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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위대한 경영
필자 ‘윤동한’은 1947년 대구 출신으로 영남대 경영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수원대학교 경영학 박사로 현대 한국콜마(주)의 회장이다. 품질제일주의와 연구개발 중심으로 회사를 세계적인 화장품-제약-건강기능식품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으로 그의 경영은 충무공 이순신의 경영에서 본받았다고 강조하는 에세이다. 이순신의 어떤 점을 배워야 하는가? 문무를 겸비한 조선 최고 장수다. 타협하지 않는 절개로 평생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장으로 임진왜란의 거대한 위기에서 조선을 건져 낸 위대한 경영자다. 민족적 도전을 앞두고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도) 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전라좌수영을 맡아 어느 수영보다 임전 준비를 잘했고, 거북선과 판옥선을 개량 정비했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이 험난한 시대에 충무공의 경영 정신을 이어받는 ‘작은 영웅’들이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글을 시작했다.
덕수이씨는 경기도 ‘개풍’을 본관으로 한다. 고려조 신호위 중랑장 이돈수를 시조로, 이순신은 조선 초 5대조 이변을 비조로 한다. 공조판서와 궤장을 받은 공신으로 영중추부사에 이른다. 증조부 이거는 성종 때 과거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와 암행어사로 오리들을 잡아들였다. 5대조와 증조의 성품을 이순신이 이어받았다. 할아버지 이백록은 평시서 봉사로 말직이다. 아버지는 창신교위를 지낸 이정이다. 어머니는 무장 변수림의 딸로 초계변씨다.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을 낳았다. 이순신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 상주 방씨와 혼인했다. 이순신은 인재의 산실 서울 건천동에 살았다. 그 동네는 34채의 양반가들이 있었다. 당시 멘토 류성용, 칠전량 패장 원균, 조선통신사 황윤길을 모시고 서장관으로 간 허성이 같은 나이 또래로 그 동네에 살았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집은 건천동 청녕공주 저택의 뒤로 본방교까지 서른네 집인데, 이 동네는 국조 이래 명인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영의정)-정인지(영의정)-이계동(병판 좌찬성 무인)이 같은 때이고, 양성지(세종조 대사헌 대제학)-김수온(호판 판중추)-이병정(병판)이 한 시대였으며, 류순정(영의정)-권민수(대사헌)-류담년(대사간)이 같은 시대였다. 노사신(영의정)-노수신(영의정)과 변협(대사헌)과 허엽(초당 우찬성)이 같은 시대에 살았다. 근세에 류서애-덕풍군 이순신-원성군 원균, 나의 가형 허성 (대사헌 좌찬성)이 한 시대니, 이때 와서 더욱 성했다.”
이순신이 아산으로 이사를 간 것은, 둘째 형 요신이 동학(서울 동-서-남-북쪽과-중앙에 있던 학교)에 다니며 과거 준비를 한 뒤다. 초계변씨 친정이 있는 아산, 행을 결심한 이유는 결단력과 경영자적 정신이 있었던 것을 이순신이 배웠을 것이다. 가문의 희망 요신이 병사하고 조부 이백록이, 국상 때 잔치(아들 혼사날에 국상이 났고, 준비한 혼인을 물릴 수 없어 장가를 들인 죄) 했다고 탄핵을 받는다. 파직되고 녹안(녹장리안의 준말로 범죄 사실을 상세 기록한 국가 문서) 에 이름이 올랐다. 이정의 아들도 벼슬길이 막힌 것이다. 이정과 며느리 변 씨는 과하다고 조정에 사면을 청했다. 그 기록이 명종실록에 남아 있다. 그 후 어느 시점에 녹안은 해제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급제한 것을 보면 신원이 이뤄진 것이 합당하다.
