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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룡(海龍) 이야기
현 기 영
문중호는 출근하자마자 어머니 일로 마음이 뒤숭숭했다. 자꾸만 전화대 쪽으로 신경이 가고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그는 흠칫흠칫 놀라며 조바심을 태우는 것이었다. 혹시 어머니가 아닐까? 지금 내게 전화가 걸려 온다면 그건 분명 파출소 순경이 대신 걸어 주는 전화이리라. 어머니가 짤막한 편지는 쓸 정도로 글자를 깨우치고 있기는 하지만, 전화라곤 난생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분이다. 게다가 전에 알려 드린 집 전화번호는 이사 관계로 보름 전에 반납해 놓고 있는 처지이니, 당신이 역전 공중전화부스에서 전화번호책을 끌어내 가지고 기억이 어렴풋한 아들 직장 이름을 떠올리고 번흐를 찾아낸다는 것은 전혀 무망한 노릇이었다. 그러니 전화가 걸려 온다면, 역전 파출소에서 걸려 올 공산이 큰 것이다. “여보, 노친네를 이렇게 함부로 길바닥에 내버리는 법이 어딨소! 당장 모셔 가시오.” 일이 이쯤 되면 노친네를 학대했다는 오해를 모면할 도리가 없으리라. 그러나 제발 그렇게라도 어머니를 얼른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혹시 이 넓은 서울바닥에서 감쪽같이 행방불명이 되면 어쩌나? 아니, 혼자 표 끊고 기차를 타고 다닐 줄 아는 분이니까, 한 이틀 아들을 찾아보다 못 찾으면 도로 고향으로 내려가시겠지. 11시가 되도록 어머니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다만 이사실에서 한 시간 내에 데이터 보고를 마감해 달라는 전화가 한번 왔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무슨 사고가 생긴 건 아니겠지…….
어머니가 둘쨋놈 돌에 상경하신다는 전보를 받은 것은 바로 엊저녁이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신새벽부터 서울역으로 마중 나가서 기다렸다. 출찰구 앞의 쇠창살을 잡고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기대어 서 있는 동안 목포발 열차는 두 번이나 도착하고 그때마다 많은 승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왔건만 어머니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타고 온다는 아침열차는 이미 둘 다 도착한 셈이고 다음 열차는 저녁에나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곡절일까? 혹시, 워낙 키가 작은 분이라 사람들 틈에 묻혀 지나가 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한참 대합실과 역 광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둘러봤으나 역시 허탕이었다. 역 광장 구석과 대합실 벤치에는 뒷모습이 어머니 비슷하게 초라해 보이는 노인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한참 이렇게 허둥거리다가 중호는 출근시간에 쫓겨 회사로 나와 버린 것이다. 지금도 중호의 뇌리에는 역 광장 어느 모퉁이에 보따리를 깔고 앉아 이제나저제나 하고 아들을 기다리는 초라한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뱃멀미 차멀미에 시달려 핼쑥해진 얼굴이…….
그때 불현듯 중호는 전보 내용을 잘못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주머니를 뒤져서 전보쪽지를 펴들었다. ‘3일 아침 목포발 열차 모’ 시골 누이 명자가 제주 부두에서 어머니를 배 태워 보내고 나서 즉시 우체국에 들러 때린 전보임에 틀림없었다. 혹시 그 배가 무슨 일로 목포항에 두어 시간 연착되고 그 결과 예정된 서울행 아침열차를 놓치고 만 것이나 아닐까?
전보 문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중호는 그때 갑자기 후달짝 놀란다. 이게 뭐야? 아니나다르랴, 이 전보는 두 가지 해독이 가능하지 않은가. 아이고, 살았구나! '3일 아침 도착하는 목포발 열차’와 ‘3일 아침 출발하는 목포발 열차.’ 그렇지, 아침에 목포를 출발하면 오늘 저녁 9시쯤에 서울역에 도착한다. 아침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저녁에 도착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때 전화벨이 호들갑스럽게 울렸다.
“부장님, 전홥니다. 거 누군지 되게 딱딱거리네요, 참.”
하고 미스터 박이 투덜거리며 전화를 내민다. 누굴까? 혹시 파출소에서 어머니 찾아가라는 전화가 아닐까? 전화를 바꿔 들자마자 대뜸 칼칼한 음성이 귀청을 때린다. 그는 흠칫 목을 움츠렸다.
“아, 문중호 씬가요? 여기가 지방검찰청인데, 당신 왜 예비군 기피로 영장을 발부했는데 여태 출두 않는 거요?”
“예? 아니…….”
어찌나 놀랐던지 목청까지 탁 쉬어서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거린다. 당장 이마빡에 진땀이 부쩍 솟아올랐다. 훈련 기피라니, 이거 멀쩡한 사람 가지고 무슨 날벼락인가. 순간 뭔가 펀뜻 짚이는 게 있다. 아무래도 말낌새가 어수룩해 보인다. 혹시…….
그러나 교활하게도 상대방이 더 빠르다. 이쪽에서 알아맞히기 전에 먼저 목소리는 제 본색을 드러내며 낄낄거린다,
“야, 야, 나여 나, 춘호. 놀래기는, 쩌석허군.”
중호는 울컥 화가 치민다. 재수없는 녀석. 장난쳐도 분수가 있지. 이런 무지막지한 놈이 있나. 은행 대리로 있는 제나 내나 하루 종일 전화 앞에 호출되어 연신 머리를 조아리머 쩔쩔매기는 마찬가지일 톈데, 그걸 악용해서 이따위로 사람 기죽이다니.
