌리를 내린 잔잔한 나무가 비경을 이루는 것이다. 산을 뚫어 길을 낸 도로라서 터널이 많다. 터널 위에 하얀색 바위가 한 무더기 솟구쳐 있다. 파란 하늘 아래 만물상 바위가 절창이다. 산을 넘자 평화로운 들녘이다. 동물 사료로 묶어둔 목초 더미가 있다. 우람한 산과 바다 들녘 모두 발칸 반도의 아름다운 정경이다.
*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중식
플리트비체PLITVICE 국립공원에 도착하여 그 안에 있는 식당에서 중식으로 송어 요리를 먹었다. 송어는 이 공원의 호수에 많이 산다. 나무로 지은 천연의 향기 그윽한 식당이다. 중앙에는 장작불을 지펴 놓아 불이 타고 있다. 야채와 함께 곁들인 송어 요리가 맛있다. 숲 속의 낭만을 고스란히 담고 분위기에서 아름다운 식사를 한 소중한 시간이다. 식사 후 3시경부터 공원을 산책한다.
*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중식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산책길에 나섰다. 이곳에서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지켜야 한다. 산 속으로 가면 안 된다. 곰이 산에서 살고 있어 다칠 수도 있다. 사슴도 산다. 반드시 호숫길을 따라 가야 한다. 배가 그려져 있는 그림 쪽으로 이동한다. 공원 하부의 호수는 잔잔한 호수다. 상부의 호수는 큰 폭으로 큰 호수다. 큰 호수에서 배를 탄다. 공원 안내도를 보니 정말 산과호수만 가득하다. 천연자연의 축복받은 땅이다. 플리트비체는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립공원이다. 원시 자연이 서린 이곳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며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자연적 가치를 지닌 곳으로 평가 되는 곳이다. 발칸 여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중한 관광지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최대의 자연관광지이다. 이 공원 지역은 자연 그대로를 살린 나뭇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금 거친 길도 있어 편안한 복장과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
공원에 들어서니 호수에 송어가 많다. 물이 맑아서 송어 떼들이 다 보인다. 에메랄드빛 물 위에 뜬 오리가 수채화를 그려낸다. Veliki slap 폭포는 높이 78m로 장관이다. 폭포 위 플리트비체강에서 내려오는 물이 산줄기를 타고 몇 갈래로 나려오며 비경을 이룬다. 또 올라가면서 새로운 호수를 만난다. 여전히 물빛은 청청하다. 호수 앞에 호수 이름을 붙여 놓았다. 호수를 따라 만들어 놓은 나무판 길을 걷는다. 호수 색깔은 석회암 성분으로 인해 녹색, 에메랄드 빛 등 다양한 색을 나타낸다. 산 그림자라도 드리우면 진한 청록색의 물이 육중하게 산을 물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연한 옥빛, 또 어떤 곳에서는 강렬한 청빛 물색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다가 다시 걸으면 야트막한 둑을 넘으며 졸졸 물이 호수로 흘러내려간다. 고향 마을 개울인양 정겹다. 드넓은 호수에서는 한가득 고인 청빛 물 가슴 속에 산과 나무를 품고 있어 더욱 환상적인 풍경이다. 가장자리에서는 송어가, 물 위에서는 오리가 평화로운 춤사위다. 산을 타고 하얗게 흘러내리는 물줄기도 있다. 들어가 땀으로 젖은 몸을 식히고 싶은 충동이 인다.
갈대가 촉촉하게 드리운 호수를 지나, 산길을 지나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은 넓어서 휴식하기에 좋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배를 타고. 또는 벤치에 앉아 배 시간을 기다린다. 배에 승선했다. 곁에는 벨기에에서 왔다는 부부가 있다. 벨기에는 우리 부부가 몇 년 전 다녀온 나라여서 반가웠다. 영어로 인사를 나누며 흐뭇한 시간이었다. 호수를 보고, 송어를 만나고, 폭포를 만나고, 나무판 길을 걷고, 숲길을 걷고, 유람선까지 타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배에서 내려 또 호수변 산길을 걷는다. 아까 올라가며 보았던 높은 폭포 앞을 또 지난다. 산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하얀 폭포가 천사의 치맛자락 같다. 호수 위에 놓은 나무판 길도 장관이다. 죽은 나무도 그대로, 호수 쪽으로 기울어 사는 나무도 그대로, 기막힌 낭만을 연출한다. 산길을 내려가서 또 유람선을 탔다. 그리 긴 거리는 아니지만 배로 호수를 건너간다.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은 16개 호수와 92개 폭포로 이루어졌다. 1949년 유고연방에서 공원으로 지정했다. 1979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록 되었다. 계절마다 다른 빛깔을 뽐내는 호수와 폭포를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매년 100만 명이 넘는다. 공원 주변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높은 산들이 있다. 골짜기엔 계단식 구조로 이루어진 16개의 신비로운 호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90여 개의 폭포 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크고 작은 수많은 폭포로 연결되는 호수가 장관이다. 각도에 따라 다른 색깔로 빛나는 투명한 녹색의 호수가 주변의 울창한 숲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탄산석회가 호수의 바닥과 둑에 쌓여서 물빛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투명한 파란색에서부터 초록색까지 물의 깊이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호수에서 떨어지는 멋진 폭포의 전경과 이곳에서 서식하는 다양한 야생 동식물들이 공원을 빛내는 요소다. 너도밤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이 빽빽하게 자라는 짙은 숲 사이로 코라나Korana강이 흐르며 원시림의 풍경을 그려낸다.