초계변씨는 비조 변효량 (우윤)을 비조로 현감 변자효가 아산 염치읍 백암리에 입향하고, 장사랑 변수림의 외동딸이 이순신의 어머니로 외가의 후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아산에서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이순신의 재정적 곤란설은 과장된 것이나 근거가 빈약하다. 어머니 변 씨가 아들 이순신에 증여한 재산 ‘별급문기’에 보면 재산을 형제들과 함께 나눠준 몫이 있다. 철저한 재산 관리 의식으로 아들과 조카를 입회하여 문서를 남겼다. 분배된 재산 목록 중 분급된 노비가 여덟 명이다. 모친은 두 번이나 아들에게 재산을 분재해 주었다. 변방에 있던 이순신은 후에 문서를 보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형을 잃은 이순신은 가문의 기둥이 되었다.
장성한 이순신은 장인 방진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이한 까닭에 방씨 가문의 후계자 노릇도 했다. 방진은 보성군수를 지내고 활쏘기의 명인이었다. 이 혼사 중신아비는 동고 이준경 대감이었다. 이순신의 멘토인 정걸 장군과 장인 방진 보성군수는 모두 이준경의 수하였다. 이순신이 문과를 준비하다 무과로 바꾼 것은 장인과 어머니 아내의 결정적인 훈수였을 것이다. 아산의 삶을 주도하던, 어머니 변 씨는 이순신의 정읍 현감과 여수 고음천의 좌수영에도 이사하며 아들 곁을 지켰다. 아산에서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겠지만,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아들은 매일 어머니 문안을 하기 위해, 사람이나 서신을 보낸 것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모친은 특히 ‘충성’을 강조하셨다. 하직 인사를 하면 “어서 가서 나라의 치욕을 씻어라.” 말했다.
1576년 서른두 살에 무과에 급제하고 함경도 삼수의 ‘동구비보 권관’으로 부임했다. 곤장 잘 치는 감사 이후백이 순찰을 나왔다. 그는 변경의 방비와 변장의 활쏘기 실력까지 감사하다.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곤장을 때렸다. 방문한 동구비보의 군기 엄청과 방비 철저를 보고 임무를 제대로 한 초급 장교를 칭찬했다. 이후백은 청백리에 녹선됐다. 1579년 훈련원 봉사직을 맡았다. 당시 병조 정랑 서익과 마찰이 발생한다. 사사로이 자기 사람을, 서열을 뛰어넘어 한성부 참군(종7품)으로 임명하려 했다. 주무관 이순신은 당연히 반대했다. 병조 정랑 모가 훈련원 봉사 한 사람에게 굴복했다. 온 훈련원 사람이 일컬었다. 그리고 괘씸죄로 그해 10월 충청 병사의 군관으로 좌천되어 해미읍성에서 근무했다. 중기 문신 이식은 통제사 시(諡)장에서 “그가 스스로를 지키며, 아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기에 반평생을 불우하게 살아야 했고 세상은 능히 알아주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 등용되어 진실한 품격이 위아래로 알려졌어도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의론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모함 속에서 형벌을 받고 옥에 갇힌 것 또한 이 때문이다.” 했다.
1580년 서른여섯 살에 발포만호로 전격 승진했다. 종사품 드디어 말단을 벗어났다. 직속상관인 전라 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 객사 마당의 오동나무를 잘라 거문고를 만들어 보내라고 했다. 이순신은 “영내에 있는 이 나무는 나라의 재물이므로 누구도 함부로 베어갈 수 없다.”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좌수사는 화가 났지만 베어갈 수는 없었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오동나무 청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병조 정랑 서익과 악연이 시작됐다. 그가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에 내려왔다. 병기고 상태가 부실하다는 터무니 없는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부임 18개월 만이다. 해임 후 훈련원에 복직하자, 함경남병사로 부임한 상관 이용이 이순신을 추천해 데려갔다. 아버지 상으로 귀가하여 상을 치르고, 사복시 주부(종6품)로 임명되었다. 여진족이 준동하자, 조정은 이순신을 조산보 만호로 급파했다. 이곳에서 녹둔도라는 이름의 지금 러시아 땅을 관리했다. 여진족의 습격이 심해지자, 함경북병사 이일에게 군사 증원을 청원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다. 마흔셋 나이였다. 우려대로 여진족은 녹둔도를 침범한다. 북병사 이일은 이 사건을 두고 조정에 처벌을 요구했다. 선조는 백의종군하면서 공을 세우라 명한다. 집에서 보직을 기다리던 이순신은 전라감사 이광 추천으로 정읍 현감으로 임명된다. 어머니와 두 형이 남긴 조카들까지 데리고 부임한다.