그러나 중호는 입술을 한번 잴근 씹고 화를 참아 버린다. 무슨 일에나 참아 버릇해 온 그로서는 도대체 노골적으로 화낸다는 것 자체가 낯선 감정이었다.
“얘 중호 오늘이 무사(왜) 마지막 금요일 아니가? 우리 고향 촌놈들 만나는 날 말이여. 혹시 잊어부러시카 하고 전화허는 거쥬.”
제주도 차조떡에 묻은 팥고물같이 제주도 사투리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저 촌놈의 말투를 들어 봐라. 중호는 어린 시절에 먹은 그 질기디질긴 제주도 차조떡과 뭉뚝뭉뚝 말뚝 박듯 고구마를 박아 넣은 차조밥이 당장 목구멍 너머로 껄떡 치밀어올 것만 같아 침을 삼키며 꾹 눌러 놓았다. 녀석의 방약무인한 사투리를 들으면 위태로운 곡예를 보는 것처럼 언제나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그였다. 자신이 섬놈임을 노출시켜 뭐 이로울 게 있나. 처신에 지장을 주면 주었지.
“야 그런디, 아까 전화 받는 치, 거 누게라? 웃놈가? 아랫놈가? 그치 말여, 꼭 선잠 깬 놈모냥 푸시시해여 가지고 떨떠름허게 전화 받는 꼴이라니! 대갈일성 베락쳐 불까 허다가 참았지. 하이간에 오늘 저녁 꼭 나와사 헌다이.”
춘호는 이렇게 속사포를 내쏘더니 이쪽에서 쓰다 궂다 하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하여튼 목소리만 들어도 재수없는 놈이다. 오늘이 마지막 금요일이니 나와라. 오늘이 아무개 아들 돌날이니 나와라. 그렇지만 자질구레하고 푼돈만 녹녹잖게 까질 뿐인 그따위 모임엔 뭐 하러 나가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 동안 통 얼굴을 내벌지 않다가 결국 춘호의 등쌀에 못 이겨 지지난달 처음으로 동창들이 모이는 데를 찾아갔었다. 하기야 마침 막 부장으로 승급된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이라 동창들 앞에서 새로 박은 명함을 돌리면서 은근히 뻐기고 싶은 생각도 실은 없지 않았다. 세상이 다 알아주는 대종합상사의 판매부장이라면 누가 봐도 부러워할 출세가 아닌가. 거기에 따른 월봉 ”만 원에 보너스 800%.
그러나 동창들은 생각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선망의 눈초리로 보아 주지를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입에 바늘쌈지를 물고 재벌회사의 횡포가 어떻고, 회장님의 존함을 마치 제 집 똥개 부르듯 함부로 불러 대는 데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희들도 마찬가지 신세인 주제에. 괜히 왔다 싶었다. 게다가 동창 여남은 명이 좁은 골방에 틀어박혀 곤죽이 되도록 소주를 퍼마시고 서로 뒤얽혀 제주도 사투리를 고래고래 질러 대는 꼴이라니. 원, 평소에 제주 사투리를 맘데로 못 써서 울화가 맺혔나. 저렇게 악을 바락바락 쓰게.
이런 반발감을 느끼면서도, 한편 야릇하게도 그 분방한 분위기에 은근히 마음이 쏠리는 중호였다. 참 희한한 녀석들이다. 저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다니. 오죽 서울말이 답답하면 저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사투리로 푸닥거리를 할까? 녀석들이 부럽다. 옆자리 손님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건만 전혀 개의치 않고 방약무인으루 고래고래 사투리를 내지르는 걸 보니 속이 다 후련하다. 중호도 한참 벼르고 벼르다가 사투리 한마디 중얼거려 본다는 게 그만 혀가 고드래떡같이 굳는 바람에 낭패를 보았다. 전자회사 다니는 고창석이보고, “어딕 살암서?” 할 것을 “어디 사니?” 하는 서울말과 섞갈려서 그만 “어디 살암니?” 하는 우스꽝스런 말이 되어 나와 주위를 온통 웃겨 놨던 거였다.
“어디 살암니?” “어디 살암니?” 하면서 녀석들은 나를 잘도 놀려 댔지.
그날 중호는 이렇게 좀 당해 가지고 돌아온 편이었지만 불쾌한 기분은 전혀 없고, 자꾸만 혼자 웃음이 쿡쿡 새어나는 것이었다. “어디 살암니?” “어디 살암니?” 역시 촌놈들이 좋긴 좋구나. 정말 신나는 놈들이야. 하여간 다음 달에 나가서 이번 낭패를 만회해야지.
그래서 지난달 모임엔 일부러 술을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 혀를 꼬부라뜨린 다음에 사투리를 씨부리니 그렇게 술술 잘 나올 수가 없었다. 하도 재미 좋아서 눈물이 글썽거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날 중호가 정작 충격을 받은 것은 헤어질 무렵에 부른 명국의 노래였다. 그 노래는 느닷없이 중호에게 30년 전의 아픈 기억을 홱 되돌려주었던 것이다.
바닷물이 철썩철썩 타고 남은 제주도
불사르던 폭도들은 어디로 갔나
국방군도 그리워라 경찰관도 그리워
제주도 사백 리에 양민이 운다
본래 가사는,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로 시작되는 유행가인데 30년 전 당시 섬사람들이 토벌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렇게 가사를 바꿔 불렀다. 그러나 불사르던 것은 폭도들만이 아니었다.