플리트비체 인구는 약 4천여 명이다.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축복받은 도시이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도시다. 플리트비체 호수들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것은 물론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더욱 소중한 영역이다. 13%가 개인소유다. 농지, 숲,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공원 안에서 민가 마을을 이루며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다. 그 만큼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광활하다. 계획된 일정으로 시간이 급하여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요정이 되어 호수를 타는 환상, 뼈 속까지 정화시키는 천연의 공기, 천상의 어느 한 품에 잠시나마 안긴 듯한 마음으로 행복한 여정이었다.
* 크로아티아 오구린 숙소로 가는 길
여기서 2시간 소요된다. 목초를 비닐로 말아 놓은 더미가 있다. 평원에서 산으로, 산에서 평원으로 이어지는 크로아티아다. 크로아티아에도 내전이 있었다.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구유고 연방에서 독립을 선포하자 이것을 반대하는 유고 연방군과 크로아티아 내 소수민족인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를 공격하면서 발생했다. 결국 1992년 1월 휴전협정 체결과 유럽 각국의 만장일치로 독립을 승인 받았다. 그러나 1993년 1월 크로아티아 관군이 세르비아계 민족을 공격하고 이에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 내에 있는 자민족을 보호하고자 전투가 시작되고 평화가 허물어졌다. 1994년 1월 세르비아 공화국이 주도하는 신유고 연방과 크로아티아가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 관계 정상화가 회복되었다. 발칸의 내전은 종교와 민족 문제로 발발하여 아픈 상처를 안고 있지만 나름대로 회복과 치료로 평온해져가고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저 멀리 발칸반도 고산의 일몰이 비경이다.
* 크로아티아 오구린 호텔 도착
오구린은 크로아티아의 지역 이름이다. 오구린 톨게이트를 나와 오구린OGULIN 호텔에 도착했다. 1층이 로비다. 식당은 0층에 있다. 유럽의 층수 계산으로 이곳 1층은 한국의 2층 개념이다. 2층 로비에서 룸 키를 받았다. 로비 바로 옆 106호가 우리 부부의 방이다. 저녁 식사는 0층, 즉 한국의 1층과 같은 식당에서 먹었다. 내일은 6시 모닝콜, 6시 40분 조식, 7시 40분 출발이다.
2011년 9월 16일 금요일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오구린 호텔 출발
새벽 일찍 기상했다. 호텔 주변을 보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상을 보는 것이다. 호텔 벽면에 이 도시의 발전상을 담은 사진이 걸려있다. 처음엔 캄캄한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차츰 밝아지면서 성당, 노천카페, 조각상 등이 드러나는 아담한 거리다. 호텔 정원과 길거리에 화분이 있어 아름답다. 시가지에 나무도 울창하다. 평온한 도시의 오구린 호텔을 출발하여 이제 슬로베니아로 간다.
* 크로아티아 들녘
드넓은 평원에 옥수수가 한가득이다. 수없이 보아온 발칸의 풍경이다. 옥수수는 사료와 식용으로 재배하는 발칸반도의 대표 작물이다. 그 들녘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목초지에서는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가축을 방목하는 모습이 평화롭다. 가끔씩 만가가 보이고 끝없이 전개되는 발칸의 들녘이다. 저 멀리에는 고산 줄기가 우람하다. 크로아티아의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 슬로베니아로 접어든다.
* 크로아티아에서 슬로베니아 가는 길
여기서 2시간만 가면 국경이다. 국경에서 포스토이나까지는 1시간 걸린다. 크로아티아는 온통 푸른 나무 물결이다. 어제도, 오늘도 싱그러운 산길을 달린다. 아드리해 반도 마을이 아름답다. 바다와 산이 만난 곳에 높은 고층 빌딩도 있고 아름다운 휴양도시를 지난다. 도로변 예쁜 도시 하나를 지나서 국경선을 향해 달린다.
* 크로아티아 국경지역 휴게소
슬로베니아 가까이에 온 국경지역의 크로아티아 휴게소다. 시원하게 뻗어나간 도로변에 고운 열매의 나무가 있다. 주변은 온통 나무숲이다. 캠핑 가는 청년들의 자동차도 있다. 오늘 일정은 포스토니아 동굴 관람 후 블레드성, 블레드 호수까지 슬로베니아의 여행을 마친다. 내일은 슬로베니아를 출발하여 오스트리아를 거쳐 뮌헨 공항으로 간다. 점점 발칸의 여행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다.
