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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최양업 신학생들의 유학처 :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신학교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租借地)로서. 서양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부터 1838년 겨울까지, 1839년 4월 6일부터 11월까지,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와 롤롬보이로 피신하였다.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Cecille)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rigone)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 2월 28일 마닐라를 도착하여 10일후인 3월 10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대만을 경유 오송(吳淞)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 29일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교구장 베지(Besi)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 한국천주교의 상징 김대건 동상

성 바오로 성당에서 골동품·재활용 가구 거리인 루아 데 산토 안토니오 거리를 지나면 카모에스 공원(Camoes Garden, 嘉模公園)이 나온다. 1557년 한때 마카오에서 살았던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카모에스를 기려 만든 곳이다. ‘흰비둘기 공원’(白鴿巢公園)이라고도 불리는 카모에스 공원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은 1985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제막한 것이며, 홍콩과 마카오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이 이를 다시 보수해 1997년 새로 봉헌했다.
[자료]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파리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Ἐtrangères de Paris ; MEP)는 1658년 7월 29일 창설되었다.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선교 지침에 따라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사제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되던 17세기 당시 아시아에선 포르투갈이 교황청으로부터 '선교 보호권'(padroado)을 위임받아 중국 난징과 베이징, 필리핀 마닐라, 마카오, 인도 고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일대 선교를 책임지고 있었다. 선교 보호권이란 그 지역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 교구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십일조 징수권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이 행사한 권한을 말한다. 그러나 교황청 의도와 달리 선교 보호권이 해외 선교에 도움이 되기보다 국왕의 권한 남용으로 폐단이 더 심했다. 특히 선교지에서 수도회간의 불화가 점차 심해지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재위 1621~1623년)는 1622년 포교성성을 설립, 교황청에서 선교 업무를 직접 관장케 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이 설립될 당시 프랑스에선 파리를 중심으로 교구 사제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된 '성체회'라는 신심단체가 활동했다. 이 성체회는 교황청에 지금까지 수도회 중심이던 외방선교에 자신들도 참여하게 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다. 이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년)가 1658년 이 요청을 받아들여 라오스와 코친차이나, 중국 남부 지역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됐다. 곧이어 1664년에는 선교지에 파견할 후속 선교사의 양성을 위해 교황청의 공인을 받아 파리, 뤼드 백(Rue du Bac)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666년 최초로 샴(Siam, 현 태국)의 수도 아유티아(Ayutthaya)에 그 대표부를 두고 출발하였다. 후에 박해로 인하여 1688년 인도의 퐁디쉐리(Pondichery)로 이전하여야만 했다. 1685년에는 극동 아시아의 선교 필요성 때문에 중국 광동(Canton)에 두 번째 대표부를 설치하였으나, 1732년 광동으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래서 당시 포르투갈 보호아래 있던 마카오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그러나 보호권(Padroado)의 압력과 마카오 행정관과의 갈등으로 1847년 초 홍콩으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천주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년)가 즉위하자마자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샴(현 태국) 보좌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면서 부터다.
또 조선교구 설정을 계기로 중국 내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의 잔재를 척결하고 포교성성의 선교권을 강화하기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 요청대로 1838년 북경교구에서 만주교구를 설정했다. 이처럼 교황청은 한 명의 선교사도 없던 신생 조선 교회를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 아래 있던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는 파격적 결정을 내렸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 양성을 시작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치교회로 성장해 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선교의 책임을 맡을 만큼 성장하는 밑거름이 돼 왔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31년 이래 지금까지 한국에 173명의 선교사를 파견했고,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 가운데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시성됐다.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 :

[주소지] Cai. do Befelho, Macau ; 澳門 白鴿巢前地 麗豪花園
[현 주소내 건물] 5층 주상 복합 아파트
1732년 광동으로부터 추방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마카오로 이전하여 카뮤에스 공원 입구 성 도미니코 성당 길 건거편 신성가(新胜街)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그 자리에 5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있다.
마카오는 중국과 유럽, 특히 포르투갈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동방의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곳이다. 16세기부터 400여 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됐다. 지금은 중국의 행정특별자치구로 운영되고 있다. 전체 면적은 29㎢로, 서울 여의도의 3.5배 크기다. 인구는 50여 만 명이며, 대부분 중국인이다.
마카오가 가톨릭 신자들, 특별히 한국 교회 신자들의 이목을 모으는 것은 포르투갈의 보호권아래 예수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선교회들의 극동 선교 전초기지로 활용되며 일본 및 중국선교의 중요 거점이었다는 점이다. 선교 단체 중 가장 먼저 진출한 예수회는 1565년 본부를 설치, 성 바오로신학교, 성 요셉신학교를 설립해서 성직자를 양성하였다. 이외에 파리외방전교회 극동지역 대표부는 1732년 대표부를 광동에서 마카오로 이전해 아시아 선교 활동의 교두보로 삼았다.