중호는 손 위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들었다. 눈앞에 놓인 서류의 촘촘히 박힌 까만 숫자들이 점점 희미해졌다.
중호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무엇인가? 그건 찌든 가난과 불행의 대명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슨 흉년은 그렇게 잦던지 한 해 걸러 한 번씩 하늘에서 큰 가뭄이 내리덮쳤다. 보리철이면 보리 여물기 전에 누렇게 황이 들기 일쑤요, 조갈이 뜰 때는 뼘 크기도 못 자란 어린 조들이 뻘겋게 타들어 죽곤 했다. 그러다가 큰 난리가 들이닥쳐 많은 사람들이 한날 한시에 떼죽음을 당하고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 마을이 나중에 재건되었다지만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는 중호의 상상 속에서는 여전히 군 소개(疏開)작전에 따라 소각되었던 폐허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꺼먼 먹칠로 지워진,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폐촌, 총소리와 불에 미쳐 버린 동네 개들만이 아직도 주인 떠난 집터에 남아 소막이나 말막에 고삐 매인 채 타죽은 가축들 시체나, 소개 내리지 않고 몰래 남아 있다가 총 맞아 죽은 사람 송장들을 뜯어먹으며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 무섭던 소카이(疏開). 온 섬을 뺑 돌아가며 중산간 부락이란 부락은 죄다 불태워 열흘이 넘도록 섬의 밤하늘을 훤히 밝혀 놓던 소카이. 통틀어 이백도 안 되는 무장폭도를 진압한다고 온 섬을 불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 든 격이었다. 그래서 이백을 훨씬 넘어 5만이 죽었다. 대부분 육지서 들어온 토벌군들의 혈기는 그렇게 철철 넘쳐흘렀다. 특히 서북군은 섬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힐 만큼 혈기 방장하였고 군화 뒤축으로 짓뭉개어 이 섬을 지도상에서 아주 없애 버릴 만큼 냉혹했다.
월남 파병 소대장이었던 중호는 그것이 말이 소개이지 실은 초토작전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소개란 취약지구의 인원과 물자를 후방 안전지대로 후송시킴을 뜻하는데, 이건 숫제 마을에 불을 놓아 물자를 모조리 태워 버리고, 거기다가 폭도들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고 인원마저 파괴했으니, 초토작전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게릴라란 물고기와 같아서 인민이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월남에서 배웠지만, 교본대로라면, 인민이란 물을 퍼내서 게릴라가 서식처를 잃고 자멸하도록 해야 옳지 않았던가. 누구는 편리하게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전쟁이란 으레 그런 거다, 그게 전쟁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그렇게 시킨다, 그 사람들이 특히 잔인해서 그런 게 아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쟁 통에선 어느 때 어디서든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 일이다. 월남땅 밀라이 사건을 보라,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전쟁 중에 일어난 게 아니었다. 6·25 터지기 두 해 전 일, 그러니까 그건 전쟁이 아니라 좌익폭동 진압이었다. 폭동진압에서 5만 넘어 죽었다니!
불현듯 그의 뇌리에 어머니의 흰 저고리 앞섶을 붉게 물들이던 30년 전의 그 핏빛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위로 반쪽이 피투성이인 얼굴이 둥두렷이 떠오르고 이어서 어머니의 처절한 절규가 높아진다. “아이고, 중호야, 날 살려 도라. 날 버려두엉 어딜 감시니(가니)?” 가슴이 몹시 뛰고 숨이 가빠진다. 지금 이 감정은 도대체 무얼까? 겁일까? 분노일까?
소카이날에 피해입은 것은 대부분 아녀자나 노인들이었는데 중호네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남정네는 미리 피하고 있었다. 단지 젊다는 이유 때문에 폭도로 몰려 공연히 죽기 쉬운 그들인지라 벌써 한 두 달 전에 산과 들로 도망가 굴속에서 피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호 아버지도 소카이 보름 전 어느 날 마루에서 아침밥 먹다가 문득 마당가의 수리대〔箭竹〕숲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면서 저편 고샅길로 올라오는 토벌군들 한떼가 보이자 기겁해 일어나 뒷담 넘어 도망쳤던 거였다.
음력 10월 20일, 그 소카이날에 마을 위 푸른 하늘은 온통 검은 연기에 그슬리고 불아지랑이가 무섭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우리에 갇힌 채 타죽는 돼지 울음 소리, 매인 고삐를 끊어 보려고 부질없이 버르적거리다가 타죽는 소 울음 소리, 말 울음 소리가 처절하게 들려 왔다. 불타는 참대밭, 수리대밭에서 꽈당꽈당 연속으로 터지는 폭죽 소리와, 떵, 떵, 떵, 하고 항아리, 독 터지는 소리가 진짜 총소리처럼 무서웠다. 그러다가 얼마 있다가 작전 마친 토벌군들이 뒤쫓아와 공포를 팡팡 쏘면서 피난길을 득달같이 재촉해 댔다. 사람들은 반달음질로 구루맛길로 우르르 몰려 내려갔다. 부득부득 우겨서 좁쌀 거의 한 멱서리를 짊어지고 나섰던 어머니는 어그적어그적 몇 발짝 걸어 보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길바닥에 좁쌀을 반 넘어 쏟아 버리고 걷다가 그래도 걸음이 더디니까 다시 한번 쏟았다. 열 살 먹은 중호가 세 살짜리 동생 명자를 업고 자꾸만 걸음이 뒤처지자 그때마다 어머니는 사정없이 머리빡을 쥐어박으면서 앞으로 떠밀었다. “요녀러 자석아! 총 맞아 죽젠 햄시냐? 혼저 도르라(빨리 뛰라)!”