* 크로아티아에서 슬로베니아 가는 국경선
휴게소를 출발하여 잠시 후 국경선에 도착했다. 뒤편은 크로아티아, 앞편은 슬로베니아다. 국기가 초록 지붕 위에 걸려 있다. 크로아티아의 사무국 직원이 올라와서 그냥 여권 검사만 하고 간다. 슬로베니아로 진입하는 국경선에서는 내려서 여권을 가지고 사무국에서 수속을 밟았다. 수없이 넘어온 국경선인데 넘을 때마다 긴장을 하게 된다. 항상 어느 나라에서든 국경을 통과 한다는 것은 삼엄한 경계로 엄숙한 분위기다. 그렇다고 해서 통과에 제약을 받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항상 포근한 유럽의 국경선이다.
* 슬로베니아 포스토이나 가는 길
여기는 슬로베니아 땅이다.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알프스, 발칸 반도의 고요한 전원국가다. 나는 두 번째로 왔다. 고운 땅이다. 초지와 예쁜 집이 목가적이다. 한국과 시차는 -8시간이다. 포스토이나POSTOJNA까지는 50분 소요된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남쪽으로 50km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다. 포스토이나 인구는 약 1만 5천명이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카르스트 동굴 포스토이나 동굴을 보기 위해서 포스토이나에 가는 것이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는 작은 유럽의 신생국가다.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구유고 연방은 불법으로 간주하고 연방군의 첫 공격지를 슬로베니아로 정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의 저항에 공화국의 분리 독립의지를 꺾지 못하고 오히려 국제여론을 악화시켰다. 1991년 8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크로아티아 내전을 거치면서, 1992년 1월 유럽의 만장일치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승인 받았다. 슬로베니아는 2004년 EU에 가입하여 경제적, 사회적으로 개방되고 있는 나라다. 아드리아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형으로 녹지가 많고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가 숲으로 덮여 있는 나라다. 창밖의 산과 숲이 울창하다. 가정 집 창가에 기르는 꽃 화분도 예쁜 나라를 예찬하고 있다.
* 슬로베니아 포스토이나 동굴
포스토이나 동굴은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긴 동굴이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이다. 오전 11시경 포스토이나 동굴에 입장했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20km의 석회동굴인데 그 중에서 일반에게 공개된 구간은 5.2㎞로 일반인의 관람코스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또한 꼬마기차를 탑승하여 입장하는 세계에서 2번째로 긴 종류 동굴이다. 2Km는 기차로, 1Km는 도보로, 2Km는 다시 기차로 본다. 1시간 30분 정도 본다. 동굴 속 온도는 8~10도다. 방수 잠바를 입었다. 두 사람이 앉는 전동기차 꼬마기차를 타고 15분간 들어간다. 1872년부터 기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가스 기관차에서 1945년 이후에는 전기기관차로 되었다. 오스트리아에는 40Km 석회동굴이 있고, 우크라이나에는 200Km 석회동굴, 켄터키에는 320Km의 석회동굴이 있다. 슬로베니아 포스토이나 동굴은 1213년 처음 오픈했다. 1818년 통로를 만들고 불을 설치하면서 동굴의 새로운 부분을 발굴하였고 1819년부터 일반인 관람이 시작되었다. 1824년에 댄스 이벤트 홀도 만들었다. 동굴 입구 처음 부분이 검은 것은 오픈 당시 전기가 없어서 불을 켤 때 그을린 흔적이다. 1884년엔 세계최초로 동굴 속에 전기를 가설하였다. 19세기 합스부르크가에서 세계에 알렸다. 현재까지 3천만 명 관광객이 찾아온 관광지다.
동굴 안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1시간 걸으며 굴속을 여행한다. 영어, 독어, 등으로 해설하는 가이드가 있는데 우리는 영어로 해설하는 남자 가이드와 함께 다녔다. 동굴 안에는 치킨, 로미오와 줄리엣, 원숭이, 소크라테스, 생각하는 사람상 등의 이름을 가진 종유석 많다. 희귀한 모양의 종유석이 장관을 이루는 ‘대동혈’, ‘ 1만명 수용 콘서트 홀’, ‘무도장’ 등이 있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수백만 년에 걸쳐 조금씩 이루어진 석회암의 용식으로 생겨난 희귀한 모양의 종유석과 석순이 장관을 이루는 신비의 동굴이다. 석순은 10년에 0.1mm씩 자라나는데, 10cm가 되기 위해선 1000년의 세월이 지나야 된다. 석회석이 많아 지하가 함몰되는 지형카르스트 지형이 잘 발달된 슬로베니아는 약 5,000개의 지하 석회동굴이 있다. 영국의 대문호인 헨리 무어는 슬로베니아 포스토이나 동굴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경이적인 자연미술관이라고 했다.