조선 수군은 보령, 충청 수영이 13관 5포, 거제의 경상우수영이 6관 16포, 동래의 경상좌수영이 18관 16포, 해남의 전라우수영이 12관 15포, 여수의 전라좌수영이 5관 5포를 거느리고 있었다. 5관은 순천-보성-광양-낙안-흥양이고 5포는 방답-사도-발포-여도-녹도였다. 5포에는 첨절제사나 만호가 지역을 통솔했다.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원칙 대가 이순신의 부임으로 현장의 장수는 죽을 지경이었다. 별난 상관이라 군비를 샅샅이 점검하고, 뇌물을 받기 않으며 일벌백계로 사정없이 처벌하니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우후는 병사나 수사의 참모(현 참모장 준장)로 관내 군사훈련과 무기 점검을 맡은 직책이다. 임란 두 달 전 난중일기에 “새벽에 우후가 각 포구의 부정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갔다.” 그리고 “맑았으나 큰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이날 귀선의 돛으로 쓸 베 29필을 받았다.” 기록으로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다.
유비무환 경영,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군사 경영의 근간은 신상필벌에 있다. 잘하는 이에게 상을 주고, 못하는 이에게는 벌을 내리는 것이다. “군기물을 확인하고 점검했다. 활과 갑옷, 두무와 용아, 환도는 깨지고 훼손된 물건이 많이 있었다. 색리와 궁장, 감고 등의 죄를 따졌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 지방에도 있었다. 무신 이봉수는 화약 제조 핵심 재료인 염초를 개발해 낸 인물이다. 부임 석 달 만에 염초 1,000근을 만들어냈다고 장계로 보고했다. 이 모든 일에 유비무환의 경영 정신이 깃들어 있다. 수군 경영 능력의 결정판은 바로 판옥선과 거북선 건조다. 미암일기는 판옥선 한 척을 짓는데 50칸 집을 짓는 것과 맞먹는다고 하였다. 소나무 100(보통 민간인 네 칸 두 줄배기 8칸 집에 기둥과 보, 도리, 중 도리, 중방, 지방 대들보도 100여 개 원목이 들고, 석가래가 100여개 든다, 50칸이면 보통 집의 6~7배니, 소나무 크기 나름이지만 1000의 오타가 아닐까?)여 그루를 잘라내야 건조할 수 있다. 판옥선은 일본의 전선에 비해 전투 능력이 뛰어났다. 기존 맹선 위에 네 기둥을 세우고 사면을 담장처럼 판자도 한 층 올려, 노 젓는 인원은 아래에 두고 전투 인력은 갑판으로 올려 구분하여 전투의 효율을 꾀했다. 판옥선에 천-지-인-현-황의 화포를 사격하여 근접전과 백병전이 벌어지지 않게 막았다. 문제는 조정에서 수군의 전투선 건조부터 무기와 화약, 병참 군수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 하나 지원해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조선용 목재와 동감, 화약과 군복까지 자체 조달하는 처지임에도 그는 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탁월한 정보 경영 능력, 적의 동정을 살피고 예측하는 것을 난중일기는 ‘후망’이라고 기록했다. 정찰과 적을 감시하는 일로 곧 척후와 요망을 합친 말 후망이다. 이순신은 적의 정세를 모르고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출동으로 시간과 인력, 물자를 낭비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물적 경영과 정보 경영을 현장에 적용하여 전투의 시너지 효과를 가장 극대화할 줄 아는 경영자였다.
2026.07.15.
이순신의 위대한 경영
윤동한 지음
가디언 간행
첫댓글
충무공의
경영 정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현재의 우리 생활방식에도 적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