해변부락에 당도한 소개민들은 마을 안으로 얼마쯤 걸어가다가 양 갈랫길에 부딪쳤다. 하나는 동카름(동동네)으로 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서카름(섯동네)길이었다. 그 세거리 가운데 잎 털린 담쟁이덩굴이 올라붙어 줄기에 그물친 해묵은 팽나무가 서 있고 그 밑에 그 작자가 무섭게 버티고 서 있었다. 핫바지 위에 낡은 가다마이를 걸친 주제꼴로. 구롬보. 그래, 낯이 검다고 구롬보라고 볼렀지.
구롬보라면 중호 또래 어린아이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원수 인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게 바로 그런 막다른 궁지였다. 그 작자는 일정 말기 한창 공출이 심할 때, 이 집은 양식을 텃밭의 작박(큰 돌무더기) 속에 묻어 놓고, 저 집은 보릿짚가리 속에 숨겨 놓았다고 고자질하고 다니던 일본놈 끄나풀이었다. 구롬보 때문에 집식구가 먹을 양식마저 빼앗긴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중호네는 양식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숨겨 놓고 공출에 응하지 않았다고 아버지가 주재소에 끌려가 궁둥이가 헌 짚신바닥이 되게 두들겨맞았다. 해방이
되어 세상이 뒤바뀌자 동네 젊은 축들이 구롬보 집에 몰려들어 개 패듯 패고 질퍽한 두엄에다 거꾸로 메다꽂아 앙갚음했다. 아버지도 그 축에 끼여 있었다. 그 후 이 년 동안 종적을 감추었던 구름보가 이제 토벌군의 정보원이 되어 세거릿길로 나타날 줄이야.
그 작자 곁에는 철모에 휜 띠를 두른 토벌군 댓 명이 총올 메고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중 권총 차고 세 가닥 붉은 줄이 그려진 멜띠를 두른 토벌군이(그게 지금 생각하면 당직사관이었나 보다) 검은 안경을 쓰고 사뭇 거드럭거리고 있었다. 구름보가 혹시 그 작자의 검은 안경이라도 빌려 쓰고 그 짓거리를 했다면,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몰랐을 것이다. 아니다. 아무리 제가 검은 안경을 썼더라도 송장같이 푸르딩딩한 그 낯빛은 속이지 못했으리라. 훗날 난리가 평정되고 불탄 마을이 재건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구롬보네 식구하고 상종하지 않았다. 그 집과 밭일 품앗이하려 드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길에서 만나도 모른 척 지나쳤다. 뭐니뭐니 해도 구롬보가 제일 지겨웠던 것은, 아마도 자기가 손가락질해서 죽은 사람들의 제사를 위해서 사람들이 떡방앗간에 줄을 서고, 먹구슬나무에 목 달아맨 추렴들이 꽥꽥 울부짖는 소리가 서너 곳에서 터져나오는 음력 시월 스무날이었을 것이다.
구름보는 세거릿길 가운데 버티고 서서 맞은편에서 오는 제 고향 사람들을 손짓 하나로 동카름길과 서카름길로 나누어 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금방 눈치채고 뒤로 주춤 물러섰다. 도수장 문턱에 앞발로 앙버티고 고삐를 잡아채는 소처럼 필사적이었다. 토벌군들이 앞 뒤 옆에서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볶아쳤다.
“이 네펜네들이 덩말 둑고 싶어 환당했구나야:”
“폭도가족두 따루 고를 거이 없다. 보라우야. 데것들이 폭도가족이 아니라문 뭐이 무서워 더리 야단이가서.”
마을 어귀 돌담길을 꽉 메운 피난민들은 총개머리판을 피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울부짖었다. 개골창에 빠진 사람, 넘어져 돌담 위에 엎으러진 사람, 에미가 아이들 부르는 소리, 아이들이 에미 찾는 소리……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공포 두 발이 벼락치듯 터지자 사람들은 순간 물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이어서 주춤주춤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폭도가족이랍시고 어른 다섯에 한 명 꼴로 골라내어도 수가 적다고 옆에서 멜띠 두른 당직사관이 윽박지르는 판국에 구름보가 자기를 몰매 때렸던 자의 가족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중호는 어머니와 갈림길에서 떼어졌다. 어머니가 등에 진 좁쌀 멱서리를 얼른 부리고, 우느라고 정신없는 중호에게 아기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기는 금방 까무러칠 듯 얼굴 꺼멓게 악악 울어댔다. 등에 업힌 아기를 어머니 쪽으로 돌리고 처네끈을 푸는데 토벌군 한 명이 둘 사이로 달려들더니 어머니를 힘껏 둥카름으로 밀쳤다. 팽그르르 한 바퀴 돌고 넘어진 어머니는 돌멩이를 주워 들고 다시 일어나더니 이마빡을 짓찍으며 울부짖었다.
“아이고, 중호야, 날 살려 도라. 날 버려두엉 어딜 감시니? 아길랑 나한테 주라, 아길랑 나한테 주라, 아이고 중호야.”