이 동굴에는 휴먼피쉬Human Fish라고 불리는 생명체가 산다. 도롱뇽의 일종으로 동굴의 어둠에 적응해 눈이 퇴화되었다. 수명은 약 80∼100년, 크기는 약 25∼30cm의 척추동물이다. 단어 그대로 ‘인어’ 또는 ‘인면어’라고도 한다.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피부색이 백인과 같고, 수명도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하얀색 생명체가 가두어 놓은 물속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유리관으로 된 물통 속에 몇 마리 들어 있다. 독특한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휴먼피쉬를 보고 콘서트홀 옆의 정거장에서 다시 꼬마기차를 타고 출구로 나왔다. 끝없이 전개되는 갖가지 모양의 종유석들 앞에서 우주의 장엄한 신비를 체험하는 여정이다. 동굴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꽃과 나무로 둘러싸인 거리의 기념품 가게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스토이나 동굴에 사는 휴먼피쉬의 큰 사진을 걸어둔 가게도 있다. 주차장에서 동굴로 이어지는 길의 바닥에도 휴먼피쉬를 그려놓고 따라오라는 영어글씨를 써놓았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 포스토이나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슬로베니아 블레드 가는 길
오후에 포스토이나를 떠나 블레드로 향했다. 슬로베니아는 2004년 EU에 가입한 나라다. 2007년부터 유로화를 통용한다. 1991년 독립했고 GNP 2만 5천불이다. 전체는 인구는 200만 명이다. 수도 루불라냐 인구는 35만 명~40만 명 유동 인구까지는 50만 명이다. 남한의 1/5, 한반도의 1/11 크기의 작은 국가다. 유고 연방시 다른 나라 왕들이 자주 오던 나라다. 자연경관이 좋아서 휴양지로 관광업이 발달했다. 항구가 있어서 무역운송업도 발달했다. 인쇄업도 발달했다. 주산업은 목재업이다. 슬로베니아인이 85%, 나머지는 여러 민족이다. 슬로베니아어를 사용한다. 한국과 수교국이다. 그러나 대사관이 없다. 그래서 여권을 분실하면 오스트리아에 가서 여권을 재발급 받아야 된다. 주재원 상사 가족 몇 명만 거주한다. 국기에는 2800m 정도의 트리블라요산과 그 아래 두 개의 강과 바다 물줄기가 그려져 있다. 블레드는 살기 좋은 도시에 해마다 선정되어 삶의 질을 우선하는 도시로 해마다 10대 도시 안에 들어간다. 유럽에서 녹지 상태가 가장 좋은 나라다. 들녘 풍경이 전원적이고 목가적이다. 지나는 곳마다 산과 나무, 초지를 배경으로 수려하게 그려내는 한폭의 수채화다. 블레드에 진입하자 알프스 높은 설산이 오롯하다.
* 슬로베니아 블레드성
블레드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다. 알프스 설봉 고산줄기가 장엄하고 코발트빛 블레드 호수가 영혼을 흡입한다. 슬로베니아에 오는 것은 포스토이나 동굴과 블레드성과 호수를 보기 위해서다. 나는 두 번째로 여행 온 곳인데도 처음처럼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알프스 산맥은 1200Km로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프랑스, 독일, 슬로베니아 이렇게 7나라에 걸쳐 있다. 슬로베니아는 알프스 끝자락이다. 가장 넓은 공원으로 트리블라브 국립공원이 있다. 2864Km의 최고봉이 3개 있다. 신선 머리 3개이며 하늘, 땅, 지하를 상징한다. 이탈리아에 알프스가 가장 많다. 항상 만년설로 눈이 있다. 지난 7월에도 눈이 내렸다. 원래는 10월 초에 첫눈이 오는데 금년에는 기상 이변으로 그렇다. 블레드성은 604m다. 블레드 마을은 해발 500m로 7천명이 거주한다. 절벽은 130m다. 1011년부터 성을 축성했다. 계속 보강하여 현재의 성이 되었다. 수도 루불라냐에서 55Km 떨어진 곳이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가 가까이 있다. 각 나라 사람들의 별장지대다. 빙하 호수가 비경이다. 19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 소유였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나폴레옹 소유였다. 다시 오스트리아 소유였다가 1차대전 후 유고연방 소유가 되었다.
버스를 산중에 주차하고 블레드성에 입장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요새와 같은 성이다. 성벽은 경사진 언덕에 있어 방어하기에 최적이다. 800여년 동안 유고슬라브 왕가의 여름별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블레드성은 블레드 호수의 아름다운 전경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장소다. 저 아래로 심원의 블레드 호수 한 가운데 블레드 섬에는 바로크 양식의 마리아 승천 성당이 있다. 성당의 종을 세 번 울리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성안은 두개의 마당이 있다. 아래쪽에 있는 마당은 바깥쪽 건물을 포함하고 있고, 안쪽 마당은 거주할 수 있는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두개의 마당은 계단을 이용해서 연결된다. 상부 마당에 예배당이 있다. 곁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돌로 된 조각들과 이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잘 전시하고 있다. 마당 끝에는 주변경관을 관찰하기 좋은 움막이 하나 있다. 그 곳에 앉아 쉬면서 발밑에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를 감상한다. 1947년 화재로 성 지붕이 허물어졌으나 복원되었다. 아래의 마당에 오래된 중세풍의 우물이 그대로 있다. 돌바닥이 아주 고풍스럽다. 산길을 따라 블레드성을 내려왔다.