이 부분에서 마카오는 한국교회와 보다 직접적인 연관을 맺게 되는데, 1808년 북경 구베아 주교에 이어 조선 교회 관할권을 계승했던 수자 사라이바(Joachim Souza de Saraiva, 1744∼1818년) 주교는 1811년 바로 이곳 마카오에서 한국 교회 신자들이 보낸 2통의 편지를 받고 이를 번역해 교황청에 보냈다. 또 1825년경에 쓰여진 조선교회 교우들의 청원서 역시 북경을 거쳐 마카오에 전달됐는데 당시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 부대표 움피에레스(Raphael Umpierres, 1823∼1835년 재임)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해 교황청에 전달했다. 이는 조선교구 설정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기폭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리적으로도 마카오는 조선으로 입국하는 선교사들의 경유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마카오를 거쳐 조선 입국을 시도했던 것을 봐도 그렇다. 무엇보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마카오를 연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성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이다. 1835년 마카오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모방 신부는 그 이듬해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는데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한 이들은 1842년까지 6년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대표 : Libois 신부)에서 칼레리(M. Callwry) ‧ 데플레슈(M. Desfleches) ‧ 르그레조아(Legregois) 신부 등에게서 수학했다. 그 중간에 민란으로 잠시 마닐라로 피신해 있기도 했으나 다시 귀환해서 철학 신학 과정을 이수했다.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으로 마카오 지역 몇 곳에는 김신부를 기억하는 상징물들이 남아있다. ‘흰비둘기 공원’으로 불리는 카모에스 공원에는 1985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세운 동상이 세워져 있고 바로 인근 안토니오 성당에는 홍콩의 한 한인 신자가 봉헌한 김신부의 목상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100여 년간 유지해오던 마카오의 극동대표부는 포르투칼의 보호권(Padroado) 압력과 마카오 행정관과의 갈등으로 1847년 초 홍콩으로 대표부를 이전하였다. 당시 홍콩은 아편전쟁 후 1842년에 난징(南京)조약으로 영국의 지배하에 있은지 얼마 안된 시기였다.
성바오로성당 등 세계문화유산 지정
서구 교회 선교회들의 극동지역 포교 활동 전초기지였다는 명성이 무색하게 현재는 7개 성당만이 사목 활동을 하고 있는 초라한 교세다. 사제서품식은 10년째 거행되지 못하고 있다. 방인 사제 양성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마카오를 통틀어 1년에 영세하는 이들도 300 명 가량이다. 현재 교세는 2만5천에서 3만명 정도. 사제수는 25명이다. 여기에 예수회, 살레시오회 등 수도회 사제를 합치면 40여명이다.
성 바오로 성당을 비롯해 성 도미니코 성당, 성요셉 성당, 성 로렌스 성당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성당 유지 관리는 관광 자원 보존 차원에서 관광청 지원을 받고 있다.
예수회 등 수도회들이 오래전부터 진출해 있던 이유로 마카오내 학교시설 50%는 아직까지 교회서 운영하고 있다. 또 사회복지 사업도 잘 이뤄지고 있다. 본당을 통한 사목은 원활하지 못하지만 교육 사회복지를 통한 선교 활동은 활발한 편이라 볼 수 있다.
중국·포르투갈문화 조화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 중국의 ‘1국가 2체제’ 정책에 따라 중국의 특별 행정구(SAR)가 되었다. 이들 행정구는 중국 중앙정부에 종속되지만 행정부, 입법부 그리고 독립적인 사법권 등으로 높은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마카오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513년. 조류즈 알바레스가 주강 어귀에 포르투갈 어선이 닻을 내린 이래 이 대륙을 드나들게 된 포루투갈인들은 1553년 중국 무역권을 획득하였고 1557년에는 중국으로부터 마카오를 조차(租借)했다. 일본, 중국으로부터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마카오’라는 지명은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아마사원’에서 유래됐다.
현재 마카오가 지니고 있는 가장 특별한 자산은 450여년 이상 된 중국과 포르투갈 문화의 조화, 또 양국 간 전통 교류로 풍성해진 문화유산(2004년 7월부로 25개 문화유적지 세계 문화유산 등록)을 잘 보존하고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동서양의 교차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롭게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가운데 지속적인 복원을 통해 상당수의 역사적 건물과 거리들 그리고 광장들이 보존돼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도 한번 눈여겨 볼만한 점이다.
마카오교구 성지순례안내센터 하 데레사 수녀님께서 마카오 순례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마카오교구는 원동지역에서 1576년 최초로 설립된 교구로 이미 450여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1836년,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인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 그리고 1년도 채 못 되어 이곳에서 병사한 최방제 프란치스코 소년이 6개월을 걸어와서 온갖 어려움을 참아 가며 10여 년 동안 신학을 배우고, 사제의 길을 준비했던 유서 깊은 땅입니다.
예수회를 선두로 하여 수많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복음과 함께 문화를 전하였고 또한 마카오를 전진기지로 하여, 중국 대륙과 일본,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당들이 동서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있는 모습으로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카오에는 25곳의 세계문화유산이 있으며, 그중에 8곳이 천주교의 성당인데도 대부분 마카오하면 거대한 카지노와 화려한 호텔 등을 떠올리게 되고, 마카오로 여행을 와서도 교회의 역사나 유적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마카오 주교님의 초청으로 마카오의 '성지순례안내센터'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많은 한국 여행객들을 만납니다. 그중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있는데, 그들 역시 일반 관광객들처럼 마카오를 잠시 구경만 하고 가는 관광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이 글을 씁니다.
교우님들께서 혹시 홍콩이나 마카오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반드시 마카오의 성당들을 순례하면서 주님께서 일찍이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시어, 마카오에 복음을 전하신 놀라운 역사들을 만나면서 기도하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혹시 마카오 순례시에 도움이 필요하시거나, 단체나 개인으로 성당의 안내를 원하시면 언제든지 저희 센터로 메일이나 전화로 연락 주십시오. 정성껏 도와드리겠습니다.
E-mail : hathresa@hotmail.com
Tel : 853. 2892 .1438 Fax : 853. 2892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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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교구 성지순례안내센터 하데레사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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