돌에 찍힌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한쪽 뺨을 적시고 횐 저고리를 붉게 물들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중호는 갑자기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얼른 책상 위의 담배를 피워 물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방심할 때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저 피 젖은 횐 저고리, 그때마다 숨가빠 헐떡거리는 이 감정은 도대체 뭐냐? 겁이냐? 분노냐? 아니,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분노를 느껴 봤더냐?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겁이다. 백주에 가위눌림이다. 더위 먹은 소 달 보고 헐떡거림이다.
왜, 어머니는 그날 죽는 길에 나서며 구태여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그렇게 아둥바둥 애를 썼던가? 에미 없어 굶어죽을 바에야 차라리 에미 품에서 죽어라, 하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다, 어머니는 끝까지 어떻게든 살아날 궁리를 했던 모양이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듯 어머니는 당장 숨넘어갈 듯 울어대는 어린아기를 안고 토벌군의 동정을 사보려고 했으리라. 돌로 이마를 쪼아 일부러 피를 홀린 것도 역시 그런 생각에서였으리라. 그러나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중호는 명자를 업고 울며불며 당숙 식구를 따라 서카름길로 내려갔다. 좁쌀이 든 멱서리는 당숙모가 자기 등짐 위에다 얹어 날랐다. 서카름길로 들어선 사람들은 얼마 안 가 좀 옴팡지고 밭담 높은 길가 밭에 수용되었다. 처음 그 밭으로 들어가라고 호령했을 때, 고향 마을 한길가 옴팡밭에서 떼송장을 본 적이 있는 그들이라 얼마나 혼겁했던가. 그러나 실은 최종적인 소개민 성분조사를 위해서 그렇게 집단수용했던 모양이다. 다른 해변으로 내린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4, 5백이나 되는 소개민들이었으니, 그 수를 수용할 만한 시설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돌담으로 에워진 밭 세 개를 노천수용소로 사용한 것이었다. 밭 하나에 병정 두 사람씩 감시했다. 중호네가 든 밭은 보리를 갈지 않은 빈 밭이었다. 낫으로 서술지게 벤 조그루가 죽창 끝같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그 발은 아마 폭도가족의 밭이거나 아니면 아버지처럼 공연히 폭도로 몰릴까 봐 두려워 피신생활을 하는 사람의 밭이었을 것이다. 소개민들은 저녁이 되어 그 부락 주민이 날라다 준 조짚뭇을 밭을 맹 둘러 가며 밭담에다 비스듬히 잇대어 세워 놓고 밤을 지내기 위해서 그 속에 들어갔다.
밤이 되자 오 리 밖에서 타는 고향마을의 불빛은 온 섬하늘을 불살라 먹을 듯이 큼직하게 구름떼 위를 번져 갔다. 불빛은 그 옴팡밭까지 밀려와 사람들의 겁먹은 얼굴을 불그림자로 얼룩지게 했다. 중호는 별로 슬픈 것 같지도 않은데 밤새도록 울음이 그쳐지지가 않았다. 아기는 당숙모의 품에서 딸꾹질하면서 잠자고 있었다.
그 이튿날 밤이 되어, 타던 불이 완전히 꺼진 탄 숲같이 깜깜한 고향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얼마나 추위를 느꼈던가! 아무리 한겨울에도 얼음 어는 일이 드문 남녘땅이지만, 조짚뭇을 지봉삼고 밭고랑에 드러누워 초겨울의 쌀쌀한 야기를 견디기란 참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밭의 조그루를 일궈다 흙덩이를 털고 밤새도록 조그만 모닥불을 피웠다.
세 번째 날에는, 그 밭에서 젊은이라고는 딱 혼자였던 돌챙이〔石手〕집 아들이 붙잡혀갔다. 본디 귀가, 아흔 난 할망만큼이나 어두워 ‘귀막쉬’ 별명이 붙은 반병신이라고 주위에서 말을 해주었지만 그대로 끌고 가고 말았다. 바로 그날 이웃밭에서는 부치은(夫致恩) 각시 나오라는 걸, 귀도 어둡지 않은데 잘못 듣고 나간 구치은(具致恩) 각시가 붙잡혀 갔다가 나중에 뒤바뀌는 촌극이 벌어졌단다.
그러나 육촌형이 토벌군인 당숙네는 무사했다. 당숙어른은 아들의 군복 차림의 독사진을 항상 품속 깊숙이 간직하고 다녔다. 사진 뒷면에는 소속, 계급, 군번, 성명뿐 아니라 가족상황까지 적혀 있어서 양민중(良民證) 나오기 전 때에 훌륭한 신분증 노릇을 해주었다. 계급은 갈매기 세 개, 중사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은 육촌형 덕분도 아니었다.
옴팡밭에 수용된 지 일 주일이 넘어, 측간으로 사용한 옆밭이 똥무더기로 덮여 똥밭이 다 되어 갈 때, 어느 날 한림을 습격한 폭도를 토벌하고 읍내로 돌아가던 육촌형이 중도에 차를 내려서 찾아왔다. 당숙어른이, 중호 어멍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보고, 살았거든 어떻게 빼낼 방도를 생각해 보라고 종용해 봤지만,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알아보는 것사 어렵지 않수다만, 빼내는 건 우리 관할 구역이 아니라 안 되쿠다. 그 육지것들이 같은 토벌군이면서도 섬 출신이렌 허면 괄시허는 게 말이 아니라 마씸. 이 섬 사람이라면 늙은이, 어린것 할 것 없이 모두 한데 싸잡아 폭도로 몰아치길 좋아하는 그것들이 토벌군이렌 달리 생각해 주는 중 알암수과? 이런 마당에 내가 남편이 폭도라고 의심받은 여자를 빼어 달라고 말을 놓았다간 아명해도 내가 거꿀로 폭도로 몰릴 거우다, 틀림없이.”