* 슬로베니아 블레드 시가지
슬로베니아 블레드는 호반의 휴양지다. 줄리앙 알프스의 진주라 불리는 도시다. 알프스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블레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적인 자취를 볼 수 있는 도시다. 푸른 잔디 정원과 고운 색상의 예쁜 꽃들이 드리운 집들은 요정이 사는 동화 속 마을이다. 나무 창문과 중세풍의 지붕이 시공을 넘어 고전의 향수에 젖게 한다. 블레드는 성, 거대한 호수,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은 빼어난 관광지임에도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다른 유럽의 도시와는 달리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도시다. 블레드BLED 인구는 약 1만 명이다. 관광지라서 카지노, 호텔, 백화점, 카페 등 온갖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틸라 브레이드 별장 쪽 주차장에 버스를 주차하고 자유로이 호수를 보다가 오후 5시 40분까지 버스로 가면 된다. 아름다운 호수 마을 블레드 시가지를 걸어서 블레드 호수변으로 갔다.
* 슬로베니아 블레드 들녘
오늘 유숙할 블레드 호텔로 이동하며 본 슬로베니아 블레드 들녘은 온통 초지다. 줄리앙 알프스 산지에 있는 호반의 도시로 아주 목가적이다. 목장과 가축 사료로 재배하는 풀과 옥수수가 들녘을 채우고 있다. 주택은 그림처럼 곱다. 붉은 기와지붕이 푸른 초지에서 큰 낭만을 선사한다.
*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텔 투숙
푸른 초장에 자리한 아름다운 호텔이다. 사방이 푸른 들녘이고 알프스 산자락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호텔은 신식 건물로 둥근 목조 베란다 구조가 독특한 모양이다. 베란다에서 바라본 슬로베니아의 멋진 풍경 한자락은 천진한 전원의 향기다. 내일은 6시 기상, 6시 50분 조식, 7시 30분 출발이다. 뮌헨공항에 1시 도착해서 4시 30분 비행기 탑승한다. 오늘 짐을 모두 싸야 한다. 유럽공항은 까다로워서 짐을 잘 구분하여 싸야 한다. 넓은 룸이 편안한 안식을 준다. 꿀잠으로 지친 여독을 사르는 밤이었다.
2011년 9월 17일 토요일 슬로베니아 출발
*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텔 출발
어제 보았던 호텔 주변의 목가적인 풍경이 새벽잠을 깨웠다. 밝아오는 호텔의 아침 산책은 온몸을 전율케 한다. 초지의 길을 따라 슬로베니아 블레드의 아름다운 땅을 걸었다. 마을의 아침은 고요하다. 해바라기가 고개를 들고 활짝 웃는다. 이방인에게 기쁨을 드러내는 발칸의 호흡이다. 나도 함께 그 곁에서 활짝 웃었다. 목재 더미가 있다. 나무가 많은 나라이니 이곳 사람들에겐 일상적으로 보는 장면이겠지만 상큼한 산의 향수다. 아직도 어둠은 가시지 않고 민가의 불빛이 푸른 목장 가운데 반짝인다. 마을 입구에는 작은 교회가 있다. 성화와 문 장식이 아름답다. 동트는 슬로베니아 블레드, 알프스 산줄기 푸르름 짙은 산자락 아래 자리한 호텔이 드러난다. 목장도 광활하게 열린다. 온통 푸른 지대의 목축 낙농가 마을, 초지 사이로 난 뽀얀 길, 이제 고운 아침의 추억을 담고 호텔을 출발한다. 오랜 시간 동안 지워지지 않을 수채화 한 폭이다.
* 슬로베니아에서 오스트리아 가는 길
호텔을 떠나자 해는 떠오르고 아름다운 햇살이 초원에 내려앉는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배경을 공으로 선사하고 있다. 요정이 살 것 같은 고운 집과 들녘을 채우는 키 작은 풀들, 그리고 큰 키로 일어선 나무들, 아득하게 먼 곳까지 둘러쳐 있는 병풍 같은 산자락, 이것이 정녕 동유럽 발칸의 아주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 블레드의 전신이라고 외치듯 사롯이 전개된다. 슬로베니아에서 오스트리아로 가고 있다. 오늘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는데 여기서 30분 소요된다. 독일 뮌헨공항까지는 총 5시간 소요된다. 오스트리아 휴게소에서 휴식할 예정이다. 뮌헨에서 16시 35분 비행기를 탑승한다. 오후 1시경까지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내일은 카타르 도하에서 새벽 1시 35분 비행기를 환승하여 인천공항에 오후 4시 35분 도착한다. 알프스 고산 줄기를 따라 힘차게 달리고 있다.
* 오스트리아 가는 국경선
톨게이트 지나듯 살짝 지났다. 검색 절차는 전혀 없었다. 국경다리 하나 통과하면 오스트리아다. 같은 EU국이어서 쉽게 넘는다. 기막힌 국경이다. 이제 여기는 오스트리아 땅이다. 우람한 알프스 산줄기가 계속 이어진다. 잠시 오스트리아를 통과하여 독일 뮌헨으로 간다.
