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의 이야기를 연재함을 널리 양해 드리면서...
▲ '살아있는 기성' 으로 불린 생전의 오청원(100세 때)
지금은 고인(2014. 11. 30일 100세로 사망)이 됐지만, 생존 시절의 오청원(吳淸原)은 “살아있는 기성(棋聖)”으로 불리웠다.
중국 발음으로는 우칭위안이지만,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어 한자의 우리식 발음 그대로 오청원이라 부르겠다.
이미 고인이 된 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 선생보다는 9년, 일본의 사카다에이오(坂田榮男)보다 6년 연상이 된다.
제자로는 린하이펑(林海峰), 루이나이웨이(芮乃偉)가 있다.
루이는 오청원의 나이 80세에 받아들인 제자.
오청원은 1914년 6월12일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바둑천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1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고에" 문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일본기원은 그에게 3단을 수여했으며 1950년 9단이 됐다.
1979년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그는 일본바둑의 황금시기에 일인자로 군림했다.
오청원은 항상 희대의 영웅들과 저울질이 되는 출중한 기재였고 시대를 통합해도 가장 위대한 기사로 꼽힌다.
아무리 양보해도 21세기 바둑 사에서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의 위치를 갖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빅게임이 있으면 어디든 날아가서 젊은 기사들과 어울려 검토에 열중하곤 했던 정열가였다.
오청원의 승부사로서의 업적은 무엇보다 치수고치기 10번기 시리즈일 것이다.
지금처럼 상금을 건 타이틀전이 드물고, 단(段)의 권위가 존중되던 시절.
그럼에도 오청원은 그의 인생 하이라이트였던 십 수 년을 승부바둑의 극단 치수고치기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니 승부사도 이런 승부사는 일찍이 없었다.
오청원은 1939년부터 1955년에 걸친 무려 17년간의 10번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모든 도전자를 하수급으로 전락시킨 기막힌 승부사였다.
또 그의 바둑사적 업적에서 결코 빠지면 안 되는 것은 '신포석'이다.
1930년대 기다니미노루(木谷實)와 함께 현대바둑의 효시가 될 업적 신포석을 개발하였다.
신포석이란 흑을 들고서 화점 삼삼 천원을 삼각편대로 형성하는 독특한 포진을 말한다.
특히 천원(天元)은 당시 바둑가에선 착수를 금기시하는 신성불가침이었다.
바로 그 옥쇄를 풀어헤친 이가 오청원이다.
지금 신포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사고의 출발점부터 속도와 중앙을 중시하는 현대바둑의 혁신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신포석법은 흑1,3,5로 삼삼
화점 천원을 착수하는 것이었다.
오청원(吳淸原)은 이름이 천(泉), 자(字)는 청원(淸原)이었다.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부친은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베이징의 최고재판소를 다녔던 엘리트였다.
오청원의 부친은 일본 유학시절 방원사(方円社 일본기원의 전신)에서 일본의 뭇 프로들과 어울릴 만큼 열성 바둑 팬이었는데, 그의 열정이 오청원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
오청원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부친은 공교롭게 오청원이 12살 때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유복했던 집안이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기울었고, 급기야 오청원은 바둑으로써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소년가장 신세가 된다.
결국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 것도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부친의 죽음 때문이었다.
생전에 부친은 엄한 교육을 자식들에게 시켰다.
아예 공교육은 시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 부친의 바지바람은 바둑으로도 옮겨 붙는다.
삼형제에게 모두 바둑을 가르쳤으나, 제일 어렸던 오청원이 기재를 보이자 그에게만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게 된다.
20년 전 필자도 취재과정에서 확인한 것인데, 오청원은 두 손 중지가 조금씩 휘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오청원은 부친이 물 건너가져다 준 바둑기보집이 너무 무거워, 책을 받쳐 든 중지가 휘어지게 되었다고.
타고난 기재도 불세출의 영웅이 되는 과정은 험난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 2012년 본인방 도전기에 오청원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왼쪽부터 장쉬, 린하이펑, 왕리청, 이치리키료, 다카오신지.
1920년대 중국은 권력자가 내놓은 약간의 돈으로 강호의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오청원이 바둑이 세다는 소문은 자자했던 터라 지역유지가 그를 받아들인다.
지금으로 치면 권력자의 녹을 받는 장학생이 된 것.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오청원을 돌봐주던 유지가 사망하자, 자연스레 홀로 '대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받은 상금 상품을 오청원이 독식하게 되자 신문에 오청원의 이름도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신동을 보기 위해 별도의 대회를 만들기까지 했다니 가히 오청원은 '프로 아닌 프로'로서 소문이 대단했다.
--- 2부에서 계속
첫댓글 100 세까지 살다간, 금세기 최고의 오청원프로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합니다 ~~
귀재는 역시,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하는 법,,,
흥미로운 바둑의 神 - 이야기 감사합니다 ~ 다음편을 기대합니다 ~!
역쉬,
바둑에 대한
애정이 총무님 답습니다.
우리나라 "조훈현" 프로
기사도 연관이 있더군요.
정리하여 2부를 곧 올리겠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친의 죽음에 가장이 되어야하는
슬픈 사연이 있었군요.신동이라고 부를정도였으니
한평생을 바둑에 길만 걸어오시고 100세까지 장수하셨습니다
다물님! 귀중한글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방면의 재능을 어느 정도는
태생부터 가지는 것 같습니다.
후생에는 갈고 닦아야 하고요.
정모 때,
뵙겠습니다.
오청원이 그리도 유명하였군요. 그러면서도 100세까지 사셨으니
비록 어릴적에 고생은 하였다 하드라도 보다 많은 축복을 받은 인생이라 생각됩니다
실력은 그냥 얻어지지 않고 타고난 재능과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정상의 자리에 오를수 있겠지요
우리 바둑방에서도 기력이 높은분들은 그만큼 연구와 노력을 많이 하였을 것으로 인정되더군요. 다물님 귀한 글 감사합니다
바둑을 아는 3국(한국, 중국, 일본)을
바둑으로 평정했다고나 할까요.
어느 방면이라도 고수라면 연구와
노력을 인정해야겠지요.
정성스런 답글, 감사합니다.
오청원이 백살까지 살았구나.
得 天 壽 했네...^ ^
得 天 壽!
"솔구름" 사범님도 아마
득천수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물 다물님은
125세에서
앞으로 과학 의학
획기적으로 발전한다하니
열살 더 보태서
135세 까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