그래도 형은 지서 순경 중에는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날 당장 지서 숙직실로 잠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형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보기나 한다면서 토벌군이 주둔한 분교(分校)로 떠난 지 한식경도 못 되어서 뜻밖에 어머니가 살아 돌아올 줄이야. 잡히면, 보통 길어야 이틀밖에 못 사는데 이레 동안 살아 있다 풀려 나온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모두 놀라워했다. 어머니는 면저, 기저귀가 단 한 장뿐이라 갈아 채울 것 없어 일 주일 동안 내내 척척하고 지린내가 가실 날이 없던 중호의 등에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그러고서 이틀 후 그지서 숙직실로 서북 사투리가 억센 토벌군 하나가 부장한 채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곧 아기를 들쳐업고 종종걸음치며 그를 따라 나섰다. 어머니를 살려 준 그 병정이었다. 계급은 갈매기 세 개에 작대기 두 개. 이등상사였다. 당숙어른은 도무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혀를 끌끌 찼다.
둘은 그날 즉시로, 중대장 지프차인지 무슨 차인지를 빌려 타고 화북에 있는 친정을 찾아가 아기를 맡기고 나와 살림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들은 나오다가 지서에 들러 말을 해놓고 갔던지 그 후부터는 일체 순경이 와서 도피중인 외삼촌 행방을 추궁한다고 외갓집을 못살게 굴지 않더란다. 그러나 그 대신 세 살짜리 외손주를 키워야 하는 치욕은 어떻게 견뎌 냈을까? 하여간 이렇게 어머니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당신의 반반한 용모 때문이라고들 말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중호는 당숙의 소개로 읍내 고아원에 들어갔다. 읍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기다랗게 놓인 한천교(漢川橋) 다리, 난생 처음 보는 다리라 어찌나 두렵던지 오금이 붙어 떨어지지 않던 기억, 어떤 아이는 벌벌 기어서 다리를 건넜지. 한 달에 두 번 외할아버지는 나무를 읍내 장에 등짐져다 판 날은 꼭 고아원으로 손자를 찾아왔다. 고아원 밥이 부족해서 노상 배곯는 줄 잘 하는 할아버지는 집에서 쪄 가져온 고구마를 먹이고, 나무 판 돈에서 몇 푼을 손에 쥐여주곤 했다. 그러면서 “널랑 크거든 꼭 군인이나 순경이 돼라, 이?” 하
고 다짐을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그 뜨내기살림은 예상했던 대로 상대가 부대 따라 육지로 떠나 버림으로써 일 년 몇 달 만에 파탄나고 말았다. 그 동안 씨 다른 동생 하나 생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까?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이미 불탄 고향마을이 재건된 때였지만 당신은 거기로 돌아갈 낯이 없었다. 섬이 평정되어도 아버지는, 다른 남정들이 그랬듯이, 종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산에서 굶어죽었든지, 총 맞아 죽었든지 했으리라. 중호가 지금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저 무덤덤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 죽음이 아버지에게만 닥친 특별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흔하디흔한 젊은 죽음들 중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리라.
어머니가 돌아왔지만, 중호는 고아원을 나오지 않았다. 고아원이 배고픈 곳이긴 해도 그때 집안형편에 학교를 보내 줄 만한 곳은 거기 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단지 그뿐이었을까? 아니다. 그 이면엔 일 년 몇 달 동안의 어머니 행적에 대한 철없는 반발심도 섞여 있었으리라.
그 악몽의 현장, 그 가위눌림의 세월, 그게 그의 고향이었다. 그러니 고향은 한마디로 잊고 싶고 버리고 싶은 것의 전부였고, 행복이나 출세와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중호는 고향의 모든 것을 미워했다. 측간에서 똥 먹고 사는 도새기(돼지)가 싫고, 한겨울에도 반나체로 잠수질해야 하는 여편네들이 싫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하는 속담이 싫고, 육지 사람이 통 알아들을 수 없는 고향 사투리가 싫고, 석다(石多)도, 풍다(風多)도 싫고, 30년 전 그 난리로 흘어명이 많은 여다(女多)도 싫고, 숱한 부락들이 불타 잿더미가 되고 곳곳에 까마귀 파먹은 떼송장이 늘비하게 널려있던 고향 특유의 난리가 싫고, 그 불행이 그의 가슴속에 못 파놓은 깊은 우울중이 싫었다. 걸핏하면 버릇처럼 꺼질 듯한 숨을 내쉬는 어머니도 싫었다. 육지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謫客)들이 수륙 이천 리를 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牧民)에는 뜻이 전혀 없고 오로지 국마(國馬)를 살찌우는 목마(牧馬)에만 신경썼던 역대 육지 목사(牧使)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草地)가 마르면 지체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 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馬政).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이 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天刑)의 땅을 버리고 싶었다. 찌든 가난과 심한 우울증밖에는 가르쳐 준 것이 없는 고향, 그것은 비상(飛翔)하려는 그의 두 발을 잡아 끌어당기는 깊은 함정이었다. 그 섬 사람이 아니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적수공권으로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다녔는데 입지전 속의 인물처럼 별의별 고생을 다 겪었다.