* 오스트리아 짤스부르크 알프스 풍경
오스트리아는 왔던 곳이다. 하지만 오늘 또 새로운 추억 쌓는다. 슬로베니아도 왔던 곳이다. 알프스를 통과하는 7.8Km터널을 지난다. 이 터널을 지나면 바로 오스트리아다. 터널 내 공사로 교통이 지체된다. 이런 터널이 많다. 알프스가 60% 이상 차지해서 그렇다. 오스트리아는 한반도 크기의 나라로 인구는 880만 명이다. 가장 긴 터널은 34Km, 두 번째 긴 터널은 24Km, 세 번째 긴 터널은 7.8Km다. 지금 7.8Km의 세 번째 큰 터널을 지나고 있다. 터널 위에 1991-2011이라는 공사기간을 새겨 두었다. 불빛 찬란한 긴 터널을 달린다.
터널을 나와 줄기차게 산중 도로를 달린다. 멀리 알프스 설산 고봉이 오롯한 비경이다. 가까이에는 알프스의 운무 서린 풍경이 촉촉한 아름다움이다. 알프스 산자락 아래 마을이 곱다. 짤스부르크Salzburg라는 교통팻말이 보인다. 오스트리아 남서부 알프스 산맥이 걸쳐 있는 아름다운 지역 짤스부르크를 지나고 있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산세가 대단히 우람하고 산등성이 고운 주택들이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다. 산자락 목장에는 가축들도 많이 보인다. 실제 여행 코스는 슬로베니아까지인데 공으로 오스트리아의 비경을 보고 있다. 독일 뮌헨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야하는 일정으로 이런 여정을 자연스럽게 얻은 것이다. 창밖의 알프스 비경에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다.
* 짤스부르크 휴게소
알프스 마을의 휴게소다. 짤스부르크Salzburg라는 휴게소의 안내판이 길손을 맞이한다. 온통 산과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는 아름다운 산중 휴게소다. 산에 가득 들어찬 짙푸른 나무들이 올곧게 서 있고, 산자락 아래 곳곳에는 민가와 목장과 초지가 그림처럼 전개된다. 오스트리아 짤스부르크의 풍경을 가슴 속에 담아 간다. 두려울 만큼 고요한 숲의 저 몸짓을 어찌 잊을까. 아름다운 가게도 둘러보았다. 여기서 뮌헨까지 2시간 반, 뮌헨 공항까지는 3시간 반 소요된다. 다시 또 알프스 산중 고속도로를 달린다.
*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알프스 풍경
짤스부르크 휴게소를 출발하자 인스부르크 알프스가 이어진다. 발칸 여정에서 오스트리아를 지나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뮌헨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도 큰 행운이다. 그래서 지금 슬로베니아에서 뮌헨으로 가는 동안 오스트리아를 거치며 짤스부르크와 인스부르크의 알프스를 보는 것이다. 짤스부르크의 알프스도 대단한 비경이었는데, 인스부르크의 알프스도 대단한 비경이다. 알프스 설산 고봉이 장엄하다. 겹겹이 크고 작은 알프스의 산봉우리가 또한 장엄한 비경이다. 알프스 터널을 지난다. 산녘에 고풍스런 건물이 있다. 낮은 지대에는 목장으로 초지 위에서 동물들이 풀을 뜯는다. 산과 초지 그리고 도로가 조화로운 맞물림으로 줄기차게 이어진다. 오늘 참으로 뜨겁게 만나는 오스트리아의 알프스다.
* 독일 진입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진입하는 국경선을 고요히 통과했다. 눈으로 확인도 제대로 못한 채 벌써 넘어온 것이다. 유럽 여행 중 가장 부러운 것이 국경선인데 발칸 여행에서도 수없이 부러운 국경선을 오늘 또 체험하고 있다. 20분 전에 파란 바탕에 별 모양의 깃발을 세워 두었던 곳이 국경선이었단다.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진입한 것이다. 국경선 표식이 따로 없다. EU국들은 그렇다. 독일이 철기가 발달해서 무기도 발달했다. 전쟁으로 의술도 발달했다. 삼림자원도 풍부하다.