그가 대학에 갓 입학해서 고향 선배들로부터 들은 충고 중에는 고향을 밝혀 이익 될 게 없더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정부 고위관리 누구누구, 학계의 누구누구도 원래는 고향사람인데 본적까지 옮겨 놓고 숨기고 있다 했다. 고학하느라고 대학을 6년 다니는 동안에 중호는 차츰차츰 사람이 서울식으로 닳고 닳아져 갔다. 재학중에 군대 갔다 온 후로는 주로 입주(入住) 가정교사를 했는데 서울말씨를 배우는 데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그는 촌스러운 고향 사투리를 홀홀 떨쳐 버리고 남다른 정열로 열심히 서울말을 익혔다. 수년 동안 가정교사라는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면서 서올말만 배운 게 아니라 눈칫밥 먹으며 서울말로 비굴하게 아첨하는 법까지 터득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가진 다음에도 얼마간 그 집에 눌러 있었는데, 그것은 소원대로 그 집 맏딸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본적을 따르기를 싫어하는 아내의 비위를 맞추려고 선선히 본적까지 옮기고 나니 그는 깔축없는 서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메뚜기가 제아무리 뛰어 봐야 고작 풀밭이라던가.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여전히 자기가 사는 동네 ‘모래내’를 ‘모레네’라고 하고 전에 살던 ‘갈현동’을 ‘갈년동’이라 하고 ‘확실히’를 ‘확실니’라고 발음하고 있는 한 고향의 올가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아내가 아는 2만 원 돈말고도 따로 만 원올 몰래 부쳐 드리는 어머니가 고향에 계신 데야 더 말해 무엇 하랴.
어머니를 생각하면 노상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해지는 중호였다. 부쳐 드리는 돈 3만 원 중 2만 원은 꼭 초기버섯이나 말린 옥도미로 바꾸어 반환해 오는 어머니. 작년 여름 서울 오셨을 때, 그런 소포를 제발 보내지 말라고 애걸하다시피 했는데도, “아이고, 야야. 너가 객지에서 공부한다고 고생할 적에 어멍이라고 무신 거 보태 준 것이 있어야지” 하며 고집 세우셨다. 그러나 보태 준 것이 없다니, 그건 당치 않은 말이었다. 어머니가 잠수질해서 매달 꼬박꼬박 부쳐 주던 그 돈을 내가 얼마나 요긴하게 썼던지! 절약하면 한 달 용돈은 충분히 될 만한 돈이었다.
중호는 어머니의 그 해묵은 자격지심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당신의 말은, 도움을 적게 주었으니 도움을 받는 것도 적게 받겠다, 라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다만 막무가내로 아들이 어렵고, 육지 며느리가 미안한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30년 전 그 일을 가슴 갈피에다 꼬불치고 있는 것이다. 일 년 몇 달 동안 딴살림 차렸던 그 일 말이다. 그 일로 여태 나를 어려워하는 거다! 어머니가 그 해묵은 자격지심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상대적으로 중호 편에서도 그것은 도무지 잊을 수없는 기억으로 못박혀 버렸다. 잠재의식 속에 복병처럼 숨어 있는 아픈 기억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심상히 여기고 유야무야 없었던 것처럼 낙천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도무지 그렇게 안 된다. 그런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살아 계신 한.
중호는 바삐 사무 보는 중에도 문득 붉은 선혈이 뚜렷한 그 흰 저고리와 어머니를 데리러 왔던 서북 토벌군의 시푸른 군복이 서로 엇갈리며 떠오르는 수가 있는데, 그때마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 헐떡거리다가는 제풀에 맥이 풀려 늘어지는 버릇이 있다. 이 순간적인 호흡장애와 탈진상태는 과연 무엇을 뜻하나? 이 두루풍수리 모호한 감정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수치감일까, 겁일까, 분노일까. 아마 이 셋이 뭉뚱그려진 복합된 감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수치감이라니! 그럼,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모질게 뿌리치고 죽어야 옳았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비록 살림 차린 상대가 원수 같은 서북군이지만, 그것이 그 후 서른 해 동한의 홀어멍생활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리 더러운 얼룩이란 말인가? 밭일만 하는 중산간 부락으로 시집올 때 그만두었던 잠녀(潛女) 물질을 다시 시작하여, 청춘과수의 더운 몸을 바닷물결에 식히고, 간장 썩는 한숨을 호이호이 숨비질 소리에 날려 보내며, 죽을 목숨을 삼십 년 더 버텨 온 당신을 누구라 더럽다 할 것이냐! 남의 얘기하기 좋다고 입방아 찧는 당숙네라면 몰라도 자식새끼라고 하는 나까지 그런 생각을 품어서야 될 말인가. 내가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중호는 사무치는 자괴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피해자일 뿐인 어머니에 대한 이 가당찮은 반감은, 실은 마땅히 가해자한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차단된 데서 생긴 엉뚱한 부작용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응당 가해자의 멱살을 붙잡고 떳떳이 분노를 터뜨려야 하는데,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빨갱이로 몰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 피해자인 섬사람들은 5만이 죽은 그 엄청난 비극을 이렇게 천재지변으로 치부해 버린다. 어쩔 수없는 운명적인 것, 자신이 박복해서, 아무래도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당했거니 하고 체념해 버린다. 허울 좋은 이념 때문에 폭동을 일으켜 살인, 방화를 일삼던 장본인들의 죽음이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어째서 양민의 숱한 죽음들마저 자업자득이란 말인가. 그것을 자기 박복한 탓으로, 전생에 무슨 죄가 있는 탓으로 돌리다니.