뮌헨에서 오늘은 맥주 파티가 있는 날이다. 옥토버 오브 페스티발October of festival로 맥주 500만 리터, 닭 70만 마리, 돼지 40만 마리 소모하는 날이다. 전 세계에서 온다. 우리도 오늘 공항 가는 길에 뮌헨 시내에 잠깐 들리려 했는데 축제로 인한 교통문제로 뮌헨 시내 못 들어간다. 3000m 알프스 고봉 설산이 장엄하게 보인다. 식물 성장 한계선은 2000m다. 10월에 왕자가 맥주를 대접했는데 그때부터 유래한 축제다. 세계3대 축제다. 광란의 맥주 축제다. 물이 석회수로 구하기 어려워서 맥주를 많이 마신다. 독일은 동독 인구 1600만, 서독 인구 6600만 모두 8200만 명 인구다. 1인당 1일에 맥주를 430ml 마신다. 상당한 량이다. 여기서 뮌헨까지 176Km 남았다. 독일 남부의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아우토반 고속도로는 1932년 히틀러에 의해 조성되었다. 2차 세계대전 군수 물자 수송을 위해서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형제처럼 지내지만 히틀러를 놓고는 아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모차르트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히틀러는 화가가 꿈이었는데 비엔나 미대 시험에 2회 낙방했다. 그림을 그려서 생활했다. 엽서를 그려서 빈에서 판매했다. 아버지는 일찍 사망하고 어머니는 유방암이라는 질병을 앓았다. 히틀러는 뮌헨에 가서 나치당을 조성하여 2차 세계대전 일으켰다. 반인륜적 행위를 했고 결국 히틀러는 자살했다. 아우슈비치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집단으로 사형 시켰다. 히틀러는 정신 이상자였다는 기록도 있다. 아버지 사망 후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려서 집으로 유대인 의사가 와서 치료하는데 어머니와 의사가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을 히틀러가 목격했다. 비엔나 미대 심사위원이 7명 중 4명이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히틀러는 유대인을 증오했다. 마리아 테레사도 비엔나에서 유대인을 다 내쫓았다. 유대인이 잘 살아서 미움을 받았다. 유대인 마을은 페스트도 피해 갔다. 아우토반 고속도로 40% 구간은 속도제한이다. 1990년 독일이 통합되고1998년 장벽이 무너졌다. 서독에서 동독을 게으른 돼지, 동독에서 서독을 수전노라고 부른다.
독일은 소로도 발달이 잘 되어 있다. 로만틱 가도도 많다. 로마군 진군해서 형성된 도로들이다.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길은 낭만의 길은 아니다. 고성 가는 고성가도다. 한국의 고속도로가 탄생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우토반 고속도로 지나다가 멈추라고 하고는 한국에도 이런 고속도로 만들기로 결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전문가 불러 건설해 달라하니 이태리 전문가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한국 지형이 이태리와 비슷해서다. 이태리 A1 고속도로와 닮은 도로 탄생이 경부 고속도로다. 스위스에서 이태리 진입하면 이태리 롬바르디 평원을 가르는 A1 고속도로를 만나다. 나는 서유럽 여행 중 이곳 고속도로도 달려 보았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와 아주 유사했다. 인스부르크 가는 안내 표지판 보인다.
여기는 독일 영토다. 울창한 숲과 목장의 푸른 초지가 비경이다. 여전히 알프스 산맥은 우람하게 겹겹으로 맥을 잇는다. 옥수수밭도 있다. 아우토반 고속도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이델베르크 고성에 갈 때도 달렸던 도로다. 지금 달리는 아우토반은 중앙 분리대가 넓게 있고 편도3차선 도로다. 도로 주변의 짙푸른 독일 풍경을 보며 뮌헨을 향해 힘차게 달린다.
* 독일 침지Chiemsee 호수
독일에 진입하여 조금 달려온 곳에서 비경의 호수를 만났다. 뮌헨에서 동쪽90Km거리 바이에른주에서 가장 큰 호수다. 바이에른의 바다란 별명이 붙을 만큼 넓은 호수다. 독일 로젠하임과 오스트리아 짤스부르크 사이에 위치해서 우리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진입하여 곧바로 만나게 된 것이다. 알프스 산맥이 가까이 있어서 깨끗한 공기와 더불어 리조트단지로 조성된 곳이다. 뮌gps에서 기차로 1시간, 짤스부르크에서 기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호수다. 버스를 잠시 주차하고 침지 호수 조망 포인트에서 호수를 감상했다. 바다 같이 드넓은 호수다. 청명한 하늘과 호수변의 숲이 코발트빛 호수를 더욱 비경으로 이끈다. 백조와 오리가 많이 떠 있어 수려한 수채화를 그려낸다.
* 독일 휴게소
독일은 비행기를 타고 이착륙할 때 상공에서 보아도 울창한 나무 군락들이 많다. 그런데 지금 육로로 지나는 이곳 독일도 온통 울창한 나무 군락이다. 초지 위에 민들레 노란 꽃이 우리나라 들녘의 민들레꽃과 똑 같다. 휴게소 옆에 옥수수 밭이 있다. 개를 끌고 다니는 여인도 있다. 이곳 휴게소 화장실은 코인을 넣고 들어가야 한다. 1유로를 넣으면 거스름 돈 대신 70센트 쿠폰이 나온다. 본 휴게소에서만 사용 가능 쿠폰이다. 유럽의 화장실은 대개가 유료여서 낯설지는 않다. 잘 가꾸어 놓은 정원 같은 휴게소에서 상큼한 휴식을 갖는 시간이었다.