어머니의 자격지심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당신 탓으로만 여겼다. 천재지변과 같이 막강한 가해자들, 그들에게 분노나 증오를 품는다는 것은 마치 천둥벼락에게 적개심을 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허망한 노릇이었다. 고향섬 해변올 수시로 침범하여 섬 여자를 약탈, 겁간, 살인을 자행하던 왜구들이 전설 속에서는 해룡(海龍)으로 묘사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가 아니었을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초윌적인 존재인 해룡. 해룡에게 먹히는 사람들은 다 팔자소관일 뿐, 해룡에 대한 적개심은 털끝만큼도 없다. 오직 덜덜 떨리게 두려울 따름이다. 피 묻은 흰 저고리와 시푸른 군복이 문득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지는 것은, 그러니까 분노도 증오도 아닌 바로 겁이었다.
중호는 입술을 피나게 깨물고 양미간을 찌푸렸다. 안 된다. 왜 겁을 내! 꿈적꿈적 잘 놀라는 어릴 적 소아병을 이젠 청산해야지. 겁낼 게 아니라 불같이 노여워하고 무섭게 증오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주눅든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 해룡의 탈을 벗기고 그 흉측한 정체를 알아봐야겠다. 막연히 육지 토벌군이니 서북군이니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인명과 사례를 알아보자. 오늘 당장 고향녀석들 모이는 데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하겠다. 해룡에 대해서 얘기하고 듣고 되새기자. 다음부터는 모일 때마다 각자 사례를 한 가지씩 취재해 가지고 나오도록 하면 어떨까? 각자 가슴속에 묵혀 둔 피해의식올 떳떳한 증오로 바꾸기 위해서, 그러나 증오가 보복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용서하기 위해서,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서’, 집 나가신 날을 기일로 제사 올리는 아버지의 억울한 혼백, 항상 자학의 채찍질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자격지심, 나의 육지 콤플렉스를 위하여. 그 육지 콤플렉스라는 것은, 30 전 그 세거릿길에서 어린 나의 뇌리에다 화인(火印)으르 뿌지직 태워 놓은 상혼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부를 배운다. 육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알랑방귀를 뽕뽕 뀐다. 아니, 섬사람의 허울을 벗고 육지사람으로 탈바꿈하려고 안달복달한다. 육지 여자와 결혼한다. 심지어는 본적까지 옮긴다. 그래서 과연 나는 육지 사람이 되었나?
중호는 자기도 모르게 쓰거운 자조의 웃음이 새어나왔다. 홈드레스가 철철이 세 벌 있는 곱상한 아내…… 시어머니의 사투리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들어 보려고 애쓰지도 않는 아내…… 큰놈 영조도 제 할머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둘쨋놈 돌날이라고 마지못해 올라오시는 어머니, 또 사나흘 며느리 눈치만 살피며 서먹서먹 지내다가 내려가시겠지. 비행기 타고 가시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밤기차를 타시겠지. 중호는 자신의 무력함에 새삼 화가 치밀었다. 시어머니보고 어머니라고 부르기 힘들어 쩔쩔매는 며느리. 몇 해 전 결혼식에 올라 왔을 때 처음 만나보고 여태 서로 못 만나고 있는 시누이와 올케. 머구리배 탄다는 매부와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아내였다. 재작년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임신 6개월밖에 안 된 몸 가지고 그걸 핑계삼아 안 내려간 아내, 그러니까 아내에겐 시집이 없다. 시집온 여자가 시집이 없다니!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나? 모든 게 고향을 외면한 나 자신의 허물이구나! 아무래도 본적을 물러야 할까보다. 그래. 당돌하지만 본적을 다시 고향으로 옮기자! 먼저 그렇게 해놓으면 모든 게 기정사실이 되어 척척 따라올 게다. 내가 서울 사람이 되고 싶어 북적을 옮길 적엔 나 자신에 대해서 호적이나 병적관계 서류 떼기가 불편하다는 옹색한 변명을 달았지만, 이젠 주민등록제가 생겨서, 아내가 그런 핑계를 ˙들고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아내가 받는 충격은 아마 클 것이다. 잘 달래야지. 우선 리허설로 몰래 돌날에 고향 친구들을 초대해야지. 어머니 외에는 십 년이 넘도록 고향사람이 드나들어 븐 적이 없는 성역(聖域)―—오일 보일러 난방의 이층집에다 홈드레스가 철철이 세 벌 있는 아내, 토끼 같은 아들이 둘, 부장 전용차, 일요 테니스가 포함되어 있는 중류생활을, 고향 촌놈들을 떼거지로 끌고 들어와 여지없이 유린하고 말리라. 춘호야, 연락연락해서 무지막지한 놈들 한 서른 명만 데리고 오너라. 대낮부터 끌어들여 밤늦게까지 고향 사투리로 시끌덤벙 북새통을 벌여 놔야지. 망할놈의 집구석, 마구 소리지르며 푸닥거리를 해대는 거야. 나도 억병으로 취해 가지고 겔겔거리다가 마누라 대신 밤늦어 집에 못 간 동창녀석 한 놈 껴안고 곯아떨어져 버려야지.
그때 전화벨 소리가 또 울렸다. 중호는 또 반사적으로 흠칫 놀랐다. 혹시 어머니가 아닐까? 아니지, 어머니는 저녁차로 오시는데. 과연 그것은 역전 파출소에서 결려 온 것이 아니라, 이사실에서 데이터 보고가 더디다는 득달같은 독촉전화였다.
(『순이삼촌』, 창작과비평사 l994)
2016년 4월 2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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