* 독일 뮌헨 가는 길
여기서 뮌헨공항까지 1시간 20분 소요된다. 1시 40분 경 도착한다. 뮌헨에서 도하까지 비행시간은 5시간 정도다. 독일과 카타르 시차는 1시간이다. 도하에 오후 11시 30분 도착해서 새벽 1시 50분 인천행 비행기로 환승한다. 독일 공항은 승객에게 질문할 때가 있다. 가이드는 그 질문 순서에 따라 우리가 해야 할 답변을 사전에 알려줬다. 가방 당신이 쌌느냐에 yes, 폭발물 있느냐에 No, 부탁 받은 짐 있는가에 No 대답하면 된다. 대답을 잘못하면 재질문 한다. 뮌헨은 120만 명 인구로 독일에서 3번째 도시다. 뮌셴으로 읽기도 한다. 뮌셴이란 수도원 이름이다. 독일의 남부와 동서 연결 도시다. 도로와 철도망이 발달된 도시다. 뮌헨 지역을 거쳐 공항으로 가고 있다.
* 독일 뮌헨공항
독일 뮌헨공항에 도착했다. 상당히 크다. QR 004항공이다. 16:45분 카타르 도하행 비행기다. 티케팅 하기 위해 줄을 섰다. 줄이 길어 1시간이 넘어서야 표를 받았다. 뮌헨에서 도하행, 도하에서 인천행 이렇게 탑승권을 2장 받았다. 도하행 탑승 보딩이 15:35분이다. H18 Gate다. 부지런히 검색대를 거치고 출국수속을 마치고 나왔다. 뮌헨 공항은 사람들이 많다. 도하 공항에서 입국서를 쓸 것이다. 인천 짐 벨트 옆에서 함께 해산하기로 했다. 유럽 여행 중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여러번 거쳤지만 뮌헨 공항은 처음이다. 뮌헨공항을 거치는 이것도 보람된 여정의 한 단면이다.
* 독일 뮌헨공항 이륙
뮌헨공항의 활주로 곁에 울창한 숲이 있다. 이륙 후에도 독일 지상은 나무 숲 물결이다. 산도 없는데 평원에 짙푸른 나무 군락이 많다. 나는 35G 남편은 40K 좌석이다. 2,4,2 좌석제로 40K는 창가석이다. 남편이 35G 통로석에 앉고 나는 창가석에 앉았다. 내 곁에는 카타르 여자 어린이가 앉았다. 옆으로는 어린 사내아기를 안은 엄마와 자매가 나란히 앉았다. 아이들이 아주 귀엽다. 어린 아기가 운다. 정숙한 카타르 여인이 침착하게 아기를 달래는 모습이 아주 지혜롭게 보인다. 지상에 도나우강의 큰 물줄기가 보인다. 흑해Blak Sea의 일몰이 비경이다. 기내 석식으로 치킨, 빵, 샐러드, 초콜릿이 나왔다. 의자 등받이에 설치된 기내 모니터 항로를 보며 지루하기 않게 카타르 도하공항으로 가고 있다.
* 카타르 도하공항에서 인천행 환승
독일 뮌헨에서 출발하여 오후 4시 45분에 출발하여 밤 11시 10분에 카타르 도하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2시간 기다렸다가 01:50분 인천행 QR 882항공으로 환승한다. 도하공항 대기실은 2층이다. 넓고 쾌적하다. 1층은 검색대 및 면세점이다. 지난번 발칸에 갈 때도 이곳 도하 공항에서 루마니아행 비행기를 환승했다. 그래서 낯익은 공항이다. 면세점과 곳곳을 둘러보고 잠시 쉬었다가 탑승했다. 우리 부부 좌석은 20G, 22K인데 자리를 교환하여 22J, 22K로 창측에 앉았다. 좌석은 2,4,2제다. 이제 나의 조국으로 간다.
* 인천 공항 도착
도하를 출발한 비행기가 상공을 가르며 내 조국으로 힘차게 날아간다. 금새 밝아오는 동녘 하늘이다. 창공의 일출이 비경이다. 눈부신 햇살로 창문을 내리고 잤다. 기내식이 2회 제공 된다. 시차 관계로 먹기 힘들었다. 현지의 새벽 시간에 조식으로 치킨 죽, 한국 시간으로 오후 2시경 중식으로 생선 요리가 나왔다. 화창한 하늘이다. 내 조국의 영토에 진입한 비행기는 창공에서 영종도의 비경을 선사하고 16:35분에 지상에 착륙했다. 9시간 30분 소요되었다. 12일간의 발칸여행은 뜻 깊고, 보람되고, 때론 역사적 순례의 여정으로 그 어느 세계여행보다 값진 탐방이었다. 미지의 땅 발칸은 순수하고, 천진하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땅이었다.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이 오감을 흔들기도 하는 영토였다. 내 생애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기록할 수 있는 찬란한 여정이다. 종교의 힘이 역사를 뒤집는 현장을 목격했고, 부족해도 세상모르고 정지된 시간의 현을 타며 사는 천진한 삶을 보았고, 아울러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에 횃불을 높이 든 내 조국이 가슴 뜨겁게 감사했다. 나는 시인이다. 시로, 글로 내가 본 발칸 여정을 그려내는 문인의 사명에 충실할 것이다.
첫댓글 1월 23일에 발칸반도 여행 출발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